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전은 조선왕조 개창자인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의 어진(초상화)을 모신 건물입니다. 임진왜란, 병자호란, 동학농민운동 속에서도 어진을 지키기 위한 백성들의 노력으로 어진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처음 어용전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우다 1442년(세종 24년)에 경기전이라는 이름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또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거치며 잿더미가 된 경기전을 1614년(광해군 6년)에 중간하였습니다.
1991년 1월 9일 대한민국 사적 339호로 승격되었고, 2008년 12월 1일 대한민국 보물 제1578호로 지정되었습니다. 태조 이성계의 어진은 여러 곳에 특별하게 보관되어 총 26점이 있었으나, 현재 전주 경기전에 있는 1점만이 남아있습니다. 태조 어진은 국보 제317호입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던 4개의 사고 중 임진왜란 때 춘추관사고, 충주사고, 성주사고가 불타 없어지고, 전주사고의 실록만이 오회길, 손홍록 등의 빠른 대처로 지킬 수 있었습니다. 이후 1614년(광해군 6년)에 건립된 무주의 적상산사고에 실록을 보관하였고, 현재 전주사고는 1991년에 무주 적상산사고를 복원한 건물입니다.
경기전 내부의 조경묘는 전주이씨의 시조 '이한' 부부의 위패(죽은 사람의 이름을 적은 나무 조각)를 모신 곳입니다. 이한은 신라시대에 사공이라는 높은 벼슬을 지냈으며, 태조 이성계는 이한으로부터 21대 후손입니다. 조경묘는 조경단과 함께 전주가 조선왕조의 발원지임을 상징하는 곳입니다.
큰 건물에서 건물과 건물 사이를 드나들 수 있게 해주는 협문과 그 옆에 작게 나 있는 쪽문의 모습입니다. 이 문을 지나면 경기전 내의 사고(史庫)를 볼 수 있습니다.
특히 밑부분을 소금에 절여 습기에 강하도록 하였다고 합니다.
사각형의 주춧돌 윗부분을 원 모양으로 깍아 돌출되게 보이게 만들었습니다.
기품 있고 건물에서 사용하는 방식입니다.
조선시대에 단청의 색과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