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 ~ 24년 교육청 늘봄 지원 사업 선정
구두수선, 우산수리, 옷수선 등 우리동네인간문화재를 발굴해 추후 선정위원회를 구성해 심사과정을 거쳐서 1,2,3...호를 정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의 제보를 받습니다. (기타 김월정-부산최고 봉사시간, 최고령 주방장: 승하네, 동래구청태권도실업팀, 사직정 명궁 등)
43년째 경영, 신라사진관 이상도 사장을 만나다
시대변화 빠른 대처, 위기를 기회로
필름 사진을 여러분들은 기억하시나요? 흑백에서 칼라로. 2000년대에 들어 디지털 카메라가 단박에 독보적 위치를 대신하고. 이제는 과거를 잊고 친숙한 디지털 카메라를 품은 핸드폰이야말로 생활필수품이다.
이러한 역사의 흐름을 오롯이 맞이한 직종 중 하나가 이웃에 있는 사진관일 것이다.
사직동에는 43년째 지역 버팀목, 신라사진관이 있다. 현재 야구장 인근에서 앨범과 증명사진을 위주로 운영되고 있다. 그 곳으로 발걸음을 재촉해 사진관의 스펙트럼을 찍어 보고자 한다.
혹자에게는 이곳에서 돌사진에 찍혔고, 그 2세의 돌사진을 또다시 찍는 사진관이 되기도 했단다. 생각보다 여전히 활기찬 사진관을 운영 중인 이상도(李相道, 70대)씨는 “신용과 성실이 있으면 때가 돌아온다”라고 말문을 열었다.
경남고성 출신으로 부산에서 군생활을 하게 된 것이 사직동과 인연이 됐다고 한다. 과거 사진관을 성공적으로 하시던 집안의 한 친척분의 권유로 사진학원에 수강했으며, 평생 한 직장을 꾸리고 계신 것이다. 아들 이승호 씨마저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다시금 영상을 전공하고 부부간에 디지털 업무를 전담하며 가업에 힘을 보태고 있다.
1979년 5월 4일, 당시 30대에 접어들어 사진관을 열었던 이상도 사장은 “사직야구장이 들어서기도 5~6년 전에 이 업을 시작했고요. 당시 이주민들과 지역토착민들이 시영과 주공에서 13평의 작은 아파트에 살았어요, 마을에는 시내버스가 없어 야구장 저 아래쪽으로 물밀 듯 사람들이 내려오곤 했지요” 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이미 동시대에 문을 열었던 지인들은 이사를 가거나 고인이 되어 현재는 외롭게 남아 사직동을 지키고 있다.
어떻게 아날로그부터 디지털 시대까지도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 이상도 사장에게 물었다. 그는 “시대변화를 읽고 빠른 변화를 해야 합니다.”라고 대답했다.
“사진협회나 조합을 통해 일본의 선진 정보를 신중히 받아 배웠습니다. 처음에는 동시기에 사진하시는 분들이 필름이 없는 사진은 존재할 수 없다고 안일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그러다 불과 2~3년 만에 디지털로 전환되는 시기를 맞게 됐습니다. 여기에서 저는 다른 사람들보다 빠른 대처를 했습니다.”라고 밝혔다.
그리고 시장을 확보하기 위해 실력만 믿고 결코 기다리고 안주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웃에 손가락질받지 않으려고 노력해왔고요. 유치원 앨범부터 시작해 품질을 인정받다가, 초등학교 등의 앨범 입찰에 선정되며 시장을 개척해 왔습니다.”라고 덧붙였다.
오래된 가게에 단순히 그루터기처럼 인내만 하고 계셨던 분이 아니라, 변화하는 세상에서 귀를 열고 창의적으로 극복해 내시는 지혜로운 전략의 경영자다. 이처럼 위기를 기회로 만들어온 신라사진관의 생명력은 오늘날 우리에게 암시하는 바가 크다.
<2023. 2.24 쇠미골소리샘 주민기자 서보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