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입 연구원 브리아는 직원 휴게실에 앉아 멍하니 커피잔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누가 설계했는지는 몰라도 통로를 확장해 휴게실로 쓰자는 아이디어는 정말이지 최악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수많은 사람이 휴게실 문을 밀고 들어왔지만, 그녀를 제외한 그 누구도 의자에 앉지 않았다. 하나같이 인상을 찌푸리거나, 아니면 즐거운 듯 웃고 있었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마치 방금 죽었다 살아난 듯 표정이 없었다. 그녀는 그런 혼돈 같은 질서 속에서 사람들을 관찰하며 커피를 홀짝거리고 있었다.
"미안한데, 비켜!"
누군가 소리치며 휴게실 문을 거칠게 밀치고 들어왔다. 브리아는 뒤쪽에서 들려오는 고함소리에 화들짝 고개를 돌려 반대쪽 문 쪽을 바라봤다. 문 쪽에는 하얀 가운차림의 남자가 품 안 가득 서류뭉치를 들고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었다. 남자는 짜증 난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브리아는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힘들게 눈치챘다. 어떻게 내가 저 남자의 표정을 알 수 있는 거지? 그녀는 흠칫하며 고개를 돌려 남자를 바라봤다. 남자는 그녀 옆을 지나쳐 반대쪽 문으로 달리듯 걸어가고 있었다. 이 자리에선 이제 그의 뒷모습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그런데도 그것 하나만큼은 똑똑히 보였다.
남자의 얼굴에 종이 한 장이 붙어있었다. 종이는 완벽하게 그의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브리아는 자리에서 황급히 일어났다. 밀려난 의자가 우당탕 소리를 내며 넘어졌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그녀를 바라봤지만, 그녀는 주변 시선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을 바라보는 주변 사람들을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제일 이상한 사람이 방금 지나가지 않았는가?
"방금 뛰어간 저 사람은 누군가요?"
브리아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남자에게 소리치듯 말했다. 남자는 잠시 흠칫하다 문 쪽을 바라보고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반곰 박사님을 말하는 건가요?"
"반곰 박사님?"
"그래요. 이 시설에서 뭘 하는진 몰라도 가장 바쁘면서 가장 게으름 피우고 있는 사람."
"지난주에 출장 가신다고 하지 않았나?"
남자의 옆에 서 있던 또 다른 남자가 말했다.
"분명... 또 뭔가 내팽개치고 오신 거겠지."
남자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브리아는 인상을 찌푸리며 문 쪽을 바라보다 다시 남자들에게 물었다.
"그 반곰 박사님이라는 분의 사무실이 어딘가요?"
"사무실이요?"
"사무실이 있긴 한데, 그걸 사무실이라고 봐야 하나?"
"창고? 오락실?"
"쓰레기장."
남자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낄낄대며 웃었다. 브리아는 자신을 앞에 두고 그들만 재밌는 농담을 하는 것에 살짝 기분이 상했지만 그래도 겉으로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다시 한번 물었다.
"그래서, 반곰 박사님 사무실이 어디죠?"
"아, 미안해요. 그러니까..."
남자는 입가를 쓸어올리며 잠시 생각하는듯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알려드릴 순 있지만, 의미는 없을 거예요. 거기 잘 안 계시니까."
옆에 서 있던 남자도 고개를 끄덕였다. 브리아는 슬슬 인내심의 한계가 찾아오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좋아요. 그냥 제가 혼자 찾-"
"거기 둘! 나 좀 도와주겠나?"
뒤쪽에서 콰앙 하고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소리치듯 누군가가 말했다. 브리아가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그녀가 찾으려 했던 남자가 서 있었다.
"거기 너랑 너!"
반곰 박사는 브리아와 앞에 서 있던 남자 중 한 명을 지목했다.
"저요?"
"박사님! 잠시 저랑 이야기 좀-"
브리아는 다급히 반곰 박사에게 걸어가며 말했다.
"뭐? 나랑 이야기하는걸 좋아하는 사람은 없는데. 나도 누군가랑 이야기하는걸 좋아하지도 않고. 혹시 우리가 이전에 만난 적이 있나?"
반곰 박사는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물론 그의 얼굴은 종이로 가려져 있었다.
"오늘 처음 뵙는 거예요. 그리고 잠깐이면 충분해요."
브리아는 땀으로 축축해진 손바닥을 허벅지에 비벼 닦아내고는 손을 뻗어 반곰 박사의 얼굴로 가져갔다.
"뭐 하는-"
브리아는 반곰 박사 얼굴에 붙은 종이 끄트머리를 손가락으로 쥐고는 그대로 잡아 올리며 그의 얼굴에서 뜯어냈다.
"이게 궁금- ...박사님?"
브리아는 손에 들린 종이를 바라보다 다시 박사를 바라봤지만, 박사는 그곳에 없었다.
아니, 그녀가 그곳에 없었다.
"여긴...?"
브리아는 주변을 둘러봤다. 검은색. 사방이 온통 검은색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어두컴컴한 공간이 아닌, 새까만 검은색이었다. 흐릿한 실루엣이 이 장소가 그녀가 서 있던 장소가 맞는다는 걸 말하듯 했다. 무언가 검고 두꺼운 천으로 세상을 덮어놓은 느낌이었다.
"자네 지금 무슨 짓을 한 거지?"
반곰 박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브리아는 다급히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소리쳤다.
"단지 얼굴에서 종이를 떼어냈을..."
브리아는 손에 들고 있는 종이를 바라봤다. 종이에는 화난 듯 찡그린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
"55 기지는 처음인가?"
반곰 박사가 말했다.
"오늘 처음 왔어요."
브리아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모르는 것 같으니 알려주지. 여기서 지켜야 할 건 많지 않아."
반곰 박사는 한숨을 내쉬었다.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지 말 것."
반곰 박사는 브리아의 손에서 종이를 뺏어 얼굴로 가져갔다. 브리아는 화들짝 놀라 멍하니 그를 바라봤다. 반곰 박사는 구겨진 종이를 만지작거렸다.
"다음부턴 조심하도록."
반곰 박사는 웃으며 말했다. 어느새 세상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네? 무엇을?"
남자가 말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자네 말고, 너. 네가 같이 가는 거로."
반곰 박사는 남자 옆에 서 있던 또 다른 남자의 가슴을 검지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또 쓸데없는 일이겠죠."
"쓸데없다니! 모든 건 발견을 위해서야. 가자고."
남자들과 반곰 박사는 걸음을 옮겨 문 쪽으로 향했다. 브리아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서 그들을 바라봤다.
남자들은 문을 밀고 밖으로 향했고 반곰 박사는 잠시 문 앞에 서서 브리아를 돌아봤다.
반곰 박사는 검지로 브리아를 가리킨 후 자신의 입 앞에 검지를 세로로 세웠다. 그는 한쪽 눈썹을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마치 '알고 있겠지?'라고 말하는듯한 모습이었다.
브리아는 침을 꿀꺽 삼키고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반곰 박사는 싱긋 웃으며 문을 밀고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