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당의 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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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너 어디까지 해봤어?자립연애 전도사 현정의 연애 상담 3건

뻔히 보이는 밀당·툭 던지는 결혼 얘기·섹스가 무기인 연인

“진짜 밀당은 상대에게 종속되지 않겠다는 태도”

클립아트코리아

폴란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리퀴드 러브>에서 ‘사랑의 기술을 표피적으로 습득한 이들의 훈련된 무능’에 대해 이야기했다. 연애 상담을 할 때면 자주 겪는 일이다. 진심으로 사랑하는 마음을 전하기보다 안전한 위치에서 사랑받는 입장이 되길 원한다. 관계 안에서 책임과 신의에 대한 부담은 거부하면서 상대의 마음을 사로잡는 방법을 알려달라고 한다. 둘 사이에 문제가 발생하면 자신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으려고 하면서 상대를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길 바란다. ‘밀당’(밀고 당기기)도 결국 그런 기술이지 않을까?에리히 프롬은 <사랑의 기술>에서 ‘진정한 겸손과 용기, 그리고 믿음과 절제 없이는 개개의 사랑에서 만족감을 얻을 수 없다’고 말했다. 덧붙여 그와 같은 덕목이 드문 사회에서는 사랑하는 능력을 성취하는 것이 어렵다고 덧붙였다. 일생에 그런 사랑을 한 번 경험하는 것도 실은 기적 같은 일이다. 그렇다면 사랑 말고 연애라면, 적어도 연애에는 기술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진솔한 사랑을 나누는 것이 쉽지 않은 물질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요즘 사람들의 연애, 그리고 그 안의 밀당, 사례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연애의 기술 혹은 사랑의 진실은 무엇일까?# 1.“어설픈 밀당을 보고 오히려 상대의 마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이준수(가명·26)씨는 최근 소개팅을 한 여성과 메시지를 주고받던 중에 대화가 쌓이다 보니 어떤 패턴을 발견했다. 다섯살 어린 그 친구가 자신에게 호감이 있다는 건 확실히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준수씨가 메시지를 보내면 그 친구는 첫 답장을 꼭 10분 뒤에 했다. 항상 10분이었다. 9분도 아니고 11분도 아닌 10분. 답을 하려고 기다렸다가 10분이 되면 보내는 게 귀엽게 느껴졌다. 그래서 먼저 고백하기로 했다. “나는 나를 좋아해주는 여자를 쉬운 여자라고 생각 안 해.” 준수씨의 말에 눈이 동그래진 친구에게 “10분씩 기다렸다 메시지를 보내지 않아도 괜찮아. 바로바로 답장해도 돼”라고 말했고 “뭐야. 들켰어. 분해. 하지만 좋아!”라고 말한 친구와 사귄 지 석 달이 조금 넘었다. 그 뒤로도 자꾸 어설프게 밀당을 하려고 해서 그때마다 다 보이니까 그러지 말라고 놀리는 재미에 푹 빠져 있다.―이 사례는 앙큼한 밀당을 해도 그걸 귀엽게 봐주고 자신에 대한 호감 신호라는 걸 잘 읽어낸 남자의 센스가 빛났다. 아무리 연애 경험이 없고 어리다고 해도 왜 저런 식의 밀당을 한 걸까? 국민적인 관심과 사랑을 받는 트와이스의 노래들이 떠올랐다. 발표하는 곡마다 여성 화자는 수동적으로 남자의 고백을 기다린다. 특히 밀당의 진수를 보여주는 ‘치어 업’(Cheer Up)의 가사 ‘여자가 쉽게 맘을 주면 안 돼. 그래야 네가 날 더 좋아하게 될걸’은 어린 여자친구들에겐 연애의 정언명령 같은 것이 되어버린 것 같다. 연애가 처음이거나 나이가 어린 여자들은 남자의 마음이 진심인지 혹은 한순간의 호기심이나 정복욕 같은 건 아닌지 불안해지기 쉽다. 20대 남자들도 사랑과 성욕을 잘 구분하지 못하고 좀더 수월하게 섹스를 하려는 목적으로 연애를 선택하기도 한다. 그런 여자들의 불안을 진정시켜줄 수 있는 것은 마치 영원한 사랑을 약속하는 듯한 달콤한 말이 아니다. 준수씨처럼 여자의 행동 이면을 잘 파악해서 걱정을 덜어주는 것이 중요하다. 결국 배려하고 아껴주는 태도가 바탕이 된 진심 어린 고백이 상대를 안심시키는 것이다.#2.“연애 직전의 긴장감 최고조, 상대의 한마디 말, 사소한 행동, 날 보는 눈빛에도 온 세포가 반응.” 구희선(가명·37)씨는 마지막 이별 이후 무생물처럼 살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다 취미 생활로 축구를 보러 경기장에 다니다 알게 된 아홉살 연하의 남자와 최근 썸을 타는 중이라고 했다. 남자가 종종 “우리 둘이 결혼하면 신혼여행은 영국, 독일, 스페인 이렇게 찍어야겠네요” 같은 말을 하기도 한다고. 그럼 겉으로는 대수롭지 않게 맞받아치지만 그게 상대의 진심일지 궁금해진다고 했다. 희선씨는 서로의 마음을 확신할 수 없기 때문에 간질거리는 마음을 다시 경험하게 될 줄은 몰랐다며 우선 연애 세포가 깨어나기 시작한 이 상태를 당분간 즐겨볼 생각이라고 한다.―연애 바로 직전, 서로 너무 좋긴 한데 확신을 가져도 될지 몰라 애매한 그 시기. 콩닥거리고 쫄깃한 그때를 많은 사람들은 연애의 묘미로 여긴다. 한동안 바위처럼 흔들림 없이 살아왔다고 하더라도 상대가 먼저 이렇게 마음을 훅 당겨주는 말을 하면 설렐 수밖에 없다. 희선씨도 그간의 경험을 통해 배운 게 있으니, 당김의 끝에 있는 마음이 진심이 아니라 귀에 닿을 때만 달달하다가 사라지는 게 아닐지 경계하고 조심할 것이다. 그렇지만 당분간 즐겨보겠다는 마음은 나이 차를 미리 걱정하고 회피하려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당겨줄 때 끌려가서 그 마음을 확인해보는 절차를 거쳐야 한 단계 더 깊어질 수 있지 않을까? 상대의 당김에 용기를 내서 다가가보는 것, 그것도 결국 일종의 기술이다.# 3.최성욱(가명·32)씨는 연인과 이별하고 돌아오는 길이라고 말했다. 일 년이 넘게 만나 왔던 동갑내기 여자친구와 헤어진 이유는 다음과 같다. 이제는 안정적으로 지내도 좋을 만큼 서로에 대해 신뢰가 생길 법도 한데, 여자친구는 자신에 대한 성욱씨의 마음이 여전한지 시험해보는 일을 멈출 생각이 없기 때문이었다. 성욱씨는 사귄다고 ‘손에 잡힌 물고기’라고 생각할까봐 매사 행동을 조심했다. 여자친구는 조금이라도 싸우는 날이면 며칠간 ‘잠수’를 타서 사람 피를 말리는 건 기본이고, 데이트 약속을 해놓고 한 시간 전에 취소하고는 그냥 집에 같이 있자고 하면서, 약속을 취소한 보상을 섹스로 대신하기도 했다고 한다. 연인 사이라고 해도 섹스는 상호 합의가 필요한 일인데, 여자친구가 먼저 적극적으로 나서서 기분을 풀어주려고 하는 그 마음이 성욱씨는 고마웠다. 하지만 여자친구는 그걸 무기로 둘의 관계를 밀었다 당겼다 하며 자신을 조종하려고 하는 것 같아 찜찜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고 한다. 성욱씨는 연인 사이에 싸움은 서로 다르게 모가 난 부분을 다듬어가는 과정의 일이고 배려하고 맞춰보려고 노력을 해야 하는 것이라 생각했는데 여자친구는 무조건 성욱씨가 지길 바라는 것을 견딜 수 없었다고 말했다.―변덕스럽고 안정적이지 않은 관계에서, 불안감을 서로에 대한 애정이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고통으로 느끼고 있으면서도 감정의 요동침을 격정적 사랑이라고 믿어버리기도 쉽다. 이런 관계에서 단호하게 이별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기에 그 결정을 지지한다. 성욱씨가 만나는 상대는 가망이 없다. 자신에게 애정을 보여주는 상대를 심적으로 조종하고 괴롭히면서 자신은 전혀 변할 생각이 없고 관계 개선에 노력도 하지 않는 상대라면 포기해야 한다. 그걸 붙잡는다고 해서 내 사랑이 고결해질 일은 없다. 특히 남자를 조종하기 위해서 ‘섹스’를 밀당의 수단으로 쓰는 여자들의 왜곡된 남성관은 위험하다. 세상 모든 남자가 섹스에 허덕이지도 않거니와, 내가 섹스를 하게 해주니 다른 건 다 내 마음대로 해도 된다고 믿는 것은 이기적이고 제대로 된 커뮤니케이션을 하지 못하는 걸 증명할 뿐이다.상대를 불안하게 만들어서 그 조마조마한 마음을 마치 애정인 양 착각하게 만드는 밀당의 기술은 자신과 상대 둘 다 기만하는 것이다. 좋아하는 마음을 억누르면서 얻으려고 하는 것이 과연 ‘사랑’일까, 아니면 관계를 좌지우지하고 싶은 ‘욕망’일까. 진짜 밀당은 상대에게 종속되지 않겠다는 태도라고 생각한다. 자신다움을 유지할 때 매력적인 연인으로 다가온다.현정 <자립 명사: 연애> 저자 겸 연애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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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hani.co.kr/arti/specialsection/esc_section/831301.html#csidx0a7fad5c4ad09d5a370249ad3de22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