벡델데이 2023 영화 부문

영상매체를 바라보는 관점에 ‘성평등’을 더한 벡델데이는 2020년 ‘영상매체의 꽃’이라 불리는 영화 내의 성평등 재현을 돌아보며 시작되었다. 그로부터 어느덧 네 번째 행사를 맞이한 벡델데이2023은 2022년 7월부터 2023년 6월까지 극장 개봉(영진위 통전망 기준 전국 10개 이상 스크린에서 개봉한 실질 개봉작)했거나 대중에 공개된 OTT 오리지널 영화 총 120편을 검토해 벡델초이스10을 선정했다. 


또한 이 기간 동안 성평등 관점에서 가장 눈부신 활약을 보인 창작자에게 수여하는 벡델리안을 감독, 작가, 배우, 제작자 부문으로 나눠 정했다. 벡델리안 선정은 올해의 심사 대상작뿐 아니라 창작자가 그간 작업을 통해 보여온 성과와 태도 등을 종합적으로 판단해 결정했다. 벡델초이스10과 벡델리안 심사에는 벡델데이2022에서 영화 <앵커>로 벡델리안(제작자)에 선정된 인사이트필름 신혜연 대표와 씨네플레이 편집장 주성철 평론가, 서울독립영화제 김동현 집행위원장, 2022년 벡델초이스10 선정작 <갈매기>의 김미조 감독이 참여했다.

벡델데이가 올해로 4회를 맞았다. 2020년 처음 벡델데이를 시작하면서 성평등한 한국영화를 조명하고 알리고자 한 노력이 어느덧 자리를 잡아가고 있음을 체감한다. 창작자들 사이에서 ‘벡델데이’의 이름이 언급되거나 창작 단계에서 그 가치와 의미를 한 번 더 짚는 과정이 수반되고, 그 노력이 결국 관객들이 영화를 선택하는 데 하나의 지표로 작용하는 예들을 접하면서 차츰 벡델데이의 좋은 영향력을 실감하게 된다. 특히 벡델데이의 평가지수가 콘텐츠 내의 정량적인 성비 균형을 가리는 데 그치지 않고, 스크린 뒤의 성평등을 돌아보거나 소수자를 배제하지 않도록 하는 데 좋은 기준점이 되어준 점은 고무적이다. 


지난 1년간 관객들과 만난 작품을 대상으로 올해도 벡델데이의 가치에 부합하는 영화들을 선정하는 데 주력했다. 개봉 당시 관객 호응이 상대적으로 적었다 하더라도 벡델데이의 가치에서 볼 때 성평등한 콘텐츠에 기여한 노력과 성과가 보인 작품이라면 이 자리에서 충분하게 상찬할 기회를 만들어 주고자 했다. 


작년의 경우 장기화된 코로나 팬데믹 여파로 한국영화의 제작과 개봉이 위축된 상황에서도 성평등한 가치를 실현한 영화들은 꾸준히 만들어졌고 긍정적인 반향을 일으켰다. 여름 텐트폴 영화들의 남성 편향적 불균형이 도드라지는 가운데에도 전체 개봉작의 면면을 점검해 보면 장르와 서사의 다양한 시도 가운데 창작자들은 성비 균형을 갖춘 서사를 구성하고, 전형적이거나 이분법적인 성별 구분을 깨는 흥미로운 캐릭터들을 창조해 관객에게 균형 잡힌 콘텐츠를 제안하는 것으로 보인다. 


좋은 작품을 고르는 데서 그치지 않고 ‘성평등한 관점’에서 의미 있는 작품을 선정하는 벡델데이의 기준에 따라, 올해의 벡델초이스10과 벡델리안을 선정했다. 올해의 작품 면면을 살펴보면 단순히 성평등한 영화라는 의미에만 머물지 않고 그 가치가 영화의 신선함을 보장하는 요소로 읽히고, 관객에게 사랑받은 작품들이라는 점에서도 긍정적이다. 벡델데이의 취지에 부합하는, 성평등에 관한 창작자들의 균형 잡힌 시각이 작년과 올해도 또 한 번 한국영화 콘텐츠의 질적인 면을 개선시켰다는 점에서, 벡델데이도 올해의 성과를 기록해야 할 것이다. 


올해 선정된 작품들을 다시 상기하는 것만으로도, 이들 개별 작품의 노력으로 한국영화가 성평등한 가치를 어떻게 반영하고 발전하고 있는지 체감할 수 있는 바로미터가 될 것이라고 믿는다. 

이화정(벡델데이2023 프로그래머)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 

감독 김세인 | 배우 임지호, 양말복 | 작가 김세인 | 제작 조성원, 조근식 | 140min | 15세 

이정(임지호)과 수경(양말복), 지나치게 공유하며 살아가는 딸과 엄마의 불안한 동거는 갑작스러운 사고 이후 폭발하고야 만다. 여성 캐릭터의 에너지를 이 정도로 응축시켜 무한대로 펼쳐 보인 영화가 있었던가. 하지만 이 영화의 힘은 강렬함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섬세함에서 온다. 벡델데이 역사상 초유의 ‘킬링&힐링’ 심리 드라마. 

주성철(씨네플레이 편집장, 영화평론가)

길복순                                                                                                              *사진 출처: 넷플릭스

감독 변성현 | 배우 전도연, 설경구, 김시아 | 작가 변성현 | 제작 이진희 | 137min | 18세

여성이자 엄마이자 킬러인 길복순의 이야기를 액션 장르로 풀어낸 수작. 스타일리시한 액션, 착하지만은 않은 여자들이 한껏 등장하는 매력적인 캐릭터의 향연은 이 영화에서 눈을 뗄 수 없게 하는 요소다. 배우 전도연은 사람을 죽이는 것보다 딸을 키우는 게 더 어려운 ‘워킹맘’ 길복순의 이야기를 설득력 있게 완성해낸다. 

김미조(영화감독)

다음 소희

감독 정주리 | 배우 김시은, 배두나 | 작가 정주리 | 제작 김동하 | 138min | 15세

영화는 묵직한 한 방으로 말한다. 다음 소희는 없어야만 한다고. 바짝 붙어선 채 이들의 이야기를 강요하지 않고 서서히 스며들게 만드는 연출은 작가이자 감독 정주리가 얼마나 뛰어난 스토리텔러인지를 증명한다. 반짝반짝 빛나던 소희와 그런 소희의 뒤를 따라가는 형사 유진을 완성하는 김시은과 배두나의 눈빛은 영화가 끝난 뒤에도 계속해서 공명한다. 

김미조(영화감독)

드림팰리스

감독 가성문 | 배우 김선영, 이윤지 | 작가 가성문 | 제작 곽용수 | 112min | 12세

산업재해 유가족인 혜정(김선영)은 회사와 합의하고 투쟁 대오를 나온다. 사회가 규정하는 행복의 컨베이어 벨트에 올라타기 위해 낙인을 무릅쓰고 자신을 새롭게 무장한다. 하지만 같은 처지의 수인(이윤지)과 아이들을 돕고자 초대한 아파트 ‘드림팰리스’는 공장 밖 또 하나의 싸움터다. 작은 이익이 세계의 전부가 되어 버린 일그러진 공동체. 산업재해, 부실공사 등 굵직한 사회 담론을 조망하는 가운데 두 여성 배우의 역할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김동현(서울독립영화제 집행위원장)

성적표의 김민영 

감독 이재은, 임지선 | 배우 김주아, 윤아정 | 작가 이재은, 임지선 | 제작 조윤빈 | 97min | 전체

수능을 앞두고 절친 모임인 삼행시 클럽이 잠시 해체를 선언한다. 민영(윤아정)과 수산나는 대학에 진학하고 정희(김주아)는 고향에 남아 느릿한 생활을 지속한다. 시간과 공간의 변화만큼, 그녀들의 엉뚱하고 영원할 것 같던 관계도 묘하게 어긋난다. 너와 나의 스무 살에 성적을 매기는 영화의 과정은 여러 심상을 일게 한다. 각자의 스무 살을 선명하게 기억하게 하는 빛나는 청춘영화. 

김동현(서울독립영화제 집행위원장)

소울메이트 

감독 민용근 | 배우 김다미, 전소니, 변우석 | 작가 강현주, 민용근 | 제작 변승민, 권오현 | 124min | 12세

대부분의 청춘영화가 첫사랑에 방점을 두는 반면 <소울메이트>는 두 여성이 깊은 우정을 통해 성장하는 과정을 섬세하게 포착한다. 거울을 보듯 서로에게 자신의 꿈을 투영하는 미소(김다미)와 하은(전소니)의 관계를 통해, 영화는 결국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우리 모두의 성장통을 아프게 담아낸다. 이렇게 두 여성이 끝까지 서로에게 힘과 용기와 꿈이 되는 영화는, 이전에도 앞으로도 흔치 않을 것 같다. 

신혜연(인사이트필름 대표)

외계+인 1부 

감독 최동훈 | 배우 류준열, 김태리, 김우빈 | 작가 최동훈, 이기철 | 제작 안수현, 최동훈 | 143min | 12세

최동훈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외계+인 1부>에도 다양한 캐릭터가 등장한다. 그런데 이들 모두 성별을 불문하고 자기 주도적이며 욕망에 솔직하다. 특히 이안(김태리)의 총기 액션 신, 삼각산 신선 흑설(염정아)의 도술 신 등에서 볼 수 있듯, 여성 캐릭터 역시 관습적이고 보조적인 역할을 벗어나 거침없고 독창적이다. 최동훈 감독의 전작들과 <외계+인 1부> 모두 백델초이스에 선정되기에 충분하다. 

신혜연(인사이트필름 대표)

유령 

감독 이해영 | 배우 설경구, 이하늬, 박소담, 박해수, 서현우 | 작가 이해영 | 제작 박은경 | 133min | 15세

“독립하면 담배나 끊을까?” “왜? 더 맛있어질 텐데.” 투철한 사명감과 역사의식 이전에 그저 조금 더 개인적 자유를 꿈꾸고, 또한 누군가를 평범하게 사랑한다는 것이 끈질긴 독립운동이 되고, 그래서 더 무서운 힘을 발휘한다. 우리는 지금껏 그때 그 시절을 다룬 한국영화에서 쉬이 보지 못한, 결코 ‘유령’으로 남지 않을 두 여성 캐릭터와 마주하게 된다. 

주성철(씨네플레이 편집장, 영화평론가)

정이                                                                                                                 *사진 출처: 넷플릭스

감독 연상호 | 배우 강수연, 김현주, 류경수 | 작가 연상호 | 제작 변승민 | 98min | 12세

한국형 SF의 도전과 가능성을 입증한 <정이>는 22세기 디스토피아를 배경으로 한다. 인간과 AI가 공존하는 세계가 수준 높은 CG로 구현되는 가운데, 영화의 중심 흐름에 전투 AI 윤정이(김현주)와 그의 딸 윤서현(강수연)의 모녀 서사가 있다. 스크린과 브라운관을 대표했던 두 여성 배우는 대단히 한국적인 모녀 관계에서 출발해 SF라는 장르를 자신들의 색깔로 장악한다. 한국영화에서 누구도 내지 않았던 새로운 길을 멋지게 개척하는 여성들의 영화.

김동현(서울독립영화제 집행위원장)

정직한 후보2

감독 장유정 | 배우 라미란, 김무열, 윤경호 | 작가 박하나 | 제작 김홍백, 민진수 | 107min | 12세

속편 제작부터 감격적이다. 아니, 당연한 결과다. 서울시장 선거에서 떨어지며 백수가 된 주상숙 의원(라미란)이 이번에는 도지사가 되어 다시 한 번 ‘진실의 주둥이’를 장착한다. 라미란 배우는 충무로에서 전혀 의심할 여지없는 원톱 배우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증명해내고, 장유정 감독 또한 흔들림 없이 자리를 지키며 시리즈 영화의 새로운 역사를 썼다.

주성철(씨네플레이 편집장,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