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이 열리면 미용실에서 일하고 있는 다방 아가씨 가슴이를 바로 만날 수 있다. 가슴이는 이혼남이자 무명권투선수 이정일을 짝사랑한다. 가슴이가 사랑하는 이정일은 다방 미쓰리에게 사랑의 화살을 꽂았다. 미쓰리는 이정일보단 유망권투선수 도윤석에게 호기심을 느낀다.
미용재주가 없는 미용사 허순영은 체육관 관장인 마관장을 좋아한다.하지만 마관장은 미용실 원장 글로리아 서에게 사랑을 고백한다. 이렇듯 인물들의 엇갈린 로맨스가 연극의 한 축을 이루고 있다.
연극의 다른 한 축은 인생의 잽을 날리는 정일과 마관장, 인생 한방을 외치는 도윤석의 삶의 방식을 교차하면서 보여준다. 여기서 도윤석이 외치는 한방은 예상치 못한 상대 즉 말도 더듬고 어리숙해보이기만 하던 철가방 백인의 펀치에 힘을 잃게된다. 펀치 중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펀치가 잽이다. 이 기본을 무시하고 한방만 외치다간 오히려 당하는 수가 있다. 힘 없이 툭툭 던지는 잽일지라도 나름의 자기 방어를 위해선 꼭 필요하다.
인간은 과거는 왜곡하고 현실은 불만이고 다가올 미래는 희망적으로 그려본다. 그래야 인생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마관장의 과거는 매스컴에 보도되면서 미화된다. 글로리아 서 역시 마찬가지다. 참가상 밖에 받지 못한 헤어쇼지만 기사가 나면 스크랩해서 액자에 걸어놓는다. 이렇게 되면 손님은 이 곳이 대단한 미용실로 착각하게 된다. 허순영은 미용기술도 없는데 미용실에서 일하는 게 불만이다. 순영에겐 마관장과 결혼해서 아이 낳고 사는 희망이 있다. 그러나 그녀의 희망은 자신을 마음에 두지 않는다는 마관장의 말에 꺽인다. 가슴이 역시 이정일이 자신을 그저 친절한 눈으로 바라만 주기를 원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권투챔피온에 도전한 도윤석은 백인과의 시합에서 부상을 입고 대회에 출전하지 못하게 되는 현실에 처한다.
등장인물들은 자신의 진짜 이름을 감추고 싶어한다. 미쓰리, 한실장, 글로리아 서, 마관장은 촌스러운 자신의 이름보단 예명으로 불리길 원한다. 특히 미쓰리는 나이와 이름 모두 비밀에 쌓여있다. 아픈 과거를 지우고자 함이다. 그녀의 마음을 잠시 흔들었던 윤석은 그녀가 장난스럽게 보여준 주민등록증을 잽싸게 낚아 채 이름과 나이를 알게 된다. 그녀의 과거를 알게 된 윤석은 3막 링에서 너무도 리얼하게 그녀를 쓰러뜨린다. 윤석이 던진 한방에 잠시 마음과 몸을 내비쳤지만 돌아오는 건 치욕과 상처뿐이다. 그 결과 미쓰리가 비틀거리면서 링 밖으로 사라지는 장면은 참으로 안쓰럽다.
생일이란 누군가에겐 기다리는 날일 수도 있지만 다른 누군가에겐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은 날일 수도 있다. 4막은 미쓰리와 정인의 생일 축하 준비에 다들 바쁘다. 홀로 다방과 술집을 전전하며 제대로 된 생일 축하도 받아보지 못한 미쓰리는 다시 서울 외곽보다 더 먼 지역으로 내려갈 예정이다. 정인은 이혼한 아내의 식당일을 도울 것이다. 윤석은 챔피온이 되기 위해 기초부터 다시 다질 것이다. 어쩌면 윤석보다 백인이 먼저 챔피온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듯 연극은 희망적인 내일을 준비하는 사람들과 좀 더 후에 있을 희망적 내일을 위해 현실에 적응하는 사람들을 함께 비춰준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슬퍼도 울지 않을거야'를 합창하는 장면 역시 현실에 적응하는 게 결코 패배가 아님을 말해준다.
다만 한실장과 윤석의 대사에 작가이자 연출가의 소리가 너무 직접적으로 들어가 있는 점이 극을 다소 교훈적으로 흐르게 한다. 그 결과 인물들간의 대사 호흡에 불균형을 일으킨다. 하루 하루가 똑같다고 느껴지지만 결코 어제의 오늘과 내일은 같지 않다. 하루 하루가 쌓여 내일 즉 미래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미쓰리가 한 방에 흔들리지 않고 잽을 차곡 차곡 쌓아 가슴에 희망을 품고 다시 한번 나타나길 소망해본다.
otr 정다훈 기자(otr.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