벡델데이 2023 시리즈 부문

영상매체를 바라보는 관점을 ‘성평등’으로 삼고 있는 벡델데이는 지난해부터 한국영화와 영화인에 주목하던 시선의 영역을 시리즈 분야로도 확대했다. 지상파뿐만 아니라 IPTV, OTT까지 다양한 플랫폼에서 시청자들이 접하는 창작 콘텐츠가 증가하는 가운데, 이들 작품이 이룬 성과와 나아갈 방향을 벡델의 시각으로 함께 점검하고 격려하고자 하는 취지였다. 특히 넷플릭스 사용자 60% 이상이 한국 콘텐츠를 관람한 적 있다고 할 만큼 한국 영화와 시리즈가 글로벌 시장에서 일상적으로 소통되는 현재, 우리 영상이 가진 인종 및 젠더 감수성 등을 더 눈여겨봐야 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벡델데이2023은 2022년 7월부터 2023년 6월까지 공개된 시리즈 중 성평등 및 문화 다양성 관점에서 가장 눈에 띈 작품 10편을 벡델초이스10으로 선정하고, 해당 작품에 참여한 창작자 중 성평등에 기여한 인물을 연출(감독), 작가, 배우, 제작자 부문으로 나눠 함께 시상한다. 공중파 및 종합편성채널, 케이블 채널, OTT 오리지널 등에서 소개된 84편이 벡델초이스 선정 심사 대상이 되었고, 심사에는 김민정 중앙대학교 문예창작전공 교수, 진명현 무브먼트 대표, 나원정 <중앙일보> 기자가 참여했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침체된 극장가가 더디 회복하는 사이 화제를 모은 건 시리즈였다. K-콘텐츠로 전 세계에서 주목받으며 제작 탄력을 더한 시리즈들은 각종 OTT 창작물이 더해지면서 작년 한 해 더 많은 장르, 스토리, 소재, 캐릭터를 구현하며 시청자와 만났다. 벡델데이도 지난해부터 시리즈 부문에 주목함으로써 이들 작품 안에서의 성평등 재현이 어디까지 왔는지 살피는 계기를 마련했다. 


2023년 시리즈 부문 벡델초이스10은 선정작의 면면으로 볼 때 모두 다양한 장르와 서사, 그에 맞는 캐릭터 구현이라는 벡델데이의 관점에 충족된다. 심사위원들은 올해 시리즈물을 성평등 관점으로 돌아볼 때 “더없이 기록할 만한 해”라는 점에 의견을 모았다.


올해 시리즈 부문 벡델초이스10은 성평등 지점에서 도전한 지점과 성취의 지점이 각각 뚜렷했다. 먼저 두 여성 친구가 외계인을 찾아나서는 SF 판타지 서사 <글리치>나 선거전을 앞둔 여성 정치인을 소재로 한 <퀸메이커>는 성역할 전복을 통한 쾌감을 안겼다. 기존에는 남성 캐릭터들을 바탕으로 한 장르나 소재라고 ‘당연히’ 여겼던 영역에서 외연을 확장해 여성 서사가 개발되고, 여성 캐릭터들이 활약하는 콘텐츠들이 지속적으로 개발됨으로써 남녀 역할의 고정관념을 탈피하는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 


학교 폭력을 소재로 피해자인 여성들의 연대를 그린 <더 글로리>와 장애인 이슈를 전면에 내세운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는 여성을 넘어, 소수자를 주목한 콘텐츠들이 어떻게 대중과 만날 수 있는지 그 길을 보여준 작품이다. 폭력에 노출된 여성 서사를 피해자를 돌아보는 드라마적인 관점에 국한하지 않고 서스펜스 스릴러 장르로 풀어낸 <마당이 있는 집>의 독특한 시도 역시 돋보였다.  


익숙한 장르의 법칙을 가져오되 성평등의 가치를 실현한 작품들도 눈에 띄었다. <슈룹>은 궁중 암투라는 틀을 차용하면서도 그 전형성을 깨는 시도로 호응을 얻었으며, <어쩌다 마주친, 그대>는 타임워프의 형식 안에서 여성 캐릭터가 자아를 발견하는 유의미한 장면을 이끌어낸다. <작은 아씨들>은 살인사건을 바탕으로 복잡하게 얽힌 가족, 계급 등 관계의 역학을 풀어내는 동안 다양한 여성 캐릭터의 욕망을 세심하게 조명한다. 기존의 드라마 형식이 공고한 경우 여성 캐릭터와 서사가 스테레오 타입에 갇히기 쉬운데, 이들은 그 안에서 성차별에 갇히지 않고 뚜렷하게 자기 목소리를 낸 작품으로 기록될 만하다. 


벡델데이는 장르성이 강한 작품들이 더 많은 주목을 받는 지금의 OTT 환경에서 찾아보기 힘든 작품들이 보여준 성평등 관점에서의 성취도 주목했다. 성역할이 고정되기 쉬운 멜로 장르 안에서 여성의 역할을 스테레오 타입화해 그리지 않은 <사랑의 이해>나 도심을 벗어나 자신의 호흡을 찾아나가는 여성의 로드무비 <박하경 여행기>는 잔잔한 반향을 일으키며 확고한 팬층을 만난 작품들이다. 


시리즈 제작은 영화 부문과 제작, 감독, 배우, 스태프 등 창작자의 교류가 활발히 이루어지며 서로 소재, 주제, 장르적인 면에서 영향을 주고받는 경우가 많다. 성평등 불균형에 대한 개선이 요구되고 있는 영화 콘텐츠와 달리 시리즈 부문에 대해 심사위원들은 “여성 창작자의 입지가 마련되어 있고, 상업영화에서 부족한 여성 서사가 꾸준히 개발되는” 성평등이 비교적 잘 구현되는 분야라는 점에서 고무적이라는 데 의견을 모았다. 성평등의 관점에서 시리즈의 현재를 점검하는 것이 영화 분야에서 보다 진일보한 콘텐츠를 만드는 데에도 좋은 자극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두 영역에서의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지를 진지하게 논의하는 과정도 향후 더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성취와 별개로 개선해야 할 지점, 아쉬운 부분도 이야기됐다. 심사위원들은 “이 시기에 여성 캐릭터와 서사가 성평등적인 면에서 보다 진일보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단순히 남성과 여성의 성비를 바꾸는 평면적인 시도로 성평등이 이루어졌다고 보는” 것에 대한 우려, “호흡이 긴 시리즈의 경우 전반부에 캐릭터 구축을 잘해 놓고도 결말 부문으로 가면서 기존의 스테레오 타입에 여성을 국한시키는” 등의 오류가 보이는 작품이 적지 않았음을 지적했다. 


내년에 만날 보다 성평등한 작품을 기다리며, 벡델데이2023의 호명과 의미 부여가 성평등한 시리즈의 개발에 더 많은 자극으로 반영되길 기대한다. 

이화정(벡델데이2023 프로그래머)

글리치                                                                                                              *사진 출처: 넷플릭스

연출 노덕 | 배우 전여빈, 나나 | 작가 진한새 | 제작 윤신애

이런 여성 버디물은 처음이다. 외계인보다 더 종잡을 수 없고 사이비 종교보다 더 질긴 ‘비주류’ 언니들의 컬트한 장르 모험. K-콘텐츠에 존재하는 그 어떤 법칙도 거부하며 여성 서사의 판을 키운 용기와 뚝심에 박수를. 

나원정(중앙일보 기자)

더 글로리                                                                                                         *사진 출처: 넷플릭스

연출 안길호 | 배우 송혜교, 이도현, 임지연 | 작가 김은숙 | 제작 윤하림, 김영규

그동안 숨죽이고 있던 숱한 폭력 피해 여성들의 눈물 겨운 연대. 상처 입은 여성들이 이 사회를 향해 펀치를 날린다. 장르를 설득력 있게 다루는 작가적 역량과 이에 호응하는 스타 파워가 일으키는 파장이 작품 안에만 국한되지 않고 실제 사회의 모순까지 가닿는 아주 힘이 ‘쎈’ 드라마. 

이화정(벡델데이2023 프로그래머)

마당이 있는 집 

연출 정지현 | 배우 김태희, 임지연 | 작가 지아니 | 제작 장소정

프레임의 네 모서리를 찬찬히 들여다보게 만드는 카메라는 천천히, 그러나 부지런히 두 여자의 천변만화를 포착한다. 새로운 각을 드러내는 일에 주저가 없는 배우 김태희의 적극적인 전진과 캐릭터를 천천히 씹어 완전히 삼키는 배우 임지연의 전력이 만들어내는 휘도. 스스로의 불안에서 해방되기 위한 두 여자의 사투는 스스로와 서로를 직시한 교차점에서 마침내 가장 찬란한 빛을 내뿜었다. 

진명현(무브먼트 대표)

박하경 여행기                                                                                          *사진 제공: 웨이브(Wavve)

연출 이종필 | 배우 이나영 | 작가 손미 | 제작 박은경

여성 캐릭터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여성 원톱 드라마. 주인공 박하경은 그 어떤 것에도 열심도 집착도 없다. 드라마가 이래도 되나, 주인공이 이래도 되나 싶은데 그게 바로 ‘박하경’ 스타일이다. 걷다가 힘들면 의자에 앉아 쉬고, 배가 고프면 밥을 먹는다. 2023년 최고의 힐링 없는 힐링 드라마. ‘힐링을 힐링하다.’ 

김민정(중앙대학교 문예창작전공 교수)



사랑의 이해                                                                                                          *사진 출처: SLL

연출 조영민 | 배우 유연석, 문가영 | 작가 이서현, 이현정 | 제작 박성은

도무지 축약해서는 감상할 수 없는 드라마의 탄생. 저마다 다른 사정을 가지고 있는 네 남녀의 감정을 집요하게 따라간 이 드라마는 추적극에 가까운 연애물인 동시에 연애예능이 범람하는 시대에 당도한 연애다큐라고도 할 수 있다. 대상화의 덫을 피해 주체적인 욕망을 실현하는 인물로 입체화된 두 여성 캐릭터를 성실하게 연기한 배우 문가영과 금새록의 대표작이 탄생했다. 


진명현(무브먼트 대표)

슈룹 

연출 김형식 | 배우 김혜수, 김해숙 | 작가 박바라 | 제작 박진형, 손재성

역사적 상상력을 화려하게 덧댄 퓨전 사극. 무엇을 상상하든 무조건 그 이상의 스토리가 펼쳐진다. 익숙한 설정의 궁중 암투도 K-세계관의 승은을 입으면 PC한 웰메이드 글로벌 콘텐츠로 거듭난다. 신인 작가 박바라와 배우 김혜수의 환상의 워맨스.

김민정(중앙대학교 문예창작전공 교수)

어쩌다 마주친, 그대

연출 강수연, 이웅희 | 배우 김동욱, 진기주 | 작가 백소연 | 제작 안창현

영화 <빽 투 더 퓨쳐>(1985) 이래 숱하게 제작된 타임슬립 장르물에서 ‘모녀 워맨스’는 거의 미개척 지대였다. 장성한 딸이 과거로 가 엄마의 십대 시절을 구원한다. 고전이 된 장르가 반갑고도 신선한 생명력을 얻었다. 

나원정(중앙일보 기자)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연출 유인식 | 배우 박은빈, 강태오 | 작가 문지원 | 제작 이상백

장애인, 그리고 여성. ‘최약체’로 치부되던 아이템으로도 충분히 재밌을 수 있다는 걸 입증했다. 콘텐츠 안에서의 투쟁이 대중과 만나기까지, 작품이 거쳐온 외적 투쟁의 과정 또한 만만치 않았다. 결국 이 ‘허들’을 극복함으로써 다채로운 희망을 안긴 사례. 더 많은 소수자들의 이야기에 기회를 열어준 기념비적 작품이다. 

이화정(벡델데이2023 프로그래머)

작은 아씨들 

연출 김희원 | 배우 김고은, 남지현, 박지후 | 작가 정서경 | 제작 조문주

19세기 미국 네 자매 이야기가 현대 한국 자매들로 무리 없이 치환되는 고전의 마법. 여성 ‘작(가)‧감(독)‧배(우)’의 완벽한 조화가, 천박한 돈 잔치의 늪에서 수련처럼 미려한 연대의 서사를 틔워냈다. 

나원정(중앙일보 기자)

퀸메이커                                                                                                                      *사진 출처: 넷플릭스

연출 오진석 | 배우 김희애, 문소리 | 작가 문지영 | 제작 신혜연

한 번은 만들어졌을 법한 드라마가 드디어 완성되었다. 그동안 남성들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정치 드라마가 여성 배우들이 맘껏 그 실력과 매력을 펼칠 수 있는 판으로 재편된 것! 김희애, 문소리, 서이숙, 진경, 김선영, 김새벽, 윤지혜, 옥자연 등 각기 다른 개성을 지닌 배우들의 각축전을 보는 것만으로도 제 몫을 다해낸다.

진명현(무브먼트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