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말하면, 003과 006의 교차실험에 대해서 크게 상관하지 않았다. 그냥 영국요리스러운 괴랄하고 맛없는 무언가가 튀어나오겠느니 생각하고 넘겨버렸지만, 지금 내 눈 앞에 펼쳐진 현실은 XK급 세계멸망 시나리오에 준하는, 말 그대로 멸망하는 상황이었다. 어차피 이 인형탈 안에서 살 바에는 죽는 것도 괜찮겠다고 생각했지만…. 일단 지금은 아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이 삶은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그 박사 놈이 어떤 음식을 뽑아냈는지 모르겠지만, 케테르급 SCP를 넘어서는 괴랄한 무언가를 뽑아낸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 시설이 이렇게까지 개판이 날 수가 없다. 지금까지 수많은 케테르급 개체를 격리해왔고, 격리 실패로 인해서 피해를 본 적도 있지만, 모두 "심각한" 정도는 아니었다. 가장 심각한 격리 실패 상황에서도 2~3주 안에 정상적으로 시설을 복구하고 격리 절차를 이어나갔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경보시스템은 하나도 작동하지 않았고, 그 덕에 보안요원과 연구원, 요원들은 무방비 상태에서 위험에 빠지게 되었다.
이후 재단의 체계는 하나둘씩 멈추기 시작했다. 작은 체계부터 조금씩 붕괴하기 시작하고, 급기야 중앙 체계마저 붕괴한 것 같았다.
혼란에 빠졌다. 이렇게 될 수가 없다. 재단의 체계는 이중, 삼중으로 백업되어 어떤 상황이든 가동되어야 할 터였다. 이 백업된 데이터까지 모조리 파괴해버린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재단의 "모든" 체계가 죽었다. 경보가 울리지 않는다. 닫힌 곳은 열리지 않는다. 열린 곳은 닫히지 않는다. 재단은 "멈추어버린 것"이다.
이제 믿을건 내 몸밖에 없다. 그마저도 진짜 몸뚱아리가 없으면 어쩌지도 못하는 처지다.
■됐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진짜 ■된 것 같다.
이 사건이 일어날 때 실험 중인 개체도 있을 것이고, 격리 절차를 진행 중이던 개체도 있을 것이다. 개체의 안전 등급 따위는 필요 없다. 어떤 개체든 모두 위험하다. 절차를 완벽하게 수행할 때나 "안전" 등급을 받는 거지, 지금 상황에는 모두 미쳐 날뛰어도 아무도 모를 것이다. 이 혼란스러운 상황을 이용해 격리실을 탈출하려는 개체도 반드시 있을 것이다. 한때 나의 일터이자 휴식처인 이 장소는 이제 나를 죽이려 드는 미친 곳에 불과하다.
내 주변에는 아무도 없다. 아마 죽었거나 탈출했겠지. 다음은 내 차례다.
내가 있는 지하 7층에서 지상 1층까지 갈 수 있을지 의문이다. 엘리베이터는 당연하겠지만 이용할 수 없고, 계단의 안전문이 잠겨있다면 그 곳도 갈 수 없다. 몇몇 복도는 이미 격리에 실패한 개체가 점령했을 수도 있다. 이런 개 ■같은 적대적인 환경에서 살아서 탈출한다면 그거야말로 기적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악조건이다.
죽거나, 탈출하거나... 씁, 어쩔 수 없지. 누가 이기나 한번 해 보자고.
아, 난 안죽나? 행동불능이 되거나, 탈출하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