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VII
팝업과 파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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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rk Hard, Play Harder!”
팝업(pop-up)과 파업(罷業)은 모두 데이비드 그레이버가 단속적 히스테리(punctuated hysteria)라고 부른 주기의 감각을 공유한다. 단속적 히스테리는 “에너지의 폭발 다음에 이완이 오고 그다음에 다시 서서히 에너지가 축적되어 또다시 강렬한 폭발을 향해 가는 주기적 형태”로, 이러한 행위 양식은 평소에는 나태하다가 시험을 앞두고 치열하게 집중하는 학생, 또는 농번기의 파종과 수확에 모든 일손이 동원되는 등과 같이, “해야 할 일이 있는 인간들이 달리 행동하도록 감독하는 사람이 없을 때 보이는 전형적인 모습”에서 나타난다.* 전통적으로 이러한 주기는 타인에게 나의 시간을 잘라 판매한다는 개념을 전제로 하는 임금 노동 체계가 도래하기 이전부터 우리의 시간 감각을 구성해 왔으며, 상황이 달리 된 지금에도 여전히 “미친 듯한 행동의 분출과 상대적인 무기력이 번갈아드는 패턴이 잘 맞는 과제”에 대해서 우리는 같은 방식으로 응수하고 있다.
팝업 스토어라는 히스테리에 참가하는 참여자들이 기꺼이 수행하는 게임화된 가짜 노동, 이를테면 미션을 수행하고 스탬프를 찍고 제품 샘플을 받는 등의 행위성은, 팝업에서 우리가 무언가 얻어가는 것이 있다는 보상 감각을 심어준다. 그 대가가 단지 우리의 개인정보와 선호 및 취향에 대한 데이터의 수집에 그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크나큰 오산이다. 그것은 무언가에 몰입해 본 경험이 있는 그 누구라도 잘 알고 있는 히스테리아의 감각을 아주 진부한 방식으로 재편한다.
기다리는 사람이 없는데도 연출되는 의도된 웨이팅, 피로와 흥분, 실망과 만족 같은 감정을 점점 더 모든 측면에서 기획된 형식으로 소비하는 그 모든 시간들.. 결코 집체화되지 않고 책임감 없이 행할 수 있는 자기동원이 착취로 변모하는 그 순간을 가리기 위해 팝업의 논리는 성행한다. 그것은 자발성이라는 이름 아래, 다르게 될 수 있었던 우리의 정동을 포획하고 단속하며, 그 결과 우리가 스스로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묻기 전에, 우리가 무엇을 원해야 하는지를 미리 알려줄 수 있게 된다. 그것은 과거에 기획된 미래의 욕망을 현재 속으로 욱여넣는 과정을 관장하는 시간-복합체이다.
임금 노동이 미래의 예측과 시간의 계획에 대한 인간 사고의 메커니즘을 실질적으로 포섭하는 과정에서, 팝업은 자연스레 파업을 대체하게 되었다. 단 며칠간의 마케팅을 위해 일반적인 자영업자라면 대대적인 리노베이션이라고 부를만한 물리적 구조의 구축과 해체, 거기에 투입된 노동자들의 밤낮 없는 활성 상태는 팝업 스토어가 작동할 수 있는 근본적인 메커니즘이다. 만약 팝업이 지나치게 오래 지속된다면 그것은 더 이상 팝업이 아니라 상설이 되어버린다.
반면 파업은 경영진이 아닌 피고용자들이 수행하는 일종의 파괴적 혁신(disruptive innovation)인데, 그것이 불러올 결과를 정확하게 예측하기 힘들고(즉 기대되는 수익성이 불확실하고), 초기에는 주류 시장으로부터 호응을 얻지 못하며, 성공하는 경우 기존 사업 모델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무언가를 수립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러나 그 혁신의 실패가 불러올 결과는 양측에게 다르다.
바로 그 차이가 팝업이 파업보다 다루기 쉬운 폭발의 형태가 되는 이유이다. 당연하게도, 자본이 기획 가능한 폭발은 축제이며, 그렇지 않은 폭발은 위기이기 때문이다. 파업은 팝업이라는 예측 가능한 폭발을 위협하는, 즉 시스템 속에 예측 불가능한 폭발을 도입하는 위기로, 바로 그러한 의미에서 팝업의 진정한 목적은 파업을 대체하는 데 있다고도 할 수 있다. 팝업은 분노로 응축될 수 있을 뻔했던 열망을 선제적으로 강탈한다.
파업도 정확하게 동일한 문제를 겪는다. 한 세기 전 존 스타인벡이 <의심스러운 싸움>에서 묘사한대로, 파업이 장기화될 때 생기는 문제들은 사람들의 에너지를 특정한 방식으로 해소시켜주지 않으면 발생하는 문제와 동일하다. 간단히 말해 몸을 움직이다가 갑자기 정지하게 되면 생기는 일들로, 파업으로 인해 할 일이 없어진 사람들의 갈 곳 잃은 분노가 파업 추동자들에 대한 의심과 불신으로 이어지고, 이것은 우리의 싸움을 의심스러운 것으로 만든다.
파업이 파업이 아니라 하나의 직업이 될 때, ‘단속적 히스테리’의 폭발적인 초기 에너지는 고갈되고, 다음 분출을 기약할 수 없는 무기력으로 인해 영구적인 긴장 상태가 이어진다. 설사 그 긴장이 정말로 영구한 것은 아닐지라도, 그 끝을 기약할 수 없다는 점에서 그 긴장은 분출을 위해 필수적인 응축과는 다른 지리멸렬함을 동원한다. 팝업은 종결을 전제로 하기에 끝없이 동원 가능하며, 끝이 있어서 지속 가능한 과잉 상태 그 자체이다. 반면 파업은 언제나 이 싸움에 끝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 – 실질적으로 우리의 싸움에 승산이 없으며, 바로 그 이유로 인해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을 지속적으로 상기시킨다. 미디어 속 고공 농성이나 단식 투쟁의 이미지는 바로 그러한 사실을 시청자에게 열렬히 설득하며, 만약 그 싸움이 종결되더라도 너무나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라야 그렇게 된다는 사실을 힘주어 강조한다.
* 데이비드 그레이버(2021). 『불쉿잡』. 김병화 옮김. 민음사. 158-16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