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스는 회의실 테이블 앞에 앉아 턱을 괸 채 다리를 떨고 있었다. 어딘가 불만족스러워 보이는 그의 표정에는 불안함마저 찾아볼 수 있었다. 그는 시선을 잠깐 문 쪽으로 향하다 이내 스크린으로 향했다. 프로젝터로 화면이 띄워진 스크린에는 회의 내용이 적혀있었지만 읽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맞은편에 앉아 그를 바라보고 있는 블란테는 손톱을 물어뜯고 있었다.
"뭐야. 빨리 왔구만."
반곰이 회의실 문을 밀고 들어오며 말했다. 그가 손목의 시계를 확인하고는 싱긋 웃으며 둘을 바라봤다. 타스 박사는 말없이 한 손을 들어 흔들었고 블란테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 모인 건가?"
"나비 박사가 아직이군요."
"어라. 나비 박사도 오는 거였나?"
"불러도 어차피 무효표나 던질 거 같은데요."
옆에 앉아있던 타스가 말했다. 반곰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람이라면 분명 그럴 거야."
"이제 누가 남았나? 내가 모르는 박사들이 더 있는 건가?"
"글쎄요. 이렇게까지 사람을 불러모을 필요가 있나요?"
"본인이 희망한다는데, 불러야지 뭐."
반곰은 블란테를 슬쩍 흘겨보더니 다시 타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블란테는 반곰의 등을 불안한 눈빛으로 올려보다 이내 시선을 흐리며 고개를 내렸다.
"다 모였습니까?"
킬리가 문을 열고 들어오며 말했다.
"방금 내가 그 말 똑같이 했는데."
반곰이 웃으며 양손으로 총모양을 만들어 킬리를 겨누며 말했다. 킬리는 표정 하나 바뀌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이군요."
"젠장, 반응 좀 해달라고."
반곰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타스는 낄낄거렸다.
"항상 늦는군요."
킬리는 손목시계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반곰 박사는 여전히 인상을 찌푸린 채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설마 '걔'야?"
킬리는 반곰을 바라보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반곰 박사가 머리를 쥐어뜯으며 소리쳤다.
"망할! 이런 일에 끌려올 바에야 006으로 자판기나 털고 다니는 건데!"
"잠깐, 뭐라고요?"
타스가 정색하며 반곰을 바라봤다.
"아무 말도 안 했어."
반곰은 아차라고 작게 내뱉으며 차려자세를 취했다.
"그거 당신이었나?"
표정 하나 없던 킬리가 눈썹을 꿈틀거리며 반곰을 노려봤다.
"아 망할, 그 자식은 내 인생에 도움이 안 돼."
반곰이 어금니에 힘을 주며 중얼거렸다.
"일단 이 문제는 뒤로 치워놓고, 블란테 박사?"
"아! 아, 네!"
테이블 위에 팔짱을 끼고 그 위에 턱을 얹은 채 사람들을 바라보던 블란테가 자신이 호명되자 화들짝 몸을 일으키며 킬리를 바라봤다.
"이 모든 건 당신의 요구가 과연 승인되어야 하는가를 위해 모인 겁니다."
킬리가 옆구리에 끼고 있던 파일철을 펼치며 말했다.
"지금까지 총 6번의 회의가 있었고, 그중 3번의 찬성, 3번의 반대가 있었습니다. 이번이 마지막일 것 같습니다."
"네..."
"좋습니다. 일단 각자 자리에 앉아주시겠습니까."
킬리가 파일철을 닫고 주변을 둘러보며 말하자 박사들은 각자 자신의 자리로 걸어가 앉았다.
타스, 반곰, 빈자리 맞은편의 킬리, 빈자리, 그리고 블란테.
"늦어서 죄송합니다!"
"여기였구만."
두 명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한 명은 나비, 나머지 한 명은
"젠장! 역시 루겐 저 자식이야!"
반곰이 테이블을 주먹으로 내려쳤다.
"어라, 반가운 얼굴들이 있는데."
"닥치고 앉아요."
타스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반곰이 타스에게 고개를 돌리더니 엄지를 들어 올리며 웃었다.
"하하하하."
루겐은 킬리의 오른쪽으로 걸어가 앉았다. 나비가 불안한듯한 표정으로 박사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에, 그러니까. 저희가 뭘 위해 모인-"
"나 자리좀 바꿔줘! 이 자식 얼굴 보고 싶지 않아."
반곰이 소리쳤다.
"저도 싫어요."
타스 박사는 고개를 저었다.
"저기?"
나비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봤다.
"아, 미안해요. 그러니까-"
타스는 블란테를 바라봤다.
"제가 설명해도 될까요?"
"아, 네."
블란테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블란테 박사님이 퇴직을 바라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걸 결정하기 위해 지금까지-"
타스는 킬리를 바라봤다. 킬리는 말없이 박사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6번. 저 녀석한테 질문을 하려고 한 거야?"
옆에 앉아있던 반곰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타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익숙해지질 않네요. 6번. 그래요. 6번의 회의가 있었습니다. 근데 아직 결론이 나질 않았어요."
블란테는 손톱을 입으로 가져갔다.
"지금까지 여러 박사가 모였고, 그중에는 여러 번 모인 사람도, 이번이 처음인 사람도 있죠."
"참고로 난 다섯 번."
반곰이 끼어들었다. 타스는 웃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저는 이번까지 세 번이네요. 여러분은 블란테 박사님의 퇴직을 과연 허가해야 하는지를 결정하시면 됩니다."
타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절대 안 돼. 55 기지에 블란테 박사가 없다? 진작에 4번 정도 TF 급 시나리오가 벌어졌을걸."
"5번 정도일 겁니다. 당신이 한 짓이 있는데."
킬리가 정정했다. 반곰은 그를 노려봤지만, 그는 블란테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튼! 이런 인재를 버린다고? 황금 전설을 갈아버리겠다는 말인가?"
"하지만, 우리는 그만둘 수 있다면 얼마든지 그만둘 수 있잖아요? 왜 블란테 박사님만?"
"우리는 그만두려면 두 가지 선택지가 있잖아?"
가만히 앉아있던 루겐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반곰이 그를 노려봤다.
"첫 번째."
루겐이 검지를 펴며 말을 이어나갔다.
"뒤지던지."
루겐은 검지로 자신의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두 번째."
루겐은 검지와 중지를 폈다.
"재단과 관련된 모든 기억을 잃던지."
루겐은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툭툭 건드렸다.
"하지만 그는 그게 안 됩니다."
킬리가 말했다.
"기억 소거제가 안 통한다는 이야긴가요?"
나비가 미간에 주름을 만들어내며 킬리를 바라봤다. 파일철에서 서류를 꺼내 박사들에게 한 장씩 건네줬다.
"이걸 보면 될 거 같습니다."
킬리가 나누어준 문서에는 실험기록이 나와 있었다. 어려운 단어들과 복잡하게 적어놨지만 대충 블란테가 왜 기억소거제가 안 통하는지는 몰라도 그것이 통하지 않는다는 건 확실하다는 내용이었다. 블란테는 자신이 씹고 있던 손톱이 부러졌다는 걸 발견했다.
"가, 가능한 건가요? 이거?"
"실험 결과가 증명하고 있습니다."
나비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문서를 노려보고 있었고 반곰과 루겐은 서류를 이미 내려놓은 지 오래였다. 타스는 머리를 긁적이며 문서를 읽고 있었다. 킬리는 문서 속 오타를 찾아냈다.
"그래서, 블란테 박사님은 기억 소거가 불가능하니까, 그만둘 수 없다는 건가요?"
"그렇죠."
나비의 물음에 타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아니어도 안된다니까?"
반곰이 투덜거렸다.
"블란테 박사님의 이야기를 들어볼 수 있을까요?"
나비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괜찮나요?"
타스가 다시 한번 물었다.
"좋습니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일지 모르니까."
"사실상 마지막이죠."
킬리가 말했다.
"계속하는 이야기지만, 저는 이런 재단에서 일할만한 인재가 아닙니다. 저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이야기를 했을 뿐입니다."
블란테는 자리에서 일어나 말을 이어나갔다.
"저는 평범한 사람입니다. 이런 정상적이라는 것이 통하지 않는-"
블란테는 반곰과 타스를 바라봤다.
"특별한 세 상속에 속해서는 안 되는 사람이란 말입니다."
블란테는 한숨을 내쉬고는 자리에 앉았다.
"사실 그의 능력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킬리가 말했다.
"기억 소거가 안되니까요."
타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이게 제일 크지."
반곰도 고개를 끄덕였다. 나비가 뭔가 불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이건 아닌 것 같네요."
"가고 싶으면 가야지."
루겐도 고개를 저었다. 반곰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루겐에게 뭐라 말하려 했지만 킬리가 노려보자 다시 얌전히 의자에 앉았다.
"이렇게 떠들어도 의미 없습니다. 투표로 정하시죠."
킬리가 말했다. 타스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그녀가 자유의 몸이 되었으면 하는 분은 손을 들어주세요."
나비, 루겐이 손을 들었다. 타스는 잠시 고민하는듯하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자, 그럼 그녀가 남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분?"
반곰, 킬리가 손을 들었다.
"동률인가?"
반곰이 손을 들어 올린 채 말했다.
"동률이면 또 투표해야겠군."
"다음 투표는 누가 하죠?"
나비가 물었다.
"일단 난 빼줘."
반곰은 자리에서 일어나 문 쪽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그를 선두로 다른 박사들 또한 자리에서 일어나 회의실을 나섰다.
블란테만이 의자에 앉은 채 문을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