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인간의 타락
겉으로 드러난 변화는 없어 보입니다. 세상은 아직 아름답고 인간은 멀쩡하게 살아있으며 아침에는 여전히 해가 뜹니다. 단지 인간은 유혹을 받아들여 선악과를 조금 먹었을 뿐입니다.
“니가 하나님처럼 될 수 있어.” 사탄이 던진 이 작은 씨앗은 형태도 없고 물질도 아닙니다. 그저 작은 욕망이자 정신입니다. 이제 인간이 선택한 이 작은 씨앗이 어떤 싹을 틔워갈지 살펴 보겠습니다.
창세기 3장 6절에서 20절까지는 비교적 짧은 내용이지만, 놀랍게도 인류의 타락이 가져올 참혹함이 거의 모두 상징적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선악과를 먹은 뒤 타락한 인간은 어떤 모습을 보여 갈까요?
- 첫번째 형상의 깨어짐
여자가 그 나무의 열매를 보니,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사람을 슬기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였다. 여자가 그 열매를 따서 먹고,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니, 그도 그것을 먹었다. 그러자 두 사람의 눈이 밝아져서, 자기들이 벗은 몸인 것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를 엮어서, 몸을 가렸다. 그 남자와 그 아내는, 날이 저물고 바람이 서늘할 때에, 주 하나님이 동산을 거니시는 소리를 들었다. 남자와 그 아내는 주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서,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다. 주 하나님이 그 남자를 부르시며 물으셨다. "네가 어디에 있느냐?" 그가 대답하였다. "하나님께서 동산을 거니시는 소리를, 제가 들었습니다. 저는 벗은 몸인 것이 두려워서 숨었습니다." (창세기 3장 6~10절)
- 수치심
제일 먼저 변한 것은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수치심을 느꼈다는 점입니다. 마지막 구절에 두려워서 숨었다는 말에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죄를 짓고 잘못했다고 느끼는 죄책감이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먹지 말라하신 선악과를 먹고 두려워져서 숨었습니다” 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벗은 몸인 것이 두려워서 숨었습니다.” 라고 하고 있습니다. 두려워서 숨은 이유는 자신이 벗었기 때문입니다.
그 전까지 옷이란 것을 입어본 적도 없는데, 어떻게 갑자기 벗은 몸에 대한 수치심이 생겼을까요?
개인의 의식안에는 거울과 같이 자신의 모습을 비춰주는 “자아상”이라는 생각의 틀이 있습니다. 수치심은 이 자아상이 나 자신의 모습을 부족하고 불완전한 모습이라고 왜곡시켜 비춰주고, 나는 스스로가 완벽하길 바라는 높은 이상을 가졌을때 발생됩니다.
나는 이미 사탄의 생각의 정수, 곧 사탄의 영을 받아드려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욕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같이 지혜롭고, 하나님과 같이 위엄과 권위를 가지면서도 아름답고 선하고 따뜻한 존재이고 싶습니다. 아니 더 나아가 완전한 존재이고 싶고 전지전능했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나를 찾으시며 동산을 걸어 다가오는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강렬한 욕망이 속에서 치솟지만, 내 실존은 하나님에 비하면 턱 없이 부족해 보여서 부끄럽습니다. 하나님에 비해 초라한 내 모습을 감추고 싶습니다.
타락한 인간은 이때부터 여러가지 수치감에 시달리며 살아가게 됩니다.
자신의 차가 남과 비해서 작거나 낡았다고 부끄러워 하거나, 재산이나 연봉을 비교해서 사람을 평가하고 이런 것이 부족하면 수치감을 느낍니다. 학력 컴플렉스와 외모 컴플렉스 역시 자신을 초라하다 느끼게 하거나 심지어 가치가 없는 존재 마냥 생각하게 합니다. 외모가 특출나거나 잘 차려입은 사람 옆에서 사진을 찍을때 많이 부끄러하는 일이나, 그저 모든 사진에 찍히는 것을 극히 꺼려하는 성향도 자신의 결점을 사진을 통해 스스로 보거나, 남들과 공유하는 것에서 오는 수치심에서 비롯됩니다. 자신이 남들보다 우월한 뭔가를 많이 가지고 있으면 신의 아들이나 되는냥 거들먹 거리게 되고, 반대로 이런 월등한 사람을 주변에서 바라봐야 하는 입장이라면 자신이 한없이 초라해 보여 적지 않은 수치감을 느끼게 됩니다. 이를 가만히 살펴보면 인간은 자신과 관련된 모든 것이 완벽하고 우월하길 바라는 본성이 있어 보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벗은 상태로 창조하셨으니 그 전까지는 벗고 있는 모습도 지극히 당연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처럼 되고싶은 욕망이 피조물인 자신을 창조주의 완벽하고 위대한 모습과 비교해 보게됩니다. 나도 완벽하고 싶고 최고로 아름답고 싶은데 자신의 실제의 모습이 하나님에 비해 부족해 보여서 싫습니다.
인간이 자신을 하나님과 비교 가능한 존재라고 인식할 수 있어야 자신의 벗은 몸에 대한 하나님 앞에서의 수치심이 가능해 집니다. 이처럼 태초에 옷을 본적도 없던 인간이 느꼈던 수치감은 하나님과 자신을 비교하는 것에서 비롯되고 있습니다.
또한 그전까지 전혀 그런 인식이 없다가 선악과를 먹는 순간 수치감을 느꼈다는 것은 인간에게 하나님과 같아지고자 하는 영이 들어갔다는 증거가 됩니다.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께 삐지는 것, 억울하다고 생각하는것, 하나님께 복수할 거라고 생각하는 것, 하나님이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생각하는 것, 당신이 있다면 내게 증명해 보이라는 것, 이런 하나님을 마치 인간의 범주에 넣어 생각할 수 있다는 것 역시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욕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타락 이후의 인간은 스스로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자신 스스로를 하나님과 대등한 위치에 올려 놓고 생각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내가 꿈꾸는 하나님 같은 이상적인 나와, 자아상이 비춰주는 현실의 내 모습의 격차 만큼이 수치감입니다. 즉 하나님과 같아지려는 욕망이 클수록, 자아상이 자신을 못나게 비춰줄 수록 수치감은 커지게 됩니다.
타락한 뒤 인간이 수치감을 느껴 하나님으로부터 숨은 현상은, 하나님의 영을 거부하고 스스로 하나님과 같아지려는 욕망의 영을 품고 있을때 나타나는 첫번째 타락의 증상입니다.
- 물질세계 안으로 들어오신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육체가 필요 없으신 전능하신 영이십니다. 그런데 이 인간의 타락 직후에 “동산을 거니시다” 라는 마치 육체를 가지신 하나님이신 것 같은 표현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영을 담고 있던 사람이 그 영을 거부하자 하나님과의 소통에 문제가 생긴 것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도 이 타락한 인간과 소통하기 위해서는 육체를 입으셔야 할 필요가 생겼습니다. 당장은 아니지만 나중에 하나님의 뜻을 직접 전하시기 위해 세분 하나님중 예수님께서 이땅에 '사람'으로 태어나실 필요를 암시하는 성경 구절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땅에 사람으로 오신후 회복을 위해 죄인들을 부르신 말씀을 한마디로 줄여본다면 이 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네가 어디에 있느냐?"
물론 하나님께서는 불가능한 일이 없으심으로 육체를 통하지 않고 잠시 하나님의 영을 인간에게 부으셔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들을 충분히 이루실 수 있습니다. 실제 성경에서도 이런 경우들이 나타납니다. 결국 하나님을 떠나는 사울왕이 젊은시절 한때 성령의 임제를 체험하고 예언을 한다거나, 삼손이 하나님과 인격적인 만남을 거치지 않고 그저 순간적으로 성령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어 힘센 장사가 되어 이스라엘 민족을 구해내는 순간들이 그 예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또는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때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그를 좋아한다” 라는 하늘에서 울린 음성처럼 하나님께선 육체를 덧입지 않으시고 구름이나 대기를 진동시켜 얼마든지 소리의 파동을 만드실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3:17 참조)
그러나 이런 초자연적 현상은 하나님께서 즐겨 사용하시는 방법은 아닙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쉬운 개입을 작정하셨다면 모든 타락한 인간을 쫓아다니시며 죄를 질때 마다 작은 벼락으로 아프게 때려 손쉽게 고분고분한 사람들로 만드실 수 있을 것입니다. 아니면 공중에 하나님의 그 거룩하신 모습과 위엄을 자주 보여주셔서 주눅든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안믿을 수 없게 만드시면 됩니다. 그러나 그렇게되면 인간은 인격과 자유의지가 크게 침범당한 상태가 됩니다. 진성한 사랑을 위해 창조하신 인간을 그런식으로 억압해서 불완전한 사랑의 대상으로 만드실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스스로 세우신 자연질서를 간섭하실 때는 인간의 영혼을 구하시기 위한 목적에 한해 최소한으로 축소시키셔서 인간의 자유의지와 인격을 지켜주십니다. 이 이야기는 잠시 뒤에 더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직접 사람으로 이땅에 나타나시기 전까지의 이야기인 구약 성경에 주로 나타난 하나님의 소통 방법은 “선지자”입니다. 하나님과 영적인 소통이 끊긴 인류에게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메시지를 전하시기 위해 시대마다 한 사람 혹은 극소수의 사람을 택하십니다. 이들을 선지자라고 부르고 하나님께 받은 메시지를 타락한 인간에게 전하는 역할을 합니다. 이 선지자들은 때때로 하나님께 받은 메시지를 글로 기록했는데 이 글들과 그 사건들이 일어난 유대민족의 역사가 모여서 성경의 전반부 구약 성경이 됩니다. 이 기록된 성경을 통해 선지자에게 직접 전해 듣지 못하는 사람들도 보편적인 방법인 글자를 통해 하나님의 메시지를 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물질세계를 다스리는 인간이 악한 영을 선택하는 바람에 선과 악의 진영의 입장이 이처럼 완전히 뒤바뀌게 되었습니다. 뱀이라는 물질을 입고 나타났던 사탄은 이제는 그 모습을 감추고도 인간에게 들어간 그의 욕망을 통해 소통할 수 있게 되었고, 반대로 소통이 끊겨버린 하나님께선 사람인 선지자 또는 메시아를 물질세계에 육체를 입은 존재로 보내 타락한 인간에게 돌아오라고 외치거나, 그 기록된 외침인 성경으로 소통해야 하는 입장이 되었습니다.
이 모든 과정이 인간이 하나님의 영을 거부하고 사탄의 영을 품었기에 생긴 일입니다. 이제 인간은 하나님과 소통이 어려워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을 닮게 만든 사람은 그 첫번째 하나님 닮은 형상이 깨졌습니다. 이제 인간은 더 이상 하나님의 영을 가진 존재가 아닙니다.
- 두번째 형상의 깨어짐
물질세계 안으로 들어오신 하나님께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십니다.
하나님이 물으셨다. "네가 벗은 몸이라고, 누가 일러주더냐?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고 한 그 나무의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그 남자는 핑계를 대었다. "하나님께서 저와 함께 살라고 짝지어 주신 여자, 그 여자가 그 나무의 열매를 저에게 주기에, 제가 그것을 먹었습니다." 주 하나님이 그 여자에게 물으셨다. "너는 어쩌다가 이런 일을 저질렀느냐?" 여자도 핑계를 대었다. "뱀이 저를 꾀어서 먹었습니다." 주 하나님이 뱀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이런 일을 저질렀으니, 모든 집짐승과 들짐승 가운데서 네가 저주를 받아, 사는 동안 평생토록 배로 기어다니고, 흙을 먹어야 할 것이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자손을 여자의 자손과 원수가 되게 하겠다. 여자의 자손은 너의 머리를 상하게 하고, 너는 여자의 자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다." (창세기 3장 11~15절)
인간의 두번째 타락의 증상은 연합이 깨졌다는 점입니다.
인간은 세분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연합하는 존재입니다. 결코 혼자 살게 디자인되지 않았습니다. 가정도 민족도 국가도 모든 사람들이 크고 작게 연합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인간의 타락은 그 즉시 인간의 연합이 깨진 현상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께서 네가 그 나무 열매를 먹었느냐 물어 보시니, 남자가 하나님 당신이 나에게 짝지어준 여자가 줘서 먹었다고 핑계를 댑니다. 타락한 인간은 자기 살겠다고 자신의 살중에 살이요 뼈중에 뼈라고까지 고백하며 좋아했던 부인에게 손가락질 하면서 저 여자의 잘못이며, 하나님 당신이 저 여자를 짝지워 주지 않았냐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현대에서도 남편과 부인이 함께 잘못을 했을 때 남편이 내 아내 때문에 그랬다고 핑계를 댄다면 그 부부의 연합은 깨져가거나 이미 깨졌다고 봐도 될 것입니다. “당신 때문이야, 너때문에 일이 이렇게 되었잖아, 널 만나고 나서는 되는 일이 하나도 없어, 너랑 결혼하는게 아니였어” 의 첫번째 싹은 이렇게 성경 맨 첫 부분, 인간의 타락 직후에 돋아 났습니다.
게다가 하나님 당신이 나에게 짝지어준 이라는 말은 사실 하나님께 그 타락의 원인을 돌리는 말입니다. 지금도 이 선악과를 먹어 인간이 타락을 결정한 일을 하나님께 돌려서, 왜 그딴것을 만들어 인간이 타락할 길을 열어두었냐고 하나님을 탓하는 우리의 속성과 꼭같습니다.
이에 여자는 뱀이 꾀어서 먹었다고 뱀의 탓을 합니다. 그러나 선택은 내가 한 것입니다.
훨씬 더 많은 유혹이 있는 현대를 사는 사람들 머릿속에도 쉴새 없이 죄되고 추악한 생각들이 스쳐 지나갑니다. 물질적인 풍요로움을 보고 욕심을 낸다거나 이성을 보고 성욕을 품는 것 등의 순간적인 충동이 생긴다고 해도, 그 충동을 따라 범죄한다면 그것은 내 잘못이고 내가 선택한 것이지, 머릿속에 그 “충동” 잘못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법정에 서서 그런 변명을 한다면 판사도 법으로 질서를 잡겠다는 “충동”이 생겨 감옥에 집어 넣을 것입니다. 법은 벌을 주는 제도를 통해 나쁜 충동이 억제되도록 개발되어 왔기 때문입니다. 충동을 탓할 수 없습니다. 결국 그 충동을 선택한 내가 모든 책임을 져야 합니다.
- 핑계와 분쟁
남편은 아내와 하나님에게, 아내는 뱀에게 “핑계”를 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남자는 부인과의 관계를 깰 목적으로 부인 잘못으로 돌리지는 않습니다. 관계가 깨지면 고통이 발생하고 고통은 타락한 인간이라도 좋을리 없습니다. 사람이 자기도 모르게 핑계를 대는 것은 자신의 “결함”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입니다.
잘못을 인정하면 인간은 자신이 실수가 가능한 결함이 있는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는 샘입니다. 이는 바꿔 말하면 자신이 하나님이 아니라고 인정하는 것과 같습니다. 물론 인간은 내가 ‘하나님이 되어야 하는데 사과하면 내가 완벽한 하나님이 될 수 없으니까 안할꺼야’ 라고 직접적으로 생각하진 않습니다. 그러나 무의식으로부터 자신의 실수나 결함을 인정하기 무척 꺼려하는 본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유혹에 넘어가 잘못을 저질렀더라도 그 원인을 제공한 대상을 비난하는 것으로 핑계를 대고 자신을 합리화하면 나의 무결성을 계속 주장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럼 내 안에 자리잡은 하나님처럼 완벽하고 싶은 욕망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습니다.
책임을 전가하는 것으로 자신의 완전함은 지키고 상대방은 결함이 있는 존재로 만들려고 드는 것을, 똑같은 마음을 품은 상대방이 용납할 수 없습니다. 서로 옳다고, 상대방은 틀렸다고 주장하며 양보하지 않으면 분쟁은 거의 필연적으로 발생됩니다. 인간 사이의 모든 분쟁의 근원은 이처럼 스스로 하나님이 되려는 인간의 강렬한 욕망에서 출발합니다.
가장 가깝고 사랑해야 하는 부부와 가족의 연합을 깰 싹이 틔였다는 것은, 장차 가정이 처참하게 깨어지는 것을 경험할 수많은 부부와 자녀들을 생각하면 끔찍한 일입니다. 인터넷 게시판에 공개되어 있는 배우자로부터 혹은 부모에게 폭력이나 성적으로 학대받은 사람들의 수많은 고백글 들중 하나만 잠시 읽어봐도 너무나 막막하고 암울한 고통이 그대로 느껴질 만큼 인간의 타락은 가정 안에서 조차 끔찍하고 폭넓게 일어나고 있는 것이 실제 현실입니다.
이제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욕망을 버리지 않는한 지속적으로 그 욕망은 자라날 것입니다. 이는 보이지는 않지만 지속적으로 유혹하는 영적인 존재가 실제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타락이 점점 더 깊어지고 스스로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는 욕망이 강해질수록 더 많은 가정이 깨져갈 것입니다.
이후에 등장하는 형이 친 동생을 죽인 인류의 최초의 살인사건도 가장 가까워야 할 가족의 연합이 깨져서 생긴것으로, 인류는 이제 서로 연합하고 화합하는 것이 근본적으로 무척 힘든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것으로 인간이 하나님을 닮은 형상 중 두번째, “연합하는 존재”도 깨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뱀에게 배로 기어다니고 흙을 먹을 것이라는 정도의 벌을 주시지만, 그 뒷 문장은 사실 뱀 넘어에 있는 유혹의 근원, 악의 영적인 인격, 사탄에게 한 선언입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자손을 여자의 자손과 원수가 되게 하겠다. 여자의 자손은 너의 머리를 상하게 하고, 너는 여자의 자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다. (창세기 3장 15절)
이 말씀은 마치 ‘니가 지금은 내가 지극히 사랑하는 사람을 유혹하고 타락시킨뒤, 그를 볼모로 잡고 그 뒤에 숨어 이 땅에 파괴와 허무를 가져오려고 하지만, 내가 여자와 너 사탄의, 죽음으로 향할 연합을 방해하겠다. 이제 나의 영이 물질세계의 육체를 입고 여자의 후손, 인간의 몸으로 나타나 너의 머리를 밟아 승리할 것이며, 너는 그 예수의 발 뒤꿈치를 상하게 하고 서로 원수가 될 것이다’ 라는 선언처럼 들립니다.
사랑하기 위해 창조하신 사람을 빼앗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다시 찾아 오시겠다는, 앞으로 드러날 위대한 사랑과 승리의 예언이기도 합니다.
- 세번째 형상의 깨어짐
마지막 타락한 인간의 증상은 하나님을 닮은 다스림도 깨졌다는 것입니다.
여자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에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할 것이니, 너는 고통을 겪으며 자식을 낳을 것이다. 네가 남편을 지배하려고 해도 남편이 너를 다스릴 것이다." 남자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가 아내의 말을 듣고서, 내가 너에게 먹지 말라고 한 그 나무의 열매를 먹었으니, 이제, 땅이 너 때문에 저주를 받을 것이다. 너는, 죽는 날까지 수고를 하여야만, 땅에서 나는 것을 먹을 수 있을 것이다. 땅은 너에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다. 너는 들에서 자라는 푸성귀를 먹을 것이다. 너는 흙에서 나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 때까지, 너는 얼굴에 땀을 흘려야 낟알을 먹을 수 있을 것이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아담은 자기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고 하였다. 그가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의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창세기 3장16~20절)
- 결과와 조치: 고통과 죽음
하나님께서 인간과 우주의 창조자시라면, 피조물인 인간의 입장에서 창조자는 생명의 근원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자신에게 생명을 주고, 그 생명을 유지시켜주는 창조자 하나님을 거부하면 사실 인간은 그 순간부터 죽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이유에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그 즉시 죽게 하진 않으시고 어느정도 시간을 주시지만, 이제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죽어가기 시작합니다. 생명의 영을 떠나 죽음의 영을 선택한 “결과”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수명이 있는 동안에도 끝없이 타락하지 못하게 “조치”를 취하실 필요가 있습니다. 여전히 자유의지가 있는 인간은 사람들을 대량학살 할 수 있을 정도로 잔인하고 악한 존재가 되기로 선택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일본제국이나 히틀러처럼 수백만명을 학살하고, 김정일과 같이 자국민 수백만명을 굶겨 죽였던 사람도 인간의 한계, 죽음에 반드시 다다르게 됩니다. 세계 1차 대전에선 도합 3천7백만명, 세계 2차 대전중 사망한 군인과 민간인이 6년간 7천5백만명 가량으로 추산되고 있으니 (Wikipedia, “World War I”, “World War II”), 이런 악하기 그지없는 인간들이 죽지않고 계속 살았다면 인류는 벌써 멸망했을 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인간이 허락받은 길어야 120여년의 시간 속에서 여자는 출산과 양육, 남편과의 관계에서 고난을 겪으며, 남자도 죽기까지 땀흘리며 수고하여야 겨우 먹고 살게된 일도, 인간 스스로 풍성히 공급해 주실 수 있는 하나님과의 단절을 선택한 “결과”이기도 하지만, 이런 고난들을 허락하셔서 인간이 끝없이 타락하는 것을 막으셔야 했던 하나님의 “조치”이기도 합니다.
타락한 인간의 욕망은 통제 받지 못하면 만족을 모르고 끝없이 자라날 수 있습니다. 영적인 세계를 모르는 세상도 이런 타락한 인간의 속성을 이해하고 여러가지 법규를 통해서 타락을 제한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고통과 죽음”을 통해서 인간 타락의 한계를 정하시게 됩니다.
이제부터 인간이 겪게될 이 고난과 죽음은 창세기 3장 마지막 부분에 낙원으로부터 쫓겨나고 생명나무로의 접근이 완전히 봉쇄된 상징적 모습으로부터 그려지기 시작합니다.
- 저주받은 미래가 보이심
“... 이제, 땅이 너 때문에 저주를 받을 것이다... ” (창세기 3:17 중)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자유의지로 하나님을 거부한 것에 화가나서 이제 저주를 하시는 것일까요? 사랑의 하나님이시라면서 왜 어울리지 않는 저주라는 단어를 쓰신 걸까요?
마치 하나님께서 직접 저주를 내리시겠다는 말로 들리기 쉬운 이 말씀은, 미래가 보이시는 하나님의 “전지”한 속성 때문에 발생하기 쉬운 오해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신 분이십니다. 시간과 공간에 묶여있는 우리는 볼 수 없는 과거와 미래를 늘 현재와 같이 보실 수 있습니다. 이 때문에 하나님께선 모든 것을 다 아시는 “전지” omniscience 하신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미래에 일어날 일을 모두 아시기에, 우리의 모든 미래도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일까요?
여기서 많은 사람들이 혼란스러워 하거나 잘못된 세계관을 형성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어떤 종교에서는 모든 사람의 운명이 이미 다 결정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곳도 있습니다. 내가 약속된 시간에 늦게 나타난것도 하나님께서 이미 다 정하신 일이며, 당신이 지갑을 도둑 맞은 것도 당신의 정해진 운명에 이미 포함되어 있다는 세계관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미래의 모든 일까지도 이미 다 아시는 전지한 분이시라는 것과, 인간의 자유의지가 서로 공존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 세계관에선 절대적이신 하나님을 수정할 수는 없으니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없다고 주장하고 이성을 무시한체 억지로 믿어야 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여전히 자유의지를 실제로 가지고 있있습니다. 지금 현재 내가 나의 왼손을 들어 올릴것인지 오른손을 들어 올릴 것인지, 택시를 탈 것인지 지하철을 탈 것인지, 공부를 하며 미래를 준비할 것인지 신나게 놀며 당장의 재미를 추구할 것인지는, 나의 의지로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연속된 자유의지를 실행해서 인간은 마치 영화의 감독이자 주인공처럼 자신의 삶을 자신이 선택해 나갈 수 있습니다.
반면 하나님께서는 시간에 얽매여 있는 분이 아니시기에 이 영화의 끝을 원하실때 언제든지 보실 수 있습니다. 또한 전능하시기에 한 개인의 삶이나 인류의 운명이라는 영화에 원하시면 얼마든지 개입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힘과 능력으로 찾은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라고 할 수 없기에 안하실 뿐입니다. 왕자가 거지로 분장해서, 자신에게 따뜻하게 대한 처녀를 왕비로 맞는 이야기나, 대기업 회장의 아들이 평사원으로 일하며 동료 중에 진정한 사랑을 만나는 이야기들 속의 원리는 모두 마찬가지 입니다. 돈이나 신분이나 능력이라는 요소가 진정한 사랑을 찾는데 방해가 되지 않도록 숨기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자신의 거대한 능력과 만물을 다스리시는 권세를 자주 드러내셔서 그걸 보고 하나님을 사랑하기로 결정한다면 그건 진정한 사랑이라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전지하시더라고 인간을 속박하시지 않고 온전한 자유속에 두시는 것은 “진정한 사랑”이라는 창조의 목적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전지에 포함된 “미리 아심”과 와 인간의 자유의지는 완전하게 공존할 수 밖에 없는 두 개념이 됩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을 이끌고 약속한 땅으로 인도하시면서 많은 기적을 보여주실때도 있었고 예수님도 사람으로 이땅에 태어나신 후 많은 기적으로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내쫓고 하십니다. 그러나 그 많은 기적들 이후에도 인간들은 하나님을 금방 잊거나 거부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두가지 입니다.
첫번째는 그 기적들이 역설적으로 하나님께서 인간의 자유의지를 침범하지 않는 선에서만 개입하셨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기적을 보여 주시는 것으로는 인격이 있는 인간을 진심으로 하나님께로 돌리지 못함을, 진정한 사랑은 기적으로는 살 수 없음을 인류에게 증명해 보여주신 것입니다.
둘째는 보이지 않지만 인간을 지속적으로 유혹하고 하나님을 거부하는 마음을 끊임없이 불러 일으키는 존재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류의 역사에 전혀 개입하지 않으시고 가만 있으셨다면 모르겠으나 꽤 강력한 기적들을 수십년 동안 집중해서, 수백년 동안 간혈적으로 보여 주셨고, 또한 끊임없이 돌아오라는 메시지를 전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민족의 마음은 왜 하나님쪽으로 기울지 않고 점점 더 심각한 타락으로 흘러갈까요? 인류의 타락은 어떤 힘으로 지속되는 것일까요?
이제 이스라엘로 대표되는 인류를 끊임없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이끄는 영적인 존재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혹시 느껴지시는지 모르겠습니다.
- 탄식
“... 이제, 땅이 너 때문에 저주를 받을 것이다... ” (창세기 3:17 중)
그래서 이 저주처럼 들리는 하나님의 말씀은 사실 미래가 보이시는 하나님의 “탄식”입니다.
인간의 타락으로 물질세계 전체가 이런 운명에 처한 이유는 인간이 물질세계 전체를 다스리는 지위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타락해서 악을 이땅에 가져오면, 땅은 그 다스리는 자에게 악한 영향을 받습니다. 때문에 인간의 타락 자체가 땅에게는 이미 저주입니다.
남자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가 아내의 말을 듣고서, 내가 너에게 먹지 말라고 한 그 나무의 열매를 먹었으니, 이제, 땅이 너 때문에 저주를 받을 것이다. 너는, 죽는 날까지 수고를 하여야만, 땅에서 나는 것을 먹을 수 있을 것이다.” (창세기 3:17)
따라서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한 열매를 먹었으니 내가 화가나서 이제 저주를 내리고, 내가 땅을 파괴할 것이다 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너의 그 스스로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하는 강렬한 욕망 때문에, 그 안에서 욕심이 자라나 땅을 파괴하기 때문에, 땅이 피를 흘리며 고통받을 것이다라는 미래를 현재처럼 보시는 하나님의 탄식입니다.
미국에서 16세에 막 운전을 시작하는 자녀에게 절대로 술을 마셔서도 안되며, 술을 마시고 운전을 하는 것은 더더욱 안된다, 그런일을 벌이면, 사람을 죽일 수도 있고, 인생이 끔찍하게 망가진다라고 말하는 것은 부모가 자식을 저주하는 것이 아닙니다. 일종의 미래가 보이기 때문이며 그렇게 인생을 망친 안타까운 젊은이들을 많이 알기에 하시는 이야기입니다. 절대로 그렇게 되길 바라는 부모는 없을 것입니다.
한국에서 어린 딸이 못된 양아치 남자를 데리고 와서 결혼시켜 달라고 떼를 쓰면, 대부분의 한국 부모들은 강제로 딸을 남자로 부터 떼어놓고, 계속 그놈을 만나려 하면 다리몽뎅이를 분질르고 머리릴 빡빡깎아 버릴 것이고, 옷을 있는데로 찢어 버릴 것이라고 소리를 지를 것입니다. 그러나 이 부모님을 보고 딸의 다리를 분지르고 머리를 빡빡깎기 위해서 딸의 실수를 기다린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사실 성경에는 하나님의 율법을 어겼을때 받을 끔찍한 처벌들이 꽤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구약 성경에 그렇게 많은 저주처럼 보이는 이야기를 하시는 이유가 실제로 그렇게 되길 바래서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정말 모자란 생각입니다. 그리고 사랑을 전혀 모르는 것입니다. 사람을 벌주시고 죽이시는 것이 진정한 하나님의 목적이셨다면 조용히 지쳐보시다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을때 하나님의 법대로 처리해 버리시면 됩니다. 성경에 죄의 댓가는 사망이라고 기록해 두셨으니 다 죽이시면 됩니다 (로마서 6:23 참조). 그렇나 그런분을 공정하시고 정확하신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을 지는 모르겠으나,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하긴 힘들 것입니다.
어린 딸이 술먹고 운전해서 인생이 망가지길 바라는 부모라서 그런 저주를 했다고 생각하거나, 딸의 다리를 분지르는 날만을 기다리는 한국 부모로 보는 것은 정상적인 생각이 기능이 많이 망가졌다 볼 수 있는 것 처럼, 구약 성경에 써있는 하나님의 무서운 경고가 타락한 못된 인간들에게 내려지길 내심 은근히 기대하는 마음은 어떤 이유에서 상당히 병든 마음입니다. 이 부분은 나중에 종교적 우월감과 율법주의에서 다시 생각해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저주를 퍼부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타락한 인간이 겪게될 고난의 미래가 보이시기에 보이는 것을 이야기하시는 것이고, 그렇게 미리 경고 하시는 이유는 절대로 그렇게 되지 않길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 찾아오는 고난과 결핍
“땅은 너에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다. 너는 들에서 자라는 푸성귀를 먹을 것이다.” (창세기 3장 18절)
이제 인간은 아름답게 땅을 활용하고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욕망과 이득 때문에 자연을 파괴하고 그 파괴된 자연에 의한 피해를 고스란히 돌려받고 있습니다.
산림을 파괴하고 무분별한 자원의 낭비로 인해 오존층이 파괴되고 온도가 올라가고 해수면이 높아지고 기상 이변이 속출하고 지진과 쓰나미와 태풍과 사막화와 한파가 몰아 칩니다. 땅속에서 수도 없이 핵폭탄 실험을 해서 지층이 불안정해 지고, 핵폐기물을 수도 없이 강에 버려 이제는 사람이 십오분만 서 있어도 그자리에서 바로 죽을 수 있는 죽음의 호수가 타락한 인간에 의해 생성되었습니다. 원유를 옮기던 배에서 기름이 유출되거나 해저 유전이 새어 나와 어마어마한 넓이의 바다가 오염되어 생물들이 몰살 당하기도 합니다. 사금을 캐겠다고 아마존의 산을 깎아 울창한 산림이 줄어들고, 현재의 속도로 바다 물고기를 마구 잡아간다면 40여년 뒤에는 바다 생물 전체가 멸종에 가까워질 정도로 (Documentary “The End of the Line”, 2009) 무분별하게 자원을 소비하고 있습니다.
수천년에 걸친 인간의 욕심과 욕망이 물질세계를 지속적으로 파괴해 왔고, 이제는 그 속도가 무서울 정도로 빨라지고 있습니다. 인간이 다스리게 되어있던 이 땅은 이제 상처입어 성난 자연이 되어 인간에게 그 상처를 그대로 되돌려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인간의 욕망을 지속적으로 부추겨 왔던 사탄은 이제 이런 자연의 무서운 결과가 나타날때 마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지게 내버려 두시느냐는 오히려 그 원망을 하나님께 돌려 버리거나 그렇기에 신은 죽었다,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펼치며 큰 공감을 얻어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 질수록 파괴의 속도는 거칠것 없이 더욱 빨라집니다. 하나님이 없고, 죽은 뒤 심판도 없다면, 인간은 욕망을 참을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나만 잘 먹고 잘 살면 된다고 극도로 이기적이 되어도 전혀 문제 없어 보입니다. 타락한 인간이 저주 그 자체가 되어버린 이땅은 정말로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고 있고, 냉혹하고 잔인한 경쟁에서 뒤쳐진 사람들은 들에서 자라는 푸성귀도 못먹어 죽어가고 있습니다.
영적인 존재인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처럼 되기위해 대신 선택한 사탄의 영과 소통하고 반응할수록 이땅에는 이처럼 악이 들어와 퍼지게 됩니다.
이제 사람은 하나님 닮은 형상, 하나님처럼 사랑과 섬김으로, 정의와 공정함과, 인자와 온유함으로 세상을 다스리는 “하나님 닮은 다스림”도 깨졌습니다.
이 짧은 성경 구절 창세기 3장 6절에서 20절 안에 모습들을 살펴보면, 하나님을 닮은 인간의 세가지 형상이 이미 모두 깨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은 이제 하나님의 영도 없고, 하나님의 연합을 닮은 사람 사이의 아름다운 연합도 깨졌으며, 하나님 닮은 다스림이 아닌 잔인하고 이기적인 존재의 파괴와 군림을 계속해서 보여 줄 것입니다.
아담은 자기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고 하였다. 그가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의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창세기 3:20)
이 인간의 타락과 하나님의 긴 탄식이 나온 뒤에 아담이 부인의 이름을 하와라고 짓는 장면은, 인간이 타락 이전에 본래 어떤 존재였는지 쓸쓸하게 알려주는 구절일 뿐더러, 앞으로 하나님의 영이 물질세계에 육체를 덧입고 여자의 후손으로 나타나 다시 모든 생명있는 것의 근원이 될 것이라는 예언의 이중적인 암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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