XCIX

장남의 사업


🐁


나는 ‘아들 하나 있는데 뭣 하러 더 낳았을까’라는 말을 들으며 자랐다. 그렇다. 나는 오빠를 둔 딸이다. 오빠는 나보다 세 살 많았지만, 보살핌을 받는 쪽은 오빠였다. 어린 시절 친구들과 놀이터에서 신나게 탈출을 하다가 밥시간에 약간 늦어서 들어갔을 때, 내가 혼이 난 이유는 오빠 밥을 차려주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오빠의 밥 차려주기라는 것은 같은 집에 사는 여자로서 당연히 수행해야 할 의무였다. 


다른 집 오빠들과 비교해서 우리 오빠가 특별히 더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스스로 밥 차려 먹어도 괜찮다고 하거나, 계란말이나 고기반찬을 양보하는 일은 없었다. 그저 착하고 상냥한 아들, 못된 소리 안 하는 순한 아들이었다.

나는 독립을 했다. 세 평짜리 원룸에서 살아도 그 집에서 사는 것보다 좋았다. 명절에도 돌아가지 않았다. 우리의 인연은 끝이라고 생각했다. 연락 한번 하지 않고 5년이 지났다. 엄마 아빠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았다. 가지 않았다. 다른 것은 궁금하지 않았으나, 오빠 밥은 누가 차려주나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하지만 내 알 바 아니다. 매정한 년 소리를 들어도 상관없었다. 시간은 흘렀다. 오빠가 굶어 죽든지 말든지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다.


내심 기다렸는지 모르겠다. 오빠의 고독사 소식을. 그러나 나에게 들려온 소식은 의외의 것이었다. 오빠가 식품 창업을 했다는 것이다. 밥 지을 줄 모르고 라면도 끓일 줄 몰랐던 오빠가 식품 창업이라니. 카카오톡 선물하기의 반찬 코너에도 입점해 있다. 매운 거 잘 먹지도 못하고 케첩이나 좋아하던 오빠가 고추다대기 사업을 하다니. 나는 궁금해졌다. 어쩌다가 그렇게 됐을까. 대견하기도 했다. 인터넷을 뒤졌다. 회사는 내실도 튼튼해 보였다. 궁금해진 나는 홈페이지의 주소를 한번 찾아가 보기로 했다.

공장은 경기도 외곽에 있었다. 큰 공장은 아니지만 깔끔하고 직원 규모가 꽤 돼 보였다. 공장은 가운데 지붕이 열리는 시스템인지 자연광으로 환했다.


위생모를 쓰고 니트릴 장갑을 끼고 돌아다니는 남자 직원들이 보였다. 식품에서 무심코 여성을 연상한 내가 부끄러웠다. 호각 소리에 맞추어 쿵쿵거리는 발소리와 뭔가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살짝 열린 공장 안을 보았다. 이상하게도 공장 안에는 보통 가정집의 부엌을 연상시키는, 한쪽 벽만 세운 세트장 같은 공간이 있었다. ‘주방 인테리어 사업도 하나?’라고 생각한 순간 말문이 막혔다. 옛말에 틀린 거 없다더니, 이런 식으로 증명하게 될 줄은 몰랐다. 열린 틈 사이로 보이는 공장의 남자 직원들은 ‘우리집에 왜 왔니’를 하듯 열 명씩 마주 보고 줄지어 서있었다. 그리고 호각 소리에 맞추어 일제히 부엌 안으로 들어갔다. 휘리릭, 저벅저벅, 후두두둑. 그들이 부엌으로 들어갈 때마다 하늘에서는 고추가 우수수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