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선악과와 자유의지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려고 만든 사람과 세상이라면 왜 우리는 꽤 끔찍한 뉴스들은 거의 매일 접하게 될까요?
하나님께서 존재 하신다면 도대체 왜 이런 일들이 벌어지게 놔두시며, 인간은 어쩌다가 이런 끔찍한 일도 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을까요? 그 원인을 찾아 보기 위해서 하나님과 태초의 인간의 관계를 좀더 자세하게 살펴봐야 할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과 진정한 사랑을 하기 원하신다면 반드시 주셔야 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자유의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내가 너를 사랑한다’라고 하셨을때, 사람이 그 사랑을 무조건 받아드릴 수 밖에 없다면 사실 사람은 선택권이 없는 로보트나 마찬가지 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기계와 같은 사람들을 가득 만들어 자신을 사랑하는 것처럼 조종하신다 한들 그건 진정한 사랑도 영광도 아닌 매우 쓸쓸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가짜 사랑을 위해서 세상을 창조하신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신의 마음을 주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을 사람에게 주어 사랑을 표현하셨다면, 사람은 이 하나님의 영을 거부 할 수 있어야 자유의지가 성립됩니다. 따라서 타락 이전의 태초의 사람에게 자유의지가 있었다는 이야기는, 이 받은 하나님의 영을 거부 할 수 있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영을 거부하기로 결정했다면 이것을 몸으로 표현해서 확정하는 장치가 바로 선악과입니다.
주 하나님은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열매를 맺는 온갖 나무를 땅에서 자라게 하시고, 동산 한가운데는 생명나무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자라게 하셨다. (창세기 2:9)
주 하나님이 사람에게 명하셨다.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는, 네가 먹고 싶은 대로 먹어라.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만은 먹어서는 안 된다.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는 반드시 죽는다." (창세기 2:16~17)
성경의 내용 중에 가장 많은 논란을 일으키는 내용이 아마 이 선악과 이야기가 아닐까 합니다. 많은 모태신앙의 자녀들이 자신의 믿음에 의심을 품게 하고, 이성과 논리를 중시하는 현대인들에게 성경이 유대민족에게 내려오는 신화적 허구라고 여기게 만든 내용, 그 선악과 이야기를 살펴보겠습니다.
- 선악과의 첫번째 의미: 자유의지 성립
무균실에서는 감기에 걸릴 수 없는 법입니다. 사람에게 자유의지가 성립하려면 실수나 잘못을 할 가능성이 열려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독특하게 어떤 나무를 정하시고 다른 것은 다 괜찮으나 이 나무 열매만은 먹지 않아야 한다, 먹으면 반드시 죽는다라고 명령 하셨습니다. 바로 선악과 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 입니다.
하나님께서 만약 인간에게 ‘달을 파괴하지 말아라, 그리하면 반드시 죽는다’ 이렇게 이야기 하셨다면 그것으로 자유의지가 성립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현대의 발달된 무기체계로도 달을 파괴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태초의 사람에게 그런 말을 하셨다고 한들 그들은 그런 능력이 없어, 그것을 지켰다고 해도 자유의지라고 말하기 힘듭니다.
하나님께서 만약 ‘재채기를 하지 마라 그리하면 반드시 죽는다’ 이렇게 말씀하셨다면 그것으로 자유의지가 성립 되었을까요? 아니면 주변에 다른 먹을 것이 없고 선악과가 유일한 먹을 거리였다면 자유의지가 성립 되었을까요? 이런류의 경고나 명령은 자신도 어쩔 수 없이 어길 가능성이 높아서 이를 통해 자유의지가 성립되기 힘듭니다.
자유의지가 성립되려면 반드시 인간이 원하면 어길 수 있고, 원하지 않으면 우연이라도 어길 수 없는 어떤 행동이 필요합니다.
우연히 뭔가를 먹을 수는 없습니다. 무엇인가를 먹으려면 반드시 생각하고 결정해서 행동해야 합니다. 보는 것은 우연히라도 볼 수 있고, 듣는 것도 원치 않아도 들을 수 있고, 잡거나 만지는 것 역시 실수로 그리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무엇인가를 먹으려면 먹을 수 있는 음식인지 판단해야 하고, 먹고 싶다는 생각도 들어야 하고, 가지고 와서 씹으며 맛을 봐야 하고, 삼켜서 먹어야 합니다. 삼중, 사중의 판단과 안전장치가 있는 행동입니다. 따라서 몸으로 하는 기본적인 행위들 중에 가장 확실한 의도를 가져야 할 수 있는 행동이 이 “먹는것" 입니다.
태초의 사람이 아직 문자나 종이, 펜을 만들기 전이므로 하나님께서는 몸으로 할 수 있는 기본적인 행위들 중에 가장 안전한 먹는 행위로 현대의 서명을 대체할 방법을 정하신 것입니다. 만일 인간이 하나님의 영을 거부하기로 결정했다면 선악과를 먹음으로 그 결정을 확정해서 보여주면 됩니다. 따라서 선악과를 먹는 행위는 계약서의 서명과 같습니다.
다른 하나의 문제가 더 있습니다. 사람이 선악과를 봐도 전혀 먹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다면 어떨까요?
사람에게 선악과가 마치 돌맹이와 같이, 먹고 싶은 욕구가 전혀 들지 않는다면 이 경우 역시 자유의지가 성립하지 않습니다. 선악과를 먹고 싶은 생각도 들지만 먹지 않는 상태가 진정한 자유의지로 이 약속을 지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하셨다’와 ‘선악과를 먹어보고 싶다’는 두가지 아이디어를 다 머릿속에 떠올는 것이 가능해야 비로서 자유의지가 성립됩니다. 선악과를 먹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께끔 하는 것이 “유혹”입니다.
‘먹지말라고 하신 선악과를 먹고 싶다’ 는 생각으로 유혹하는 존재가 있습니다. 바로 “사탄”입니다. 사탄은 사람을 유혹해서 선악과를 먹어보고 싶은 생각을 할 수 있게 해서 자유의지의 기본 조건 ‘두가지 선택’ 을 성립시킵니다.
사실 성경에는 사탄이 왜, 언제, 어떻게 생겨났는지 그 기원을 글자 그대로 설명해 주는 부분은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께 대항하겠다, 하나님만큼 높아 지겠다라고 선언했던 역사상 한 국가의 교만한 고백을 미루어 이것이 하나님의 반대 세력, 유혹을 일으키는 원인, 사탄의 마음이겠다 미루어 짐작해 볼 수는 있습니다.
네가 평소에 늘 장담하더니 '내가 가장 높은 하늘로 올라가겠다. 하나님의 별들보다 더 높은 곳에 나의 보좌를 두고, 저 멀리 북쪽 끝에 있는 산 위에, 신들이 모여 있는 그 산 위에 자리잡고 앉겠다. 내가 저 구름 위에 올라가서, 가장 높으신 분과 같아지겠다' 하더니 (이사야 14:13~14)
유혹하는 존재가 없으면 여전히 자유의지는 성립할 수 없습니다. 이 사탄이라는 존재는 역설적으로 하나님께서 진정한 사랑을 찾으시는데 반드시 필요한 자유의지를 성립시켜주는 하나의 요건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전능하시다면서 왜 악을 아직 용납하시는가? 혹은 왜 아직 사탄을 그냥 놔두시는가? 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가 여기 있습니다. 유혹은 자유의지가 성립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요소입니다.
- 선악과를 통해 드러나는 “선”과 “악”
창세기에 어떠한 자세한 설명도 없이 갑자기 등장하는 “사탄”이나, 사탄의 속성 “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경에 나타난 작은 힌트들과 지금까지 쌓아온 하나님의 사랑과 창조의 속성을 토대로 주의 깊은 논리적 이해를 시도해 봐야 합니다.
물론 이 사탄이나 악에 대한 올바른 정의를 세우지 않아도 예수님과 구원에 대한 큰 줄기를 이해하는 데는 큰 무리가 생기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미 그 큰 줄기가 믿어지는 믿음이 생긴 후에 어떻게하면 선과 악을 구분하여 성도로서 잘 살아가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서는 꼭 필요한 이해입니다. 이 글은 복음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려고 시작한 글이므로 이 과정을 생략하지 않고 좀더 깊게 들어가 보겠습니다.
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어둠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물 위에 움직이고 계셨다. 3.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빛이 생겨라" 하시니, 빛이 생겼다. (창세기 1:1~3)
하나님께서 천지, 하늘과 땅, the heavens and the earth 를 창조하셨음이 성경의 제일 첫 문장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하늘은 지금 지구에서 바라보는 하늘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을 느낄 수 있는 영적인 세계까지 품은 넓은 개념이고, 땅도 지구의 표면이라기 보다는 물질세계 전체인 우주라고 보는 것이 옳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영적인세계와 물질세계를 포함한 존재하는 모든 세계를 창조하셨다는 선언입니다. 이 두 부분에 대해서는 앞서 이미 생각해 보았으니 그 다음 내용에 주목해 보겠습니다.
창세기 1장 3절의 “빛이 생겨라” 라는 하나님의 우주 창조 명령 이전에 이상한 단어들이 등장합니다. 바로 2절의 “혼돈”과 “공허”와 “어둠”입니다. 이러한 속성은 하나님의 사랑과 창조에 정확하게 반대되는 개념입니다. 이 혼돈과 공허와 어두움을 좀더 자세하게 살펴보겠습니다.
- 사랑과 공허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어둠이 깊음 위에 있고, (창세기 1:2 중)
창조란 없던 것이 생겨서 가치를 가지게 되는 상태입니다. 아빠 생일날 아이가 삐뚤빼뚤한 글씨와 그림으로 생일축하 카드를 만든다면, 아빠에 대한 아이의 사랑이 표현된것, 아주 작은 수준이지만 창조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 카드가 되어준 종이 한장과 크레파스는 이런 생일 카드라는 창조의 결과물이 되기 전에는 아빠가 감동할 만한 가치를 전혀 가지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아이의 사랑이 카드라는 형태로 창조되어 표현되면서 단순히 종이위에 크레파스로 그려진 엉성한 그림 이상의 가치가 생겨난 것입니다.
아이가 아빠에게 카드를 만들어 주지 않았다면, 아빠와 엄마가 희생과 사랑과 보살핌 등의 수 많은 가치를 쏟아 부우며 아이를 낳아 기르지 않았다면, 아빠와 엄마가 서로 사랑하지 않았다면, 그 아빠와 엄마가 태어나지 않았다면, 이런 훌륭한 가치들은 창조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창조가 일어나지 않은 상태, 그래서 사랑할 것이 없는 상태, 그래서 아무 가치도 의미도 없는 상태가 “공허”입니다.
사랑이 필연적으로 창조를 가지고 온다면, 사랑하지 않아서 창조가 되지 않은 상태는 지극한 공허함을 필연적으로 가져오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은 아무런 사랑도 받지 못하거나, 무엇도 사랑하지 않아서 아무런 가치도 만들어 내지 못하면 극심한 공허감에 시달리게 됩니다.
사랑하지 않아 창조되지 않음, 그래서 가치나 의미가 없음이 “공허”입니다.
- 질서와 혼돈
무엇인가가 창조되었다고 해도 질서를 가지지 않으면 그역시 가치를 가지기 힘듭니다.
맛있는 케이크를 만들 수 있는 모든 재료들을 가지고 있다고 하나, 요리의 순서를 따라 목적을 가지고 질서있게 조리되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곱게빤 밀가루와 계란과 크림과 소금과 설탕이 그냥 균등하게 섞여 있는 상태를 보고 먹고 싶다거나 좋아한다거나 하는 가치를 가진 상태로 생각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수소와, 산소와, 탄소와 철등이 만들어져서 존재한다고 해도, 지금 우주와 같은 아름다움과 자연의 질서와 우리가 신뢰할 만한 규칙적인 법칙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래서 그런 기본 물질들이 아름다운 자연으로, 멋지고 광활한 땅과, 푸르른 하늘의 공간과, 바다의 깊음과 강의 시원함과, 그안에 존재하는 다양하고 아름다운 동물과 식물로 존재 하지 않는다면 그런 물질이 어떤 의미를 가지겠으며 어떻게 그런 의미없는 물질들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우리가 의지하고 있는 자연의 법칙이 단 0.1%의 우연한 통제불가능을 가진다면 지금 우리가 누리는 모든 평화는 단번에 깨지고 혼돈으로 빠져들 것입니다. 예를 들어 차를 운전하다가 멈추는 브레이크 기능이 0.1% 확률로 오작동을 일으킨다면 이 세상은 당장 굉장한 혼란을 경험할 것입니다. 중력이나, 전자기력, 강력 약력이 단 0.001%의 확률만이라도 질서와 법칙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면, 그래서 랜덤한 결과를 가져 온다면, 지금 우리가 가진 자유와 평화는 전혀 기대할 수 없습니다.
창조된 것들이 의미를 가지게 되고, 사랑할 수 있는 무엇인가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질서 안에 있어야 합니다.
창조되었다고 하나 질서 안에 있지 않아 가치를 가진 상태로 보기 힘든 상태가 “혼돈”입니다.
- 빛과 어두움
창조된 것이 질서를 가지고 가치를 구성한다고 해도 그 목적이 선하지 못하고 악하거나, 밝고 아름답지 않은 어둡고 두려움 뿐이라면 그것도 의미가 있는 상태라 할 수 없습니다.
아이가 아빠에게 카드를 만들어 주었다고 해도, 그 카드의 내용이 사랑과 감사가 아닌, 모욕과 저주라면 그 카드는 만들어지지 않은 것만도 못할 가치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하늘의 구름이 아무리 아름답게 형성 된다고 해도, 그 구름이 끊이 없이 번개를 만들어 그 주변의 모든 동식물을 끊이 없이 파괴하고 생명을 앗아간다면, 그런 구름은 없는것만 못할 것입니다.
사람이 창조되어, 모든 동식물을 파괴하고, 주변 동료들에게 끔찍한 피해를 일으키는 어두움으로만 존재한다면, 그 사람의 의미는 어떻게 느껴야 하며, 그 사람을 어떻게 쉽게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창조가 일어나고 만들어진 물질이 질서와 규칙을 가지고 각자의 역할대로 작동한다고 해도, 그 의미와 목적이 선하지 못하고 어두움과 악함으로 향한다면, 물질세계안에 차라리 생겨나지 말것을 하는 후회를 불러 일으킬 것입니다.
목적이 선하지 못함, 의도가 바르지 못함을 “어두움” 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 창조와 반창조
그래서 이 글에서는 “혼돈과 공허와 어두움”을 창조의 반대, 반창조 Anticreation 의 속성들 이라고 정의하고 사용하려고 합니다.
사랑이 반드시 창조를 가지고 온다면, 그 창조는 질서가 있고 선한 목적을 가지고 있어야 가치가 있는 상태라고 할 것입니다. 반대로 창조되지 못해 존재하지 않는 상태 “공허”나, 창조되었다고 해도 무질서 상태 “혼돈”, 질서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그 목적이 “어두운” 상태가 반창조의 속성들이며 창조가 그런 속성들로 다시금 돌아가는 것을 반창조가 일어났다 라고 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 2장에 등장하는 “혼돈과 공허와 어두움”은 3절의 창조가 일어나지 않은 상태, 즉 완전한 반창조 상태입니다. 또한 창조되어 질서와 선한 목적을 가지고 있던 무엇인가가 완전하게 소멸되어 무로 돌아가거나, 무질서나 어두운 목적으로 변하는 것을 파괴되었다거나 타락했다고 말할 수 있고 반창조가 일어났다고도 말 할 수 있습니다.
- 선과 악
그렇다면 반창조는 무슨 힘으로 진행 될까요?
만들어져서 존재하던것이 파괴되어 혼돈이나 공허로 돌아가거나 목적이 어두운 상태로 변하는 것은 어떠한 힘이나 의도가 가해져야 되지 않을까요?
반창조가 창조의 역전 현상을 나타내는 단어라면, 이 반창조가 실제로 일어나게 작용하는 힘, 그런 방향으로 이끄는 성향을 “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랑이 창조를 가지고 오는 선한 힘이라면 창조가 다시 반창조로 흘러가려고 하는 힘도 존재할 것입니다. 이러한 힘을 선의 반대 “악”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물질세계의 창조를 가지고 왔다면, 악은 창조를 혼돈과 공허로, 즉 창조되기 이전 상태로 돌리려는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끊임없이 아름답고 선한 것들을 사랑하기 위해 창조 하신다면, 악은 앞으로 파생될 속성, 미움, 혐오와 파괴 등을 이용해 창조된 아름다움과 선한 것을 공허하고 의미없는 창조 이전 상태로 돌리려고 하는 반창조를 지속적으로 시도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창조를 통해 모든 생명의 근원이 되신다면, 악은 반창조를 통해 완전한 공허와 허무의 상태, 즉 모든 죽음의 근원이 됩니다.
- 선과 악의 인격
선이 인격을 가지지 않은 좋은 것들의 속성이라면, 이 선의 속성을 가지신 인격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격이 있으시기에 생각과 감정을 가지고 사랑하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와 대비되는 악이 공허와 혼돈과 어두움으로 이끄는 힘이라면, 사탄은 이런 악의 속성을 가진 인격체로서 생각과 감정을 가지고 사람을 유혹합니다. 혼돈, 공허, 어두움 그 자체는 인간과 대화할 수도 유혹할 수도 없습니다. 인격체인 사람을 유혹하기 위해선 사탄도 인격체여야만 합니다. 잠시 뒤에 사탄은 유혹할 목적으로 인간과 “대화”하게 됩니다.
그럼 성경상에서 인간과 대화가 가능한 사탄과 악마, 귀신과 마귀는 어떻게 다를까요?
성경을 검색해 보면 사탄과 악마는 거의 같은 의미로 쓰였음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이 광야에서 40일간 시험 받으실때 사탄 혹은 악마에게 시험 받으셨다고 두 단어가 번갈아 쓰였음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나중에 예수님께서 본격적으로 복음을 전하실때 귀신을 쫗아내는 것을 보고, 그가 바알세불이라는 큰 귀신의 힘을 빌어 작은 귀신을 쫗아낸 것이라고 사람들이 모함하자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대답하십니다.
사탄이 사탄을 쫓아내면, 스스로 갈라진 것이다. 그러면 그 나라가 어떻게 서 있겠느냐?
내가 바알세불의 힘을 빌어서 귀신을 쫓아낸다고 하면, 너희의 아들들은 누구의 힘으로 귀신을 쫓아낸다는 말이냐? 그러므로 그들이야말로 너희의 재판관이 될 것이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영을 힘입어서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에게 왔다. (마태복음 12:26~28)
이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사탄도 나라와 같은 조직이 있고, 그 세력들이 서로 싸우지 않고 함께 목적을 이루는 것을 언급하셨습니다. 귀신을 쫓아내시고는 ‘사탄이 사탄을 쫓아내면’ 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으로 봐서 귀신은 사탄과 그 이름을 바꿔불러도 상관 없을 만큼 속성이 같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느 마을에서 귀신들이 떼로 씌인 한 사람에게서 귀신들을 쫓아 돼지떼에 들어가게 허락하신 것과 다양한 장소에서 귀신을 쫓아내시는 것으로 봐서 귀신은 다수가 여러곳에 존재하는 것으로 사탄과는 조금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어 보입니다. 따라서 귀신은 여러 곳에서 사람들에게 들어가 반창조를 실제적으로 이루어 가는 “영적인 다수의 일하는 존재” 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새번역 성경을 검색해 보면 마귀라는 단어는 단 2번 등장하는데 한번은 사탄의 뜻인듯 쓰였고 다른곳에서는 귀신과 비슷한 의미로 쓰였습니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사탄과 악마와 마귀는 악의 속성을 가진 영적 인격체의 우두머리, 혹은 본체로 쓰고, 귀신은 사탄과 같은 속성을 지닌 존재지만 마치 행동대원 같이 실제로 여기저기서 그 목적을 실행하는 다수의 영적인 존재들이라고 정리해 볼 수 있겠습니다.
사탄이 반창조를 가장 효과적으로 이루는 방법이 무엇이겠습니까? 두번 생각할 것도 없이 하나님께 이땅을 다스리라는 임무를 받은 인간을 타락시키는 것입니다. 한 국가를 가장 효과적으로 망치는 방법은 다스리는 존재를 타락시키는 것입니다. 볼링의 킹핀처럼 다스리는 존재인 사람을 유혹해서 타락시키면 창조세계를 가장 효과적으로 혼란스럽게 만들고 파괴해서 이땅에 반창조를 이루어 갈 수 있습니다.
사탄과 귀신 등의 악한 영적 존재의 역할은, 사람을 유혹해서 하나님과의 약속을 깨뜨리는 쪽으로 선택하고 행동하도록 유혹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피조물인 사람과 그 생명의 근원 창조주와의 관계가 어긋나게 유도합니다. 그에 대한 결과로 창조의 선한 상태를 반창조의 악한 상태, 즉 어둡고 혼란스럽고 공허하기 그지없는 상태로 서서히 돌리는 것이 사탄의 목적입니다.
악한 영적인 존재들이 언제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는 성경에 정확하게 나타나진 않지만, 그들의 존재 이유와 목적은 이처럼 분명합니다.
- 선과 악은 대등한가?
이처럼 선과 악은 완전히 상반되는 개념으로 서로가 서로를 극명하게 대비시켜 드러나게 해 줍니다. 그렇다면 선과 악은 대등한 존재일까요?
6.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주님 앞에 섰는데, 사탄도 그들과 함께 서 있었다.
7. 주님께서 사탄에게 "어디를 갔다가 오는 길이냐?" 하고 물으셨다. 사탄은 주님께 "땅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오는 길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8. 주님께서 사탄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내 종 욥을 잘 살펴 보았느냐? 이 세상에는 그 사람만큼 흠이 없고 정직한 사람, 그렇게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을 멀리하는 사람은 없다."
9. 그러자 사탄이 주님께 아뢰었다. "욥이, 아무것도 바라는 것이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겠습니까?
10. 주님께서, 그와 그의 집과 그가 가진 모든 것을 울타리로 감싸 주시고, 그가 하는 일이면 무엇에나 복을 주셔서, 그의 소유를 온 땅에 넘치게 하지 않으셨습니까?
11. 이제라도 주님께서 손을 드셔서, 그가 가진 모든 것을 치시면, 그는 주님 앞에서 주님을 저주할 것입니다."
12. 주님께서 사탄에게 말씀하셨다. "그가 가진 모든 것을 다 네게 맡겨 보겠다. 다만, 그의 몸에는 손을 대지 말아라!" 그 때에 사탄이 주님 앞에서 물러갔다. (욥기 1:6~12)
이 성경 본문 역시 논란을 가지고 오기도 하지만 흥미롭고 재미있는 내용도 많이 들어 있습니다. 우선 어디를 갔다고 오느냐 라는 하나님의 질문에 사탄이 물질세계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오는 길이라고 대답합니다. 의미도 없고 정처도 없이 세상을 떠도는 존재가 사탄입니다. 악의 속성인 혼돈, 공허, 어둠과 너무 잘 어울리는 대답입니다. 사람들을 의미없고 공허한 일에 매달리게 해서 결국 소중한 시간을 낭비하게 하는 허무한 일들이 어디로부터 왔는지 추적해 들어갈 수 있는 좋은 실마리입니다.
둘째로 사탄은 사람을 시험하고 유혹해서 죄를 짓게 유도하고 죄를 지으면 하나님께 그가 죄를 지었다고 고발하고 그에 상응하는 형벌을 선고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10절과 11절에서 보면 사탄이 하나님께 허락 받은 후에 사람을 시험하러 떠나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마치 검사가 함정수사로 그 사람이 범죄자 임을 밝혀 내겠다는 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앞서 살펴본 마태복음 12장에 “그러므로 그들이야말로 너희의 재판관이 될 것이다.” 는 예수님의 말씀도 사탄이 검사와 비슷한 역할이 있음을 두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부분은 인간의 타락에서 더 자세하게 살펴 보겠습니다.
셋째로 12절에서 볼 수 있듯이 사탄은 하나님의 질문에 대답하고 허락과 명령을 받는 존재라는 것을 알게됩니다.
어떻게 하나님께선 선과 악의 대결구도에서 승리를 하신 걸까요?
그것은 선과 악, 창조와 반창조의 근본적 능력의 차이에 있습니다.
어떤 젊은이가 모래사장에 정교하고 아름다운 모래성을 지었다고 가정해 봅니다. 너무나도 아름다고 정교해서 해변의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구경하고 감탄하고 사진을 찍고 있습니다. 이때 한 이상한 젊은이가 나타나 무자비하게 그 모래성을 부수어 버립니다. 얼핏 보면 그 난폭함과 파괴성이 두려운 힘이나 능력 같지만 사실 그건 아무나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감탄할 만큼의 아름다운 모래성을 만들 수 있는 능력과 주먹으로 그 모래성을 부수는 일, 이 둘중에 무엇이 더 월등한 재능과 능력이 필요하겠습니까?
사람들이 감탄할 만큼의 아름다운 모래성을 쌓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없고, 마음만 먹는 다고 다 되는 일도 아니며, 파괴와는 비교할 수 없는 정도의 월등한 창조적 능력이 필요합니다. 반면에 파괴는 뭔가 파괴할 만한 창조가 먼저 있어야지만 거기에 기생해서 성립되고, 창조보다 훨씬 능력이 떨어져도 약간의 힘과 폭력성만 있으면 가능합니다.
우주가 시작되기 전,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고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인식할 존재도 없는 이 어둠과 공허함이 악한 상태라면, 하나님의 빛이 있으라라는 창조 자체가 이미 반창조의 악을 이기신 것입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니, 어둠이 그 빛을 이기지 못하였다. (요한복음 1:5)
빛과 어둠이 만나면 무슨일이 일어날까요? 그 순간 어둠은 소멸되고 빛이 이길 수 밖에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창조 자체가 이미 허무한 비창조 - 아무것도 창조되지 않은 상태의 악을 이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따라서 선과 악이 대등한 존재일 수 없고, 창조가 발생하는 순간 이미 반창조에 승리했으며, 능력에 있어서 절대적이신 하나님께서 그렇지 못한 사탄에게 명령을 내리시는 것이 어찌보면 당연한 질서입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이 사역을 막 시작하신 초기에도 귀신이 예수님을 보자마자 어쩔줄을 몰라합니다.
그 때에 회당에 악한 귀신 들린 사람이 하나 있었는데, 그가 큰소리로 이렇게 말하였다. "나사렛 사람 예수님, 왜 우리를 간섭하려 하십니까? 우리를 없애려고 오셨습니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 압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거룩한 분입니다." 예수께서 그를 꾸짖어 말씀하셨다. "입을 다물고 이 사람에게서 나가라." (마가복음 1:23~25)
이 성경 구절을 보면 귀신은 예수님이 어떤 존재이신지, 자신은 어떻게 끝날 존재인지 이미 알고 있어 보입니다. 사람이 자유의지로 하나님의 사랑을 선택하는 과정이 모두 끝나면 사람을 유혹하는 사탄의 역할도 끝나게 됩니다. 이 때문에 사탄은 하나님의 통제를 받아 사람에게 자유의지를 성립시켜주기 위해 그 유혹을 담당하는 한시적인 존재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그러나 사탄은 파괴와 죽음을 휘두르면서 여전히 자신이 하나님과 동등한 존재처럼 보이려고 온 갓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하기에 결코 만만한 존재는 아닙니다. 이런 하나님과 같아 보이려는 사탄의 속성을 “교만” 이라고 합니다.
네가 평소에 늘 장담하더니 '내가 가장 높은 하늘로 올라가겠다. 하나님의 별들보다 더 높은 곳에 나의 보좌를 두고, 저 멀리 북쪽 끝에 있는 산 위에, 신들이 모여 있는 그 산 위에 자리잡고 앉겠다. 내가 저 구름 위에 올라가서, 가장 높으신 분과 같아지겠다' 하더니 (이사야 14:13~14)
- 선악과의 두번째 의미
마지막으로 선악과에는 아주 중요하고 핵심적인 두번째 뜻이 있습니다. 인간은 이 선악과의 존재를 통해 누가 창조주이고 누가 피조물인지 깨닳게 됩니다.
주 하나님이 사람에게 명하셨다.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는, 네가 먹고 싶은 대로 먹어라.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만은 먹어서는 안 된다.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는 반드시 죽는다." (창세기 2:16~17)
선악과는 독열매 였을까요? 그래서 먹으면 죽는 것일까요? 선악과를 먹으면 반드시 죽는다는 이야기는 어떤 의미일까요?
피조물의 입장에서 창조자는 생명의 근원과 같습니다. 소설속에 등장하는 가상의 인물, 주인공들에게 소설가는 신과 같은 창조자입니다. 소설책의 주인은 소설가이고 그 안에 등장하는 다양한 인물들도 소설가로부터 창조되어진 인물들입니다. 따라서 당연히 이 소설속의 등장 인물들에게 생명을 주는 존재가 소설가이고 이 소설가가 소설을 그만 쓰기로 결정하면 그 순간 소설속의 등장 인물들은 창조된 세상에서 죽은 것과 같습니다.
도자기 입장에서 도자기를 만드는 사람 역시 창조자입니다. 도공이 원하면 필요에 따라서 도자기를 작게도 만들고 크게도 만들고 길게도 만들 수 있습니다. 도자기에게 도공이 창조자이고 생명의 근원이며 존재의 목적을 정하는 주인입니다.
이렇듯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는 생명을 창조하여 주시는 자와, 그 창조된 생명을 받아 존재 할 수 있는 자의 관계입니다. 써지고 있는 소설의 주인공이 글쓰는 작가에게 이제 글을 그만써 달라고 할 수 있다면 작가가 손을 떼는 즉시 소설의 주인공은 죽은 것과 마찬가지이며, 만들어지던 도자기로부터 도공이 손을 떼, 다시 반죽그릇으로 돌려보내면 그 빚어지던 도자기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게 됩니다.
피조물이 창조주를 거부하면 피조물은 그 즉시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선악과는 그것을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법을 정하시는 창조주시고 우리는 그것을 따라야 살 수 있는 피조물이라는 것을 인간에게 알려주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인본주의자들이 들으면 크게 반발할 내용입니다만 하나님께서 사람과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주가 맞으시다면 사실 피조물인 인간은 그런 존재 입니다. 다만 인간이 전혀 하찮은 존재가 아닐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 존재를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 이 이유 단 하나입니다. 사랑받는 사람이 이 세상 그 무엇보다 가치있는 이유는 누군가 그정도로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한복음 3:16)
- 하나님의 엄중한 경고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너에게 나의 마음을 준다, 나의 마음을 받아다오. 거부하면 안된다” 와 같이 부드럽게, 사랑의 하나님답게 이야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는 반드시 죽는다라고 꽤 냉정하고 무섭게 이야기하십니다. 왜 일까요?
만약 인간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겨 선악과를 먹고 나타나는 결과가 하나님의 마음을 거부하는 것과 실제로 인간에게 죽음이 찾아오는 것, 이 두가지라면,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함정에 빠뜨리실 의도가 아니라면 반드시 인간에게 엄중한 경고를 하셔야 합니다. 행여 그것이 좀 덜 사랑의 하나님처럼 보여지더라고 말입니다.
산골에 사는 부모님이 자녀들에게 독초를 알려줄 때, 나이스한 부모란 소리를 듣기위해 “이건 먹으면 안돼, 먹으면 내가 슬퍼져” 라고 말해주지 않습니다. 몇번이고 강조하고 무섭게 겁을 줘서라도 절대로 자녀가 먹지 못하게 엄중하게 경고합니다. 생명과 직결된 교육을 하는데 아이가 장난이라도 치며 집중하지 않는다면 자식들의 등짝을 때려서 울리는 경우가 생기더라도 절대로 우습게 여기거나 잊어버리지 못할 기억으로 남게 하기도 합니다. 부모가 자식을 협박하는 것도 미워해서도 아닙니다. 오히려 정말 진하게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의 마음일 것입니다. 만의 하나, 아니 백만분의 일의 확률로도 절대로 일어나선 안되는 일입니다. 사랑하는 자식의 생명을 가지고 장난칠 부모가 어디있겠습니까.
같은 원리입니다. “먹으면 반드시 죽는다”의 원리는 성경 전체의 무서운 하나님 이야기에 거의 모두 적용 됩니다. 성경을 읽다보면 하나님께서 너무 엄하시거나, 전혀 사랑의 하나님 같지 않으신 부분이 꽤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부분들을 잘 묵상해 보면 모두 한 민족이나 나아가 전 인류의 영원한 삶과 영원한 죽음에 관련되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 짐짓 무서워 보이는 하나님의 피조물에 대한 냉정한 경고 안에는 사실 피조물의 등짝을 때려서라도 영원한 죽음에 이르지 않게 하려는 창조주의 사랑의 담겨 있습니다.
이처럼 선악과는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드릴 것인지 거부할 것인지를 결정할 수 있게하여 자유의지를 성립시켜 주는 존재였습니다. 또한 선악과는 사람에게 먹지 말라고 명령하시는 존재, 즉 창조주를 알려주고, 자신은 피조물 인것을 깨닳게하는 역할을 합니다. 마지막으로 이 선악과를 통해 유혹하는 존재, 사탄의 실체가 드러나게 됩니다.
순서를 조금 바꿔 다시 정리해 보면, 창조주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먹으면 안된다, 반드시 죽는다 말씀하셨습니다. 선악과를 보면 먹고 싶은 생각이 들도록 유혹하는 사탄의 존재가 이제 곧 나타날 것입니다. 이 두가지 중 하나를 선택하는데 인간은 아무런 제약도 없는 완벽한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으로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자유의지 안에서 하나님과의 사랑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하거나 거부할 수 있는 진정한 사랑의 전제조건을 모두 만드셨습니다.
이제 사람은 완벽한 자유의지를 가진, 진정한 사랑이 가능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V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