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don’t have a soul, Doctor. You are a soul. You have a body, temporarily. - Walter M. Miller ‘A Caniticle For Leibowitz’
2장. 하나님과 인간
- 하나님의 사랑과 창조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창세기 1장 1절)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다면 왜 만드셨을까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는 성경의 맨 처음 이야기를 읽고, 이런 생각을 해 보는 것은 어쩌면 꽤 자연스러운 반응일 수 있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한 때 사람이 수족관을 아름답게 꾸미고 그 안에 물고기를 기르는 것처럼 하나님께선 우주에 사람을 기르시며 관상하시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적도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세상을 창조하셨는지 생각하려면 어디부터 시작해야 할까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요한복음 3장 16절 중)
어쩌면 이말은 너무나도 많이 들어서 식상 할 수도, 아니면 너무나 거대해서 어떻게 해석하고 느껴야 하는지 우리로서는 다 이해하지 못하는 말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 성경 한구절에는 하나님께서 왜 세상을 창조하셨는지의 이유부터 우리가 알아야 하는 모든 기독교 세계관이 담겨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 한구절로부터 성경의 모든 이야기와 사건들이 펼쳐졌고 그 펼쳐졌던 모든 성경의 이야기와 지혜들은 다시 모두 접혀 그 한구절을 향해 갑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이유는 하나님께서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요한1서 4장 16절 중)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알리기 위해서 쓰게 하신 책이 성경입니다. 그 성경에 이처럼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선언이 나옵니다. 사실 이외에도 성경에는 하나님의 성품이 다양하게 표현됩니다. 복을 내려 주시길 좋아하시고, 오래 참으시기도 하고, 때론 화를 내시기도 하고, 심지어는 질투하신다는 표현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곰곰히 생각해 보면 성경에 나타난 이런 다양한 하나님의 성품은 이 “사랑”이라는 단어에 모두 포함됩니다. 우리가 사랑을 해보면 그 사랑의 감정안에 기쁨과 슬픔이 함께 어울어져서 다양한 감정들이 만들어진다는 것을 알게됩니다.
하나님께서 “나는 사랑이다” 이렇게 자신을 선포하시고 어떤 시공을 초월한 곳에 홀로 고고하게 계시면서 아무것도 창조하지 않으시고 나는 사랑이다, 나는 사랑이다 이렇게 말씀하신다면 그건 너무나 허무한 말일 것입니다. 제가 어떤 여인에게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고백해 버리고, 그 뒤로 방안에 들어가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나오지도 않고 반듯하게 누워서 나는 그녀를 사랑한다, 나는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한다 해봐야 그것은 제가 바보거나 진짜 사랑을 모르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보고 싶습니다. 목소리도 듣고 싶고, 기쁘게 해줘서 웃게 만들고 싶고, 선물도 해주고 싶고, 데이트 계획도 짜게되고, 마음같아선 뭐든지 다 해주고 싶습니다. 때론 마음을 몰라줘서 싸우기도 하고, 때론 섭섭하고 가슴 아프기도 하지만, 이런 사건들과 이벤트 들이 쉴새 없이 만들어지는 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이 고백되고 받아들여지면 사랑이 커나가게 되고, 때가 되면 결실을 맺습니다. 한 가정이 꾸려지고 아이들이 태어납니다. 그 아이들은 부모의 자연스럽고 지속적인 모든 사랑을 받으며 장차 또 다른 사랑을 할 사람으로 성장해 갑니다. 사랑 때문에 이 모든 것이 창조되고 있습니다.
남녀간의 사랑이나 부모 자식간의 사랑 뿐만이 아닙니다. 자신의 일을 사랑하는 경우도 마찬가지 입니다. 요리를 사랑하는 사람은 음식을 만들게 되고, 자동차에 푹 빠진 사람은 자동차를 만들거나 멋지게 꾸미게 됩니다. 음악을 사랑하면 새로운 노래를 창조하게 되고, 자신의 일을 사랑하는 예술가들은 그림 조각 등의 미술 작품으로, 또는 연기나 춤으로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담은 무엇인가를 창조하게 됩니다. 진심으로 뭔가를 사랑하면 반드시 무엇인가가 만들어 집니다. 그렇게 사랑은 반드시 창조를 불러옵니다.
이처럼 사랑의 가장 중요한 속성은 “창조”입니다.
또한 사랑은 반드시 대상이 있어야 합니다. 아무 표현도 아무 행동도 하지 않으며 그 대상을 사랑한다 할 수 없습니다. 사랑의 대상이 없는데 “사랑한다” 거나, “사랑이다” 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이시라면 반드시 창조가 일어나야 하고 그 창조된 대상에게 반드시 사랑이 흘러가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해서 자연스러운 창조 현상이 발생되어 사랑의 대상들이 끊임없이 만들어집니다. 꽃이 피고, 나무가 자라고, 구름이 만들어졌다가 비를 내리고 흩어 지기도 하고, 동물들이 새끼를 낳고, 아이들이 태어납니다. 그리고 사랑이신 하나님에 의해 그 창조된 대상들은 지속적인 사랑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이시기에 사랑하시려고 이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을 알았고, 또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도 그 사람 안에 계십니다. (요한1서 4:16)
- 하나님 세분의 완전한 연합: 사랑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사랑”이 되셨을까요? 어떻게 사랑이라는 속성을 가지게 되셨을까요? 더 거슬러 올라가 살펴 보면, 하나님께서 한분이 아니고 세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우리의 형상을 따라서,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자. 그리고 그가,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에 사는 온갖 들짐승과 땅 위를 기어다니는 모든 길짐승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창세기 1장 26절)
성경책에 가장 먼저 나오는 창세기 1장에는 이렇게 참 흥미로운 표현이 나옵니다. “우리가 우리의 형상을 따라서 사람을 만들자.” 하나님이 “우리”라는 복수로 스스로를 표현하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스스로를 복수로 표현하신 이유는 성부, 성자, 성령 또는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 이렇게 하나님이 세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완벽한 절대신이자 유일신 사상을 가지고 있는줄 알았는데 이렇게 세분이시라니 어떻게된 일일까요? 이것에 대한 해답은 완벽한 절대신이라는 표현에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선 지식과 능력이 모자라거나 제약이 없으신 완전한 분이십니다. 만약 이런 전지전능하시고 완전한 분이 세분이시라면 이 세분이 동일하시다고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 완전하신 목적이 같다고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나 주가 할 수 없는 일이 있느냐? 다음 해 이맘때에, 내가 다시 너를 찾아오겠다. 그 때에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다. (창세기 18장 14절)
처음부터 내가 장차 일어날 일들을 예고하였고, 내가, 이미 오래 전에,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일들을 미리 알렸다. '나의 뜻이 반드시 성취될 것이며,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은 내가 반드시 이룬다'고 말하였다. (이사야 46장 10절)
나는 주다. 모든 사람을 지은 하나님이다. 내가 할 수 없는 일이 어디 있겠느냐? (예레미야 32장 27절)
예수께서 그들을 눈여겨보시고, 말씀하셨다. "사람은 이 일을 할 수 없으나, 하나님은 무슨 일이나 다 하실 수 있다." (마태복음 19장 26절)
하나님 앞에는 아무 피조물도 숨겨진 것이 없고, 모든 것이 그의 눈 앞에 벌거숭이로 드러나 있습니다. 우리는 그의 앞에 모든 것을 드러내 놓아야 합니다. (히브리서 4장 13절)
모든것을 다 알고 계시며, 불가능이 없으신 신이 세분이시라면 이러한 전지전능하심 안에서 세분은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세분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세분이 생각까지 항상 똑같으신 분들이 아니고 다른 인격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세분은 온전한 하나님의 속성을 가지고 계시지만 생각과 행동은 그 완전하시고 전지전능하심 속에서 각기 자유로우십니다. 만약 세분이 생각까지 항상 일치하시는 동일한 분이시라면, 나중에 예수님께서 이땅에 오셔서 세례를 받으실때 하늘에서 하나님의 음성으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라고 말씀하시는 장면이 이상한 장면이 됩니다.
하나님 아버지 역할로 하늘에서 음성도 들려주시고 빨리 땅으로 이동하셔서 아들로써 세례도 받으시고 사랑한다는 음성도 들으시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순종” 하셨다는 말도 세분이 다른 인격을 가지지 않으셨다면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만약 하나님 세분께서 우주를 3등분 하셔서 각자 다스리셨다면 하나님의 속성이 “독립” 이시거나, 그 안에서 끊임 없이 경쟁을 하셨다면 “경쟁” 이셨을 텐데, 우리에게 너무나도 다행스럽게 하나님 세분께서 서로 사랑하심으로 “사랑”이 되어 주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스스로를 “우리” 라고 표현하신것 처럼 세분입니다. 이 세분이 모두 완벽한 신의 속성을 가지고 계십니다. God is Three Persons in One Nature. 이 세분이 서로를 완전하게 사랑하셔서 마치 한분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은 세분이시며, 그 세분의 완벽한 연합과 화합에서 “사랑”이라는 근본적인 속성이 발생됩니다.
- 사랑의 대상: 사람과 세상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우리의 형상을 따라서,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자. (창세기 1장 26절 중)
사랑이신 하나님께서 사랑하기 위해서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이 사랑의 대상 사람을 창조하셔서 허공에 그냥 띄워 두시지 않으고 그들이 살 수 있는 아름다운 우주와 자연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제가 어떤 여인을 깊게 사랑해서 평생을 함께 하고 싶어 청혼을 했다면 함께 기거할 곳을 마련해야 합니다. 너무 사랑하지만 낮에 데이트하고 밤에는 각자의 집에서 자고 다음날 다시 만나거나, 길바닥에 사랑하는 여인을 재우는 남편은 아마 극히 드물 것입니다.
제가 그 여인을 극진하게 사랑한다면 크던 작던 최선을 다해서 집을 마련하고, 그 집을 최대한 아름답게 꾸며 주고 싶을 것입니다. 부인이 좋아하는 장미와 데이지를 뜰에 심어주고, 아침이면 아름다운 새소리를 들으며 일어날 수 있게 창틀에 새장을 달아주고, 추울때와 더울때 집 온도를 조절해서 편안하게 해주고 하는 모습들을 보면 아마 다른 사람들이 ‘저사람은 참 부인을 사랑하는구나’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자연과 우주의 그 찬란한 아름다움을 보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어떤 마음으로 사랑하고 계시는지 알 수 있게 됩니다. 위대한 자연의 아름다움을 볼 때 알 수 없는 눈물이 핑 도는 것은 아마도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사랑을 무의식 속에서 느끼기 때문은 아닐까요.
사랑하는 연인들은 서로 늘 함께 하고 싶어서 수시로 카톡이나 문자 메시지를 보냅니다. 하루에 많게 주고 받는 연인들은 수십통에서 수백통까지도 주고 받을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도 인간을 지극히 사랑하셔서 하루에도 수백, 수천통의 메시지를 보내고 계십니다. 그게 우리로서는 사랑하는 연인에게 그렇게 해주고 싶어도 하기 힘든 아름다운 사랑의 이벤트들 입니다. 빰에 부딧치는 시원한 바람, 어깨에 내려 앉은 따뜻한 햇살, 책을 읽고 싶게 만드는 시원한 나무 그늘, 열심히 움직이는 개미와, 매일 다르게 그려지는 하늘의 구름 등의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것들이 하나님의 사랑의 문자 메시지 입니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인지 현대의 사람들은 이런 창조자의 사랑의 메시지를 전혀 받지 못하는 메마른 사람들처럼 보입니다. 왜 일까요?
하나님께서 사랑의 대상으로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사랑의 대상이 머물게될 집, 우주를 창조해 주셨습니다. 이 우주를 물질세계 또는 세상이라고 불러도 좋습니다.
- 사람의 영, 육, 혼
아마 진화론적인 세계관을 가지신 분들은 이 사람 중심적이고 우주가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것과 같은 느낌의 기독교 세계관이 꽤 거스리실 수도 있습니다. 진화론의 세계관에선 사람이나 동물이나 다를바 없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어떤 진화론자는 인간과 동물의 결혼이 가능하다고까지 말한바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적 세계관에서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 위해 특별히 창조된 인격체이고 이 인격체는 영, 육, 혼 (Spirit, Body, Mind) 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실 사람의 영과 혼은 거의 붙어있어서 영혼 또는 Soul 이라고 이해해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차차 살펴보겠지만 사람의 혼은 반드시 어떤 영과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단순히 이해를 돕기위해 영과 혼으로 불리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사람은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 세계관과 인격이 있는 존재이므로 혼, Mind가 있습니다. 이 부분은 1장 세계관에서 살펴보았습니다. 또한 육체, Body를 가짐으로 해서 자신의 자유의지를 표현 하거나 행사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 Spirit 을 가진 존재로 영이신 하나님을 닮은 특별한 존재 입니다. 여기서는 인간의 육체와 영에 대해서 좀더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 사람의 몸과 물질 세계
물질세계란 눈으로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원자로 구성된 세상을 말합니다. 공기나 전파와 같이 보거나 만질 수는 없는 것들도 원자와 전자로 혹은 전기력이나 자기력이라는 늘 검증 가능한 실존하는 힘으로 구성되어 있음으로 물질세계입니다. 따라서 물질세계란 우주라고 이야기해도 좋고 세상이라고 불러도 이 글 안에서는 거의 같은 의미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인간과 창조세계를 굳이 물질세계로 만드셨을까요? 하나님과 같이 육체가 없는 그냥 인격을 가진 영적인 존재와 그런 영적 존재들만 있는 전혀 다른 종류의 세계를 창조하실 수도 있으셨을 것입니다. 물질이 없는 정신세계 같은 곳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육체가 있는 존재로 만드신 이유는 자유의지를 주시기 위해서 입니다.
제가 배가 고플때 가게에 진열된 치킨을 보고 냄새까지 맡는다면 무척 먹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아무리 배가 고파도 돈을 지불하기 전에는 먹지 않을 것입니다. 그냥 먹으면 도둑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때 저는 배가 고파서 치킨을 먹고 싶은 충동이 생겨도 그것을 먹지 않고 참고 기다리게 내 몸을 다스려서 나의 의지를 표현합니다.
머리속에 범죄를 저지르고 싶은 충동이 있어도, 아니야 그러면 안돼, 하고 머리속에서 생각을 지우고 몸이 범죄를 저지르지 못하게 다스리면 저는 범죄를 거부한 사람이 됩니다. 그러나 몸을 움직여 그 범죄의 충동에 따르면 저는 그것을 하기로 결정한 범죄자가 됩니다. 이처럼 물질로 구성된 육체는 내 생각안에서 어떤 결정을 내렸는지 밖으로 보여주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만약 사람이 육체를 가지지 않고 세상도 물질세계가 아닌 영의 상태, 혹은 정신만 있는 상태라면 유령처럼 서로 제약없이 섞이고 나뉘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치 머리속에 나쁜 생각과 좋은 생각들이 무작위로 떠오르는 것처럼 말입니다. 정신세계 안에서 이리 저리 생각들이 뒤섞이면 그것이 내 생각인지 다른 존재의 생각이 들어와서 섞인 상태인지, 그 생각을 가지고 따라갈 것인지 거부할 것인지가 무척 불분명할 것입니다.
사람이 가진 몸은 “나”라는 범위가 어디부터 어디까지인지를 확실하게 정해 줍니다. 나 이외의 다른 존재도 물질로 이루어져 있어서 “나 이외의 것들” 또는 “타인” 이라는 명확한 구분을 가집니다. 이 물질인 몸을 움직여 내가 가진 생각을 표현하고 내가 나 이외의 것들을 어떻게 대할 것인지, 타인을 어떻게 대할 것인지에 대한 생각을 몸으로 표현 할 수 있게 됩니다. 악수를 청할 수도 있고, 등을 두드려 줄 수도 있고, 바라만 볼 수도, 아예 처다도 안볼 수도, 아니면 심각하게 공격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육체를 포함한 물질세계 즉 우주는 사람에게 자유의지를 줄 수 있는 기본 토대가 될 뿐만 아니라 그 자유의지를 표현하고 확인하는데 꼭 필요한 장치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시려고 할까요? 그것은 자유의지가 있는 상태에서만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있는 기본조건, 인격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로보트처럼 만들어서 리모컨의 1번 버튼을 누르면 박수치고 찬양하고, 2번 누르면 헌금하고, 3번 누르면 사랑의 눈길을 보내게 만드셨다면, 그런 존재는 인격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인격체가 아닌 존재와 사랑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로보트를 좋아할 수는 있어도 로보트와 인격체가 서로 진정한 사랑을 한다고는 말 할 수 없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자유의지를 가진 인격체가 자발적으로 결정해서 해야만 가능해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고 그 창조된 인간이 물질세계인 우주에 육체를 가지고 존재하게끔 하신 이유는 인간이 자유의지를 가지고 스스로 사랑을 결정할 수 있게 해 주시기 위해서 입니다.
- 사람의 영
하나님은 영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사람은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 (요한복음 4장 24절)
하나님은 “영” Spirit 이십니다. 앞서 잠시 언급한 것과 같이 하나님께선 인격은 있으시지만 육체를 가지실 필요는 없습니다. 물질세계를 창조하셨으니 물질세계인 우주를 창조하기 이전에도 존재 하실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선 물질 또는 몸이 없어도 존재하시는 분이십니다. 이런 분을 “영” 이라고 합니다.
물질은 시간과 공간에 구속됩니다. 따라서 물질인 육체는 사실 제약이 많습니다. 시간의 흐름을 거스를 수 없고, 한번에 두 장소에 존재 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신 분이기에 이런 제약이 있는 육체를 굳이 가지실 필요가 없습니다. 특별한 목적이 있지 않는한 그렇습니다.
오직 그분만이 죽지 않으시고, 사람이 가까이 할 수 없는 빛 속에 계시고, 사람으로서는 본 일도 없고, 또 볼 수도 없는 분이십니다. 그분에게 존귀와 영원한 주권이 있기를 빕니다. 아멘. (디모데전서 6장 16절)
반면에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인간과 우주는 기본적으로 물질로 구성되어 있고 육체나 형태가 시간과 공간에 구속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창조주 하나님과 그가 만드신 피조물인 인간을 포함한 물질세계가 가지는 가장 근본적인 차이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육체를 가짐으로서 자유의지를 표현 할 수 있다고 했는데 하나님께서 육체가 없으시다면, 하나님은 자유의지가 없으신 것입니까?
자유의지가 인간에게 필요한 이유는 그래야 자발적인 사랑을 할 수 있고, 이는 진정한 사랑에 필수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피조물은 육체가 있어야 하나님과 사랑을 할 것인지 말 것인지, 즉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진정한 사랑이 될 것인지 아니면 그 사랑을 거부할 것인지를 스스로 결정해서 행동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심 안에서 이미 무한히 자유로우십니다. 사랑하기 위해서 세상을 창조하신 것은 세분 하나님께서 원하셔서 자유롭게 하신 일입니다. 존재 하기도 전에 누가 세상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할 수도 없고 신께 누가 뭔가를 지시할 수도 없습니다. 전지전능이라는 말 자체에 이미 완벽한 자유로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자유롭지 않고서 어떻게 전능, Omnipotence를 이야기 할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하나님께는 육체를 만들어 입으시고, 그 육체의 행동을 통해 세상을 사랑할 것인지 말것인지 보여 주실 필요가 없습니다. 세상의 존재 자체가 마치 하나님의 육체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지 않기로 결정하셨다면 세상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세상이 존재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들어 사랑하기로 결정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누구도 부탁하거나 강요할 수 없는 완벽한 하나님의 자유안에서 결정된 사항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우리의 형상을 따라서,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자. 그리고 그가,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에 사는 온갖 들짐승과 땅 위를 기어다니는 모든 길짐승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으니,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하나님이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 (창세기 1장 26~27절)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다른 물질세계 창조물과는 다른 특별한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바로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는 점입니다. 여기서 한가지 문제점이 생겼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물질로 육체를 구성하실 필요가 없으신 영이신데 사람은 육체를 가지고 있는 존재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닮았다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눈, 코, 입, 팔, 다리 같은 몸의 생김새를 닮았다는 이야기가 아니게 됩니다. 이것은 사람이 하나님과 같은 영을 가진 존재, 영혼이 있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주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의 코에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 (창세기 2장 7절)
사람의 몸이 흙 또는 물질로 되어있다는 점에 의의를 제기하실 분은 없으실 겁니다. 우리는 우리가 죽으면 흙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으니까요. 하나님께선 육체를 가지신 분이 아니기에 사람의 코에 불어 넣으신 것은 하나님 폐 안에 있던 공기가 아닙니다. '생명의 기운'이라고 표현된 '하나님의 영'을 사람에게 불어 넣어, 사람이 하나님의 영을 가진 존재가 되었다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기 영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고, 또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시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요한1서 4장 13절)
- 하나님 닮음: 영적인 존재
왜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하나님의 영을 불어 넣어 주셨을까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자신의 영을 불어 넣어주신 이유는 첫째로 영이신 분과 소통하려면 사람도 영적인 존재가 되어야 하고, 둘째로는 영이신 하나님 자체를 사람에게 나눠주심으로 사람도 하나님을 닮은 “사랑”이 되어갈 수 있도록 해주시기 위해서 입니다.
제가 어떤 여인을 사랑하게 되면 제 마음은 그 사람에게 갑니다. 그 사람은 지금 무엇을 할까? 밥은 먹었을까? 지금 기분이 좋을까 나쁠까? 오늘 하루는 무엇을 하고 지냈을까? 늘 궁금합니다. 내 몸은 여기 있으나 내 마음과 정신은 그 사랑하는 사람에게로 가버린 것 같습니다. 또 내 마음이 비워진만큼 그 곳엔 내가 사랑하는 사람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함께 있지 않아도 얼굴이 그려지고, 목소리가 생각나고, 때때로 그 좋았던 향기가 맡아 지는 것 같은 착각도 듭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나의 마음을 주고 그 빈 마음을 상대방으로 채우는 것입니다. 제 마음을 그 여인이 전해 받았다면 그 여인도 저를 알아보고 싶은 생각이 들 것입니다. 전해준 마음으로 인해 소통이 시작됩니다.
영적인 존재이신 하나님께서도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하기 위해서는 사람과의 소통이 이루어 져야 합니다. 사람이 개미나 코뿔소와 대화하기가 거의 불가능 하듯이, 영이신 하나님과 소통하려면 사람도 반드시 영적인 존재여야만 합니다. 사람이 영을 전혀 느낄 수 없다면 영이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시고 이 피조물과 진정한 사랑의 관계를 형성하고자 하신다면 사람을 반드시 하나님을 닮은 영적인 존재로 만드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자신의 영을 사람에게 나눠주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인간은 이제 하나님께서 불어 넣어주신 하나님의 영, 즉 성령님을 통하여서 영이신 하나님과의 소통이 가능해졌습니다. 인간은 이 받은 하나님의 영으로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무엇을 좋아하시고 싫어하시는지 소통해서 파악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무엇 때문이지 많이 망가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간절한 일이 생기면 신에게 기도하는 것으로 영적인 소통을 시도하게 됩니다. 또한 우리에겐 영적인 판단력이 아직 남아 있어서 어두움과 타락과 저주와 거짓과 증오와 교만함이 하나님의 속성인지 밝음과 절제와 공정함과 진실됨과 용서와 겸손이 하나님의 속성인지 누가 알려 주지 않아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기 영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고, 또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시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요한1서 4장 13절)
둘째로 하나님은 모든 참된 것과, 지혜로운 것과, 복된 것과, 선한것과 아름다운 것들의 근원 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 아름답고 선한 하나님의 영을 사람에게 나누어 주셨기 때문에 사람은 다른 사람을 감동시킬만한 아름다움과 선함을 뿜어 낼 수 있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간암에 걸린 어머니께 간 이식을 해드릴 수 있는 몸상태로 만들기 위해 6주간 15kg 감량해서 기어이 어머니를 살린 36살 아들의 이야기, 떡볶이 장사로 근근히 모은 전세산 1500만원과 전세금 800만원까지도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달라고 기부하시면서 늙었지만 그래도 혹시 쓸모가 있다면 죽을 때 각막을 더 기증하고 싶다는 93세 떡볶이 장수 할머니 이야기, 한평 남짓한 고시원 쪽방에서 생활하시던 중국집 배달부 아저씨가 월급 70만원을 쪼개 5명의 아이들을 돕다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신 것이 신문을 통해 알려지면서 수백, 수천명의 심지어 모르는 사람들 조차 그의 빈소를 찾아 눈물을 흘리며 이제 나도 어려운 아이들을 돕겠다고 약속했던 이야기들 속의 아름다움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아름다움을 많이 닮아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이야기들은 사람들을 깊게 감동시킬 수 있는 어떠한 힘이 있습니다.
이런 아름답고 감동적인 이야기들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선한 영을 나눠주신 존재, 오직 사람만이 삶으로 써 내려갈 수 있는 이야기들입니다. 하나님의 영을 우리에게 불어 넣어 주셨다는 것은 사실 이렇게 선하고 아름다운 가능성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영이 우리에게서 떠났다거나, 우리가 하나님의 영을 거부했다는 이야기는 사실 굉장히 심각한 이야기입니다만 이 이야기는 다음 장에서 좀 더 자세하게 살펴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을 사람에게 불어 넣어 주신 이유는 영이신 하나님과 사랑하려면 사람도 영을 알고 느낄 수 있는 영적인 존재여야 합니다. 또한 사랑하는 사람에게 마음을 주는 것을 넘어 하나님께서는 가장 선하고 아름다운 하나님의 영을 인간에게 떼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선하고 좋은 것들을 사람도 누리게 하게 해 주시기 위해서 입니다.
사람은 이제 받은 하나님의 영, 성령님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이 영이신 분을 알아 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한 사랑 그 자체이신 하나님의 영을 품고 신적인 레벨의 사랑이 가능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는 그 첫번째 의미 입니다. 사람은 불어넣어 주신 하나님의 영이 담긴 영적인 존재입니다.
- 하나님 닮음: 연합하는 존재
두번째로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는 이야기는 사람이 세분 하나님과 같이 서로 연합하고 화합해야 하는 존재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우리의 형상을 따라서,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자. 그리고 그가,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에 사는 온갖 들짐승과 땅 위를 기어다니는 모든 길짐승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창세기 1장 26절)
“우리의 형상을 따라서” 에는 사람도 영적인 존재라는 의미와 더불어 세분 하나님처럼 사람도 혼자 사는 독립된 존재가 아닌 여럿이 함께 협력하고 화합해야 하는 존재라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사람은 혼자서는 자식을 낳아 번성하는 것이 불가능 합니다. 자손을 만들려면 반드시 남녀 짝이 있어야 합니다. 태초의 인간은 더욱 그렇습니다. 두 남녀가 서로 사랑해서 한 몸을 이루어야 하고 자녀를 낳아 길러야 합니다. 더구나 하루 아침에 자녀가 자라지도 않고 십 몇년 혹은 수십년 가까이를 길러야 하기에 기본적으로 가족이라는 공동체로 수십년을 함께 살아가게 되어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예 작정하시고 그렇게 사람을 디자인 하셨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버지, 아들, 그리고 성령 하나님으로 불리우시는 것과 비슷하게 우리의 가족은 기본적으로 아빠와 자녀와 엄마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서로 깊게 사랑하여야 하고 서로가 서로를 위해서 희생하고 순종해야 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각 개인을 매번 흙을 빚어 따로 따로 만들지 않으시고 이렇게 가족을 통해 번성하게 하신 이유는, 가족안에서 서로 사랑하고 화합하는 것으로 세분 하나님의 사랑의 관계를 배우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또한 인류는 가족 공동체들이 모여 마을을 구성해서 이루고 해결해야 하는 문제들도 있고 민족과 국가로서 도전하고 이루어 나가야 하는 문제들도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마을의 공동 우물을 파는 일이나 민족의 전통 음악, 무용들을 계승 발전시키는 일들이나, 국가가 고속도로를 만들고, 나아가 우주계발 계획 등을 설립하고 수행하는 일들이 그렇습니다.
이와 같은 공동체 도전과제들을 통해 사람들은 협동하고 화합하는 것을 배우게 되고 서로를 이해하고 양보하는 등의 하나님적인 속성을 많이 배울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양보와 이해와 협력과 화합같은 개념은 혼자서는 가질 수 없는 개념이고, 이는 하나님께서 세분이시고 선하시기에 비롯됩니다. 하나님 닮게 창조된 사람이 서로 배우고 이해하고 협력해서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들을 이루어 내는 것은 아름답고 위대한 일들입니다.
인류는 또한 고통도 함께 느끼게 됩니다. 이웃 국가에 사막화가 진행되면 내가 사는 나라에 황사 현상이 벌어지고, 핵 발전소가 붕괴되어 방사능 물질이 방출되면 이웃 국가도 다 함께 고통을 겪게 됩니다. 숲이 개발이라는 명목으로 파괴되어 가거나 화석 연료를 너무 많이 써서 이산화탄소가 많아지면 지구의 온도가 올라가고 남북극의 얼음이 녹고 해수면이 높아져서 섬들이 사라지는 등, 세계 전체가 기상 이변의 고통을 함께 겪습니다.
가족에게 좋은 일이 생기거나, 아픈 사람이 생기면 가족 구성원 전체가 영향을 받는 것과 같이, 인도의 한 버스안에서 끔찍한 강간사건이 벌어지면 전세계가 함께 분노하고 고통받고, 미국에서 총기 난사사건으로 초등학생들이 죽은 사건은 전세계의 부모들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반면에 아프리카에서 굶어 죽던 아이들이 다른 나라의 도움으로 살아나면 모두가 기뻐하고, 칠레 광산 붕괴로 갇혀있던 광부들이 구출되는 사건을 전세계 사람들이 함께 지켜보며 기뻐했었습니다.
사람은 혼자 잘되면 행복할것 같지만 옆사람도 함께 행복해야 진정으로 기뻐지며, 내가 고통받으면 주변 사람들도 함께 고통받고 슬퍼집니다. 사람은 어떤 면에서는 모두 크고 작게 연결되 어있어서 영향을 주고 받으며, 함께 행복해 지고, 함께 고통을 나누게 됩니다.
그분은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셔서, 온 땅 위에 살게 하셨으며... (사도행전 17장 26절 중)
심지어 하나님께서는 남자와 여자로 따로 빚어 만드시지 않으시고 남자의 갈비뼈를 취해 여자를 만드시는 것으로 인류가 얼마나 단 하나의 근원을 가진 공동체적 존재인지 극명하게 보여주셨습니다.
이처럼 사람이 함께 살아가야며 연합해야하는 존재인 이유는 세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신의 삼위일체를 닮은 모습으로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 하나님 닮음: 다스리는 존재
마지막으로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는 이야기는 사람이 하나님처럼 다스리는 존재로 지음 받았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우리의 형상을 따라서,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자. 그리고 그가,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에 사는 온갖 들짐승과 땅 위를 기어다니는 모든 길짐승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창세기 1장 26절)
하나님께서 사랑의 대상으로 만드신 존재는 사람이고, 사람이 동식물을 비롯한 그 밖의 모든 물질세계를 다스리는 존재라는 이야기는 진화론적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심한 반발심을 불러 일으킬 만한 이야기입니다. 진화론에선 인간도 결국 꽤 잘 진화한 동물에 불과한데 어떻게 오만하게 인간이 그렇게 생각 할 수 있나 하고 말입니다. 소설 “개미”의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외계인이 지구에 온다면 인간이 아닌 개미를 지구의 주인으로 보고, 그들과 이야기하려고 들 수도 있다고 말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다면 기독교 세계관은 왜 동물이 아니고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을까요?
사실 이 이야기는 성경적 세계관에서는 너무나도 쉽게 이해될 수 있습니다. 만일 개미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인격적 사랑의 대상이고 이땅을 다스리는 존재였다면 예수님도 개미로 하나님의 메시지를 가지고 이땅에 오셨어야 했습니다. 사람에게 메시지를 전하시려면 사람으로 오셔야 하고, 코뿔소에게 메시지를 전하러 오셨으면 코뿔소로 오셔야 합니다. 종을 뛰어 넘어 메시지를 전한다는 것은 메세지가 제대로 전달될 가능성이 거의 제로에 가깝습니다.
어느날 뭔가 거룩하고 구별되어 보이는 코뿔소가 아주 맑은 눈을 가지고 다가와서 코로 이해심 많은 사람의 팔에 부드럽게 쓰다듬는 다고 해도, 어떤 사람도 그 온전한 뜻을 알 수 없을 것입니다. 나중에 다시 살펴 보겠지만 예수님께서는 너무나도 명확하게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하러 “사람”으로 이땅에 오셨습니다. 하나님과 사랑을 나눌 대상은 하나님께서 영을 나누어 주신 존재, 사람입니다.
그것은, 내가 내 뜻을 행하려고 하늘에서 내려온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려고 왔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6장 38절)
성경에는 사실 동물이 사람처럼 말을 하는 부분이 두군데 있기는 합니다. 하나는 사탄이 뱀을 덧입어 인간을 유혹할 때이고, 다른 하나는 민수기 22장에 나귀가 성령님의 허락으로 말을 하는 장면에서 입니다. 그러나 이 두번의 경우 모두 특별한 뜻이 있는 상황임으로 예수님이 “사람”으로 오신 것이 하나님의 메시지를 “사람”에게 전달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는 점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 뱀이나 나귀가 코뿔소나 개미의 언어로 소통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처럼 말을 했습니다. 여전히 그 대상은 사람입니다.
- 하나님 닮은 다스림
하나님께서 사랑의 대상인 인간을 만드시고 그들로 이 물질세계를 다스리라고 하신 이유는,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으로 하나님과 소통해서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어떤 속성을 가지신 분인지 알아내서 그것을 기준으로 하나님 닮게 이 땅을 다스리라는 의미였습니다. 여기서 다스린다는 단어는 인간이 동식물을 마음대로 살리고 죽이고 파괴하며 물질세계위에 군림하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은 군림하거나 파괴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스리는 왕이 다스림을 받는 존재들을 위해 희생하고 섬기는 다스림입니다.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으며, 많은 사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몸값으로 치러 주려고 왔다. (마태복음 20장 28절)
하나님께서는 사랑이시기에 분명 모든 자연의 동물과 식물을 아니 돌들까지 모두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하나님 닮아가며 하나님이 사람을 사랑하듯 사람이 이웃과 자연을 사랑하길 원하십니다. 왜일까요?
진정한 사랑이 서로 상호간에 일어나는 교류라면 하나님의 사랑은 아름다운 세상의 창조로 이미 증명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어떻게 알겠습니까?
사랑하면 서로 닮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닮아가면 세상이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줄 알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배우고 그 배운 사랑으로 세상을 다스리면, 이땅에 동물들이, 나무가, 풀이, 바람과 돌들이, 그 모습을 보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사랑이신 줄을 알게 되고 그 사랑이신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시고, 또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가운데서 완성된 것입니다. (요한1서 4장 12절)
저 개인적으로 미국의 Deadliest Catch라는 알라스카 인근의 험한 바다에서 킹크랩 낚시를 보여주는 프로그램을 좋아합니다. 미국은 이 킹크랩을 비싸게 팔 수 있다고 해서 다 잡아 씨를 말리는 일을 더이상 하지 않습니다. 지금은 철저하게 아직 다 자라지 않은 어린것들과 새끼를 낳을 수 있는 암컷은 놔줘야 합니다. 법으로 그렇게 정해져 있습니다. 과학적으로 전체 킹크랩 양을 추정해 보고 올해 잡아도 내년에 다시 개체수가 회복 될 수 있는 수량만을 각 배에 할당해서 잡게 합니다. 이 제한된 양으로 인해 가격이 올라가도, 먹는 횟수가 줄어들어도 다들 이해하고 내년을 기다립니다. 그것이 자연을 파괴해 버리지 않고, 절제함으로 자연과 더블어 살아가는 방법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것이 하나님 닮은 다스림입니다. 이 다스림 안에는 하나님의 속성 중, 절제, 양보, 인내, 배려 등의 사랑의 속성들이 들어가 있습니다. 우스갯 소리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이런 다스림을 보고 알라스카 킹크랩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게 되고, 다른 모든 해양 생물이, 바다가 하나님의 속성, 그 궁극적 사랑을 보고 찬양하게 되어 있습니다. 아니 있었습니다.
그러나 현실의 인간은 이런 하나님의 속성을 가진 다스림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코뿔소의 코가 정력에 좋다고 전기톱으로 잘라가고, 상어 지느러미가 비싸게 팔린다고 상어를 잡아 모든 지느러미를 잘라내곤 헤엄도 못치는 피흘리는 몸통을 바다에 그냥 버리는 잔인하고 이기적인 존재의 다스림, 아니 파과와 군림을 보여 줍니다. 지금 인간이 지구를 이렇게 다스리는 모습을 보고 동식물이, 바람과 돌들이 만약 생각할 수 있다면, 입을 열어 말을 할 수 있다면 무슨 말을 할까요? 어쩌다가 우리는 참혹한 뉴스가 가능한 세상을 만들어 버렸을까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V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