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 초 한국에 본부를 두고 싱가포르에 지부를 둔 BEE Korea는 주로 아시아에 사역을 집중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분의 말씀이 아시아를 넘어 이슬람의 땅인 중동과 중앙아시아로 가도록 길을 열어 주셨다. 중동은 2000년에, 그리고 중앙아시아는 2005년에 BEE 사역을 시작했다.
조 선교사가 BEE Korea의 첫 선교사로 남아시아 사역의 관문국가인 싱가포르에 정착한 후 얼마 되지 않은 2000년 초 중동의 사우디아라비아와 카타르에서 사업하며 선교에 눈을 뜬 그리스도인 사업가(김비호 집사)가 그 지역 거주 외국인 지하교회의 목회자들에게 말씀 훈련이 필요함을 깨달았다. 전문 교육을 받은 목회자가 아닌 경제적 목적으로 중동에 온 평신도 그리스도인들이 목회를 했기 때문이다. 그 사업가는 그들을 훈련할 기관을 찾다가 BEE Korea 본부에 연락했다. 본부는 중동이 싱가포르 지부가 담당하는 지역이기에 조 선교사가 판단해서 추진하라고 했다. 조 선교사는 1990년대 말 온누리교회 외국어 예배 목회자를 대상으로 BEE 사역을 한 경험이 있었다. 그는 외국인들이 경제적 목적으로 한국에 왔기에 교회 지도자마저도 신앙에 관한 관심과 열심에 한계가 있음을 경험했다. 그러한 이유로 조 선교사는 카타르에 있는 외국인이 BEE 사역의 대상이라는 말에 별 흥미를 갖지 않았다.
2000년 4월 카타르를 실사 차 방문한 조 선교사는 그곳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외국인들을 보고 다음과 같이 적었다.
본부는 싱가포르 지부에 있던 내게 카타르를 방문해 사역 타당성을 조사하도록 했다. 나는 고개를 갸우뚱 하며 그해 4월 카타르를 방문해서 실태를 확인했다. 주님은 내 눈을 열어 이슬람의 심장부인 그곳에서 자신들이 그곳에 온 돈을 벌겠다는 목적이 단숨에 날아갈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교회를 세우고 믿음생활을 억척스레 일구어 나가는 사람들을 보게 하셨고, 제대로 된 목회적 훈련도 없이 직장을 갖고 목회하는 그들이 말씀으로 세워질 때 바로 그 이슬람의 심장부에서 무슬림들에게 예수님을 전파하는 영적으로 건강한 도구가 될 수 있음을 깨닫게 하셨다.
그렇게 카타르에서 외국인 교회 지도자를 대상으로 BEE 사역을 시작했다. 하나님은 주로 인도인과 필리핀인을 중심으로 사역의 기회를 주셨다. 초기 중동 사역에서 하나님은 조 선교사에게 그분의 뜻 일부를 보여주셨다.
주기적으로 방문해 같이 시간을 보내며 필리핀인과 인도인에 대해 더 이해하게 되었다. 위험을 감수하는 신앙적 열정도 그렇고 대부분 그들은 한국인보다 훨씬 영어도 잘 구사했으며 열악한 환경에 잘 적응했다. 잘 훈련하면 그들은 좋은 동역자, 더 나아가 세계 선교의 현장에서 연합하여 뛸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는 실로 하나님이 주신 비전이었다.
그 당시 BEE 말씀 훈련을 받았던 지금은 카타르에서 국제 교회 지도자로 섬기고 있는 인도 국적 학생은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성경 학교나 신학 훈련이 전혀 없는 카타르에서 체계적으로 성경을 공부하게 된 것은 우리 기도의 응답이었다. 실망스럽게도 세미나가 거듭되며 초기 학생 중 많은 이가 탈락했다. 하지만 BEE Korea의 선교사들은 하나님이 주신 비전에 시선을 고정하고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사역을 지속했으며, 결국 2006년부터 카타르에서 배출한 인도자들이 재생산을 시작했다. 하나님의 은혜가 BEE 사역 가운데 계속하면서 카타르에서 BEE 사역에 불이 붙기 시작했다. BEE로 훈련 받은 학생들이 자원해서 BEE Korea의 인도자와 선교사로 헌신했다.
그 결과 2024년에는 카타르에는 영어 외에 다양한 언어로 세미나를 인도할 수 있는 6유닛의 선교사와 42명의 헌신한 인도자가 활동한다. 그들은 대부분 케럴라 출신 인도인으로 그들에 관해 조 선교사는 다음과 같은 글을 적었다.
카타르에 있는 케럴라 출신 인도인 그룹이 먼저 이 부르심(세계 선교에 동참하라는)에 응답했다. 인도자가 되자 그들은 카타르에 있는 자신의 가까운 신앙 동료에게 BEE를 소개하고 사람을 모았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그들은 자신의 고향인 케럴라에 BEE를 심기 시작했다. 첫 술에 배부르지 않았다. 하지만 끊이지 않고 그들은 도전했다.
하나님의 절묘하신 섭리로 섬기던 교회에서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고 가르치는 이단으로 몰려 쫓겨 난 이 그룹은 기도하며 교회를 개척하고 전 교인이 BEE를 배우고 가르치는 말씀 중심의 교회가 되었다. 그들은 말씀으로 충만해지자 하나님 섬기기를 목말라 했다. 이슬람 국가의 심장부에서 어디건 만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제자로 양육했다. 그들은 인도에서도 케럴라를 넘어 타밀나누, 우따르프라데시, 꼴까따로 연결 고리를 찾아 BEE를 퍼뜨렸다. BEE 학습서를 각 주의 언어로 번역하고 출판하고 계획을 짜고는 대부분 직장인인 자신들의 얼마 되지 않는 금쪽같은 휴가를 BEE 세미나를 위해 사용하며 자비량으로 인도의 각 지역으로 파고 들었다.
급기야 2018년에는 자발적으로 BEE Trust India를 설립하고 정부에 등록해 인도 전역에서 합법적으로 BEE 사역을 할 수 있도록 준비하고 사무와 학습서를 보관하기 위한 자체 건물도 마련했다. 그리고 이웃나라인 방글라데시에도 BEE 사역을 개척했다. 2020년에는 처음으로 현지화를 이루고 독립적으로 BEE 사역을 할 수 있는 BEE 사역의 형제 나라가 되었다.
카타르는 현지화의 좋은 예다. 그들은 안정적 사역을 위해 카타르 교회를 오랜 기간 기도한 끝에 카타르 복음주의 교회 연합(Evangelical Churches Alliance Qatar)을 통해 합법적 교회와 예배 처소로 인정받았고, 인도에서는 2018년 BEE Trust India라는 비영리법인으로 정부 등록도 마쳐 인도 어느 곳에서나 합법적으로 말씀 사역과 다양한 기독교 사역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앞에서 기술했듯이 현재는 인도의 12개 주와 방글라데시, 스리랑카, 필리핀에서 BEE 사역을 주도한다. 그들은 코로나 기간 중 비대면 사역을 활성화하여 호주, 미국, 캐나다 등 다양한 나라의 학생들도 양육하고 있다. 이렇듯이 독립한 BEE 카타르와 인도는 BEE Korea의 형제 기관으로 모든 면에서 서로 격려하며 긴밀하게 협력하고 있다.
카타르를 두 번째 방문하던 2000년 8월 카타르 사역을 마치고 조문상 선교사와 김비호 장로는 승용차로 카타르 국경을 넘어 메카와 메디나 두 이슬람 성지가 있는 사우디아라비아에 발을 디뎠다. 동부 다란의 김 장로 집에 여장을 풀고 김 장로는 나를 아람코(ARAMCO)로 데리고 갔다. 아람코는 미국 석유회사 시설로 그 안은 마치 미국 같았다. 당시 사우디 안에서는 여자는 외국인이라도 사우디 안에서는 어디를 가든 밖에서는 아바야라는 검은 옷을 입어야 했다. 하지만 아람코 안에서 외국인 여자들은 미국 같이 반라의 차림으로 다녔다. 또한 여자는 운전을 할 수 없었는데 그 안에서는 운전도 하고 다녔다. 더 놀라운 것은 그 시설 안에는 교회도 있었다. 사우디 안의 유일한 지상교회였다. 그곳에 필리핀, 남아프리카공화국, 이집트, 시리아, 팔레스타인 등 다양한 국적의 그리스도인 지도자들이 모였고 조 선교사는 그들에게 BEE 사역을 설명했다. 그러자 그들 대부분의 반응은 뜨거웠다. 그렇게 그곳에 있던 사람들을 중심으로 두 그룹을 형성했다. 당시 그 땅에서 BEE 사역이 필요했던 배경을 고종영 선교사는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2001년 정재호 교수가 갈라디아서 세미나를 하던 장소가 우연치 않게 나와 친분이 있던 필리핀 지하 교회였다. 그래서 도대체 어떤 사람이 와서 사우디 지하교회에서 성경공부를 하러 왔나 보러 갔다가 정 교수를 만나게 되었다. 비록 사우디에 종교의 자유가 없고 폐쇄적이었지만, 열심인 이단들이 들어와서 지하교회를 유혹하곤 했다. 그래서 혹시 이단이 와서 거짓 가르침을 전하는지 확인하러 갔다가 《갈라디아서》를 함께 공부하게 되었고, BEE 《갈라디아서》 세미나가 율법주의적인 이슬람의 종주국인 사우디아라비아에 일하러 온 외국인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을 지키고 복음을 현지인들에게 나누기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을 다시 한번 절실히 느꼈다.
고 선교사는 부부가 한국계 미국인으로 당시 무선전화 엔지니어로 사우디 통신사에서 일했고 아내인 조경진 선교사는 미군부대에서 군속으로 근무하는 자비량 선교사(tentmaker)였다. 이렇게 BEE 사역을 맛본 고 선교사 부부는 다음 해 조문상 선교사가 리야드를 방문할 때 조 선교사와 직접 동역할 기회를 가졌다. 고 선교사는 이렇게 적고 있다.
그후 조문상 선교사와 《일대일 제자양육 성경공부》 세미나를 한 인도인 지도자가 리야드에 와서 《일대일 제자양육 성경공부》 하는 것을 도와주며 BEE와 다시 한번 접하게 되었고, 2002년 담맘에 있던 김비호 집사의 소개로 리야드에 세미나를 하러 온 조문상 선교사를 만나게 되었다. 조문상 선교사가 세미나를 하러 올 때마다 우리 집에 머물며 세미나를 함께 다니게 되었다.
그해 두 번째 조 선교사가 담맘을 방문해 BEE 세미나를 인도할 때 리야드의 고 선교사에게 전화가 왔다. 조 선교사가 이번에 리야드는 갈 계획이 없다고 하자 고 선교사 부부는 그러면 자신들이 담맘으로 갈 테니 좀 보자고 했다. 400 킬로미터도 넘는 담맘까지 오게해서 미안했지만, 그렇게 하자고 했다. 고 선교사 부부는 세미나가 없는 낮에 담맘에 있는 김비호 집사가 BEE 사역을 위해 빌린 집으로 찾아 왔다. 두 사람은 조 선교사를 보자 대뜸 BEE 사역을 함께하고 싶다고 했다. 조 선교사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두 사람과 동역하기로 했다. 그리고 조 선교사가 본부 사역을 맡아 2004년 한국으로 들어간 후 2005년 중동지부를 세우며 고 선교사 부부가 중동 사역을 맡게 되었다. 당시 리야드의 고 선교사 집은 마치 간이 인쇄소 같았다. BEE 학습서를 출력하고 제본해 학생들에게 제공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고 선교사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세미나가 있을 때마다 세미나에 필요한 학습서를 조문상 선교사가 가지고 다녀야 했고, 학습서가 너무 많고 무거울 뿐더러 공항 세관 검사에서 종교 서적으로 걸릴 위험이 많아 현지에서 학습서를 만들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보안 관계로 외부에서 복사를 할 수가 없어서 집에서 복사를 하고 책을 만들었다. 당시 사용하던 복사기는 각 권으로 페이지를 분류할 수 있는 기능이 없어서 《그리스도인의 삶》 세미나를 위해 책 20권을 만들려면 각 페이지 20장씩을 긴 책상 위에 놓고 책상을 80 바퀴 정도 돌면서 각 페이지를 모으고 제본하여 책 한 권을 만들어야 했다. 그래도 책 앞 뒷장은 한국 인쇄소에서 멋있게 인쇄를 해 와서 그럴듯한 책을 만들 수 있었다.
2000년도만 해도 사우디아라비아는 오픈도어스(Open Doors)가 매년 발표하는 기독교 핍박지수에서 북한과 함께 1, 2위를 다투었다. 그러기에 모든 기독교 사역은 매우 조심해서 수행해야 했다. 앞에 고 선교사가 언급한 리야드 정재호 교수 세미나를 포함해 여러 세미나가 종교 경찰의 급습으로 중간에 중단했었다. 고 선교사는 위험했던 순간을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사우디아라비아에는) 각 나라의 모국어로 된 성경책도 많이 부족하여서 400킬로미터 떨어진 항구 도시를 통해 밀반입되는 성경을 그 도시로 세미나를 인도하러 갔다 올 때 마다 지하 교회에 운반해주곤 했다. 한 번은 고속도로에서 불심검문을 당하였다. 차 뒷좌석에는 30권의 성경책과 BEE 학습서 등이 있었고 걸리면 영락없이 붙잡혀 가야 하는 긴박한 상황이었다. 운전하던 고 선교사는 경찰의 지시에 따라 차에서 내려야 했고 경찰은 차 뒤 트렁크부터 열라며 수색을 하기 시작했다. 긴박하고 절박한 짧은 기도 가운데 하나님이 지혜를 주셔서 옆좌석에 앉아있던 아내가 경찰이 뒤 트렁크를 열고 조사하는 동안 뒷좌석에 있던 성경과 학습서들을 입고 있던 아바야 안으로 쑤셔 넣었다. 물론 아내에게 차밖으로 나오라고 하면 성경과 학습서들이 우수수 떨어져 걸릴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지만,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경찰은 뒷좌석에 아무것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아내를 보며 잠시 고민하다 그냥 가라고 한다.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을 다시 한번 경험한 순간이었다.
이렇게 종교의 자유가 전혀 없고 핍박이 심한 사우디이지만, 당시에도 어림 잡아 수천 곳의 지하교회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했다. 그 땅에서의 BEE 사역의 필요성에 대해 고 선교사는 이렇게 말한다.
보통 40명 미만의 성도가 모여 지하교회를 세우고 숨어서 예배를 드리는 상황이었다. 핍박이 심할수록 교회는 부흥되어 성도 수가 늘어나면 보안상 교회는 갈라져서 또 하나의 교회가 세워지지만, 제대로 신학교육을 받은 사람은 턱없이 부족하여서 그중 믿음이 있고 지도력이 있는 성도가 목사가 되기에 BEE 세미나가 꼭 필요한 곳이었다. 그 주에 배운 말씀을 가지고 각자의 교회에서 설교하고 또 다시 모여 말씀을 공부하고 이렇게 말씀이 교회에서 살아 역사하기 시작하니 교회들이 건강해졌고 입에 입을 통해 다른 지역 지하교회들의 목사들이 그룹을 만들어 세미나를 인도해 달라며 요청이 온다. 살고 있는 리야드와 400킬로미터 떨어진 담맘, 코바, 쥬베일, 그리고 2시간 비행해서 가는 제다까지 BEE 세미나는 왕성하게 사역을 넓혀갔다.
지하교회는 10-20개의 교회가 모여 교단의 형식을 갖고 있었고 각 교단에서 BEE로 훈련받은 지도자들은 《일대일 제자양육 성경공부》를 교회 훈련 프로그램으로, 그리고 《갈라디아서》, 《로마서》, 《그리스도인의 삶》 3과목을 지도자 훈련 프로그램으로 사용하였다. 그동안 사우디 동부지역(담맘, 코바, 쥬베일)에서 두 번 그리고 서부지역(제다)에서 한 번의 졸업식이 있었다. 졸업식 또한 숨어서 해야 하기에 현지인들이 주말에 모여 유흥을 즐기기 위해 빌리는 리조트를 하루 대여해서 밖에서 경비를 보면서 그러나 안에서는 마음껏 축제로 하루를 보낸다. 직장인이자 교회 지도자이며, BEE 학생으로서 시간을 쪼개 가면서 2년을 공부하고 맞는 졸업식이기에 모두가 감격스러웠다.
BEE 사역을 왕성하게 넓혀가던 2010년 10월 제다에서 사역을 마치고 아내와 함께 승용차로 리야드로 오는 고속도로 초입에서 운전하던 고 선교사는 심장마비로 길에서 쓰러지게 되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당시 학생에게 연락하고 그 학생의 간호사 아내에게 연락이 가 그 간호사가 일하던 병원을 통해 시술하여 고 선교사는 살아났다. 그 후 한국에서 관상동맥 우회 수술을 받고 사역을 계속하던 고 선교사 가정은 2013년 사우디아라비아를 떠나 중남미로 사역지를 옮기게 되었고 사우디 특성상 후임 선교사 파송이 어려워 지금은 사역이 미미하다. 하지만 중동 지부를 맡고 있는 카타르의 사잔 선교사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옛 사역지를 돌며 BEE 사역을 다시 일으키기를 기도하며 계획하고 있다.
종교적인 면에서 세계를 보면 기독교와 이슬람교가 각축을 벌인다. 두 종교 간 전선은 아프리카를 지나 중앙아시아를 통해 아시아로 최전선이 이어진다. 최전선 중 아프리카는 이슬람교가 기독교에 대한 공세를 펴며 점차 남하하고 있다. 하지만 중앙아시아는 반대로 기독교가 이슬람교에 대한 공세를 펴며 세력을 넓혀가고 있다. 따라서 중앙아시아에서의 BEE는 이슬람과의 최전방에 있는 교회에 말씀이라는 영적 양식을 공급하여 전투에서 승리하도록 하는 견인차 역할을 한다.
중앙아시아 중 BEE Korea가 첫 발을 내디딘 곳은 우즈베키스탄이었다. 1997년 온누리교회 초청으로 몇 명의 우즈벡 고려인이 한국에 와 BEE의 《갈라디아서》를 맛보았다. 그리고 그들 중 일부는 우즈베키스탄으로 돌아가 그룹을 더 모으고 우리에게 와서 가르치기를 요청했다. 그 요청에 따라 1998년 김사무엘 선교사가 치르칙에 있는 고려인 교회에서《로마서》를 인도했고 1999년 조문상 선교사가 《그리스도인의 삶》을 인도했다. 세미나를 마치고 환송회 자리에서 있었다. 한참이 지나 그때 있었던 일을 조 선교사는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학생들은 풍성하게 준비한 음식을 서로 나누며 다시 하나님 말씀을 배운 감격과 한 과목을 마쳤다는 기쁨, 그리고 오래 전 그들의 부모나 조부모가 떠나왔던 땅에서 온 또 한 사람을 보내야 한다는 아쉬움에 젖어 있었다. 식사를 마치자 학생들은 나를 앞으로 나오게 했다. 베체슬라브 형제는 앞에 준비한 꾸러미를 들고 내게 다가왔다. 꾸러미 안에는 우즈베키스탄 전통 옷, 모자, 신발, 칼, 허리띠 등으로 꽉 차 있었다. 그리고 지난 한 주간 함께 공부한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배운 영적 전신갑주를 들먹이며 전통 복장의 하나하나를 나에게 입히고 씌우고 신기고 착용시켰다. 나는 이제 우즈베키스탄인 같아 보였다. 생각하지도 못한 그들의 환송 선물에 감격하며 학생들이 보여준 근면함과 사랑에 감사의 말을 전했다.
그러자 한 학생이 나에게 말했다. 선생님도 이제 돌아가시면 우즈벡에 다시 오지 않을 것이라고. 나는 그 자매에게 왜 그렇게 말하는지 물었다. 자매는 김사무엘 선생님도 다시 오지 않으니 선생님도 다시 안 오실 것이라고 했다. 나는 그럴리가 있냐며 꼭 다시 오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그 자매의 말은 사실이 되어 그후 20여년이 지나도록 나는 그 땅을 밟지 못했다. 그리고 이는 내 마음에 늘 죄송스러움으로 남아 있다.
그 해 말 조 선교사 가정이 싱가포르로 파송받으며 우즈베키스탄 사역은 본부가 담당하게 되었고 얼마 후 흐지부지 되었다. 하지만, 중앙아시아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2000년대 초 강남중앙침례교회의 교인이던 박기성 집사가 온누리교회에서 진행하는 BEE 성경공부에 참석하여 배우고 자신의 교회의 담임 목사와 카자흐스탄으로 파송한 주원장 선교사에게 BEE를 소개하여 2004년부터 카자흐스탄의 알마티와 카라간다를 중심으로 BEE 사역을 시작했다. 본부는 중앙아시아 사역을 확대하고자 카자흐스탄을 방문해 몇 차례 세미나를 인도한 본부 인도자였던 김민수 목사를 2006년 2월 카자흐스탄 선교사로 파송하며 중앙아시아 지부를 세웠다. 또한, 그 다음해인 2007년 기관 등록에 필요한 주소지 확보를 위해 알마티에 아파트를 구입하고 정부에 “BEE-CA 성경선교센터”라는 종교기관으로 등록했다. 하지만 영적 전쟁이 심한 이슬람 땅에서의 사역은 난항을 겪었다. 몇 년 후 종교법이 개헌되며 어렵게 등록한 종교기관은 필요한 성도 수를 채우지 못해 취소되었고, 그에 따라 아파트도 처분했다. 그리고 2020년까지 별 진전없이 소규모로 사역을 이어오다 김민수 선교사가 사임하며 중앙아시아에서 BEE는 철수했다.
2021년 초 조 선교사는 팬데믹으로 중국 사역을 하지 못하던 김예 선교사에게 중앙아시아를 담당할 것을 제안했고 김 선교사는 믿음으로 수락했다. 그때의 심정을 김 선교사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그곳은 지금까지 내가 계속 섬겨왔던 중국과는 전혀 다른 배경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종교 환경 등으로 그렇게 썩 내키지는 않았기에 바로 답하기에는 좀 망설여지는 심정임을 숨길 수가 없었다. 그러나 세우신 리더십을 통한 하나님의 계시적인 사인이 있음을 믿고 있었기에 이내 순종하고 그 땅을 위한 기도를 시작했다.
김 선교사는 먼저 1년 넘게 기도로 준비하며 이윽고 2022년 키르기스스탄 왕복 항공권 외에는 정해진 것 없이 믿음으로 그에게는 미지의 땅인 중앙아시아로 향했다. 키르기스스탄 비슈케크에서 한국인이 운영하는 숙소에 여장을 푼 김 선교사는 그곳 주인이 출석하는 현지인 교회에서 주일을 지키며 담임목사인 류동수 목사에게 간단하게 이곳에 오게 된 경위를 설명했다. 류 목사는 그날 점심을 김 선교사에게 대접했다. 다음 주 주일 예배 후 이번에는 김 선교사가 류 목사 부부를 식사에 초대했다. 그때의 상황을 김 선교사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며칠 후 함께 식사하던 중에 성령님께서 내 마음속에 강하게 ”이분들과 BEE를 해라.“라고 하셔서 대뜸 ”목사님과 BEE를 하겠습니다.“라고 말씀을 드리면서도 속으로는 “도대체 지금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거지?”라고 생각하며 아마도 ”네, 제가 기도해 보겠습니다.“라고 대답하실 것으로 답변을 예상했다. 그런데 두 분은 별 고민도 없이 이내 “그렇게 해도 되시겠어요?”라고 해 좀 앞뒤가 맞지 않는 설익은 대화가 오고 갔다……훗날 두 분께 처음 만난 그 당시 우리의 대화가 좀 이상하지 않았는지 물어보았더니 그 식사 자리에 나오시기 전에 이미 두 분은 BEE를 하기로 마음을 정하고 내가 먼저 결정적인 제안을 해 오면 그것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인으로 여기기로 했다고 하셨다.
비슈케크에서 기도하는 중 김 선교사는 4월 21일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로 가서 27일 카자흐스탄 알마티로 가라는 인도하심을 받았다. 21일 공항으로 데려다 주던 한국 선교사는 별 계획 없이 우즈베키스탄에 가는 김 선교사를 의아해 여기며 동시에 안타깝게 생각해 공항에서 마중할 사람과 숙소를 소개해 주었다. 김 선교사는 타슈켄트 공항에 마중 나온 초면의 고려인 홍세르게이와 유가이싸샤 목사를 만났다. 김 선교사는 그들에게 조 선교사에게 들은 치르칙이라는 도시에 대해 물으며 당시 이야기를 했지만, 그들은 어느 교회의 누구인지 모르겠다고 했다.
4일 후 홍 목사로부터 다음 날 강세르게이라는 목사가 타슈켄트에서 치르칙으로 돌아간다고 해 김 선교사는 그 다음 날 출국하는 일정이지만 치르칙 땅을 밟아라도 보기 위해 치르칙에 가기로 했다. 치르칙으로 가며 조 선교사에게 들은 이야기를 강 목사에게도 했지만, 강 목사는 BEE에 관해 들은 적이 없다고 하며 바쁜 듯 서두르며 하차할 곳을 물었다. 초행길인 김 선교사 일행은 기왕이면 아무 교회이든 교회 앞에 내려 달라 하자 도상에 있는 교회 앞에 김 선교사 일행을 내려 주고는 급히 자리를 떴다. 김 선교사는 교회에서 한참을 기다린 끝에 담임인 김스테니슬라브 목사를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성령님의 세밀한 인도하심을 경험했다. 김 선교사는 조 선교사에게 들은 내용을 김 목사에게 전했다. 다음은 김 선교사가 적은 당시 상황이다.
……(환송 모임에서 조 선교사에게) 어느 한 분이 “이제는 다시 이곳에 안 오실 거죠?”라는 질문에 “아니요, 다시 오겠습니다.”라고 약속하였지만, 그 후 25년 동안 지금까지 지키지 못했다고 합니다. 뒤늦었지만, 그분께 이를 사과하고 싶은데 지금 그분들이 누구인지 이름도 모르고 교회 이름도 모르고 사진도 없습니다. 하지만, 내일 아침이면 나는 출국을 해야 해서 그냥 가기에는 너무 안타까운 마음에 이렇게 무작정 오게 되었다고 했다. 그러자 가만히 듣고만 있던 그 목사가 “내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라고 말을 하자 순간 나는 호흡이 멎는 듯하고 온몸에 닭살이 돋았다. 옆에서 통역하던 홍세르게이 목사도 나와 똑같은 충격을 받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곧 김스테니슬라브 목사는 사모와 큰아들에게 전화해서 급히 오라고 하자 바로 이엘레나 사모와 큰아들 발레리 형제가 도착했다. 함께 점심 식사를 하면서 그들은 지나간 많은 일을 얘기해 주었다. 특히 목사는 두 가지 비전이 있는데 먼저 자신이 시무하는 교회를 통해 우즈베키스탄을 위한 50명의 목회자가 배출되고 또 지금 200명 가까이 예배 드리기는 좁은 예배당 공간을 확장하는 것입니다. 긴 대화 가운데 점심이 끝나갈 무렵 사모가 “우리 BEE를 다시 공부할 수 있습니까?”라고 물어 오셔서 “그럼요!”라고 답하고 다시 올 일정을 약속하고서 헤어진 후 타슈켄트로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 그리고 호텔로 돌아와서도 흥분이 가라앉지 않고 감사와 감동의 기도를 멈출 수가 없었다. 앞서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솜씨와 예비하심과 인도하심의 그 손길을 경험하는 복을 내게 누리도록 하여 주심에 감사했다.
김 선교사는 알마티로 가기 위해 타슈켄트 공항으로 데려다 주던 유 목사로부터 카자흐스탄의 한 목사를 소개받아 그분과 통역으로 온 천슬라바 목사를 만났지만, 성령님께서 동역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1년 후 다시 카자흐스탄을 방문했을 때 그동안 자주 연락하던 천슬라바 목사의 소개로 알마티의 한 목회자 모임에 참여해 BEE를 소개하고 그곳에서 5명의 BEE 훈련 관심자를 만났다. 하지만 일부는 러시아어를, 다른 부류는 카작어를 사용해 BEE 학습서의 카작어 번역을 시작했다. 그 후 다섯 명 중 하나인 아나르백 목사의 소개로 복음주의교회모임에 BEE를 소개하게 되었고, 먼저 아나르벡 목사 교회에서 지도자들을 대상으로 세미나한 것을 평가한 후 교단 전체에 진행할지를 결정하기로 했다.
중앙아시아에서는 키르기스스탄,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외에 타지키스탄에서도 BEE 훈련이 진행 중이다. 타지키스탄은 BEE 인도자 이혜정 목사의 지인인 최윤섭 선교사(미국 은혜교회 파송)가 개척한 두샨베에 있는 타직은혜선민선교센터에서 운영하는 신학교 요청으로 2022년 말에 시작했다. 중앙아시아에서의 BEE 사역은 이슬람의 박해 외에도 한국 이단에 의한 대규모 집회로 기독교 사역 전체가 영향을 받는다. 하지만 앞에서 기술했듯이 세계 선교의 최전방으로 반드시 말씀 사역이 필요한 곳이기에 어떤 어려움과 방해가 있더라도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역을 계속해야 한다.
BEE는 중동에서 위에 언급한 국가 외에 바레인, 아랍에미레이트, 쿠웨이트에서 사역했고, 중앙아시아에서는 아프가니스탄에서도 사역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