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국가를 찾아 아시아로 온 BEE가 BEE Korea를 창설하게 된 이야기는 흥미진진하다.
한국계 미국인인 김사무엘(김충모) 선교사는 C&MA(The Christian and Missionary Alliance) 소속으로 일본에 파송받아 1983년부터 9년간 9개의 교회를 개척했다. 두 번째 임기(term)를 마치고 안식년을 시작할 때 하나님은 김 선교사에게 새로운 비전을 주셨다. 중국과 북한을 향한 비전이었다. 그는 1992년 중국에서 사역할 기회가 있었다. 허난 성에서 지하 교회 지도자들이 3일간 김 선교사를 강사로 초청한 것이다. 그는 나름대로 3일간 강의할 내용을 열심히 준비했다. 중국 교회 지도자들은 김 선교사의 강의를 경청하며 열심히 적기도 했다. 마지막 날 좀 일찍 강의를 다 마치자 목회자들은 뭔가 아쉬워하는 듯 했다. 그들은 더 배우기 원했다. 김 선교사는 자신이 준비한 것을 다 가르쳤다고 답했다. 그러자 그들은 쏟아내듯 성경에 관한 질문을 해댔다. 하지만 김 선교사는 대부분의 질문에 시원하게 답을 해주지 못했다. 이것은 그의 마음에 늘 가시같이 걸려 있었다. 그래서 김 선교사는 중국 교회 지도자들이 지속해서 공부할 수 있는 성경 공부 교재가 없을까 고심했고 이는 그의 중요한 기도제목이 되었다.
그해, 소속 교단인 C&MA 선교 대회가 홍콩에서 있어서 참석 후 안식년을 보내고 있는 미국으로 가기 위해 홍콩 비행장에서 탑승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자신의 연배인 한 서양인이 곁에 앉았다. 차림새가 관광객 같지는 않았고 그렇다고 사업하는 사람 같지도 않았다. 김 선교사는 자신의 이름을 소개했다. 상대방도 주위에 흔한 동양인의 광뚱어 억양이 강한 알아듣기 힘든 영어를 듣다가 미국 억양으로 영어를 하는 동양인이 말을 걸어오자 반갑게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그리고 어떻게 홍콩에 왔는지 서로 조심스레 탐색했다. 그러면서 둘이 모두 선교사라는 것을 알고 상대방에게 급격히 마음을 열었다. 이내 상대방은 자신의 사역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사실 그는 BEE의 선교사로 미국 텍사스에서 열리는 자신이 속한 선교회의 이사회에 보고하기 위해 가는 중이었다. 따라서 그의 묵직한 손가방에는 BEE World가 중국에서 사역해야 하는 당위성을 피력한 서류와 계획서로 가득했다. 그는 그 서류들을 꺼내 김 선교사에게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미 중국어로 번역한 학습서 몇 권도 김 선교사에게 보여주었다. 김 선교사는 무릎을 치며 자신의 기도에 하나님이 응답하셨음을 알았다.
김 선교사는 우선 BEE 사역에 동역할 교회를 한국에서 찾기 시작했다. 해외 선교에 뜻을 두고 있는 몇몇 교회를 찾아가 담임 목사들에게 BEE를 열정적으로 소개했다. 또한 설립을 준비 중이었던 횃불트리니티 신학교에도 소개했다. 하지만 이 기관 모두는 나중에 다시 연락을 주겠다고 하고는 감감 무소식이었다. 그때 누군가 온누리교회의 하용조 목사를 찾아가 보라고 귀띔해 주었다. 하용조 목사는 달랐다. BEE에 대한 소개를 듣자마자 기획담당 김종인 집사를 불러, 당시 BEE 본부가 있었던 오스트리아의 비엔나로 직접 파견하여 BEE 사역의 도입을 위해 적극적인 자세를 취했다. 당시 온누리교회는 전 교인이 기본적 양육 프로그램인 《일대일 제자양육 성경공부》를 활발하게 하고 있었는데, 하 목사는 그 다음 단계인 일꾼 양육 프로그램을 찾고 있었고, BEE가 그 해결책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또한 선교지에서 교회 지도자 양육 프로그램으로도 효과적일 것이라는 판단이 섰다. 하 목사의 지시에 따라 김 집사는 소재웅 목사와 함께 1992년 10월 BEE International의 사역과 조직을 살펴보기 위해 비엔나와 모스크바를 방문하게 된다. 후에 김종인 장로는 그 당시를 다음과 같이 글로 남겼다.
1992년 10월의 끝자락 무렵, 이미 초겨울로 접어든 모스크바의 아침은 유난히 추웠다. 며칠간 내린 눈으로 도로는 온통 겹겹으로 얼어 붙은 데다가 바람까지 강하게 불었다. 모피 모자를 깊이 눌러쓴 채 외투 깃을 여미며 종종걸음을 치며 일터로 향하는 러시아 사람들의 기계적인 발걸음이 묘한 감흥을 불러일으켰다. 러시아가 개방된 지 얼마 되지 않은 터라 사람들이 사는 모습에는 여전히 공산주의의 짙은 그늘이 드리워 있었고, 지하철 입구에서 다 시든 사과 몇 개를 좌판에 놓고 행인들을 바라보는 초라한 노점상의 무심한 눈빛에 이 도시가 한층 더 삭막해 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 아침에도, 비록 딱딱한 러시아풍 빵 몇 조각으로 끼니를 때웠을지라도, 그 발갛게 상기된 얼굴에 웃음이 떠나지 않는 한 무리의 사람이 있었다. 그들이 바로 BEE 선교사였다.
그들은 러시아 교회 지도자들을 대상으로 《그리스도인의 결혼》 과목을 인도하기 위해 모였다. 스무 명 남짓 되는 현지인 지도자들이 러시아 각지에서, 심지어 어떤 이들은 열흘이 넘는 여정을 달려왔고, BEE 선교사들은 비용을 아끼기 위해 비엔나에서 부다페스트까지 기차로 와서 부다페스트에서 모스크바까지는 폐차장으로나 갈만한 싼 고물 여객기를 타는 불편을 감수하였다. 먹는 것도 아주 질박하여 식사 후에 과자라도 있으면 어린아이처럼 좋아하는 그들의 천진스러운 얼굴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나도 비엔나에서 이틀은 난방이 전혀 안 된 BEE 선교관에서 지냈는데, 템플(Bill Temple) 선교사가 준 담요 몇 장으로도 모자라 서울에서 가져간 옷가지를 다 꺼내 덮고도 추위로 밤을 홀딱 새우며 BEE 선교사들의 삶의 편린을 맛보았다. 또 모스크바에서 약 2주간 같이 지내며 복음에 대한 그들의 열정과 진지함, 배우는 이들의 열심과 순수함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몸으로 체감하였다.
나의 비엔나와 모스크바 방문은 그 해 봄 김사무엘 목사를 통해 BEE가 하용조 목사에게 소개되면서 이루어졌다. 지도자 양육과 선교사 훈련 과정으로 BEE에 매력을 느꼈던 하 목사의 뜻에 따라, 나는 소재웅 목사와 함께 비엔나의 BEE 본부와 모스크바 사역 현장을 직접 보기 위해서 방문한 터였다. 그리고 이 2주간의 경험은 내게 실로 소중한 선교적 자산이 되었다.
김종인 집사와 소재웅 목사의 보고를 들은 하용조 목사는 온누리교회가 BEE 프로그램을 양육 및 선교의 도구로 받아들이기로 하고 온누리교회 안에 BEE 프로그램을 수용하기로 결정했다. 이듬해인 1993년 1월 김사무엘 선교사와 김종인 집사는 홍콩에서 딜로우 선교사와 두 차례 회의를 했다. 첫 번째 만남에서 딜로우 선교사는 동아시아 선교를 위한 BEE China 설립에 관한 필요성을 이야기하면서 그 작업이 쉽지 않다고 했다. 김종인 집사는 온누리교회의 비전과 사역을 딜로우 선교사에게 설명하고 이어 김 선교사가 온누리교회에서 양육과 선교에 어떻게 BEE 사역을 접목할 수 있는지 상황을 이야기했다.
다음날 아침 그 세 사람은 다시 회의를 이어갔다. 그 자리에서 설립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동아시아 선교를 위한 BEE China 대신 BEE Korea를 설립하는 안을 제시했다. 세 사람은 이것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는 강한 확신을 받았다. 딜로우 선교사는 후에 이 모임에 대해 이렇게 회고한다. “돌아 보건대 이 회합이 BEE와 세계 도처에서 행해지고 있는 BEE 사역에 있어서 매우 역사적인 순간이었다고 생각한다.”
귀국 후 순서대로 BEE 과목을 번역하기 시작했다. 그해(1993년), 첫 과목인 《갈리디아서와 로마서》 초본이 완성되자마자 동유럽 사역을 총 책임 맡게 된 본(David Bon) 선교사가 온누리교회로 와서 온누리교회 목회자를 대상으로 과목을 인도했다. 이것이 한국에서 열린 첫 BEE 세미나였다. 그 후에도 과목을 번역하며 비엔나(BEE International)와 미국(BEE World)의 BEE 인도자들이 와서 BEE 과목을 하나하나 전수하기 시작하면서 BEE Korea 설립 작업은 가속도가 붙었다. 다시 해가 지나 1994년 7월 8일에 BEE Korea는 하나님께 창립 예배를 드렸고, 서울을 기점으로 중국을 비롯한 동서남 아시아와 열방을 향한 BEE의 새로운 지평이 열리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