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를 그리기
_소현문 《평화 문해력》 전시 리뷰
석지윤
소현문(素顯門)의 기획 전시 《평화 문해력 peace literacy》(2025.3.1.-5.18.)은 대한민국 광복과 제2차 세계대전 종전 80주년을 맞이하는 2025년의 역사적 의미를 고찰하고자 한다. 3월 1일에 시작하여 5월 18일에 끝나는 전시 기간 역시 전시가 전달하고자 하는 역사의 의미를 반영한다. 이 전시에 참여한 3인의 작가 김재홍, 이겨레, 현승의는 회화 매체를 통해, 시인 최지인은 언어를 통해 각자 다른 방식으로 평화에 관해 생각해 보게 한다.
“평화를 어떻게 그릴 수 있을까?”
2004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는 전 세계적으로 테러와 전쟁의 공포가 확산하고, 국내적으로는 북한 핵 문제가 대두된 시기에 평화의 메시지를 전파하고자 《평화 선언: 평화를 위한 세계 100인 미술가》(2004.7.31.-10.24)를 개최하였다. 해당 전시의 도록에서 미술평론가 최민(崔旻, 1944-2018)은 「평화를 그리기」라는 글을 기고하였고, 이 글은 다음과 같은 간명한 질문을 통해 시작한다. “평화를 어떻게 그릴 수 있을까?”
사진/촬영: 《평화 문해력》전시 전경/정희수
김재홍,〈침묵〉, 1991, 캔버스에 유채, 122x244cm
최민은 평화라는 개념을 설정하는 것에는 추상적인 어려움이 따르며, 그러므로 평화의 반대에 있는 전쟁, 갈등, 폭력을 통해 평화의 의미를 규정하고자 한다. 그에 의하면 평화는 “전쟁이 없는 상태”로, 인류의 역사상 전쟁의 공포는 현실에 상존해 왔기 때문에 사실상 평화란 “하나의 허구, 불가능성, 또는 거짓말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최민이 생각하는 평화를 그리는 방법은 평화라는 불가능한 상태를 형상하거나 평화의 반대항에 있는 전쟁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전 세계 미술가들이 단호하게 전쟁에 대한 반대 의사를 “외치는 것”으로, 미술가가 평화를 선언하는 것이 곧 평화를 그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국가와 민족 간의 군사적, 정치적 갈등에 대한 반대와 저항만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평화를 그리는 방법인가? 최근 동시대 미술계에서는 평화를 다루기 위해 평화 자체를 담론화하기보다 전쟁을 경유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예컨대, 2020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개최된 《낯선 전쟁》(2020.6.25.-9.20.)은 한국 전쟁 70년을 기념하여 “이 땅의 평화를 염원하면서 전쟁이라는 의미를 새롭게 보고자” 했으며, 2019년 뉴욕 MoMa PS1에서는 《Theater of Operations: The Gulf Wars 1991-2011》(2019.11.3.-2020.3.1.)을 통해 이라크와 중동 지역에서 발생한 정치적 갈등을 비판적으로 살펴봄으로써 전쟁의 의미와 파급 효과를 성찰했다.
그러나 최민과 같이 평화를 전쟁이 없는 상태로 정의하는 것 또는 평화를 말하기 위해 전쟁의 의미를 적극적으로 탐구하는 것은 평화의 의미를 군사적 충돌이 없는 상태로 한정하는 다소 협소한 논의이다. 그러므로 평화는 물리적 폭력의 감소를 포함하여 차별과 혐오에 대한 비판적 인식의 확산과 같은 사회문화적 차원으로 확장하여 생각할 필요가 있다. 이처럼 다양한 의미의 평화, 즉 평화 다원주의에 기초한 논의가 확산하는 것, 다시 말해 평화 문해력이 사회문화적으로 활발히 이야기되는 것은 평화라는 막연한 미래의 상태를 지금 우리의 현재로 끌어오는 가장 유효한 실천이 될 수 있다.
평화를 읽고 그리는 세 가지 방법
그렇다면 소현문의 《평화 문해력》에 참여한 3인의 회화 작가는 각자 어떻게 평화를 읽고, 그리고 있을까? 1980년대 민중미술에 참여한 바 있는 김재홍은 남성의 육체를 통해 한국 현대사를 신체화한다. 〈침묵〉(1991)은 5.18 민주화 운동 당시의 한 장면을 그려낸 것으로, 거리에 누운 한 광주 시민의 취약한 신체와 몸 위에 덮인 옷가지를 현장감이 느껴지는 시점으로 그려내 관람자를 1980년 5월 광주로 데려간다. 〈거인의 잠-202103〉(2021)은 골격이 드러나는 앙상하고 노쇠한 신체의 일부를 확대하여 하늘에서 내려다본 산맥처럼 보이게끔 골격을 그려냈다. 육체의 주인공에 해당하는 작가의 장인은 일제강점기, 해방 정국, 한국 전쟁에 이르는 굴곡진 한국 현대사를 몸으로 살아낸 이로, 그의 살과 뼈는 신체화한 역사를 상징한다.
사진/촬영: 《평화 문해력》전시 전경/정희수
이겨레,〈사람들〉, 2025, 캔버스에 유채, 53x40.9cm
큰 화면에 사실적인 신체 재현을 통해 역사를 육화한 김재홍의 작업과 달리, 이겨레는 인물의 윤곽선을 흐릿하게 그려 멀리서 보면 추상화처럼 보이는 인물화를 그린다. 작가의 최근작 〈사람들〉(2025)은 캔버스 표면의 질감을 그대로 노출한 짙은 파란색의 화면에 이목구비가 없는 인물의 흩어지는 형상을 그렸다. 이러한 형식은 어린 시절 백내장 수술로 인해 사람을 명확히 인지할 수 없는 작가의 물리적 한계와 더불어 사람을 지각하는 방식에 대한 그의 관심사를 반영한 것이다. 이처럼 이겨레가 그려내는 경계 없는 신체는 한국의 역사를 상징하는 토지와 같이 단단하고 굴곡진 육체성을 구축하는 김재홍의 인물상과 극단적인 대비를 이루며, 투명하고 흐릿한 개인의 취약함과 외부적 요인들의 거침없는 투과가 남긴 상흔을 보여준다.
한편, 세 개의 패널이 수평으로 이어진 이겨레의 작품 〈Platz〉(2017-2018)는 독일 라이프치히에 위치한 아우구스투스 광장이라는 특정한 장소와 건축물의 실루엣을 이어 그린 풍경화로, 100년이라는 긴 시간을 견뎌낸 장소의 시공간적 역사성을 복수의 캔버스 패널을 통해 표현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1945)과 독일 통일(1990)과 같은 독일 역사의 주요한 역사적 사건에 따라 가로 길이를 달리해 배치한 세 개의 캔버스 패널은 세계사적 전환기에 해당하는 독일 역사의 거시적 흐름을 광장의 실루엣을 통해 나타낸다. 반면 세 패널 위에 올려진 작은 크기의 캔버스 패널들은 광장 주위에 세워지고 쓰러져간 건축물들을 실제 자료에 기반하여 드로잉한 것으로, 아우구스투스 광장의 미시적인 역사를 표현했다. 이처럼 이겨레는 독일이라는 거대한 공간과 아우구스투스 광장이라는 특수한 장소의 변천을 교차하여 역사의 흐름을 고정된 2차원 평면 회화를 통해 구현하였다.
사진/촬영: 《평화 문해력》전시 전경(바르토스 커피 랩)/정희수
이겨레,〈Platz〉, 2017-2018, 캔버스에 유채, 118x500cm
사진/촬영: 《평화 문해력》전시 전경/정희수
현승의,〈징조들〉, 2023, 장지에 혼합매체, 130x194cm(X3)
현승의,〈Scenery for You 2〉, 2024, 장지에 혼합매체, 72.8x91cm
김재홍과 이겨레가 신체와 건축물이 역사와 맺는 관계를 통해 성찰적 의식을 드러내었다면, 현승의가 그려낸 흑백의 바다는 현재를 살아가는 동시대인이 가진 근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그린다. 대형 장지에 그려진 〈징조들〉(2023)은 2023-2024년에 바다에 방출된 도쿄전력의 후쿠시마 오염수가 야기한 해양생태계의 파괴와 인류 공동체에 대한 신뢰 붕괴 그리고 코앞에서 느껴지는 총체적 절망의 냄새를 바다와 관련한 다양한 일상의 장면을 분할 화면을 통해 보여준다. 무채색으로 그려진 어시장의 생선을 비롯한 해양 환경 생물체에서부터 언론 보도 화면과 텍스트로 표기된 멸망에 관한 밈에 이르기까지 총 144개의 분할된 사각형 칸에 그려진 장면은 실시간으로 느껴지는 지구 멸망의 기운을 축축하게 담아낸다.
그러나 현승의가 그려낸 또 다른 흑백의 바다는 ‘당신을 위한 풍경’이라는 다정다감한 제목을 통해 불안으로 한껏 예민해진 우리의 신경을 위로한다. 〈Scenery for You 2〉(2024)는 수평선 너머로 태양이 떠오르고, 햇빛에 반사된 수면의 물결 끝에는 나비가 날개를 펴고 있는 장면을 그린다. 화면의 좌우에는 크리스마스 전등과 같이 작은 빛을 발하는 열매가 야자수잎에 달려 있다. 잔잔히 일렁이는 바다의 물결과 하얗게 발광하는 태양, 흰 나비의 꼿꼿한 형상은 우리에게 절망의 바다에 함부로 잠겨 죽지 말 것을 권고한다. 작가가 “희망은 이따금씩 무책임하지만 절망은 깊은 사랑에서 비롯됩니다.”라고 말했듯이, 현승의가 그려내는 바다 또는 절망은 근미래에 파도처럼 닥칠 불가피한 파국을 상징함과 동시에 멸망 직전에 그려진 다정한 풍경화 속의 커다란 애정의 마음을 나타낸다.
김재홍, 이겨레, 현승의의 작업이 보여주었듯, 현시대에서 평화를 읽고 그린다는 것은 신체에 남긴 시간의 상처, 경계 없이 사라지는 취약한 개인, 인류 공동의 환경과 미래를 스스럼없이 파괴하는 광란의 선택을 곱씹어봄으로써 다시금 사회와 타인에 대한 기대를 거두고, 실망감을 안긴다. 그렇지만 ‘평화 문해력’이라는 제명의 전시가 2024년 12월 3일 윤석열 전 대통령의 계엄령 선포 이후 개최되었으며, 김재홍, 이겨레, 현승의와 최지인 같은 일군의 작가와 시인 역시 미술과 시를 통해 역사와 인간을 성찰하는 예술을 전개해 오고 있다. 이처럼 평화를 읽고 쓰고 그리는 행위는 평화를 미래에 도달할 불가능의 상태로 유보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계로 끌어들이는 유효한 방법이다.
*본 글의 제목은 미술평론가 최민의 글 「평화를 그리기」(2004)에서 빌려왔다.
참고 문헌
윤범모, 「인사말: 한국전쟁 70년과 특별전 《낯선 전쟁》」, 『낯선 전쟁』, 국립현대미술관, p.6, 2020.
최민, 「평화를 그리기」, 『평화 선언: 평화를 위한 세계 100인의 미술가』, 국립현대미술관, 페이지 미상, 2004.
현승의, 「애정과 절망의 표류기」, 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