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승근:론도
-잠에서 깬 바위 우화(羽化/寓話)
백필균
장승근:론도
-잠에서 깬 바위 우화(羽化/寓話)
백필균
밑그림은 아직 갖추지 않음을 선언한다. 작자가 몸을 푸는 움직임은 드러냄을 유보하고 유보함을 드러낸다. 빠르고 간단한 형태로 착상을 제시하는 기술은 최초의 인식을 붙잡고 최후의 이미지로 도약하는 장치다. 장치는 특정한 처리 과정과 결과 범위를 전제하기에 밑그림은 그 명명 아래 즉흥적인 완성 혹은 계획적인 미완성으로 남는다. 밑그림에서 ‘밑’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바닥과 바탕, 받침과 발판은 여전히 밑이 아니다. 표면과 표층 아래로 침전하는 시선은 겉으로 활개치기보다 속으로 웅크린다. 그 일시적 압축은 차후에 회화가 우화하는 조건이다.
바위는 세계를 비추는 여명이 해변에 가득할 즈음 잠에서 깬다.
장승근이 화면에 서로 다른 레이어를 이중으로 겹치는 구성은 앞선 그의 회화 연작부터 근작까지 반복적으로 보이는 개성이다. 2023년 장승근의 연작이 이전 작업과 다른 부분은 텍스트나 만화적 요소가 아닌 회화의 밑그림을 주요 선율로 삼은 향연이다. 초벌한 밑그림을 남겨 칠하거나 재벌하는 덧칠로 작업을 마치는 구조는 마지막 인사를 주문하는 일종의 공식으로, 주제부 다음에 삽입부가 흐르고 재차 주제부를 반복하는 론도(rondo)의 시각적 형식을 선보인다.
J는 같은 날에 글 두 편을 보냈다. 두 편 모두 J가 회화에 관한 생각을 옮긴 글이었다. 첫 글을 보내고 그는 술을 마셨고, 몇 시간 되지 않아 또 다른 글을 보냈다. 밤공기와 술 냄새가 묻은 말투. 그가 늦지 않게 덧붙인 무언가는 내 앞에 거친 움직임으로 남아있다. 그것은 1이자 111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일이다.
《론도》는 장승근이 2023년 상반기에 작업한 회화 55점, 스케치 56점과 3점을 방 4곳과 화장실 1곳에 설치한 전시다. 비교적 길지 않은 시기에 점진적 변화를 보이며 진행한 다작은 일정한 조건에 따라 위치한다. 방문자가 관람동선에서 각 방 입구 정면마다 누군가의 얼굴을 마주하는 구성은 또 다른 론도다.
하나, 방마다 인물과 고양이와 꽃 소재별 회화를 1점 이상씩.
하나, 잠에서 깬 누군가의 얼굴은 각 방 입구 정면에.
하나, 딱밤 맞는 누군가의 이마 혹은 딱밤 때리는 누군가의 손은 각 방 안쪽 출입구 옆벽에.
하나, 화판 높이와 주요 색조가 같으면 옆면을 붙이고 아랫선을 같게.
시작과 끝에서 누군가를 다시 만나는 날까지 뒤척이는 시간은 전시가 확장하는 미적 경험으로 나아간다. 장승근이 작업실 안과 가까운 바깥을 오가는 일상의 반경에서 벗어난 이번 전시는 그의 회화가 내골격에서 외골격 혹은 이중골격으로 우화하는 흔적을 조명한다. 장승근의 회화에서 밑그림은 대상을 직선적인 선묘와 백묘로 나타내며 기울어진 구조에 활기찬 동세를 펼치고, 이를 기반으로 시간을 조직하는 흔적은 보이는 주체의 운율보다 보여주는 주체의 것을 선명하게 표현한다. 형태는 구조와 동세가 결합한 것이지만 장승근의 구조는 현실의 것과 어긋나며 동세는 임의의 지휘를 따른다. 초기 발상을 말기까지 전이하는 시지각적 연속체는 단계와 단계 사이 필연성을 드러내는 한편 사용자가 스스로 인식이 열리는 국면에 다다른다. 밑그림을 이중으로 표현하는 형식은 회화를 회화로 성찰한다. 구긴 튜브와 접힌 근육이 닮은 회화. 현실에서 우화한 꿈의 세계, 혹은 그 반대로.
잠에서 깬 바위는 이미지가 퇴적하고 파쇄하는 몸을 이끌고 산에 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