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 D.C는 미국의 수도이다. 정식 명칭은 컬럼비아구이다. 조지 워싱턴과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에서 이름을 가져왔다. 미국 어느 주에도 속하지 않는 독립 행정 구역이다. 좁지만, 국제적으로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 있는 세계 도시이며, 금융 센터로서도 중요성이 높다. 수도로서 기능하도록 디자인한 계획도시다.
워싱턴 D.C.는 포토맥 강의 동쪽 유역에 자리 잡고 있으며, 서쪽으로는 포토맥 강을 경계로 버지니아주와 접하고 다른 방향으로는 메릴랜드주에 둘러싸여 있다. 1790년 조지 워싱턴 대통령이 이곳을 수도로 정하고, 프랑스의 피에르 샤를 랑팡을 초청하여 새 수도 설계를 의뢰하였다. 현재 잘 정비한 시원한 거리는 피에르 랑팡의 설계를 골격으로 하여 이어받은 것이다. 인구는 약 70만 명인데, 주변 교외 지역에서 드나드는 통근자를 고려하면 주중 인구는 백만이 넘는다. 컬럼비아 구역을 포괄하는 워싱턴 대도시권의 인구는 약 620만 명으로, 미국의 대도시권 가운데 6번째로 큰 규모이다.
1840년 당시의 도시인구는 약 5만 명으로 도시로서의 성장은 저조했으나 남북전쟁(1861-1865) 때에 인구가 6만 명에서 12만 명으로 급증했다. 이 전쟁 중에는 북군의 부대가 대거 주둔하여 남군의 침공에 대비했다. 많은 사람이 북군을 돕고 수도를 지키는 일을 도우려고 워싱턴 DC로 이주해왔고 노예 생활에서 해방된 흑인들이 이주해 옴으로서 인구가 급증했다. 전쟁이 시작될 때의 35만 명의 인구가 전쟁이 끝나는 1918년에는 45만 명으로 늘어났다.
전쟁이 끝난 후 의회는 워싱턴DC의 도시개발을 위해 도시 정부 구조의 변화가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1871년 도시를 관리할 지사를 대통령이 임명했으나 1874년에 의회는 도시 운영을 대통령이 임명한 행정관 세 사람에게 맡기도록 법을 개정했다. 워싱턴 DC는 미국에서 유일하게도 도시를 운영할 대표를 시민이 투표로 뽑을 수 없는 도시가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기간은 또다시 워싱턴 DC 인구의 증가를 가져왔다. 그후 1930년 경제공황은 직업을 잃은 실업자로 전국의 도시가 어려움을 겪었지만 워싱턴 DC만은 예외였다. 연방정부는 이때 전국의 경제를 살리기 위해 많은 프로젝트를 수행했기 때문에 1930년에서 1940년 사이에 인구가 48만5천 명에서 66만5천 명으로 늘어났다. 1950년에 와서 도시 인구는 80만 명으로 정점에 달했다. 그 후로는 도시 인구가 줄어들기 시작했으나 도시 주변 인구가 급증해서 광역 인구는 1950년에서 1970년 사이에 150만 명에서 300만 명으로 늘어났다. 워싱턴 DC 인구는 흑인의 인구가 늘어났고 주변 도시는 백인 인구가 급증했다.
워싱턴 시민의 참정권에 대한 요구가 의회에 반영되어 1964년 헌법개정이 통과되어 처음으로 워싱턴 시민은 대통령 선거에 투표할 수 있게 되었다. 1973년 시정부 위원선거를 할 수 있도록 의회는 법 개정을 했다. 100년 만에 자치권을 갖게 되었다.
그렇게 고층 건물은 많지 않지만 많은 건물들이 밀집되어 있어 보인다
고층건물은 아래 보이는 이 법때문에 못지어진다고 한다
1899년 12층짜리 카이로 아파트 건물(Cairo Apartment Building)이 들어서자 의회는 건물 고도 제한법(Heights of Buildings Act)을 통과하여 어느 건물도 의사당보다 높게 짓지 못하도록 규정하였다. 이 법은 1910년에 개정되어 건물 고도를 인접 가로의 폭에서 6.1m를 더한 높이 이상으로 건설하지 못하도록 제한하였다.[6] 오늘날 워싱턴 시의 건물 윤곽선(skyline)은 낮고 넓게 퍼진 모양새를 갖추어, 워싱턴 시가 "복잡하지 않고 바람이 잘 통하는" 거리에 "낮고 편리한" 건물들이 있는 "미국의 파리"가 되길 바라던 토머스 제퍼슨의 뜻을 따르고 있다.[6] 그러하여 워싱턴 기념비(Washington Monument)는 구역에서 가장 높은 구조물이다.[7] 그러나 도시의 확산 현상으로 교통 및 주택 문제를 이유로 워싱턴의 고도 제한은 비난을 받았다.[6] 구역의 고도 제한 규정을 피하기 위해 시내와 가까운 곳의 높은 건물은 포토맥 강에서 버지니아주의 로슬린쪽에 건설되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