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26일


(중략)배경과 피사체의 거리를 멀게 느껴지시는 것은, 배경의 레이어는 투명한 물감으로 1단계의 레이어만 쌓고, 대상을 묘사하는 텁텁한 질감의 물감과 두터운 물감량으로 그려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는 제가 ① 배경과 대상이 가까워보이는 화면 ② 배경과 대상의 원근이 느껴지는 화면 중 어떤 화면이 저의 작업 의식에 더 탁월하게 다가올지 실험함이였습니다. 기존의 작업들은 대부분 배경의 붓질을 또한 여러번 쌓는 형식으로 대상과 거리를 두지 않는 ①번의 사례들이 많은데, 새로 신작을 제작하려니 ②번의 경우가 많이 없었던 것 같아 ②번과 같은 데이터가 필요하다고 느껴졌습니다. ②번의 형식으로 그림을 그렸을 때 느낀 점은 작업의 속도가 빠르고, 대상이 화면의 주인공 처럼 기능하여 시선을 흡수한다는 점입니다. 고민이 좀 더 필요한 지점은 화면 내에서 원근이 생기는 것이 과연 유효한 노림수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원근을 드러내려는 행위가 현실 모사를 어중간하게 시도하려 했던 의도로 비춰진달까요. 필균님은 어떠신가요?   


강렬한 팬티의 주인공은 제 절친중 한명으로 그 녀석의 자취방이 항상 덥고 습했기에 함께 팬티만 입고 술을 먹은 적이 있습니다. 이 친구는 몸에 문신 굉장히 많은데, 튼실한 살덩이와 윤곽선들로 그려진 문신이 한 곳에 어우러져 있는 녀석의 야릇한 고추를 그리고 싶었습니다. 덩어리 면과 선들이 한데 융화되어 이상하지만 계속 보게되는 친구의 사타구니는, 선과 색면의 병치를 통해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제 회화의 방향성과 맞닿아 있다고 생각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제목은 '야릇한 회화적 사타구니' 쯤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알아봐주시니 감사합니다. 20F 딱밤 그림과 달리 30호 S 사이즈에 그린 딱밤 그림은 20F 딱밤 그림처럼 채색하려 했으나, 두차례 색감조정에 실패하여 세번째 그린 것입니다. 조바심이 나버린 저는 그냥 종이에 드로잉 한 것 같은 느낌을 주기위해 회색빛의 화면을 만들고, 그 위에 라인드로잉과 드로잉의 명암만 옮겨놓아버렸습니다. '아, 차라리 이때가 제일 나았던 것 같은데.' 하는 마음으로요. 손을 어떻게 더 대볼지, 이대로 유지할 지는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제목은 '딱밤 때리기', 혹은 조금 꼬아보자면 '총이 뒤로 젖혀지다'라는 뜻을 담고 있는 군대 용어 특유의 긴장감을 빌려 '칵크트 피스톨'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정식명칭은 칵트-콕트 피스톨이지만 중사 상사 아저씨들이 꼭 칵크트라고 발음했던 기억이 납니다.


사실 불필요한 말인 것 같아 말을 안드렸지만, 필균님의 말씀을 들으니 말을 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네요. 작업실 공구를 그린 그림은 실로 우울한 마음에 그렸습니다.  며칠전  가족들의 불화를 관찰했던 심정이 담긴 일기를 아버지에게 보여드렸습니다. 저는 우습게도  '얘가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가족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구나' 와 같이 저의 심상을 공감 받는 드라마적인 상황을 상상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그 글이 전시 서문과 같은 공공연한 텍스트로 전시되는 것으로 오해 하신 채로, 아버지는 많은 충격을 받으시며 저에게 상처가 되는 말을 많이하셨습니다. 그렇게 저는 그날 아버지와 심하게 다툰 후 다음날 아버지가 쓰러지셨습니다. (현재는 건강이 회복되셨습니다.) 물론 온전히 저와 다툰 스트레스로 인해 쓰러지신 것은 아니지만, 제가 아버지를 그렇게 만들었다는 죄책감과 슬픔, 한편으로는 제 의중을 파악하지 못한 채 상처가 되는 말을 쏟아냈던 아버지가 원망스러웠던 기억이 있습니다. 

 가족의 불화를 해결하고픈 맘에 썻던 일기는 제 목적과는 다르게 완전히 정반대의 결과를 불러일으켰습니다. 일기를 보여주며 숨겨진 내면을 이야기 하는 방식은 완전히 이상한 망상에 몸을 맡겨 실행했던 어리석은 방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던 중 문득 작업실에 못 대신 사인펜을 '될 대로 되라지' 라는 마음으로 벽에 박아넣고, 그 위에 두개씩 겹쳐 걸어놓은 캔버스 짜는 도구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작업도구는 제가 작가로서 존재를 암시하고 증명하는 것들이고, 그것이 두겹으로 겹쳐져 있는 것은 제가 도구로서 레이어를 겹쳐서 사용하는 화법과 맞닿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근데 그것들이 벽에 대충 때려박은 사인펜에 의지하고 있는 상황은 마치 그날의 상황과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어설픈 맥락에 매달려 있는 수단들은 항상 우스운 결과를 불러일으키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우울한 그림이 나왔나 봅니다.  제목은 '벽에 박힌 사인펜과 도구들'이나 '어설픈 맥락에 매달린 것들', 조금 쿨하게 가보자면 'Tools'쯤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너무 멋없을려나요. 제목 짓는 건 항상 어렵습니다. 


필균말씀처럼 노란 옷을 입은 그림은 화면 밸런스가 맘에 들지 않아 얼렁뚱땅 방치해 두었던 그림인데, 빠른 시일내에 손을 봐야겠습니다. 제목은 '금연실패한 날'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