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E가 아시아로 온 주요 목적은 아시아에 있는 공산권 국가 안에서 교회 지도자를 말씀으로 양육하기 위해서 였다. 그래서 중국은 BEE Korea의 설립 시부터 제1의 사역 대상지였다. 하지만 아시아의 또 다른 공산국가인 베트남은 같은 공산국가이면서도 중국과는 다른 이유로 시작했다.
중국으로
BEE는 온누리교회에서 평신도를 양육하면서 중국 사역을 시도했다. 그래서 BEE Korea의 첫 해외 사역 현장은 임업을 주요 산업으로 하는 산골 마을인 중국 왕청으로 조선족이 그 대상이었다. 김내헌 목사는 그 당시 중국의 조선족 그리스도인이 말씀에 관해 가졌던 열정을 이렇게 회고했다.
1993년 12월부터 1994년 1월까지 네 차례에 걸쳐 현지 교회를 방문하여 《갈리디아서와 로마서》를 공부하였는데, 나는 1994년 1월 황종연 목사님과 함께 그곳을 방문했다. 지금은 서울에서 옌벤까지 직항편이 있어 쉽게 갈 수 있지만, 당시에 옌벤을 가려면 텐진에서 기차를 타고 39시간을 가야 하는 먼 길이었다……그러한 (학생들의) 열정과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지금도 매번 우리에게 신선한 감동과 도전을 주고 있다. 말씀을 배우고자 며칠씩 기차를 타거나 험한 산길을 걸어서 세미나에 참석하는 학생들 앞에서 우리는 한없는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1993년 시작한 중국 사역은 크게 5단계를 거치며 발전했다. 1단계는 1998년까지로 중국내 조선족과 한인 선교사가 사역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이 두 그룹은 BEE의 기본전략인 재생산이 어려웠다. 한인 선교사는 자신의 파송 교회나 단체의 고유사역이 있기에 BEE 사역은 또 다른 사역이 되거나, BEE의 재생산 원칙에 충실하자면 자신의 중국인 학생들을 가르쳐 이들 역시 재생산을 하도록 해야 하는데 이는 자신의 사역자를 BEE 사역에 빼앗길 수 있다는 염려가 있어 재생산을 하지 못했다. 반면에 조선족은 중국 안에서 소수종족으로 주종족인 한족으로 전파하거나 그들을 가르치기가 어려웠으며 또한 중국대륙 전체로 사역을 확장하기에 제한이 있었다.
BEE는 1999년부터 현지인 대상으로 사역 방향을 바꾸면서 2단계로 들어섰다. 하나님께서는 상해에서 중국의 5대 농촌교회(단체) 중 한 단체에 속한 교회를 BEE에 연결해 주셨다. BEE의 말씀 훈련을 통해 은혜를 받은 그 교회의 지도자들은 자신이 속한 단체의 네트워크를 통해 자신들의 고향과 상해 주변으로 사역을 소개했다. 사역의 양이 많아지며 본부는 2004년 상해에 중국 지부를 세우고 2005년에는 중국에서 BEE 사역을 전담할 선교사를 파송했다.
확장기로 분류하는 3단계는 2006년부터 2010년까지이며 BEE 사역이 상해와 그 주변을 넘어 안휘성, 저장성, 허북성, 윈난성 등에 번졌다. 사역이 많아지며 본부는 중국에 헌신한 선교사들을 상해와 항조우로 추가 파송하여 사역을 일구었다. 또한 선교사들은 현지인을 훈련하고 사역자로 세워 한국 선교사들과 동역하도록 했다. 이때 상해 온누리 교회에서도 세미나가 진행되면서 인도자가 배출되었고 이들도 함께 중국 사역에 크게 동참했다.
4단계(2011-2015년)는 성숙기이다. 2011년 온누리교회의 반태효 목사가 3개월 중국으로 단기 선교를 가서 원조우 시의 현지인 교회에서 《일대일 제자양육 성경공부》 사역을 하면서 이 보다 한 단계 높은 교육이 필요한 것을 보고 그 곳 목회자들에게 BEE를 제안하며 BEE와 연결해 주었다. 이에 따라 BEE 본부의 대표자 2인이 2011년 원조우 지역 목회자들에게 BEE 사역을 소개했다. 이때 동문교회와 표간교회에서 BEE 훈련에 관심을 보여 2012년에 중국의 예루살렘이라는 원조우에서 BEE 사역을 시작했다.
또한 중국 내 선교에 열심인 한 원조우 목회자는 헤이롱장성에 본부를 둔 시안에 있는 단체를 BEE에 소개했다. 그런데 이미 헤이롱장성 본부에 있는 목회자 그룹 및 신학교에서 BEE가 진행되고 있었기에 이는 중국에서의 BEE 사역을 동북과 서북으로 확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먼저 서북 실크로드의 중요지인 시안에 신학교를 두고 실크로드를 따라 교회를 개척하던 그 단체는 전적으로 BEE 프로그램을 신학교의 교과과정으로 정하고 2013년부터 학생들에게 체계적으로 BEE를 가르쳐 사역자로 훈련하였다. BEE가 추구하는 성경의 재생산에 따라 이곳에서 일정 기간 훈련 받은 현지인 사역자들은 자신들의 주도로 자신들이 배운 BEE를 서북의 다른 지역으로 퍼뜨렸다.
이 시기에 이미 훈련받은 많은 목회자가 자기 교회에서 BEE를 가르치고 적용하면서 많은 영적 변화를 경험하자 자기들의 고향과 지인들에게 BEE를 소개하며 전국으로 확산됐다. 상해에서 운남성을 소개하고 상해에서 우시를 소개하고 우시에서 허난성과 허베이성 교회를 소개하고 헤이롱장성에서 지린성을 소개하고, 온주에서는 다시 항주와 안휘성, 상해 교회를 소개하고 스스로 선교를 하였다. 또한 이때 대만교회와도 연결되어 사역했으며 한인들을 통해 광조우가 소개되었고 BEE 이사 한 분의 헌신을 통해 광조우 사역은 든든히 서 갔으며 또 심천과 홍콩에서도 사역이 진행되었다. 운남성에서는 소수종족들에게 BEE가 들어가 장족, 리수족, 이족, 바이족, 묘족, 나시족 등에서 사역이 진행되며 일부 학습서는 소수종족 언어로 번역되기도 하였다.
한국의 BEE 본부는 사역이 확장돼는 이 시기에 화동과 서북으로 한국 선교사를 추가로 파송했다. 따라서 중국에서는 상해를 비롯한 화동, 화북, 서북, 동북과 서남의 5개지역에서 한인 선교사들이 현지인 사역자들을 행정적으로도 훈련하며 함께 사역하게 되었다. 이는 넓은 중국에서 효과적으로 BEE 사역을 하기 위한 조직적인 정비로 이어져 중국 전체를 몇 개의 지역으로 분리하고 지역마다 담당 선교사를 세워 관리하도록 했다.
2016년부터 시작한 5단계는 BEE 사역을 중국인에게 이양하는 2018년까지 이어진다. 중국에서 자신들이 BEE 사역의 주체가 되겠다는 움직임의 시발점은 4단계 말엽인 2014년 한국에서 있었던 BEE Korea 창립 20주년 컨퍼런스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중국에서 BEE 사역에 관계한 지도자들이 컨퍼런스에 참석해 BEE가 전 세계 곳곳에서 사역하고 있는 현실을 봄으로 세계 선교에 BEE를 통해 동참하겠다는 결의를 보였다. 이 움직임을 타고 본부와 중국 관련 선교사들은 자신들이 사역하는 8개 지역에서 각 지역 사역을 책임질 현지인들을 추천해 그들과 동역을 시작했다. 2016년 원조우의 동문교회를 담임하던 구화평 목사가 교회 신축을 마치자 자신이 2년 후에는 교회 담임을 내려놓고 BEE 사역에만 전념하겠다고 우리에게 알려 왔다. 이에 따라 2017년 한국의 본부는 구 목사를 초대 중국 BEE의 책임자로 정하고 구 목사에게 2018년에 원조우에서 구 목사의 주도로 BEE 사역 이양을 위한 중국 내 BEE 컨퍼런스를 열 것을 제안했다.
관광지 같이 유명한 곳이 아닌 원조우에서 중국 각지로부터 오는 수십 명 뿐 아니라 한국에서도 여러 명이 참여하는 컨퍼런스를 하기에는 여러 위험부담이 있었지만, 각 사람이 도착하는 날짜와 시간, 장소 등을 달리하는 등 작전을 짜 2018년 5월에 중국 BEE 사역 관련자들이 원조우에 모여 컨퍼런스를 시작했다. 중국 내에서는 모두 여러 교통수단을 이용해 원조우에 왔고, 외국에서 오는 참가자는 각기 다른 공항으로 도착해 지역 사역자의 차를 타고 육로를 통해 원조우로 이동하다 중간에 원조우 사역자를 만나 차를 갈아타고 이동했다. 많은 위험부담이 있었지만 컨퍼런스에서 BEE 사역을 중국인에게 이양하기를 선포하고 각 지역 대표 8명과 컨퍼런스 진행 대표 등 총 9명의 책임자 중에서 사무총장을 선출하기로 했다. 각 지역은 사무총장으로 추대할 사람을 정하기 위해 지역별 회의를 하고 그 후 전체 회의로 모여 각 지역 대표는 자신이 속한 지역에서 추대한 사무총장이 누구인지를 호명했다. 모든 지역은 원조우의 구 목사를 만장일치로 사무총장으로 추대하여 구 목사가 초대 BEE China의 사무총장이 되었다.
이어 부사무총장 2명을 선임하고 각 지역의 책임자들을 이사진으로 하는 이사회를 세움으로 BEE China의 조직이 완성되었다. 이사들은 그 자리에서 기본적인 정관을 정하고 총회 형식으로 동의와 이견을 받아들이며 조정해 가는 시간도 가졌다. 이렇게 현지인들에 의해 현지인을 세우고 현지인을 통해 현지의 사역 원칙들을 세워 나가는 BEE China의 첫 발을 딛었다. BEE Korea는 그 자리에서 새로 구성한 BEE China에게 중국어로 된 학습서 파일과 행정 시스템 등을 이양함으로 이양절차를 마무리했다. 또한 BEE China의 요청으로 2022년 완전 독립 때까지 BEE Korea가 중국 사역을 돕기로 했다. 이후 이들 스스로 모임을 정기적으로 갖도록 훈련하기 위해 일년에 2회에 걸쳐 정기 회의를 하도록 권하고 이들의 모임에 한국 선교사가 참석하여 진행 상황을 지켜봄으로 이들 스스로 조직을 세워가도록 했다. 2회의 모임은 한번은 9명을 중심으로 한 주요 이사들과 지도자들 중심으로, 또 한번은 각 지역 주요 사역자들에게 동기를 부여할 수 있도록 각 지역 사역자 중심으로 모임을 갖기로 했다.
하지만 이양 후 얼마 되지 않아 지도부의 운영 미숙이 여지없이 드러났다. 이양식이 있던 다음 해인 2019년 5월 BEE China 1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컨퍼런스로 BEE China 관계자들이 시안에 모였다. BEE Korea에서도 대표단이 참석했다. 여기에서 재정에 관한 이사회 안의 이견이 드러나며 이는 갈등으로 비화하였고 컨퍼런스는 어색하게 마쳤다. 안타깝게 이 상황을 보고 있던 BEE Korea의 대표들도 직접 안을 내거나 중재하기도 어려워 기도만 해야 했다.
더군다나 뒤이어 전 세계를 강타한 중국 발 팬데믹은 지역별 관계 단절에 최적의 핑계거리를 제공했다. 지역별로 각자도생 하면서 감사하게도 어려운 팬데믹 가운데 BEE China는 온라인과 오프라인 모두를 이용해 BEE 사역을 성실히 이어갔다. 2022년 팬데믹이 수그러들 때 초대 사무총장의 5년 임기도 1년을 남겨두고 있었다. 구 목사는 나이와 건강 문제로 2023년 5월에 사무총장 연임을 하지 않을 것을 BEE China 이사회와 BEE Korea에 통보해 왔다. 원래 2022년 말에 독립하기로 일정을 잡았던 BEE China는 계획대로 2022년 말 완전 독립하기로 하고 2023년 2기 지도층을 구성하기로 했다.
5주년이 되는 2023년 5월 BEE China는 이래저래 미루어 왔던 연례 컨퍼런스를 청도에서 열었다. 중국에서 기독교에 대한 보안 문제가 이전에 비해 훨씬 심해져 BEE Korea는 참관인 1명만을 컨퍼런스에 파견해 불화와 팬데믹 등 어려운 시기에 초대 사무총장으로 5년의 임기를 다한 구 목사에게 감사패를 전달하며, 50여 명이 참석한 컨퍼런스에 함께했다. BEE China는 2기 사무총장을 선출하며 새로운 지도층을 구성했다.
베트남은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성령님이 주도하시는 사역”이다. 1996년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하노이 사역을 개척하기로 한 개척팀은 1997년 초 변변한 자료도 없이 구정을 끼고 일주일 여정으로 하노이를 방문했다. 귀국 하루 전 아직 사역을 개척하지 못한 개척팀의 팀장은 지도 보기를 좋아하는 초등생 아들 손에 지도를 들려 무작정 지도에 표시되어 있는 머물고 있는 호텔에서 가장 가까운 교회를 찾았다. 하지만, 지도를 보고 찾아간 곳은 고딕식으로 지어진 가톨릭 성당이었고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호텔로 돌아가려는 데 지도를 보고 있던 팀장 아들이 근처에 또 다른 교회가 있다고 해 따라갔다. 당시 상황을 팀장이었던 조문상 선교사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아이가 여기라고 하는 곳은 일단 고딕식 건물이 아니었다. 분위기도 달랐다. 건물 마당으로 발을 들여 놓으니 마침 3명의 젊은이가 오토바이를 타고 막 어디론가 출발하려던 참이었다. 그들에게 다가가 누구 영어 하는 사람이 있는지 물었다. 그중 한 형제가 영어를 한다고 했다. 반가운 마음에 이곳이 성당인지 아니면 교회인지를 물었다. 교회란다. 하노이(당시 인구 126만)에 교회가 몇 개가 있냐고 하니 이곳 하나란다. 그렇다면 이 교회가 하노이에 단 하나 밖에 없다는 그 공식 교회였다. 목사가 몇 분이냐고 물었다. 목사는 없고 강도사가 셋이라고 했다. 너무 놀랐다. 이 커다란 하노이에 유일한 공식 교회를 찾아 오다니……놀라는 동안 그 형제는 이만 가봐야 한다며 오토바이를 몰고 사라졌다. 나중에 알았지만 당시 그 교회 교인은 170명 정도였고 영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은 다섯 손가락에 꼽았다.
하지만 하노이에 하나밖에 없는 교회를 찾은 것은 성령님의 인도하심의 전초전에 불과했다. 동역자를 만난 것은 더 극적이다. 당시 그 교회에 한인 교회가 뒤편의 교육관 같은 부속 건물의 한 방을 빌려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그곳을 기웃거리다 누군가 흘리고 간 주보로부터 담임 목사가 “태원수” 목사임을 알게 되었다. 교회에 아무도 없어 철수하고 그날 오후 아이와 한 자매를 다시 교회로 보내 태 목사의 연락처라도 알아보도록 했다. 그 둘이 교회에 가니 베트남 사람 하나가 교회에 있었다. 영어로 태 목사의 연락처를 묻자 그가 전화번호를 적어 주었다. 그런데 그 전화번호는 태 목사가 아니라 타이라는 그 교회의 현지인 집사의 전화였다. 구정인 그날 정탐팀은 간청하여 타이 집사를 호텔에서 만났다. 그는 아내와 함께 보트피플로서 홍콩 난민 수용소에서 예수님을 영접했다고 했다. 그 사람 집을 방문했던 당시 상황을 조 선교사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집은 낡은 아파트 5층이었다. 다리가 부실한 아내도 힘을 다해 5층을 컴컴한 계단으로 올라갔다. 우리가 들어가자 두 사내 아이(아들)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막 식사를 마쳤는지 상을 치우는 중이었다. 우리 팀 중 성인 3명과 그 형제 부부, 부모 이렇게 7명이 테이블에 둘러 앉았다. 탐색을 마쳤으니 본론으로 들어갔다. 먼저 베트남 전쟁에 한국이 참여해 베트남 국민에게 상처를 준 일을 사과했다. 타이 형제는 지나간 역사이며 앞으로가 중요하다고 답했다. 그러던 중 그 사람의 친구가 고등학생 정도 보이는 딸과 함께 찾아와 자리에 합석했다. 베트남 교회가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물었다. 타이 형제는 망설임 없이 말씀 교육이라고 했다. 지난 크리스마스 때 전도를 나가 30명 정도 전도를 했는데 그들에게 무엇을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모르겠다고 설명을 덧붙였다. 흠~~ 하노이에 하나 밖에 없는 공식 교회를 찾았고, 영어가 가능한 한 현지인을 실수(동 목사의 실수)로 만났는데 말씀 사역을 하는 우리에게(우리 단체에 대한 설명은 아직 하지 않았었다.) 말씀 사역이 필요하다고 한다.
놀랐다. 하나님의 섬세하심에 입이 쩍 벌어졌다. 그래서 바로 일정을 잡았다. 6개월 후에 와서 《일대일 제자양육 성경공부》를 하기로……하나 남았던 불가능할 것 같던 목표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달성되었다. 그런데 홀가분함 가운데 성령 충만에 관해 이야기하라는 부담이 마음에 왔다. 성령 충만에 관해 설명하고 우리는 같이 기도했다. 성령님을 부르며 그냥 기도했다. 그런데 성령님이 각자에게 막 임하신다. 모두에게 성령님이 임하시더니 방언이 모두에게서 터진다. 할머니, 할아버지부터 아이들까지……그리고 누가 시작했는지 우리는 찬양했다. 누구는 한국어로, 누구는 베트남어로, 누구는 영어로 같은 노래를 찬양했다. 그 찬양이 "목마른 사슴"이다. 목마른 사슴들이 "목마른 사슴"을 감격하며 불렀다.
하노이로 갈 것을 인도하셨던 성령님은 그곳에 하나밖에 없는 교회, 그것도 말씀 훈련이 필요한 교회로 인도하셨고 동역자를 만나게 하셨다. 얼마나 세밀하신가? 그렇지만 이 역시 성령님의 인도하심의 시작에 불과했다.
몇 달 후 타이 집사를 찾아 지하교회 지도자를 중심으로 첫 팀을 꾸리고 BEE 과목을 하나씩 가르치기 시작했다. 감사하게도 BEE World가 남쪽 호치밍을 중심으로 1995년부터 사역을 하고 있어 학습서를 별도로 번역하는 수고를 덜 수 있었다. 북 베트남의 첫 그룹이 복음과 구원에 관해 설명하는 《갈라디아서》를 배우고 그들은 충격을 받았다. 타이 집사는 BEE 공부가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되어 담임 목사인 빙 목사에게 자신이 어떤 성경공부에 참석했는데 정말 성경에 관해 많은 것을 배웠다고 했다. 하지만, 빙 목사는 이단도 많으니 함부로 외부에서 제공하는 성경 공부에 참여하지 말라고 단호히 거절했다. 그래도 타이 집사는 꼬박 BEE 성경공부에 참여했다. 2년이 지난 어느 날 빙 목사가 타이 집사를 불렀다. 자신이 이번에 호치밍 시에서 다른 목사들과 성경공부에 참석했는데 내용이 너무 좋다며 자신이 공부한 책을 내밀었다. 타이 집사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빙 목사가 내민 책은 바로 자기가 이미 2년전 배운 BEE의 《갈라디아서》였다. 타이 집사는 이것이 2년전 자신이 말한 바로 그 성경공부라고 했다. 이는 북베트남 사역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그 다음 방문 시 상황을 조 선교사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다음 약속한 날짜(2000년 초)에 하노이를 방문하니 새로운 학생 셋이 참석했다. 하노이 교회의 동 목사 부부와 빙 목사의 아내 하 사모였다. 몇일 간 공부를 마치고 세 명과 빙 목사를 저녁에 초대했다. 그리고 이 세 분이 계속 참석한다면 이 세 분을 위해서라도 나는 정기적으로 오겠다고 다짐해 주었다.
몇 달 후 다음 과목을 위해 하노이를 방문하자 나를 세미나 장소로 데리고 갈 처음 보는 형제는 목적지도 알려주지 않고 나를 오토바이 뒤에 태우고 쏜살같이 달려 바로 3년전 성령님의 인도로 아들과 함께 찾았던 그 교회로 들어갔다. 그리고 나를 한인교회가 있는 뒤쪽 건물 2층으로 올라가라고 재촉했다. 그리고 내 뒤에서 자바라 문을 밖에서 닫고는 커다란 열쇠로 잠가버렸다. 안내 받아 간 방 안으로 들어서자 처음보는 얼굴들이 죽 앉아 나를 맞았다. 당시 북 베트남에는 두 곳의 신학교를 통해 목회자로 인정받은 목사가 16명이 있었는데 나를 맞은 사람들은 그중 둘을 뺀 14명이었다. 둘 중 하나는 남쪽에서 같은 과목을 배우고 있는 빙 목사로 밖에서 망을 보는 역할을 했고 다른 한 사람은 정부와 너무 가까운 목회자였다. 그렇게 성령님께서는 북 베트남의 공식 목회자를 BEE의 학생으로 연결해 주셨다.
2003년 정부는 북 베트남에 총회 구성을 허락했다. 총회장, 서기, 회계 등 모든 책임자는 BEE 학생이었다. 수면 위로 북 베트남 교회가 드러나자 외국에서 자금이 흘러 들고 그에 따라 책임자의 자리에 권력이 더 생겼다. 이는 결국 몇 안 되는 북 베트남 목회자들의 편을 갈랐고 BEE 사역에도 영향을 미쳤다. 몇 년을 끌기는 했지만, 결국 BEE 사역에 부정적 영향을 주던 편의 지도자가 미국으로 야반도주를 하며 북 베트남 공식 교회는 다시 하나가 되고 2010년 총회는 북 베트남 27개 현에 성경훈련센터를 운영해 줄 것을 BEE에 제안했다. 그렇게 BEE는 북 베트남 총회의 공식 훈련 프로그램이 되었다. BEE Korea는 베트남에 김근식 선교사 가정을 파송하여 북베트남에 훈련센터를 개척하도록 하였고 현재 20여개의 현에서 공식적으로 BEE 훈련을 하고 있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은 현재 진행형이다. 북쪽의 공식훈련센터 중 몇 개는 자오, 흐멍 같은 소수 종족 교회 지도자를 대상으로 한다. 비교적 하노이에서 그리 멀지 않은 박슨(자오족)이나 타잉유엔(흐멍족)은 총회에서 어렵지 않게 사역을 시작했지만, 보통 소수 종족, 특히 그들의 교회는 베트남 목회자라도 접근이 쉽지 않다. 총회에서도 하노이에서 먼 소수 종족 교회에서 성경을 가르치고자 지방 정부에 허락을 구하지만, 번번히 지방 정부는 거절해 왔다. 그러다가 타잉화 현과 디엔비엔푸 현에서 제한적으로 사역을 허락해 공식훈련센터를 개설할 수 있었다. 이렇듯 공식적인 방법이 어렵기 때문에 공식 교회에 속하지 않은 북 베트남 사역자들은 비공식적으로 북 베트남에 있는 소수 종족에 BEE 프로그램을 가지고 들어갔다.
BEE Korea 보다 먼저 남 베트남에서 사역을 시작한 BEE World는 내부 문제로 2010년대 중반 남 베트남 사역을 접고 몇 명의 BEE 인도자들이 자신들이 사역해 오던 남 베트남 공식교회와 근근히 사역을 이어 갔다. 2023년 1월 태국에서 주관하는 선교사 훈련 프로그램에 조문상 선교사가 강사로 참여했을 때 WEC 선교사가 훈련생 중 베트남 선교사들을 만나 그들로부터 중부 산지에 있는 제에 족 교회 지도자를 접촉하고 방문하기로 협의했다. 이 김에 북 베트남에서 소수 종족 사역을 하던 떰 목사와 함께 중부 사역을 개척하기로 하고 2023년 3월 2주 정도의 일정으로 제에 족 뿐 아니라 에데, 반라 등 여러 종족 교회를 방문하며 말씀 사역의 필요성을 설명했다. 그러다 다낭에서 예정에 없던 몇몇 VCM(Vietnam Christian Mission) 지도자를 만나 식사를 하며 말씀 사역에 관해 소개하자 그들은 VCM 총회장인 득 목사를 만나기를 간곡히 청했다. 3개월 후 많은 걱정과 함께 득 목사를 포함해 여러 명의 VCM 운영위원과 만났다. 그런데 성령님께서 이미 그들의 마음을 만지셔서 이미 BEE와 동역할 것을 정하고 있었고 중부 지역에 3곳의 공식적인 훈련센터를 운영하기로 합의했다. 그 세 곳의 훈련센터 외에 지난 번 방문을 통해 세 곳의 비공식 훈련센터도 개척하여 총 6곳의 훈련센터를 중부 베트남에서 운영하게 되었다.
베트남 약 1억의 인구 중 복음주의자 즉 계신 교회에 출석하는 그리스도인은 1.8%이다(약 180만명). 그리고 복음주의자 중 15%는 낀 종족(베트남 주요 종족)이고 85%가 소수 종족이다. 즉 대부분 베트남 복음주의자는 소수 종족이다. 따라서 낀 종족보다는 소수 종족 그리스도인에게 BEE가 더 필요하다. 돌아보니 북 베트남에서의 사역이 소수 종족 대상으로 움직여 가고 중부에서도 소수 종족 사역의 문이 열린 것은 성령님의 또 다른 인도하심이다. 성령님은 처음에 하노이로 가도록 인도하셔서 북 베트남 총회와 동역하며 안정적으로 북 베트남 사역을 하게 하시고 이제 북부와 중부의 소수 종족을 섬기도록 기회를 주신다. 그래서 베트남 사역은 성령님이 주도하시는 사역으로 고백할 수 밖에 없다.
네팔에서의 BEE 사역은 1998년 가을에 동시에 일어난 두 경로로 시작됐다. 하나는 당시 네팔에서 70여개의 교회를 개척한 호산나 재단(기독교성결교단)의 김홍국 선교사가 목회자 훈련을 맡으며 BEE에 이 훈련을 부탁했다. 또 하나는 온누리교회 네팔 예배 담당 목사이던 라이(K. B. Rai) 목사가 네팔로 귀국하며 자신의 사역지에서 BEE 훈련을 시작할 것을 부탁했다. 그 두 사람과 1999년 초 네팔을 방문하기로 일정을 잡았다.
그런데 그해 가을 서울에서 한국, 네팔, 티벳의 유명한 무당들이 참가하는 공연 같은 것이 예술의 전당에서 열렸다. 이에 대해 조문상 선교사는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나와 아내는 네팔의 무당이 나온다는 말에 적을 알기 위해 그 공연에 참석해 객석에 자리를 잡았다. 예정한 프로그램에 따라 각국 무당들이 순서대로 나와 공연을 이어갔다. 예정한 프로그램이 끝났을 때 사회자는 관계자들과 무슨 의논을 하더니 무대에 올라와 예정하지는 않았지만, 특별한 것을 하겠다고 하며 각국 무당들이 나와 신내림을 보여주겠다고 선포했다. 아내와 나는 말없이 서로 눈을 마주친 후 눈을 부릅뜨고 대적기도에 들어갔다. 첫 무당이 나와 신내림을 열심히 했다. 한참 애썼지만 진만 빼고 축 늘어져 들어갔다. 다음 무당이 나왔다. 그 역시 이리저리 날뛰고 옆에서 다른 무당은 긴 나팔을 불어댔지만 실패했다. 끝으로 네팔 무당이 나온 것으로 기억한다. 그도 열심히 신을 내리려 했지만, 결국 신내림에 실패했다. 모든 무당에게 신내림은 일어나지 않았다. 머쓱해 진 사회자는 보통 신이 잘 내리지만, 오늘은 이상하다며 급히 공연을 마무리했다. 그때 우리에게 확신이 섰다. 네팔 사역은 어두운 영에 대해 승리하는 사역일 것이었다.
1999년 카트만두에 호산나 재단 소속 목회자 50여 명이 모였다. 한국에서 간 세 명의 BEE 인도자가 이들을 다섯 그룹으로 나누어 한 그룹 씩 맡아 《일대일 제자양육 성경공부》를 3일에 걸쳐 인도했다. 그리고 성실하고 앞으로 인도자가로 가르칠 가능성이 있는 10명을 선발했다. 앞으로 이 그룹에 집중해서 BEE 과목을 가르치고 그들로 재생산을 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카투만두 사역을 마치고 세 인도자는 동부의 기독교 중심지이며 아누그라하교회라는 잘 알려진 교회가 있는 다란으로 향했다. 그 교회 창립자인 라이(BB Rai) 목사와 교회 지도자들에게 BEE 사역을 설명하고 이 교회와 BEE 사역을 할 것을 제시했다. 그들은 다음 날 그 교회에서 BEE를 하려면 5천 달러가 있어야 한다고 했다. 우리는 거절하고 울라바리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KB 라이 목사에게 갔다. 그곳 복음교회협의회 회장이 된 KB 목사는 근처 다막에 목회자 20여명을 모아놓고 있었다. 우리가 BEE 사역을 설명하자 그곳의 목회자들은 뜨거운 반응을 보였다. 그렇게 동부 그룹을 구성하였다.
당시 네팔은 문맹률이 70%를 넘었고 가난도 세계 몇 위에 들었다. 그런 네팔 목회자에게 본격적인 BEE 과목은 버거웠다. 공부가 익숙하지 않아 질문을 하면 질문에 함께 주어진 성구는 찾지도 않고 자신의 생각으로 답하기 일쑤였다. 아니나 다를까 다른 곳보다 시간을 2배로 늘려 세미나를 했는데도 시험을 보니 낙제 점수가 수두룩했다. 조문상 선교사는 당시 네팔에서의 BEE 사역의 어려움을 네팔의 여인들이 무거운 물동이를 넣은 망태기를 지고 자신의 집으로 산을 오르는 여인에 비유하여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50명 중에서 추려 10명을 양육하고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배우는 속도는 일반적으로 보아 다른 곳에 비해 떨어지는 편이다. 그들의 가난과 배우지 못한 것이 그 원인일까? 우리 학생 중에는 이삼일 산길을 걸어 십 여 시간 버스를 타야 공부하러 올 수 있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 곳에서 공부를 해야 얼마나 했겠는가? 하지만 이들이 더 연약하고 세상적으로 보아 더 볼품이 없기에 그들에게 더 많은 정과 관심이 쏠린다. 이들 가운데 더 선한 열매가 맺히기까지 아마도 물동이를 등에 지고 산길을 오르는 그 어려움이 우리에게도 필요할 것 같다.
하지만, 하나님은 역시 하나님이시다. 재생산에 머뭇거리는 학생들이나, 그들이 재생산할 것에 관해 확신이 서지 않는 조 선교사를 하나님은 떠미셨다. 2001년, 카트만두와 울라바리의 두 그룹을 한 그룹으로 합했다. 네팔에서 재생산이 일어나게 된 상황을 조 선교사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2002년 초 울라바리에서 세미나를 할 때 샴부라는 카트만두 그룹의 목사가 내게 다가와 자신의 마을로 올 것을 요청했다. 그 이유를 물으니 나를 만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했다. 다음 네팔 방문 때 어렵사리 그 마을을 방문했다. 이미 여러 명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고 샴부 목사는 참석자를 일일이 소개하며 특별히 두 명을 내게 자세히 소개했다. 그 둘은 나를 만나기 위해 이틀을 걸어 왔다고 했다. 그 이유를 물었다. 부탁이 있단다. 그들에게 무엇이냐고 물으니 샴부 목사가 하는 성경공부를 자신들도 할 수 있게 해 달라고 했다. 외부에서 접근이 쉽지 않기에 그곳에 있는 우리 학생 3명이 그들을 가르쳐야 했다. 그렇게 네팔 산악지역에서 재생산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는 네팔 사역의 주요 전략이 되었다.
히말라야로 잘 알려진 네팔에는 많은 인구가 산악지대에 산다. 날씨도 시원하고 말라리아 같은 질병도 덜하기 때문이다. 왠만한 높이까지는 농사가 가능해 산악지대로 도로망이 거미줄 같이 나 있다. 대충 산악지대로 들어서면 주요 간선도로(대부분 왕복 2차선으로 비포장이었는데 지금은 포장도로로 바뀌고 있다.)가 있으며 중간중간 바자라고 불리는 시장이 형성된 마을이 있다. 대중교통은 그런 바자가 있는 마을들을 통과하며 운행한다. 그 바자 마을은 거기서부터 오토바이나 도보로 이동할 수 있는 작은 마을들의 중심지이다. 짧게는 몇 시간, 길게는 몇일을 걸려 사람들은 자신의 마을에서 바자가 있는 마을까지 걸어 오가며 자신의 소출을 팔고 필요한 것을 구해 돌아간다. 이런 깊은 산 마을에도 교회가 많다. 그렇기에 현지인 인도자들이 이 산 마을을 방문하여 BEE 과목을 가르치는 것은 네팔 환경에 딱 맞는 전략이다. 현지인 사역을 늘리면서 조 선교사는 의구심이 하나 있었다. 과연 현지인들이 가르치는 수준이 어떨까? 그래서 한 번은 한 현지인 인도자가 사역하는 마을을 방문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학생 모두는 극구 말렸다. 조 선교사가 가기에 너무 험하다는 것이다.
이 전략을 이용해 네팔에 BEE 사역을 꽃피운 사람은 박은형 선교사다. 박 선교사는 2004년 조문상 선교사가 본부 사역을 시작하며 네팔 사역을 맡았다. 박 선교사는 조 선교사가 훈련한 10여명의 인도자 중심으로 산마을에 사역을 개척하고 재생산을 확산했다. 조 선교사는 박 선교사에게 사역을 이양하며 한 가지 부탁을 했다. 현지인 인도자가 인도하는 마을들을 가서 수준을 좀 확인하라는 부탁이었다. 박 선교사는 그래도 젊어 이 부탁을 우직하리 만큼 지켜 때로는 3, 4일을 걸으며, 때로는 위험하기 짝이 없는 낭떠러지 길을 타고 대부분 마을을 방문해 사역 현장을 확인했다. 이렇게 BEE 사역은 네팔 산마을 깊숙히 자리를 잡았다. 많은 선교단체가 네팔에서 사역하지만, 이렇게 산마을에서 말씀으로 사역하는 단체는 BEE가 거의 유일했다.
네팔 사역에 여러 네팔인 사역자가 많은 공헌을 했다. 그중에서도 카드가 목사와의 만남은 네팔에서 BEE 사역을 위한 하나님의 축복이다. 카드가 목사는 BEE Korea가 2000년 카타르에서 BEE 사역을 시작할 때 당시 카타르 도하의 네팔 교회 담임 목사로 BEE 사역에 참여했다. 하루는 저녁에 카드가 목사가 다른 그룹에 세미나를 인도 중이던 조 선교사를 찾아왔다. 목사는 현재 공사장에서 타워크레인 기사로 일하며 목회를 하고 있는데 전임 목회를 하고 싶으니 정식으로 신학을 하고 싶다고 했다. 싱가포르에 머물며 사역하던 조 선교사는 자신과 좋은 관계를 가지고 있던 싱가포르의 극동신학교(Far Eastern Bible College)의 토우 학장에게 부탁해 카드가 목사가 신학사를 공부할 수 있도록 주선했다.
2003년 카드가 목사는 신학을 1년 남겨 놓고 있었고 조 선교사는 카드가 목사와 동역할 방법을 주님께 구하고 있었다. 스리랑카에서 사역할 때 조 선교사가 미국에서 유학시절 신앙으로 이끌었던 시온감리교회의 정우현 목사로부터 이메일이 왔다. 당시 스리랑카에서 모뎀으로 연결한 인터넷은 연결하기도, 이메일을 받아 읽기도 어려웠다. 이메일로 연락을 잘 하지 않는 분이 보낸 이메일이라 뭔가 급한 내용일 것 같아 한참을 기다려 이메일을 열고 읽을 수 있었다. 정 목사는 아프리카나 인도네시아에서 사역할 한국인 선교사를 추천해달라고 했다. 몇 사람을 추천한 끝에 카드가 목사에 관해 말하며 현지인을 선교사로 받을 때 유익한 점을 나열했다. 정 목사 교회는 당회에서 의논하고 카드가 목사를 선교사로 파송하기로 결정했다.
시온교회는 조 선교사와 협의하여 작은 예배 처소를 세 들어주고 최소한의 사례와 사역비만 네팔의 카드가 목사에게 보냈다. 1주년 때 시온교회 대표로 조 선교사가 참석하였다. 교회는 터져 나갈 듯이 성도가 늘었고 활기가 넘쳤다. 이 소식을 들은 시온교회는 본격적으로 교회건축을 하자고 했다. 그러나 조 선교사는 그 계획에 반대하고 건축할 돈까지 모두 합해 땅만 사 주고 교회는 자신들이 어떻게 하든 건축하도록 시온교회에 부탁했다. 카드가 목사는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모를 큰 땅 한 구석에 성도와 함께 쇠파이프와 양철판으로 교회를 짓고 이사했다. 3년 후 카드가 목사는 이래저래 건축비를 만들어 버젓한 교회당을 지었다. 그래도 교회가 소유하고 있는 땅의 20%정도만 활용했다.
2009년, 시온교회의 한 장로가 미국으로 이민을 가며 부흥하는 네팔교회를 위해 사용해 달라며 적지 않은 헌금을 했다. 정 목사는 이 헌금으로 남은 땅에 학교를 시작하기 원했다. 하지만 교회 내부 사정으로 이 계획이 물거품이 되며 정 목사는 조 선교사에게 자신은 하지 못했지만, 어떻게 하든 이를 추진해 줄 것을 부탁했다. 조 선교사는 존경하는 분이 부탁하시기에 그렇게 하겠노라고 말씀 드렸다. 하지만 난감했다. 다시 이를 주님께 올려드렸다. 그해 8월 카타르에서 알고 지내던 장로님이 카타르에서 전화를 하셨다. 이분이 국제전화로 조 선교사에게 전화를 하신 것은 그 전에도 그 후에도 없었다. 유 장로님은 콕 집어 네팔에 기술학교를 하고 싶은데 도와달라고 하셨다. 조 선교사는 기술학교도 좋지만, 땅도 있고 운영할 신실한 사람도 있으니 일반학교를 하시면 어떨지 유 장로께 물었다. 유 장로는 1월 현장을 방문하고 결정하겠다고 했다. 결론적으로 유 장로와 함께한 선교회 회원들은 정 목사가 계획한 헌금의 3배를 들여 학교 건물을 완성했고, 시온국제학교로 명명한 그 학교는 1000명의 학생이 다니는 네팔 동부의 명문학교로 자리 잡았다.
이런 하나님의 강한 역사로 카드가 목사는 BEE에 마음 깊이 감사하며 헌신했다. 카드가 목사는 지금까지 네팔의 BEE를 이끌어 오며 여러 명의 현지인 선교사를 포함한 동역자들과 사역을 하고 있다. 그는 네팔 전체를 BEE로 덮을 비전을 가지고 BEE가 익숙한 동부를 넘어 기독교가 척박해 BEE 교육이 더 절실한 서부 끝으로 사역을 확장했다. 3천만이 조금 넘는 인구에 복음주의자는 2.8%에 불과한 네팔이 코로나 전에는 몇 년 동안 가장 많은 학생을 가르치는 국가가 된 것은 카드가 목사의 지도 아래 어려움을 마다하지 않고 책을 지고 산을 오르내리며 가르치는 현지인 BEE 사역자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들의 헌신을 보고 조 선교사는 〈천국의 마칼루들〉이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아침 햇살을 받은 마칼루 봉은 유난히 빛난다. 이 이방인은 지리산 만한 높이에 와서 그 끄트머리만 겨우 보이는 이 설산이 멋있다며 신이나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렌즈를 들이밀지만, 나와 함께 온 카드가 목사는 그저 덤덤하다…… 6년 전만해도 신내린 무당이었던 싸누 자매는 신이났다.
”(마칼루 쪽을 가르치며) 저 높은 곳에 그룹들이 있어요. 거기 가려면 여기서 새벽에 출발해서 지프로 몇 시간 간 후 걸어서 깎아지른 산길을 4시간 올라야 해요(우리에게는 적어도 6-8시간이다). 옆은 바로 강이 흐르는 낭떨어지예요. 떨어지면 바로 천국가요. (씩~) 선교사님(나)이나 목사님(카드가)은 거기 못 가요. 그렇게 힘든데 막상 가서 BEE를 가르치면 그렇게들 좋아해요. 그 모습에 내 가슴이 뜨거워져요. 막 신이 나고 힘이 솟아요. 그래서 힘들지만 자꾸 가게 돼요.“
그 말에 한 편으로는 나도 신이 난다. 하지만 또 한 편으로 나의 안일함이 그들의 눈물겨운 순수한 수고와 대조되며 내 가슴은 이래저래 먹먹해진다. 분명 천국에서는 그들이 저 마칼루같이 빛날 것이다. 그리고 저 아래 지리산은 그때도 그 빛나는 마칼루들을 보며 신이 나서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즐거워할 것이다.
네팔은 재정 외 학습서, 인도자, 행정, 사역의 모든 면에서 이미 현지화하였다.
숭실대학교 교수이던 윤현덕 장로는 온누리교회의 선교부서에서 사역하며 BEE Korea의 창립부터 BEE 사역에 헌신했다. 1994년 윤 장로는 유학할 때 같이 신앙생활을 하던 연세대학 건축과의 한 교수로부터 최근 온누리교회에 등록교인이 된 숭실대 건축학부의 교수를 소개받았다. 연세대 교수는 그 교수가 선교에 관심이 많다고 알려줬다. 마침 BEE Korea가 창립된지 얼마 되지 않아 함께 사역하면 좋겠다고 생각해 그 교수에게 연락을 하며 동역을 제안하지만, 그 교수는 지금 다른 선교단체 일에 연관되어 시간을 낼 수 없다며 정중히 거절했다. 하지만, 윤 장로는 1995년 초 개강을 앞 둔 교수수련회에서 그 교수를 다시 만나 자신이 사역하는 BEE애 관해 보다 상세하게 설명하며 교수로 있으면서 방학 때 선교지에서 교회 지도자들을 대상으로 사역하기에 좋은 프로그램이라고 했다. 그 교수는 그 다음 주부터 토요일 아침 6:30에 모이는 BEE 기도모임에 참석하기 시작했다. 그 교수가 조문상 선교사이다.
조 선교사는 1995년 《갈라디아서와 로마서》 세미나를 들으며 복음을 확실히 깨달았다. 그리고 그해 여름 중국 영구에서 조선족 교회 지도자들에게 같은 과목을 직접 인도할 경험을 가졌다. 조 선교사는 당시 신학도 하지 않았지만, 학습서 내용만 따라 인도하는 BEE 사역이 선교지 교회에 얼마나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는지 체험했다. 그러면서 새로운 BEE 과목이 개설될 때마다 조 선교사는 아내와 함께 배웠다. 그러면서 방학마다 중국을 방문해 BEE 사역을 심양, 하얼빈, 장춘, 옌빈, 훈춘 등지로 확장했다.
당시 BEE Korea는 김사무엘 선교사가 간사 한 명과 사역 전체를 맡고 있었다. 김 선교사가 온누리교회의 정식 목회자가 되자 교회 사역으로 BEE 사역을 거의 돌보지 못했고 간사가 사역을 맡아서 하는 상황이었다. 조 선교사는 중국이라는 선교지에서 BEE가 얼마나 선교지에서 필요한 훈련 프로그램인지 이미 확인했다. 그런데 심각하게 BEE 사역을 기획하고 추진하는 담당자가 없어 사역이 간사 수준에서 진행되는 것이 안타까웠다. 1996년 말 1997년 교회 조직을 세울 때 조 선교사는 자원해서 BEE의 총무가 되었다. 그리고 이를 축복이라도 해 주시듯 하나님은 1997년이 시작되자 조 선교사 가정을 통해 베트남 사역의 문을 열어 주셨다.
1998년 11월 아직 국내외에서 BEE 사역은 미미했고 어떤 구체적인 계획도 없었던 때 하용조 목사는 BEE 사역의 장기 전략에 대해 논의하기를 원했고 BEE는 논의 자료를 준비해야 했다. 조 선교사는 그 자료에 대해 나중에 이렇게 회상했다.
당시 BEE Korea는 아직 단 한 명의 선교사를 파송하지도, 파송할 계획도 없던 때였다. 그 상황에서 나는 기도하며 자료를 만들어 갔다. 먼저 현 상황을 보여주는 지도를 그렸다. 당시 BEE 사역 주체인 동유럽 중심의 BEE International과 미국으로 본부를 옮긴 BEE World, 그리고 아직도 걸음마 단계인 한국의 BEE Korea를 해당 국가에 표시하고 “현재의 BEE 사역”이라는 제목을 달았다. 그 다음 장에는 “궁극적 BEE 사역의 모습”이라는 제목을 달고 앞의 지도에 표시한 그 세 곳 외에 아프리카, 중동, 인도, 중국, 싱가포르에 표시하고 그 옆에 “지역 특성을 감안한 선교 권역화”가 되어야 한다고 미래 비전을 제시했다. 사실 14일 하 목사와 BEE Korea의 지도층이 함께 한 회의에서 긴장 중에 이 자료를 발표하고 나는 이 자료의 내용을 잊었다. 그리고 2009년 이 자료는 “보이시는 하나님, 이루신 하나님”이심을 깨닫게 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그 10년 전인 1999년 초에 BEE는 남아시아에서 베트남에 이어 네팔까지 사역을 시작하게 되었다. 게다가 봄이 되기 전 스리랑카에서 사역 중인 TIM의 도육환 선교사는 스리랑카에서도 BEE 사역을 해 달라고 요청했다. BEE Korea 본부는 분명 하나님이 여신 사역의 문임을 인정하며 보낼 사역자를 찾았지만, 당시 몇 명 되지 않는 인도자 중에 영어로 세미나를 인도할 사람을 찾기 어려웠다. 그나마 당시 총무인 조 선교사는 방학이 있어 일 년에 두 차례 방학 중 시간을 낼 수 있었다. 하지만 요청하는 영어권 사역에 비해 인도자 수는 턱없이 부족했다. 하나님께서 더 많은 사역의 문을 열어 주시는 데 당시 형편으로는 하나님이 여시는 사역을 제한해야 했다. 그럴 때 하나님은 조 선교사를 부르셨다.
1999년 5월 어느 날 나는 어느 때처럼 일찍 학교 연구실에 도착해 QT를 했다. 그런데 혹은 보낼 사역자에 대한 기도 때문인지, 혹은 하나님이 여시는 사역의 문을 제한해야 한다는 죄스러움 때문인지, 하나님은 직접 나에게 해결책을 말씀하셨다. “이제 교수 그만하고 선교사로 나가라!” 주님의 말씀이 너무 분명해 QT 노트에 썼다. “네, 주님!” 하지만, 일상 생활을 시작하자 불안했다. 현실이 보였다. 장애가 있는 아내, 중 2 아들, 나를 사랑하시는 연로하신 할머니, 교수 외아들이 자랑스러운 신앙심 없는 부모, 교수 그만 두고 아내도 대학 강의와 레슨 다 그만 두면 어떻게 생활할지에 대한 염려가 엄습했다. 그래서 마음을 돌렸다.
다음 날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순서에 따라 어제 QT한 본문에 이어지는 다음 본문으로 QT를 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다시 분명히 말씀하신다. 어제 내가 염려한 모든 것을 그분이 알아서 하시겠다고. 이렇게 3일을 주님과 줄다리기를 했다. 그렇게 세 번째 망설인 다음 날 아침 하나님이 다시 명확히 말씀하신다. “내가 너를 선교사로 부르고 있다. 그런데 네가 이 부름을 거절한다면 나중에 네가 천국에 올 때 후회하지 않겠니?” 조 선교사는 더 이상 하나님께 묻지도 망설이지도 않았다.
나는 그날 아내인 김정년 선교사에게 하나님이 우리를 선교사로 부르신다고 했다. 아내는 잠시 나를 바라보고 이렇게 말했다. “그러면 장애인인 나하고 결혼하지 말았어야지!” 그리고 질문한다. “당신, 장애인 선교사 봤어?” 사실 못 보았다. 나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눈만 끔뻑였다. 아내는 언제까지 정해야 하는지 물었다. 학교를 그만 두려면 이번 학기 끝나기 전인 5월 말에는 총장께 말씀 드려야 한다고 했다. 그러자 아내는 “3일만 줘. 기도해 보게!” 하고 말했다. 3일 후 나는 아내에게 하나님이 뭐라시냐고 물었다. 그 질문에 아내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하나님이 선교사 나갈지 말지에 대해 아무 말씀도 안 하셔. 하지만, 내가 당신 아내이고 성경이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하라고 했으니 하나님이 당신에게 선교사 가라고 하셨다니 당신을 따를께!”
조 선교사는 총장과 면담을 신청했다. 그는 면담 내용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나의 사직 이유를 눈을 지그시 감은 채 듣던 새문안 교회 장로이기도 한 어윤배 총장은 잠시 더 눈을 감고 생각하더니 다음과 같은 교수에게는 너무 좋은 제안을 하셨다. “조 교수, 선교하겠다는 거잖아? 그러면 학교에서 3년 휴직을 줄께. 3년동안 조 교수 원하는 대로 선교하고 학교로 돌아오세요!” 교수에게 휴직은 기본급이 다 나오는 유급 휴가와 같아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는 학교에서 허락하지 않는다. 특히 3년이란 긴 기간의 휴직은 더욱 어렵다. 너무나도 좋은 제안이었지만 나는 이 제안을 거절하고 다음 날 사직서를 총장께 드렸다. 선교사 하다가 교수로 돌아오기가 내키지 않을 것 같기도 했고, 또 선교한답시고 가르치지도 않으면서 학과 교수 자리를 3년 동안 차지하고 후임도 뽑지 못하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으로 믿지 않는 다른 교수들에게 본이 되지 않을 것 같아서이기도 했다. 2000년도 후반인가 싱가포르를 방문했던 숭대 중진 교수는 일부러 나에게 연락해 함께 교제하며 어 총장이 6개월 동안 내 사표를 수리하지 않았다고 전했다.
조 선교사가 사직하고 선교사로 나간다는 소식을 들은 하 목사는 조 선교사 부부를 아침 식사에 초대했다. 그 자리에서 하 목사는 조 선교사에게 신학을 하고 온누리에서 같이 목회하기를 제안하셨다. 하 목사의 제안이 감사했지만, 조 선교사는 죄송하다며 그 제안도 바로 거절했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선교였음이 너무 분명했기 때문이다.
파송 지역은 사역이 여러 곳에서 시작된 남아시아이고 타이틀은 개척 선교사였다. 항공기를 이용한 이동을 감안할 때 당시 항공기의 허브였던 태국의 방콕과 싱가포르가 파송 후보지였다. 방콕은 생활비가 싸면서 태국 자체가 선교지라는 이점이 있었고, 싱가포르는 영어권이고 이미 충분한 교회가 있어 영어로 세미나를 인도할 수 있는 BEE 사역의 동역자를 세울 수 있다는 이점이 있었다. 조 선교사는 동역자를 세울 수 있는 싱가포르로 가기로 했다. 외국에 장기 체류하려면 비자가 필요했다. 부부는 미국에서 유학하면서 학교를 통해 비자를 얻고 학교 기숙사에서 생활하던 것을 기억했다. 그래서 아내인 김 선교사가 공부할 수 있는 신학교를 찾았다. 몇 개의 신학교가 싱가포르에 있었지만, 극동신학교만이 년초에 학생을 모집하기에 그 신학교에 지원했다. 합격 통지를 받고 조 선교사는 네팔 사역 후 싱가포르에서 항공기를 갈아타며 극동신학교에 들려 시설을 보고 가족이 오면 머물 기숙사를 정했다.
드디어 조 선교사 가정은 그해 11월 파송을 받고 12월 18일 싱가포르에 도착해 아내가 학생으로 등록한 극동신학교 허름한 기숙사에 정착했다. 그리고 이 곳을 삶의 터전으로 베트남, 네팔, 스리랑카를 1년에 3-4회 방문하며 BEE 사역을 일구었다. 그리고 2000년에는 중동의 카타르와 사우디아라비아에 사역을 개척했다. 후에는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 인도에도 사역을 넓혔다.
조 선교사는 알지 못했지만, 싱가포르성경신학교(Singapore Bible College)에는 이미 베트남을 오가며 BEE 과목을 인도하는 미국인 교수(Nick Griffith)가 있었다. 그리피스 교수는 BEE 사역을 여러 모양으로 협력하며 결정적으로 선교사가 되기 원하는 자신의 제자 두 명을 내게 소개했다. 레이첼(Rata Rachel Rajagopal) 선교사와 다나(Dana ?) 선교사이다. 둘 사이에는 늘 긴장감이 있었지만, 각기 그 지역에서 BEE 사역 발전에 많은 역할을 했다. 특히 레이첼 선교사는 인도네시아 사역을 시작했고 후에 중동에 이어 동서아프리카 사역을 맡아서 진행했다. 또 BEE 원본이 현지인의 수준에 너무 높다고 판단해 이의 간략본을 만들 때 영문학을 전공한 레이첼 선교사는 교정을 도맡아 했다. 그 외에도 응(Ng Han Lim), 탄(David Tan) 등 싱가포르인 목회자와 신학교 교수들이 함께 사역했다. 또한, 박은형, 봉해남 등 한국인 선교사가 싱가포르에 와서 선교사 훈련과 언어 훈련을 받아 BEE Korea의 주요 사역자로 세워졌고, 카드가 같은 네팔과 스리랑카 국적의 BEE 학생들이 신학을 공부하며 하나님의 사역자로 세워져 나갔다. 이렇게 싱가포르는 남아시아와 중동 사역을 위한 BEE 지부 역할을 감당했다.
싱가포르 지부는 2004년 조 선교사 가정이 본부 사역을 위해 싱가포르를 떠나며 조대식 집사가 지부를 맡았다. 그 후 박은형, 봉해남 선교사 가정도 각각 사역지로 떠나고 레이첼 선교사도 본부 근무를 하며 싱가포르는 지부로서 역할을 마쳤다. 하지만 싱가포르 지부 사역으로 남아시아 사역은 든든히 섰고, 중동 사역도 개척하였다. 그리고 2004년 조 선교사가 본부 사역을 맡으며 BEE 사역은 더 확장해 2005년 중동이 지부가 되고, 2006년 중국과 중앙아시아 지부가, 2008년에는 미주와 아프리카 지부가 생겼다.
2009년 조 선교사는 컴퓨터에서 오래된 파일들을 정리하고 지우는 작업을 했다. 그러다 기억에서 사라진 1998년 하 목사와의 장기 전략회의 자료 파일을 열었다. 그리고 그 파일을 넘기며 조 선교사는 너무 놀랐다. 한 지도, 11년 전 선교사를 내보낼 계획 조차 없던 시기에 그렸던 지도가 2009년 BEE 사역의 모습과 너무나 흡사했다. 그 지도의 제목은 “궁극적 BEE 사역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 지도 옆에는 “지역 특성을 감안한 선교 권역화”라고 적혀 있었다. 이 지도를 작성한 당사자인 조 선교사는 정작 그 자료의 존재 마저 잊었지만, 11년 후 그 계획은 현실이 되어 있었다. 조 선교사는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었고 하나님이 이루셨음을 뼈저리게 깨달으며 하나님은 “보이시는 하나님, 이루시는 하나님”이심을 고백했다. 10여년 전 하나님이 미래를 보이시고 그동안 보이신 것에 따라 하나님이 이루셨기 때문이다.
인도네시아에서의 BEE 사역은 싱가포르 지부 소속이었던 레이첼(Rata Rachel Rajagopal) 선교사(싱가포르인)와 다메(Dame Simajuntak) 사역자(인도네시아인)에 의해 2003년도부터 시작되었다. 메단(북부 수마트라)과 말랑(동부 자바) 지역의 현지 교회 지도자를 대상으로 《갈라디아서》, 《로마서》 세미나가 있었고, 바탐에서도 간헐적으로 사역이 있었다. 몇 번의 세미나가 있었으나 결국 두 사람의 불화로 중단되었다.
그러던 중 리아우 제도 주 바탐에서 사역 중인 김부열 선교사(싱가포르 한인교회 파송)가 BEE 사역자인 조대식 집사(당시 주 싱가포르 대한민국 대사관 참사로 재직)에게 바탐에서 사역 중인 실리똥아(Jonston Silitonga) 목사를 소개했다. 실리똥아 목사는 기독교 종족인 바탁종족으로 죤스톤(Patrick Johnston)과 같은 사역자가 되라고 부모님이 지어 주신 이름이었다. 그러나 부모님의 기대와는 달리 젊은 시절 방황기를 거치다가 성령의 강권하시는 은혜로 거듭남을 체험하고 목회자가 되어 복음을 위해 헌신했다. 그는 바탐과 주변 섬 지역을 순회하며 복음을 전파하고 발로이(GBI Baloi) 센터 교회를 개척하여 담임목사로 목회하고 있다. 개 교회 목회를 뛰어넘어 알파오메가사역(Alfa Omega Ministry)을 통해 “목회자 연합모임”을 이끌며 인도네시아 교회부흥을 위해 선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BEE는 실리똥아 목사가 세운 사역자 훈련학교(School of Ministry, SOM)의 학생들을 《일대일 제자양육 성경공부》로 훈련하기로 하였다. 봉해남 선교사는 SOM과의 사역을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2005년 4월부터 조대식 집사 부부는 주말마다 바탐을 방문하여 학생들을 《일대일 제자양육 성경공부》로 훈련했다. 《일대일 제자양육 성경공부》 과목을 마친 후 SOM 학생들에게 BEE 과정을 계속 제공하기로 하고, 남아시아지부 소속으로 싱가포르에 거주하고 있던 BEE 선교사들(박은형, 봉해남)과 훈련생(라잔 전도사-네팔)이 세미나를 인도하였다. 처음에는 《갈라디아서》, 《로마서》, 《그리스도인의 삶》 등 몇 과목만을 학생들에게 제공하다가 2009년도부터 SOM 교과과정 안에 기본사역자과정(Diploma in Practical Ministry, DPM)을 구성하는 일곱 과목 모두를 제공하게 되었다. 2010년 1월 SOM 13기 14명의 졸업을 시작으로 총 10기수에 140명의 DPM졸업생을 배출하였다. 배출한 졸업생들은 BEE 선교사나 목회자, 전도자 또는 일반 사역자로 수마트라 전역으로 흩어져 부르심의 자리에서 섬기고 있다.
SOM 2기 출신인 로비(Robby Marpaung) 목사는 2012년에 BEE 전임 선교사가 되어 BEE 사역을 감당하면서 실리똥아 목사의 “목회자 연합모임” 사역을 돕고 있으며 바탐 인근 섬에 소재한 쑹아이우삐(GBI Sungai Upih) 교회에서 목회하고 있다. BEE에서 신학사과정(Sekolah Tinggi Teologi BASOM) 학비를 지원한 SOM 출신 주안(Juan Carlos) 선교사는 2016년에 BEE 전임선교사가 되어, 바탐 SOM 후배들에게 DPM 과정을 인도하였다. 현재는 메단으로 이주하여 BEE 사역과 함께 교회개척을 하고 있다.
바탐의 빠시르인다(GBI Pasir Indah) 교회를 담임하는 씽아(Wilson Sinaga) 목사는 DPM 과정으로 교회 리더십을 훈련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BEE는 로비 선교사를 이 그룹의 인도자로 정했다. 봉선교사는 빠시르안다 교회 사역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현지교회 분위기는 담임목사가 성도와 함께 학생으로 공부하는 것은 흔하지 않았다. 또한 씽아 목사는 신학석사 학위를 갖고 있는 SOM 교수였고, 인도자인 로비 선교사는 당시 신학 학위 없이 SOM 졸업이 전부였다. 그럼에도 씽아 목사는 교회 리더십 대상으로 2014년에 DPM 과정을 열고 본인과 사모도 함께 참석하여 DPM 과정을 이수했다. 2015년 8월 총 13명이 졸업하고, 《인도자학교》(Facilitator Training School, FTS)로 훈련 받고 BEE 사역자가 되어 본인의 교회에서 바로 재생산하고 있다. 현재까지 총 4그룹 43명이 DPM 과정을 이수하고 주일학교 교사로, 집사로 충성스럽게 섬기고 있다.
실리똥아 목사는 “목회자 연합모임”을 통해 매년 인도네시아 국내외에서 3-5천명이 참석하는 대형 집회를 여는 데, 마지막 날에 SOM 졸업식이 BEE DPM 졸업식으로 거행된다. 이를 통해 BEE 사역이 자연스럽게 소개되고 사역이 확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BEE 사역은 수마트라의 메단, 뜨빙띵기, 쁘라왕, 바간바투 지역으로 확장해 이들 그룹에서 재생산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북부 수마트라 주 따루뚱(Tarutung)은 2010년 3월 그 지역 오순절 계열 목회자들 모임에서 BEE 사역을 소개함으로 그해 6월 시작하였다. 따루뚱은 HKBP(Huria Kristen Batak Protestan) 총회 본부와 신학대학교가 있는 곳으로 바탁 종족 그리스도인들의 영적 고향 같은 곳이다. 그러나 교회가 전통화되고 종족문화가 깊이 교회내에 들어와 있어 오순절계통 교회와는 거리를 두고 있었다. 이 그룹에 대해 봉해남 선교사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훈련에 참가하기를 원하는 목회자와 리더십들 18명을 대상으로 DPM 과정이 2010년 6월에 시작되었다. 3개월에 1번씩 세미나가 진행되었는데 싱가포르에서 따루뚱까지 여정은 멀고도 험했지만, 열정적으로 배우는 학생들과 말씀과 삶, 사역을 나누며 격려가 되었다. 학생 중에는 현직 경찰관이면서 복음 전도자로 사역하는 씨마라마따(Dayan Simarmata) 사역자가 있다. DPM 과정을 마치고 바로 2013년도에 따르뚱에서 1시간 떨어진 씨빠후따르(Sipahutar)에서 다니엘 목사와 함께 재생산하여 2015년도에 13명이 졸업하게 되었다. 씨마라마따 목사는 이제 이 지역의 경찰 최고직으로 재직하면서 2곳에 교회를 개척하여 목회를 겸하고 있다.
봉해남 선교사는 2011년도에 빼라왕(Perawang, 리아우 주)에서 대부분 개 교회 담임인 목회자 22명을 대상으로 BEE 사역을 시작했다. 2012년 9월 DPM 졸업과 FTS를 마치면서 이들을 통해 리아우 주 전 지역으로 BEE 사역이 폭발적으로 확산되리라 기대하였다. 하지만 뿌르바(Yusuf Purba) 목사 만이 본인 교회에서 3과목만 인도해 봉 선교사는 무척 실망스러웠다. 그러던 중 씨홈빙(Bistok Sihombing) 목사에 의해 2018년 3월 빼깐바루(Pekan Baru, 리아우 주)에 있는 본인이 목회하는 교회(GKKI Filadelfia)에서 . 5개 교회에서 모인 20명의 학생으로 BEE 사역을 시작해 2019년 7월 15명이 졸업했다. 씨홈빙 목사는 자카르타와 반둥에 있는 교단 소속 교회에 BEE 사역을 소개하여 이 지역들에서도 BEE 사역의 길이 열렸다.
2014년도에 로비 선교사를 통해 메단(북부 수마트라 주)에서 10명의 목회자를 대상으로 BEE 사역을 해 이 중 3명(씨나가, 하레파, 와우)이 재생산을 하고 있다. 2018년도에 로비 선교사와 주안 선교사에 의해 떼빙띵기(Tebing Tinggi, 북부 수마트라 주)에 14명을 대상으로 사역을 시작해 문테 목사와 씨아쟌 목사에 의해 떼빙띵기와 뻬르다간의 2교회에서 재생산이 이루어지고 있다. 2018월 4월 바깐바투(Bagan batu, 리아우 주)에서 로비 선교사에 의해 DPM을 시작(31명)하여 빈사르, 사무엘, 리디아 목사에 의해 뗄룩바노, 발람, 바깐바투, 또르깐다에서 재생산했고 일부는 진행 중이다.
반자루바루(남부 칼리만탄)에 오순절 기독교인으로 구성된 “베데스다기도모임”은 매주 회원들의 가정집을 순회하며 전도와 기도하는 소규모 기도모임이다. 씰리똥아 목사가 이 지역에서 연합부흥성회를 인도할 때 이 기도모임도 참석하여 BEE 사역에 대해 듣고 BEE 사역을 요청했다. 봉해남 선교사와 로비 선교사를 통하여 2011년에 1기가, 2013년에 2기가 시작되어 각각 2012년과 2014년에 졸업했다. 이 졸업생들은 스스로 BEE 사역을 위한 깔리만탄 위원회를 조직하며 반자르바루와 반자르마신에서 새로운 그룹을 개설하여 재생산을 시작하였다. 쓰리 사역자 부부는 편도 6시간 거리의 바뚜리씬에, 씨빠융 사역자 부부는 편도 4시간 거리의 록사도에, 케지아 선교사는 중부 깔리만탄의 쌈삣, 빨랑까라야로 사역을 확장해 지금까지 8개 그룹에 49명이 DPM을 마쳤다.
2015년 3월 봉해남 선교사는 인도네시아 반둥으로 이주하여 인도네시아 사역에 집중하게 되었다. 인도네시아 사역의 내실화를 위해 2017년 BEE Indonesia 컨퍼런스를 열어 BEE 사역자들과 졸업생들 70여명에게 BEE 사역의 비전과 철학을 공유하게 하고 반자루바루와 메단 그룹의 졸업생 중 14명을 BEE 인도자로 임명하며 참석자가 BEE를 통한 말씀사역에 헌신하기로 결단했다. 이 컨퍼런스에 참석한 한 부부의 헌신에 관해 봉 선교사는 다음과 같이 기억한다.
씨빠융과 글로리아라는 부부는 현직 경찰이며 국가공무원이다. 말씀사역의 중요성을 인식한 이 부부는 그런 훈련 기회가 없는 산간지역인 록사도, 무알라울랑에 BEE 사역을 2017년에 시작했다. 승용차로 4시간 거리임에도 격주 주말마다 방문해 2019년 17명이 DPM 과정을 마치고 이들을 통하여 3세대 그룹이 시작해 3개 그룹 11명이 졸업했다. 경찰인 씨빠융 인도자는 타지역으로 사역하러 갈 때 자녀들을 집에 두고 가는 부담 이외에 근무지를 이탈할 때 상부 허락을 얻고 총기를 반납해야 했다. 그러던 중 신임경찰학교에 교수요원으로 발령을 받게 된다. 이는 승진을 포기하는 자리이지만, 총기 반납과 이동 허락을 더 이상 받지 않아도 돼 사역에 더욱 집중할 수 있다고 감사하고 있다. 현재는 학교에서도 경찰후보생 중 기독교인들을 모아 《일대일 제자양육 성경공부》를 하며 복음에 견고히 세워진 경찰로 어느 곳에 근무하던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굳게 유지하는 것에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있다. 또한 자택 뒤뜰에 세미나 공간을 만들어 BEE 사역 장소로 활용하여 재생산에 헌신하고 있다.
2016년 초 수라바야(동부 자바 주)에서 목회하는 루카스 목사가 수라바야에 있는 사역자들에게 BEE를 소개해 달라는 요청이 있어 사무엘(David Samuel) 목사의 샬롬교회에서 소개회가 있었고, 사무엘 목사도 참석했다. 사무엘 목사는 법학을 전공한 직장인으로 목사이신 아버님의 소천 후 신학훈련 없이 갑작스레 목회자로 아버지 교회에서 목회하게 되어 늘 말씀에 부족함을 느끼고 있었다. 사무엘 목사는 BEE가 이동식 신학교임을 알고 바로 본인 교회에서 DPM 과정을 개설하기로 해 2016년 그 교회에서 목회자와 교회 지도자 13명이 BEE를 시작해 2018년 DPM을 졸업했다. 졸업생들은 바로 2세대 5개 그룹에서 35명을 재생산하고 있다. 사무엘 목사는 BEE를 확산하는 전도사로 자인하며 BEE 사역자로 섬기고 있다. 학생들이 떨어져 나가고 오해로 그룹이 중단되는 일을 겪으면서도 동료 목회자와 교회에 BEE 과정을 소개하고 사역의 확장을 위해 뛰어다닌다.
암본(말루꾸 주)의 샬롬교회를 담임하는 란 목사는 사무엘 목사 그룹의 BEE 세미나 소식을 듣고 비행기를 타고 와 세미나에 참여하겠다고 했다. 그 대신 BEE는 암본에 새 그룹을 개설하기로 하고 2017년 BEE를 시작했다. 신학대 교수, 전도사, 교회 지도자 19명이 참여하여 2019년 13명이 DPM을 졸업하였다. 그 중 마테우스 집사에 관해 봉 선교사는 다음과 같이 기억하고 있다.
마테우스 집사는 은행 고위직으로 주 3회 신장투석을 해야 했다. 그러나 신장투석 당일 오후에도 세미나에 열심으로 참석하며 말씀의 능력을 경험하며 기뻐했다. 하지만 몇 세미나 후 건강상 더 이상 참여할 수 없었고, 마지막 세미나 방문 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분은 연약한 몸을 이끌고 세미나에 참석하여 모든 학생 뿐 아니라 인도자에게도 격려가 되었던 분이다.
지진과 쓰나미 피해를 입은 중부 슬라웨시 주에서 온누리교회와 동역하며 TIM의 이은준 선교사와 그 지역 GTM(Gereja Toraja Mamasa) 교단에 BEE의 DPM 과정을 소개하고 교단 차원에서 BEE 과목을 공식적으로 열었다. 2019년 1기를 시작하여 팬데믹을 거치며 2022년 졸업하였다. 졸업자 중 로버트와 아구스 사역자를 통해 2023년부터 2개 그룹이 재생산 중이다. 또라자(남부 슬라웨시 주) 목회자 중 100여명이 매월 1회 정례적으로 모이는 또라자목회자연합회에 사무엘 목사와 봉해남 선교사가 방문하여 BEE 사역을 소개하고 2019년 16명을 대상으로 BEE를 시작했다. 팬데믹으로 일시 중단되었지만 2024년 9명이 졸업하여 재생산 중이다.
인도네시아는 10개 주에서 매년 현지 사역자 40명이 5-600명의 학생을 훈련하고 있다. 인도네시아는 2025년 BEE 사역의 독립을 목표로 한다.
카타르에서 BEE를 접한 사람 중 인도인이 많았다. 모두 BEE의 내용을 좋아했지만, 자신의 사역으로 삼는 사람들은 흔하지 않았다. 그러다 2005년 카타르 사역을 맡고 있던 레이첼 선교사는 남인도교회 교인들을 만나 BEE 그룹을 형성했다. 그들은 지금까지 만났던 그 어떤 그리스도인들보다 특별했다. 마치 베뢰아 사람들 같이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배우고 삶에 적용했다. 그들은 2006년부터 BEE 과목을 인도할 수 있는 인도자 훈련을 받고 출석하는 교회에서 사람들에게 BEE를 가르쳤다. 그러다가 그들은 자신들의 고향 케럴라 주로 BEE를 가지고 갔고 이윽고 인도 다른 주로도 사역을 확대했다. 케럴라 출신 사잔(Samuel Sajan Mandody) 선교사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카타르 인도자들이 인도 케럴라에서 소규모로 BEE 사역을 시작했다. 인도에 많은 신학교가 있지만, 현실은 다르다. 훈련 받지 않은 목회자와 교회 지도자가 도처에 넘친다. BEE 인도자들이 그러한 현실을 마주하면서 BEE 사역은 인도의 다른 주로 퍼지기 시작했다.
현재 BEE는 인도 12개 주에서 활동한다. 인도는 다양한 문화와 언어의 나라이기에, 사역의 어려움 중 하나는 학습서를 현지 주 언어로 번역해야 한다는 점이다. 2024년 현재 그들은 10개 언어로 학습서를 번역했다. 또한 2018년 BEE Trust India를 비영리법인으로 인도에 등록하며 자체적으로 사무도 보고 학습서를 보관할 수 있는 센터도 마련했다. 인도 내에서 그리스도인에 대한 박해가 많아지면서 BEE Trust India는 아주 조심스럽게 사역하고 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은혜로 BEE Trust India의 주관으로 졸업식도 거행했다. 인도는 카타르와 함께 2020년에 현지화를 이루고 BEE Korea에서 독립해 BEE라는 말씀 사역을 통한 세계 선교의 귀한 동역자가 되었다.
인도는 세계에서 제일 인구가 많은 나라이다. 한 나라이지만, 28개주와 8개의 연합 영토(Union Territory)는 각각 문화와 언어가 달라 다른 나라에서 BEE를 시작할 때와 유사한 도전에 직면한다. 하지만, 외국인과는 달리 인도인들은 그 안에서 자유롭게 이동하며 머물 수 있다. 게다가 BEE Trust India의 법적 보호 아래 인도 전역에서 합법적으로 사역할 수 있다. 따라서 인도에서의 BEE 사역은 세계에서 가장 큰 나라이며 아직도 기독교가 박해 받고 있는 나라의 고착화되고 전통화된 그리스도인을 말씀 위에 세워 그들의 신앙을 어려움 가운데에도 건실하게 지킬 뿐 아니라, 다양한 문화와 언어권에 BEE 사역을 심고 경험한다는 의의를 갖는다.
이런 타문화권 사역 경험은 인도 인도자들과 선교사들을 국경 넘어 방글라데시로 이끌었다. 사잔 선교사는 방글라데시 사역에 관해 이렇게 말한다.
인도의 이웃 국가인 방글라데시에서의 사역 가능성을 찾으며 초기에 몇 차례 열매 없는 시도가 있었다. 하지만 2021년 하나님은 그분의 시간에 방글라데시의 현지 교단 한 곳의 문을 여셨다. 현재 방글라데시에서 훈련이 필요한 목회자와 교회 지도자가 BEE 학습과정으로 훈련 받고 있다. 2024년 방글라데시 인도자들은 재생산을 시작했다.
카타르의 인도인들은 카타르에서 다양한 국적의 교회를 접촉하여 BEE를 소개하며 응하는 자들을 제자로 삼는다. 그중에 필리핀인과 스리랑카인도 있다. BEE Korea는 1999년부터 스리랑카에서 사역해 왔지만, 성공적으로 재생산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인도인들이 카타르에서 제자화한 스리랑카 여 목사인 마노 목사는 자신의 나라에서의 BEE 훈련에 애정을 쏟았다. 그래서 BEE Korea는 스리랑카 사역을 인도인들에게 이양했다.
또한 인도인들이 카타르에서 만난 필리핀 목사를 통해 필리핀 본토에서 BEE를 시작하자 BEE Korea는 진행 중인 필리핀 사역도 인도인에게 이양했다. 필리핀에서의 BEE 사역을 일원화하고 언어면에서 한국인보다는 인도인에 이점이 있어서였다. 하지만, 좀 더 선교적 이유가 있다. 조문상 선교사는 이를 다음과 같이 적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넘어 인도인들의 필리핀 사역은 하나님이 처음 주셨던 비전, 즉 BEE를 통한 세계 선교의 동역자로 세우는 비전을 실현하는 하나님의 포석일 수 있다. 한 걸음 앞서 BEE 사역의 세계 선교의 파트너로서 성공적으로 사역하는 인도 그리스도인의 모범을 필리핀 그리스도인들에게 보여줌으로 필리핀인들도 같은 비전을 받아 BEE 사역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BEE 세계 선교의 형제가 되어 연합하기를 꿈꾸어 본다.
몽골이 러시아로부터 독립한 후 몽골 복음화를 위해 많은 교회와 선교사가 몽골로 향했다. 그래서 2000년 초까지 몽골 내 그리스도인의 수와 선교사의 수가 별 차이가 없었다. 따라서 복음주의 교회가 많은 지역의 목회자를 대상으로 하는 BEE 사역의 특성상 몽골은 사역 우선순위 지역에 포함하지 않았다. 하지만 몽골로 파송한 온누리교회 TIM 선교사가 2000년에 자신이 개척한 교회의 지도자들에 대한 BEE 교육 요청을 하였다.
당시 BEE Korea는 싱가포르에 베이스를 개척하고자 첫 선교사를 파송하여 본부는 중국과 러시아, 극동아시아, 중앙아시아 사역을 담당하고 싱가포르 베이스는 그 외의 남아시아와 중동 지역을 담당하고 있었다. 싱가포르 베이스는 베트남, 네팔, 스리랑카에 이어 중동의 카타르와 사우디아라비아까지 사역을 확장하고 있었지만, 본부는 국내 사역 외에 해외에서 계속되는 사역은 중국에서 조선족을 대상으로 하는 사역이 전부였다. 그런 상황에서 몽골에서의 사역요청은 뿌리치기 어려운 제안이었다. 논리적으로 볼 때 몽골에서 BEE 사역은 시기상조였지만, 본부의 지도부는 정탐여행 후 몽골 사역을 추진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지속적인 사역을 위해서는 학습서가 제 때에 번역되어야 하는데 한 과목을 진행한 후 번역이 되지 않아 몽골에서의 BEE 시도는 바로 멈추었다.
그후 2006년도에 한국에서 신학을 하고 몽골로 돌아가는 몽골인 목회자가 본인이 직접 번역하겠으니 BEE 사역을 다시 하자는 요청이 있었다. 두 과목을 더 진행하고 세 과목 째 번역을 하던 현지인 목회자는 자신의 목회 사역이 바빠지면서 번역에 시간을 내지 못했고 두번째 시도도 이렇게 흐지부지 되었다. BEE Korea는 사역의 우선순위에서 밀리는 몽골 사역을 이후 10년간 적극적으로 추진하지 않았다.
그러던 2017년 17년 전 몽골에서 BEE 사역을 처음 시도했던 TIM 선교사는 좀더 세부적인 계획을 가지고 BEE Korea를 방문해 몽골에서 BEE 사역의 재개를 의논했다. 재개한 몽골 사역을 담당하는 강부순 장로는 진행 상황과 기대를 다음과 같이 적는다.
이렇게 2018년 다시 몽골에서 BEE 사역이 진행되었다. 하지만 5년간의 사역에도 현지 협력 선교사의 재생산에 관한 이해 부족으로 2023년 말 몽골 사역은 다시 중단 위기를 맞았다. 그런데 뜻하지 않았던 몽골 담당 TIM 선교사의 변화는 그동안 훈련했던 몽골 현지인 교회 지도자들의 BEE 사역 문을 여는 계기가 되었다.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비전과 소명을 받은 대로 자신들의 그룹을 만들고 BEE의 첫 과정인 DPM 과정을 시작하고 2024년 7월 첫 2세대가 수료했다. 몽골에서 BEE 사역은 아직 시작 단계로 학습서 수정과 번역도 계속해야 하고 특히 재정은 걸음마 단계이지만, 이제 세우신 사역자들을 통해 샤머니즘과 라마불교의 땅 몽골을 그분의 말씀 위에 세우시기를 기대한다.
BEE는 아시아에서 위에 언급한 국가 외에도 1998년에 캄보디아에서, 1999년에는 말레이시아와 스리랑카에서, 2001년에는 라오스에서 사역했다. 또한 필리핀, 태국, 일본에서도 사역했다. 그중 라오스를 제외한 모든 국가에서 다양한 변화를 겪으며 현재까지 BEE 사역은 계속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