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빙스톤, 슈바이처, 스탠리 등 잘 알려진 선교사 이야기의 주 무대가 아프리카이어서인지 많은 사람이 선교하면 자연스레 아프리카를 떠올린다. 아시아와 중앙아시아, 그리고 중동으로 사역을 확대하도록 인도하신 하나님은 드디어 2006년 BEE Korea에게 아프리카 진출문을 여셨다. BEE Korea는 그분의 인도하심에 따라 동서아프리카에서 거의 동시에 사역을 시작했다. 동아프리카는 먼저 수단과 케냐에서 BEE 사역을 시작한 후 케냐 주변 나라인 우간다, 탄자니아, 남수단으로 사역을 확장했다. 서아프리카는 가나에서 사역을 시작하였고 하나님의 강권하심으로 코트디부아르, 라이베리아, 토고로 사역을 넓혔다.
2006년 여느 때와 같이 조 선교사는 두노서원 건물 한 구석에 마련한 BEE Korea 본부 사무실에서 사무를 보고 있었다. 이른 오후 한국에서는 흔하지 않은 피부색의 소유자가 문을 두드린 후 열고는 얼굴을 빼꼼히 들여 놓았다. 그는 아프리카인으로 같은 층에 있는 다른 선교회를 간다는 것이 실수로 우리 선교회로 들어선 것이었다. 찾는 곳이 아니라고 하자 보통 발길을 돌릴 텐데 그분은 피부색과 대조되는 하얀 이와 눈동자가 더 커지며 아예 안으로 들어서서는 그러면 이곳은 무엇을 하는 곳인지 물었다. 자리를 청하여 앉히고 BEE 사역을 설명하자 커진 그의 눈이 더욱 반짝이며 커졌다. 그는 자신을 케냐 키수무 근교에 있는 Bishop Okullu College of Theology(BOCOT)의 학장인 아긱 교수라고 소개하며 동역할 길이 있을 것 같다고 했다. 이어 아긱 교수는 자신의 신학교에서 그러지 않아도 평신도를 교육해 교역자로 세우는 프로젝트를 구상 중이라며 BEE에 관해 더 설명해주기를 요청했다. 조 선교사는 방금 전의 조금은 사무적인 태도를 바꿔 BEE가 선교 현장에서 제공하는 과목과 과정을 학습서를 보여주며 자세히 아긱 교수에게 설명했다. 두 손을 깍지끼고 경청하던 아긱 교수는 본국에 돌아가 관계자들과 협의 후 연락하겠다고 하며 연락처를 받아 갔다.
얼마 후 아긱 교수는 학교 담당 교수들이 지난 번 논의했던 프로그램을 진행하기로 했다는 이메일을 보냈다. 몇 번의 논의로 그해 12월 BEE Korea는 싱가포르인인 레이첼 선교사를 케냐로 보내 BOCOT과 사역양해각서를 맺고 2007년 4월 1기를 모집해 첫 수업을 하고, 8월에 2기를, 2008년에 3기를 모집해 세 반을 운영했다. 5일 동안 숙식하며 배웠기에 학비가 과목 당 8,000 실링(당시 미화 80-90달러) 정도로 현지에서는 상당히 비싼 편이었지만, 목회자가 되려는 지원자는 끊이지 않았다.
레이첼 선교사는 BEE의 재생산 정책에 따라 이 학생들을 중심으로 2009년 10여 개의 훈련센터를 케냐 각지에 열고 훈련센터마다 첫 세미나에 직접 참석하여 학생들을 격려하고 그곳에서 가르칠 현지 인도자도 소개했다. 또한 BOCOT 출신의 첫 아프리카인 선교사를 허입했다. 목회자 과정이 아닌 성경 공부 과정으로 개설한 세미나는 과목 당 학습서 인쇄비의 5배 정도인 5달러를 학비로 정했다. 서구로부터 무엇이든지 받는 것에 익숙한 아프리카인들에게 학비를 내고 배우는 것은 익숙하지 않았다. 하지만 학비를 내고 배운 사람들이 그럴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입에서 입으로 소문을 내며 다니자 학생들은 늘어나기 시작했다. 레이첼 선교사는 2012년 8월 BEE 아프리카 컨퍼런스로 지금까지 공부한 학생들의 졸업식을 마치고 BEE Korea를 사임했다.
조 선교사 생각에는 아무리 기도하고 궁리해도 동아프리카 사역을 맡을 사람은 현재로서는 박은형 선교사 밖에 없었다. 하지만 박 선교사는 이미 네팔과 인도네시아에서 사역을 안정적으로 수행하고 있었다. 제안을 받아 들일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하지만 기도하면 할수록 성령님께서는 계속 박 선교사에게 동아프리카에 관해 제안하도록 부담을 주셨다. 조 선교사는 내키지 않는 맘으로 별 기대감 없이 박 선교사에게 동아프리카 사역을 맡아 달라고 메시지를 보냈다. 그러자 박 선교사에게 바로 답이 왔다. 동아프리카를 맡겠다고.
조 선교사는 나중에 박 선교사에게 어떻게 바로 동아프리카를 맡겠다고 수락했는지 물었다. 박 선교사는 조 선교사의 메시지를 받자마자 까맣게 잊고 있던 30여년 전 중고등학생 시절 하나님 앞에 했던 서원이 생각났다. 출석하던 교회에서 아프리카에서 선교하는 선교사가 집회를 했고 집회가 끝날 무렵 그 선교사가 아프리카 선교사로 헌신할 사람은 일어설 것을 초청했을 때 자신이 일어나 아프리카 선교사로 헌신했단다. 박 선교사는 잊었지만, 하나님은 기억하셨고 그분의 때가 되자 부르셨다.
박 선교사가 동아프리카를 맡으며 사역은 들불같이 동아프리카에서 번져 나갔다. 그때까지 지역은 키수무, 종족은 루오, 교단은 성공회 중심이었다. 하지만 2013년 중동 두바이에서 한인 교회를 담임하던 신철범 목사의 연락으로 BEE 사역이 케냐의 다른 지역과 종족으로 퍼졌다. 조문상 선교사는 그 사건을 다음과 같이 기억한다.
2013년 초 나는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의 고종영 선교사 집에 머물며 사역하고 있었다. 하루는 이메일을 보던 고 선교사가 나에게 한 이메일을 읽어보고 답을 하라고 했다. 의아하게 생각하며 이메일을 읽어보니 두바이 한인교회의 신철범 목사가 보낸 이메일이었다. 나는 10여년 전 중동 사역을 시작했을 무렵 두바이 신 목사 교회를 찾아가 예배 드리고 식사하며 교제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사우디에서 사역하는 고 선교사를 연결해 주었다. 신 목사는 그 후 고 선교사를 두바이로 초청해 BEE 과목을 자신이 담임하는 한인 교회 지도자들에게 가르치도록 했다. 그런데 이메일에는 자신의 교회가 케냐에서 사역 중인 김홍일 선교사를 허입했고 캅시고리아라는 곳에 훈련센터를 완성했단다. 그러니 BEE가 그 시설을 이용해서 현지 목회자를 훈련하도록 김 선교사에게 말했다며 김 선교사의 연락처를 보내왔다.
이후 몇 년간 캅시고리아는 케냐 BEE 사역의 거점이 되었다. 그곳을 통해 칼렌징 종족의 아프리카내지교회(Africa Inland Church, AIC) 교단으로 확장하며 우리 선교사들이 그 교단에서 선교사 비자를 받으며 케냐에서 사역할 문이 열렸기 때문이다. 그 후 마세노웨스트, 캅카르와, 모소이로트, 냔시옹고, 키탈레 등 케냐 중서부에 위치한 다양한 교단과 종족, 지역으로 번져 나갔다. 사역이 커짐에 따라 본부는 윤경환, 권태남, 신동준 선교사 가정 등 더 많은 본부 선교사를 케냐로 파송했고 여러 유닛의 현지인 선교사도 팀을 이루어 사역하며 케냐는 동아프리카 BEE 사역의 중심지 역할을 담당했다. 케냐 사역자들은 국경을 넘어 서쪽으로는 우간다와 남쪽으로는 탄자니아로 사역을 넓혔다.
거의 모든 BEE 사역이 그렇듯이 우간다 BEE 사역도 한 귀퉁이에서 시작해 우간다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우간다에서의 BEE 사역은 수영로교회가 우간다로 파송한 GMS 소속 이상덕 선교사를 통해 시작했다. 아내인 권민주 선교사는 오래전에 수영로교회에서 재직 중 BEE를 들었다. 후에 우간다 선교사로 가서 비교적 동부에 속하는 진자에 사역 기반을 잡고 교회 개척과 목회자 후원 사역을 하고 있었다. 이 선교사 부부는 2007년 BEE가 이웃 나라인 케냐에서 사역을 시작했다는 소식을 듣고 BEE 본부로 연락을 했다. 마침 8월 조문상 선교사가 BOCOT 2차 사역 일정이 잡혀 있어 이 선교사는 그 수업에 참여했다. 그리고 자신이 사역하는 진자에서 2008년에 첫 그룹을 시작하기로 했다. 2008년 조 선교사는 우간다 첫 사역을 위해 케냐-우간다 국경을 넘던 때를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BOCOT 사역을 마치고 마타투(대중교통수단인 승합차) 지붕에 짐을 싣고 국경 도시인 부시아로 갔다. 트럭들이 줄지어 서 있는 비포장 도로는 바람이 불 때마다 먼지를 사정없이 휘날렸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국경 검문소도 출입국 관리자도 없고 현지인들은 국경을 자유롭게 넘나들었다. 나는 어찌할 바를 몰라 커다란 가방을 끌고 작은 가방은 등에 메고 케냐 쪽에서 우간다로 걸어 갔다. 옷차림이나 피부 색이 눈에 띄었지만, 그 누구도 제지하지 않았다. 케냐 출국 도장도 없이 우간다로 들어서니 허름한 건물이 있고 “Immigration”이라고 적혀 있는 조그마한 창구가 있었다. 창구 주위에는 서너 명이 양 손에 각각 다른 돈을 들고 케냐 돈을 우간다 돈으로 환전해주기 위해 내게 소리치며 손짓을 한다. 멋쩍은 웃음으로 그들을 지나쳐 창구로 가 여권을 내미니 한국에서 이미 우간다 비자를 받았기에 직원은 사무적으로 입국 도장을 찍어주었다. 그리고 먼지가 풀풀 날리는 길을 가방을 끌고 메고 더 걸어가니 이상덕 선교사가 팔을 벌리고는 웃는 얼굴로 맞으며 아프리카 억양이 강한 영어로 외친다. “Welcome to Uganda!”
그렇게 시작한 그룹이 2011년 졸업하고 그들을 통해 BEE 사역이 우간다의 중부 중도시에 자리를 잡았다. 그 사이 이상덕 선교사는 자녀 교육 문제로 수도 캄팔라로 이사하며 근교에 선교사들이 세운 신학교인 All Nations Theological School(ANTS)에 BEE를 소개해 2010년 BEE는 ANTS와 사역양해각서를 체결하고 동역을 시작했다. 그때 이 선교사는 캄팔라에서 더 동쪽에 있는 마사카로 새로 온 김유신 선교사(기독교성결교단)에게 BEE를 소개해 김 선교사는 꾸준히 ANTS 학생과 함께 공부하고 후에 BEE 사역에 동참했다.
본부에서 동아프리카로 파송한 윤경환 선교사가 우간다 국경에서 멀지 않은 케냐의 마세노웨스트에 자리를 잡고 우간다 사역도 함께 해 나가면서 우간다 BEE 사역이 좀 더 활력을 얻었다. 윤 선교사는 우간다 사역이 확산하던 때를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그러던 중 케냐 컨퍼런스에 참석한 우간다 목사의 요청으로 국경까지 가서 목사를 만났다. 그 목사의 소개로 우간다 동부 음발레와 그 근처에 있는 교회와 목회자들을 소개받으면서 BEE 사역이 급속도로 우간다에 퍼지기 시작했다. 당시 20명의 열정적인 목사들이 음발레에 모였고, 케냐 현지 선교사들의 헌신으로 보통 5-6년 배우는 세 과정(DPM, DCL, DBS)의 19과목을 1년 반 만에 마치면서 계속 재생산하며 불붙기 시작하였다. 오도이 목사는 자신의 강력한 네트워크를 통해 중부를 지나 서부 캄팔라와 엔테베 그리고 콩고 접경과 그 넘어 콩고까지 들어가 세미나를 하였다. 그러면서 팬데믹 전까지 우간다 전역에 47개의 그룹이 생겼다.
그리고 BEE는 빅토리아 호수 안의 섬에도 들어갔다. 윤 선교사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빅토리아 호수 위의 많은 섬으로 구성된 카랑갈라의 한 목회자는 말씀 공부에 목말라 엔테베까지 가서 BEE를 공부했다. 그는 자신이 사는 섬과 주위 섬들에는 성경을 배울 수 있는 곳이 전무하다며 우리를 설득하여 조각배 같은 나룻배를 4시간이나 타고 들어가야 하는 섬 몇 곳을 소개했고, 결국 그곳에도 BEE 세미나 그룹이 생겼다. 엔테베에서 먼저 배운 학생들이 그 섬들에 번갈아 들어가 세미나를 인도하고 있다.
우간다는 영어가 공용어이지만, 우간다인 일부만 사용하며 대부분은 고유 언어인 루간다어를 사용한다. 이를 알게 된 BEE는 팬데믹 기간 중 사역 자체가 어려울 때 BEE 학습서를 루간다어로 번역하기 시작해 2023년부터 출판을 시작했다. 이제 현지인 선교사와 인도자들이 영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곳에서도 교회 지도자 그룹을 모아 가르칠 수 있기에 우간다에서의 BEE 사역은 앞으로 더욱 확장될 것이다.
탄자니아 사역의 시작은 2011년 케냐와 탄자니아 국경지대인 미고리의 교회에서 목회를하는 케냐 인도자에 의해 《일대일 제자양육 성경공부》를 가르치면서 시작했다. 이후 2015년 당시 BEE 이사인 정진희 권사가 탄자니아에 있는 YWAM 소속 이동선 선교사를 통해 카라투에서 《일대일 제자양육 성경공부》 등 세 과목을 진행하였고, 2018년 마구구에서 홍향임/완자 목사 부부를 통해 DPM, DCL일부 과목이 담임하고 있는 목회자와 교회 지도자들을 위한 교육으로 사용되는 등 한국인 선교사들의 네트워크를 통해 사역이 추진되어 왔다.
2018년부터 동아프리카 지부장인 박은형 선교사와 탄자니아 국가 담당인 신동준 선교사는 아루샤에 있는 목회자 그룹을 대상으로 BEE 사역을 본격적으로 열기 시작했다. 신동준 선교사는 이 시기의 BEE 확장에 관해 다음과 같이 적는다.
그간 진행했던 사역 방식과 다른 점은 2006년 케냐에서 동아프리카 사역을 시작한 이후, 그동안 케냐에서 훈련받은 현지 선교사와 인도자들의 인적 네트워크를 통해 BEE가 탄자니아에 소개되었다는 점이고, 탄자니아 학생들을 동원하고 세미나를 인도한 것도 한국인 선교사가 아니라, 케냐 인도자였다는 점이었다. 그들은 케냐에서 영어로 공부했지만, 동아프리카 공용어인 스와힐리어를 사용할 수 있었기에, 국경을 넘어 스와힐리어만을 대부분 사용하는 탄자니아에서 스와힐리어로 사역을 쉽게 전개했다는 점이었다. 따라서 2019년 사역은 탄자니아 BEE 사역의 전환기로 볼 수 있다. 탄자니아에서 세미나를 수강한 학생의 수는 2019년부터 증가하여 연 인원은 연 900-3,500명에 달한다.
특히, 팬데믹이 확산되던 시기에도 탄자니아의 BEE 사역은 멈추지 않았다. 국가의 코로나 프리 정책이 있었기도 했지만, 1년 6개월 정도 케냐 사역자들이 탄자니아에 들어가지 못할 때, 탄자니아 학생들은 그들 스스로 자신들이 배운 과목들을 이웃 도시로, 자신들 고향의 도시로, 동료 목사의 교회나 교단에 가서 학생들을 모으고 세미나를 인도하기 시작했다. 사역은 자연적으로 현지인이 현지인을 가르치고 인도하는 사역이 되었다. 그 결과 팬데믹이 끝나가던 2020년 5월 350여명의 첫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탄자니아 국가 담당으로 사역을 하는 해군 장교 출신 신동준 선교사는 탄자니아 사역에 관해 이렇게 말한다.
탄자니아에서 BEE 사역을 하는 느낌은 총과 총알을 충분히 갖추고 전쟁터에 나가는 병사 같다. 사역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던 2019년에 이미 준비된 케냐 인도자가 다수 있었을 뿐 아니라 동아프리카 지부장을 중심으로 케냐 선교사들이 19과목의 학습서를 스와힐리어로 이미 번역해 놓은 상태에서 사역을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BEE Korea는 이 모든 것을 사전에 알고 준비한 것은 아니었다. 전략적인 사고와 인위적인 노력이 아니라 열정을 다해 선교하시는 하나님을 따라 끊임없이 도전하고 움직인 결과였다.
탄자니아는 다른 아프리카 국가와 달리 다양한 종족과 언어가 존재함에도 1964년 건국이후 국가 통합 정책으로 스와힐리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도록 강력한 정책을 추진하였기에 언어와 종족적 장벽 없이 사역이 급속도로 전파될 수 있었다. 또한 역사적인 면에서 탄자니아는 서구 열강에 의한 식민지 시대를 경험한 다른 아프리카 국가와 다른 면이 있었다. 서양 선교사들이 예수님과 복음을 전할 때 그들은 지배자에 의해 강요된 종교가 아니라, 마치 조선 말기처럼 해방자의 이미지가 있었다. 동아프리카 해안은 오랜 기간 지리적으로 중동과 가깝기에 그들의 지배를 받아 왔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환경적인 배경을 바탕으로 탄자니아 사역은 역동적으로 펼쳐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탄자니아 사역에서는 이런 배경 외에도 설명할 수 없는 요인들이 있다. 이에 관해 신 선교사는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그것은 바로 탄자니아 그리스도인들이 가지고 있던 “말씀에 대한 목마름”이다. 탄자니아에 오래 사신 교포가 한 말이 있다. “이곳은 남한의 9.5배 되는 면적을 가진 나라이지만, 인구는 남한과 비슷합니다. 이곳은 땅이나 사람들의 마음 또는 영혼이 다 비어 있어요.” 주요 도시를 버스로 이동하려면 꼬박 하루가 걸린다. 여행을 하다 보면 그 광활함에 압도될 때가 있다. 탄자니아는 케냐에 비해 경제 수준이 낮고, 내륙 쪽으로 또는 주변 국가로 나가면 매우 열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슬람과 토속신앙과의 혼합주의, 물질주의에 맞서 탄자니아가 말씀사역의 중심이 될 수 있다는 소망을 품게 하는 곳이다.
신 선교사는 한 졸업식이 특히 그의 기억에 남아 있다.
2020년 5월 카토로 졸업식이 생각난다. 졸업식에 참석하기 위해서 일행은 아루샤에서 비행기를 타고 므완자에 도착하였다. 졸업식을 하는 카토로는 거기서 차로 다시 반나절을 가서 빅토리아 호수를 카페리로 넘어야 했다. 거기서 다시 4시간 정도 진행하여 게이타 주의 카토로의 졸업식 행사가 있던 교회에 저녁 늦게 도착했다. 카메라 조명을 키면 온 동네가 정전이 되는 상황에서도 학생들은 찬양을 개사해서 특별 순서로 특별 찬송을 불러주었다. 그 가사의 내용은 이곳까지 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더 깊이 알게 해 주어 감사하다는 내용이었다.
말씀에 목마른 땅, 탄자니아에서 말씀 사역을 하는 BEE는 말씀의 비가 되어 마른 대지를 촉촉히 적신다. 비교적 최근에 사역을 시작한 탄자니아지만, 2027년까지 현지화를 이루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
서아프리카의 가나는 BEE Korea가 케냐 사역을 막 시작한 2007년 사역의 문이 열렸다. 가나에서 오래 사역 중인 최용순 선교사가 세운 단체(West African Mission, WAM)가 운영하던 신학교에서 BEE 세미나를 요청했다. 한국에서의 만남을 통해 가나에서 BEE 사역을 하기로 결정하고 이미 케냐 사역을 시작한 싱가포르인이었던 레이첼 선교사가 가나 사역도 담당하도록 했다. WAM과 협력 사역을 시작했지만, 전통적인 한국 선교사와 외국인 선교사의 협력은 난항을 겪었다.
그러던 중 2008년 BEE의 회원이 잘 아는 한 가나 선교사(Completing Christ’s Commission, CCC)가 병이 들어 자신이 운영하던 신학교를 아직 젊은 아들에게 맡기고 가나를 떠나자 지인인 BEE 회원을 통해 BEE에 협력을 요청했다. 젊은 부부는 레이첼 선교사와 협력하기에 더 적합했다. 따라서 레이첼 선교사는 CCC와의 동역을 결정하고 2008년 가나로 이주해 사역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레이첼 선교사는 테마와 워라워라에서 사역을 시작하고 2009년 3월 BEE 모임을 개최했다. 그러나 레이첼 선교사가 개인 사정으로 BEE Korea를 떠나게 되자 김용달 선교사가 가나 사역을 이어받았다. 김 선교사는 물리학 박사로 싱가포르의 IT 연구소에서 일할 때 조 선교사를 만났다. 김 선교사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한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의 감격을 경험하고 하나님을 위해 살겠다고 다짐했지만, 선교사가 되겠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주변의 선교사들을 보면 늘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 우리 가정에서 가장 먼저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넘치는 사랑을 받았지만, 세상의 성취만을 바라며 사는 삶이 옳은지 늘 마음에 갈등이 있었다. 그럼에도 믿음 좋은 성도로 살면 된다고 생각했다. BEE 사역에 대해서 알게 된 계기는 1999년 싱가포르에서 직장 생활 중에 당시 BEE Korea 선교사로 그곳에 파송된 조문상 선교사 부부를 만난 것이다. BEE 학습서로 공부하면서 주말에는 현지인을 대상으로 BEE 사역을 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조 선교사 가정이 별로 아는 이 없는 싱가포르에 선교사로 익숙하지 않은 삶을 살 때, 하나님은 다양한 방법으로 조 선교사 가정을 위로하셨다. 그중의 하나가 김용달 집사를 통해서였다. 김용달 집사는 틈틈이 조 선교사 가정을 찾아 즐거움을 안겼다. 하루는 조 선교사 부부를 무조건 끌고 나가 가전 제품 판매점으로 가더니 주로 집에 머무는 김정년 선교사가 무료할 수 있으니 텔레비전을 하나 고르라고 했다. 아무리 필요 없다고 거절해도 소용이 없었다. 그리고 며칠 후 그는 CD 플레이어를 가지고 왔다. 이는 그저 일부에 불과하다. 그러다 2002년 말 김 집사는 한국으로 귀국했고, 조 선교사 가정도 본부 사역으로 2004년 귀국했다.
조 선교사는 김 집사에게 연락하고 만났다. 그간 삶의 이야기는 안타까웠다. 김 집사는 고학력이라는 이유로 직장을 잡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 선교사는 일단 BEE 기도 모임에 김 집사를 초대했다. 김 선교사는 이렇게 말한다.
비록 많지 않은 사람이 모였지만 찬양과 기도뿐만 아니라 평신도 인도자를 단기 선교사로 안수하여 선교지로 파송하는 모습에 매료되었다. 2005년 1월 BEE Korea의 사역자가 되기 위해 인도자훈련학교를 수료했다. 그리고 예비 인도자로 임명되어 세미나에 참석해 다양한 과목을 공부하면서 성경 공부에 눈을 뜨게 되었다.
예비 인도자가 되자 김 집사는 조 선교사와 수원에서 BEE 세미나를 함께 인도했다. 그러면서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한다. 다음은 김 선교사의 이야기이다.
2005년 어느 날 《성경연구방법1》 세미나가 있어서 수원 온누리교회에 가기 위해 지하철 통로를 함께 걷고 있던 조 선교사는 내게 뜬금없는 질문을 했다. “혹시……선교사가 되고 싶지 않으세요?” 하나님의 초대는 그렇게 내게 다가왔다. 갑작스러운 질문에 의아해하는데 초대 내용은 매우 단순했다. “BEE Korea 선교사가 되면 세계 어디든 공짜로 사역 다닐 수 있어요.” 그동안 선교사가 되는 것을 꿈꿔왔지만 왠지 자격이 안될 것 같아 망설였는데, 하나님의 계획은 내 생각과 달랐다. 조 선교사의 초대는 이어졌다. “그런데, 여기에 일단 들어오면 세상으로 돌아갈 수 없어요.” 인생 가장 밑바닥에서 부르시는 하나님의 강력한 음성은 마치 물고기 뱃속에 숨은 요나를 찾으시는 외침 같았다. 내가 주님께 드린 약속, 그동안 내 마음대로 산 세월, 그래서 주님께 죄송한 마음……
김 선교사는 자신이 선교사된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은 감회를 가지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BEE Korea 선교사가 되고 제일 처음 방문한 곳이 들어가기 힘든 사우디아라비아와 아프가니스탄이었다. 아마도 하나님께서 초짜 선교사를 단기간에 철저하게 훈련하시기 위해 선택하신 최상의 장소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하나님께서는 그곳에도 목숨을 걸고 믿음을 지키는 남겨진 자가 있음을 보여주셨다. 지난 세월을 생각하면 내 인생에서 부르심을 받고 즉시 선교사로 헌신한 것이 가장 잘한 결정이라고 생각한다. 반면 아쉬움이 남는 것은 조금 더 일찍 선교사로 헌신하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나를 가장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 지금도 가장 선한 길로 인도하고 계시리라 믿는다.
김용달 선교사 가정은 2009년 8월 3살인 예지와 태중의 아이와 함께 8월 가나에 도착했다. 김 선교사는 레이첼 선교사의 그룹 뿐 아니라 도착한 해에 아부리, 호훼, 아샤이만 지역에서 사역을 시작하고 2011년에는 아크라, 콰미크롬, 자시칸에서 새로운 그룹을 만들어 제자훈련을 왕성하게 시작했다. 레이첼 선교사의 워라워라 그룹은 테마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근처 그 지역에서 가장 큰 도시인 호훼에 하나님의성회 교회에 새로운 그룹을 개척해 한번 방문하여 두 그룹에서 세미나를 했다. 하나님의 은혜로 시작된 가나 사역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확장되어 1년 6개월이 지나 첫 번째 졸업식을 했고, 지난 15년 동안 15회의 졸업식을 통해 54개 그룹에서 433명이 졸업했다.
가나의 제자훈련 사역이 열매를 맺기 시작하자, 김 선교사는 서아프리카 다른 나라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서아프리카에는 많은 불어권 국가가 있지만, 김 선교사는 언어 장벽으로 영어권인 라이베리아 사역을 시작하기로 했다. 사역을 시작하기 위해서 라이베리아 내에서 제자훈련에 관심을 갖고 BEE 사역을 함께 일굴 현지인 동역자가 필요했다. 김 선교사가 사역에 대한 열망으로 조급한 마음이 들 때, 2013년 구에 목사를 소개받아 함께 사역하기로 했다. 김 선교사는 구에 목사와의 동역을 이렇게 회상한다.
구에 목사가 먼저 제자훈련에 관심이 있다고 해서 난 안도했지만, 구에 목사는 첫 과목부터 참여하지 않고 평신도 21명만 보냈다. 4개월 뒤 이어진 《갈라디아서》 세미나에는 이런저런 이유로 12명만 참석했다. 그리고 그나마 세미나를 마칠 때 9명만 남아 나는 사역을 중단해야 했다. 그 일을 통해 지도자가 훈련에 앞장서서 동참하지 않으면 그 사역은 성공할 수 없다는 교훈을 얻었다.
김 선교사는 라이베리아의 목회자 대부분이 번영신학에 목매고 있음을 보았다. 라이베리아의 열악한 환경 때문이다. 진정한 영적 부흥을 위해서는 목회자들이 먼저 하나님의 말씀으로 훈련받고 변화하는 것만이 라이베리아의 소망임을 깨달은 김 선교사에게 라이베리아 사역에 관한 열망은 마음의 부담이 되었다. 라이베리아 사역의 문을 계속 두드린 결과 2018년 하나님의성회의 탐바 목사를 통해 캘드웰 그룹의 45명의 훈련생을 두 그룹으로 나누어 훈련을 시작했다. 첫 그룹의 실패를 교훈 삼아 이번에는 지도자인 탐바 목사와 그의 아내인 콤포트 목사, 그리고 목회자 여러 명이 제자 훈련에 참여하도록 했다. 중간에 탐바 목사의 훈련 포기와 팬데믹 등 어려움도 있었다. 하지만, 이 어두운 터널의 시간에도 하나님은 반전을 계획하고 계셨다. 김 선교사는 다음과 같이 반전을 회상한다.
그런데 2022년 7월 COVID-19가 잠잠해지면서 하나님의성회 신임 총회장으로 선출된 탐바 목사가 총회 임원과 노회장을 대상으로 BEE 제자훈련을 받기로 총회에서 결정되었다고 알려왔다. 실로 하나님의 역사하심이었다. 2023년 1월 몬로비아 굿뉴스 하나님의성회 교회에 총회장 탐바 목사외 총회 임원 36명이 《일대일 제자양육 성경공부》 제자훈련에 참가하였다. 나중에 들은 바는, 라이베리아 하나님의성회에서 코트디부아르 하나님의성회 총회장인 오노레 목사를 부흥강사로 초청했는데, 그분이 코트디부아르에서 BEE 사역이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다고 얘기했다고 한다.
그후 김 선교사는 라이베리아를 방문할 때마다 두 주를 머물며 두 세미나를 인도했다. 캘드웰 그룹은 2023년 10월 본부 인사가 참석한 가운데 컴포트 목사 외 총 18명이 라이베리아 1회 졸업식을 통해 DPM 졸업장을 받았다. 총회 임원 그룹은 2024년 말 졸업 예정이다. 어려운 라이베리아 사역을 돌아보며 얻은 교훈을 김 선교사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라이베리아 사역을 통해서 그룹 지도자가 반드시 제자훈련에 참여해야 한다는 것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서 기다려 주는 것, 그리고 모든 상황에서 신실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일은 인간의 힘과 노력보다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더 중요함을 깨닫게 되었다.
김 선교사가 서아프리카의 영어권에 자신의 사역을 집중하고 있을 때, 하나님은 전혀 기대하지 않은 방법으로 불어권 사역의 문을 여셨다. 김 선교사를 파송한 온누리교회는 2014년 융합선교를 온누리교회의 선교 방향으로 잡았다. 그리고 인도네시아와 서아프리카에서 융합선교를 시범적으로 추진하기로 정했다. 서아프리카 융합선교 팀장이던 임훈 장로는 융합선교를 시험하기에 적합한 나라를 찾다 코트디부아르를 선정했다. 임 장로는 그해 말 TIM의 한충희 목사와 함께 아비장을 방문하여 아비장한인교회와 장로교단, 한인선교사회에게 온누리교회 융합선교에 대해 설명하고 코트디부아르에서 융합선교를 시행하기로 합의했다. 임 장로는 한인선교사들과의 모임에서 바울선교회 소속 선교사로부터 “서부아프리카 목사들의 성경 일독 비율이 10%”라는 이야기를 듣고 목회자들을 대상으로 BEE를 시행하면 좋겠다는 의견을 현지 장로교단장인 백성철 목사에게 제안하고 2015년에 계속 협의하기로 했다.
백 목사는 2015년 초 한국에 와 온누리교회와 북서아프리카 융합선교팀을 방문하고 협력 방안을 논의하여 코트디부아르 장로교단 신학교인 입테시신학교에서 BEE 사역을 시행하기로 했다. 그 이후 BEE 본부는 옆 나라인 가나에서 서아프리카 BEE 사역을 담당하는 김용달 선교사에게 아비장한인교회에서 현지인 목회자를 대상으로 제자훈련을 하기로 했다는 연락을 했다. 그해 11월 김 선교사는 본부의 조문상 선교사와 아비장한인교회를 방문해 BEE 사역을 소개하고 사역양해각서를 체결했다. 김 선교사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는다.
아비장한인교회의 하드웨어와 BEE Korea의 소프트웨어가 융합된다면 코트디부아르에서 매우 효과적으로 사역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서둘러 《일대일 제자양육 성경공부》 학습서를 불어로 번역 출판해, 2016년 2월 8일부터 12일까지 첫 세미나를 하였다. 불어에 능통한 백인호 목사가 현지인 목사 22명을 대상으로 《일대일 제자양육 성경공부》 세미나를 담당하고, 김용달 선교사는 아비장한인교회 백성철 목사님과 성도 9명을 대상으로 제자훈련 기본과정을 시작하였다.
코트디부아르 사역의 열매에 관해 김 선교사는 이렇게 요약했다.
코트디부아르에서는 지난 8년 동안 총 13번의 졸업식을 통해 63개 그룹에서 538명이 기본 과정인 DPM을 수료하였고, 그 가운데 79명이 사역자로서 제자훈련에 참여하고 있다. 이미 두 번째 과정인 교회 지도자과정(Diploma in Church Leadership, DCL)을 수료한 훈련생이 15명이며, 3세대 인도자까지 사역자로 활동하는 것은 무척 고무적이다. 그리고 코트디부아르 사역을 통해서 불어권 사역을 위한 불어 학습서 13권과 청소년 교재인 라구가 4권까지 번역 출판된 것은 또 하나의 결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코트디부아르 사역은 지금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요, 신실한 주님의 제자들이 아낌없이 헌신하고 협력한 결과다.
가나의 이웃 나라인 토고는 작은 나라로 불어권이다. 김용달 선교사는 이 나라에서의 BEE 사역을 다음과 같이 계획하고 추진했다.
토고는 불어권 국가로 서아프리카 국가의 국민은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지만, 한국인은 입국 비자를 받아야 한다. 그래서 나는 토고 사역은 그 사람들과 현지 언어인 에웨 및 문화를 공유하는 가나 그리스도인들을 먼저 훈련해 그들을 토고로 보내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2016년 토고 국경 도시인 아플라오에서 31명이 DPM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2년여 뒤인 2018년 8월에 16명이 졸업했다. 그런데 기대와 달리 제자훈련 과정을 마친 누구도 토고 사람들을 제자 삼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다시 한번 그분의 방식으로 사역의 문을 여셨다. 김 선교사는 다음과 같이 적는다.
그러던 차에 콰미크롬 지역에서 제자훈련을 받은 다니엘 사역자로부터 자신이 토고의 바두 지역에서 교회 지도자들을 대상으로 제자훈련을 하고 싶다는 연락이 내게 왔다. 다니엘 사역자는 토고 사람으로 토고 자매와 결혼하여 가나의 콰미크롬에 살면서 제자훈련을 받았다.
이어서 다니엘 사역자의 토고 사역을 김 선교사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다니엘 사역자는 불어와 부족 언어인 에웨로 소통이 가능하다. 이렇게 토고 사역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법으로 시작되었다. 2021년 1월 코로나가 종식되지 않아 국경이 봉쇄된 상황에서 다니엘 사역자는 20명의 바두 사람들과 제자훈련을 시작하였다. 바두는 중소 도시이기에 생활이 바쁘지 않고 훈련에 관심이 많았다. 다니엘 사역자는 봉쇄한 국경을 우회해 오토바이 뒤에 매달려 산길을 통해 오가며 기본사역 과정을 모두 가르쳤다. 다니엘 사역자의 고생과 헌신을 통해 팬데믹이 종식되고 한국에서 손님들이 참석한 2023년 10월 27일 제1회 졸업식에서 11명이 영광스러운 졸업식을 하였다. 토고 사역이 다니엘 사역자의 순종으로 시작되고 졸업까지 이어진 것은 지금도 그의 자녀를 사랑하시고 성숙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다.
위에 언급한 나라 외에도 BEE는 아프리카의 수단, 남수단, 알제리, 에티오피아, 콩고, 말라위, 남아프리카공화국, 이집트, 카메룬에서 사역했고, 대부분 이 나라에서 지금도 BEE 사역은 진행하고 있다. 수단은 남과 북으로 분리하기 전인 GMS 소속 정은희 선교사의 요청으로 2006년 수단복음장로교단과 목회자 훈련을 위한 사역양해각서를 체결하며 시작했다. 몇 차례 DPM 졸업식까지 진행했던 수단에서의 BEE 사역은 수단이 남북으로 나뉘면서 북 수단이 기독교에 대한 탄압을 더하고 선교사들을 추방하면서 2013년 정은희 선교사도 추방당하고 멈추었다. 그후 정은희 선교사는 2014년 남수단에 들어가 BEE 사역을 시작하고 지금까지 사역을 이어오고 있다.
알제리는 수단보다 앞선 2005년 알제리와 튀니지에서 사역하던 한 한국인 선교사가 BEE Korea를 찾아 사역을 요청하여 첫 사역을 시작했다. 불어권이기에 불어에 능통한 백인호 목사가 맡아 몇 년 사역을 이어갔다. 하지만 말씀 훈련 자체보다는 재물에 관심이 많았던 현지 책임자와의 관계 문제로 사역 자체를 중단해야만 했다. 사역은 중단했지만 불어로 학습서를 번역하던 아주 장로와는 그 이후 장로가 하늘나라에 가기까지 동역했다. 아주 장로는 언어에 달란트를 받은 사람으로 영어, 불어, 아랍어, 스페인어에 능했다. 그리고 학습서 한 권을 1-2주 만에 번역했다. 너무 번역이 빨라 혹 번역의 정확도를 의심했지만, 현재 TIM 본부장으로 섬기는 한충희 목사가 프랑스 대사관에서 외교관으로 근무하던 시절 카메룬에서 BEE 학습서로 가르치며 확인한 결과 고칠 것 별로 없다며 번역의 정확도를 확인해주었다. BEE Korea는 아주 장로를 통해 많은 BEE 학습서를 불어와 아랍어로 번역할 수 있었다. 아주 장로는 평생 독신이었다. 그 이유를 장로에게 묻자 그리스도인 수 자체가 적은 알제리에서 그리스도인 자매를 만나지 못해서라고 했다.
말라위에서의 BEE 사역 역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볼 수 있다. 팬데믹 기간 중인 2021년 말라위에서 인터넷으로 BEE를 수강하던 GMS의 이창기 선교사(치과 사역)가 말라위에서 확실한 사역 계획 없이 BEE Korea의 협력선교사가 되었다. 그후 얼마 되지 않아 어떻게 알았는지 BEE Korea로 말라위의 쏘미(Somy Jacob)라는 목회자가 자신은 난민촌에서 목회하는 목사로 그곳에 말씀 훈련이 필요하다고 연락해 왔다. 그는 말씀 공부에 관한 열망을 설명한 뒤 이렇게 메시지를 마쳤다(괄호 안은 필자 첨가). “We (are) waiting (for) your help, sir because we want (to) learn (the Word of God). 우리는 배우기 원하기에 선생님의 도움을 기다립니다.” 본부는 즉시 동아프리카를 담당하는 박은형 선교사에게 연결하여 훈련 필요성과 가능성을 논의해 보도록 했고, 난민 수용소이기에 재정적으로 어렵지만, 말씀 사역을 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본부는 박 선교사와 의논하여 이창기 선교사에게 난민촌을 방문하여 BEE 사역을 진행하도록 의뢰했다. 이 사역은 현재도 진행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