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
2008년, 삶에 대한 강한 불안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물론 이러한 불안감은 의혹과 질문의 형태로 항상 마음속에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나 실질적인 삶의 체험이 부정적인 예측과 답변을 가져오는 경우가 많아지면서, 불안감이 계속 커졌다. 그리고 이러한 불안은 나만의 것이 아니었다. 주변과 뉴스에서 듣게 되는 많은 이야기는, 우리가 불안에서 벗어나기 힘들 것이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확인해 주었다.
이런 상황은 답답함으로 연결되었다. 그리고 이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내 심리를 지배하고 있는 불안을 표현하고 전시하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그 일은 마치 친구와 수다를 떠는 것과 같은 효과를 가져다주었다. 한참을 이야기를 나누고, 불평하고, 어쩔 수 없는 수용과 수긍의 과정을 거치다 보니 조금이나마 마음의 평화를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때 제작된 작업과 진행된 전시가 내게 마음의 평화를 일정 부분 가져다주었을지라도, 그 원인인 불안은 전혀 사라지지 않고 항상 나와 함께하는 존재가 되었다.
그래서 나는 불안에 대해 공부를 시작했다. 불안을 처음 실존적인 인간의 문제로 제기한 키에르케고르부터, 자아가 인식하는 위험의 동종신호로 해석한 프로이트, 그리고 욕망의 주체에게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것으로 파악한 라캉을 거쳐, 임계점을 넘어선 불안을 장애로 다루며 그 신체적 작용 과정을 연구하는 신경 과학이나, 인간 진화의 원동력이자 동시대 사회적 변화의 압력으로 파악하는 진화 심리학까지, 가능한 만큼 이해를 해보고자 했다. 그리고 미술사에 기록된 불안을 다룬 작품을 찾아보며 작가의 생각, 당시의 사건, 그리고 표현 방식을 이해해 보려 하였다.
이 공부의 과정은, 조금씩 나를 불안에 친숙해지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새롭게 느껴지는 것들을 통해 작업을 하고, 이를 모아 전시를 진행해 갔다.
‘불안’을 인간 심리의 깊은 곳에 존재하는 공리(公理, Axiom)적 부분이라 여기게 되면서 진행했던 전시 ‘공리적 풍경’.
나의 삶이 불안과 그로 인해 생성된 불명확함 때문에 눅눅하고 축축하다는 것을 표현하고자 했던 전시 ‘습지’.
습지에 있는 내가 이상향으로 꿈꾸게 된 햇빛에 바짝 마른 사막을 명확함이라 생각하며 진행했던 전시 ‘사구’.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그 바삭하고 명확한 이상향을 찾을 수가 없어서, 그저 그곳이 있을 것이라 짐작되는 방향을 바라보며 그 풍경을 그렸던 전시 ‘바짝 마른’.
그리고 삶에 대한 고민이 시작된 청소년기에 십 년간 거주했던 ‘심곡(深谷)동’의 이름에 빗대어, 불안과 함께하는 삶을 표현하려 한 전시 ‘깊은 구지’.
이 전시들을 거치면서, 어느새 불안은 내게 친숙한 존재가 되었다. 그리고 평생을 함께해야 할 친구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내 작업을 보면 이해가 쉽다고 생각한다. 물론 소재와 표현법등, 중간 중간 누락된 이야기가 많지만, 그러한 것은 관람자의 상상의 영역에 맡기거나, 기회가 있을 때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아직도, 의문만이 가득하다. 다만 예전과 다른 것은, 이 의문들이 밉지 않다는 것이다. 한가지 확신하는 것은, 쉽게 알 수 없고, 또 결론 내릴 수 없는, 그리고 해결할 수 없는 인간의 근원적인 심리인 불안이 예술의 유효한 한 가지 주제가 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이를 다루는 것이 가치 있는 일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Introduce
In 2008, I began to feel strong anxiety about my life. Of course, this anxiety has always existed in my mind in the form of doubts and questions. However, as practical life experiences increasingly brought negative predictions and answers, anxiety continued to grow. And this anxiety wasn't just mine. The many stories we hear around us and on the news constantly confirm that it will be difficult for us to escape anxiety.
This situation led to frustration. And in this situation, all I could do was express and display the anxiety that was dominating my psychological state. And it had the same effect as chatting with a friend. After talking for a while, complaining, and going through the inevitable process of acceptance, I was able to find some peace of mind. However, although the work produced and the exhibition held at this time brought me some peace of mind, the anxiety did not disappear at all and was always with me.
So I started studying anxiety. From Kierkegaard, who first raised anxiety as an existential human problem, to Freud, who interpreted it as a homogeneous signal of danger recognized by the ego, and to Lacan, who understood it as something that inevitably occurs to the subject of desire, and I tried to understand as much as possible about neuroscience, which considers anxiety beyond the critical point as a disorder, studies the process of physical action, and evolutionary psychology, which understands it as the driving force of human evolution and the pressure of contemporary social change. Then looking for artworks dealing with anxiety recorded in art history, I tried to understand the artist's thoughts, events at the time, and methods of expression.
This process of study gradually made me familiar with anxiety. And each time, I worked on things that felt new, collected them, and held an exhibition.
The exhibition ‘Undefined Scene’ was held based on the belief that ‘anxiety’ is an axiom that exists deep within human psychology.
The exhibition ‘Land of Humidity’ was an attempt to express that my life was damp and damp due to anxiety and the uncertainty created.
The exhibition ‘Shifting Sands’ was conducted with the idea of clarity in the sunlight-parched desert that I dreamed of as my utopia in a wetland.
However, no matter how much I searched, I couldn't find that crisp and clear utopia(desert), so I just painted the scenery while looking in the direction I assumed it would be in the exhibition 'Very Dry'.
And the exhibition ‘Deep Valley’ attempts to express life with anxiety, alluding to the name of ‘Simgok(which means deep valley)’, where I lived for ten years during my adolescence when I began to worry about life.
As I went through these exhibitions, anxiety became a familiar thing to me. And It became a friend I would spend the rest of my life with.
I think it is easy to understand when you look at my work in this context. Of course, there are many stories that are missing here and there, such as materials and ways of expression, but I will leave those to the people’s imagination or explain them when I have the chance.
I am still full of questions. The only thing that is different from before is that I do not hate these questions. One thing I am sure of is that anxiety, which is a fundamental human psychology that is not easily known, cannot be concluded, and cannot be solved, can be a valid subject of art, and that dealing with it can be a valuable task.
늪, 습지, 사구, 그리고 곡이 있는 풍경
고충환 / 미술평론, 2022
곡(谷)들은 나에게 프로히트의 계곡을 떠올리게 했다. Uncanny valley. 지금 나의 삶이 수많은 일들로 이어져 복잡하듯, 수많은 곡(谷)들이 내 삶을 감싸고 있었다. 난 언제나 내 삶이 햇볕에 바짝 마른 듯한 명확함을 보여주기를 바라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다. 언제나 불명확한 부분이 있고, 판단이 어려운 부분이 있으며, 빛이 들지 않는 어두운 부분이 있다. 이것은 거대한 하나의 계곡이 되어 나에게 심곡, 내가 살았던 깊은 구지를 떠올리게 하였다. (작가 노트)
미술을 하나의 형식으로 간주하고 순수한 형식을 추구한 모더니즘 패러다임에 의해 견인된 추상미술이 아니라면 그림들은 대개 어떤 식으로든 그림을 그린 사람의 인격 그러므로 창작 주체의 개성(아이덴티티)을 반영하기 마련이다. 인물은 물론이거니와 풍경이나 정물이 다 그렇다. 이런 광의의 층위에서 보면 다만 그 경우와 정도에 차이가 있을 뿐 모든 그림은 일정 정도 자기를 그린 그림 곧 자화상의 한 표현일 수 있다. 그럼에도 일반적인 의미 그러므로 협의의 층위에서 자화상이라고 하면 자기가 직접 등장하는 그림, 자기를 직접 대상화해 그린 그림을 의미한다. 작가 이주형의 그림을 초기부터 쭉 봐왔지만, 작가의 그림에서 이런 자화상에 해당하는 그림을 본 기억이 없다. 아마도 영 없지는 않을 것이지만, 여하튼 근작에서 이런 자화상을 그린 그림이 있어서 주목된다.
반백의 머리에 안경을 쓴 작가가 얼굴을 비스듬하게 기울여 화면 아래쪽을 보고 있다. 캔버스가 층층인 것을 보아 아마도 작업실일 것이다. 뭘 꼭 본다기보다는 다만 얼굴 각도가 화면 아래쪽을 향하고 있는 것인데, 아마도 무언가 생각에 잠겨 있을 것이고 굳이 보는 것으로 치자면 자기 내면을 쳐다보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작가는 자기의 전면을 그렸는데, 의외로 그림의 제목이 <뒤>다. 전면을 보지 말고 그림의 이면을 보라는 말인가. 표면에 드러나 보이는 의미가 아닌, 이면에 숨은 의미를 읽어달라는 주문인가.
실제로 그림을 보면 작가 뒤편에 뭔가 시커먼 덩어리가 숨어 있다. 그림자다. 흔히 그림자는 주체의 반영이고 분신이라고 했다. 그림자를 놓고 악마와 거래한 이야기도 있고(여기서 그림자는 아마도 영혼을 의미할 것), 그림자가 일어나 걸으면 그 사람이 죽는다는 이야기를 다룬 소설도 있다. 미술사에서도 보면 그림자에 각별한 의미를 부여한 작가들이 있었다. 에드바르트 뭉크와 프랜시스 베이컨 같은 작가들이 그렇다. 아마도 얼굴이, 표면이, 전면이 못다 한 이야기를 그림자가 대신해준다는 심층적인, 내면적인 의미를 담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림자처럼 보이는 어둠 속에 또 다른 뭔가가 있다. 어둠 속에 숨어 있어서 잘 안 보이지만, 작가가 그린 모든 그림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그러므로 보기에 따라선 작가의 트레이드마크라고도 할 수가 있는, 머리칼 같기도 하고 털 뭉치 같기도 한, 알 듯 모를 듯한 형태가 있다. 나는 그림자에 나를 숨기고, 그림자 또한 나의 분신을 숨긴다. 나의 진실(실체)은 그림자에 숨어 있고, 그렇게 숨겨진 나의 진실(실체)은 나 자신만큼이나 분명한 실체(비록 알 듯 모를 듯한 형태지만)를 가지고 있다. 그렇게 작가의 모든 그림에 빠짐없이 나타나는 알 수 없는 털 뭉치(?)는 작가의 분신으로 봐도 좋을 것이다. 그러므로 작가는 자기가 그린 모든 그림에, 그림의 소재가 되었던 모든 장소에 자신의 분신을 보낸다. 일상적인, 존재론적인, 역사적인 사건 현장의 목격자로서 그리고 증언자로서 자기 사신을 보내 참여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일단 알 수 없는 형태를 다름 아닌 작가의 분신으로 보면, 비로소 작가의 다른 그림들이 눈에 들어온다. <말풍선> 시리즈는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을 함축한 것이고(보기에 따라선 혀처럼도 보이는), <산의 언어>에서 분신은 설핏 웃는 것처럼도 보인다(보기에 따라선 수목처럼도 보이는). 여기에 형태적 유사성에 착안해 보자면, <이빨 요정>은 아마도 아기의 탈락된 젖니를 보관하고 있다가 이를 기념(기억)할 요량으로 그린 것이며, 외적으로 보아 풍경을 소재로 한 일련의 <곡> 시리즈 중 일부 머리의 뒤통수를 그린 것 같은 그림들이 주목된다. 비록 형태적 유사성으로 보아 뒤통수처럼 보이는 것이지만, 거기서 숨은 얼굴을 찾아보는 것도 재미있는 일일 것이다.
미셀 투르니에는 <뒷모습>에서 사람의 뒷모습에 각별한 의미를 부여한다. 뒷모습은 앞모습보다 더 많은 의미를 함축한다(숨긴다). 앞모습은 그저 보이는 것이 다지만, 뒷모습은 애정과 연민과 근성을 가지고 보지 않으면 그 숨은 뜻을 볼 수도 읽을 수도 없다. 그러므로 애정과 연민과 근성이야말로 또 다른 제3의 눈인 것이고(촉각이 제2의 눈이다), 그 눈으로 본 뒷모습은 그 자체 또 다른 얼굴일 수 있다. 이처럼 그 자체 또 다른 얼굴인 뒤통수에서 작가가 보이는가. 작가의 무엇이 보이는가. 작가의 내면이, 작가의 무의식이, 작가의 번민이, 작가의 상처가, 작가의 자의식이 보이는가. 제3의 눈으로 본다면 비로소 볼 수 있을 것이다. 애정의 눈길을 보낸다면 비로소 보여줄 것이다.
그럼에도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왜 머리칼인가. 왜 털 뭉친가. 왜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은 형태인가. 분신이라고는 하지만, 분신이 도대체 뭔가. 보르헤스는 거울 속에 타자들이 산다고 했다. 거울을 보면 그 속에 또 다른 내가 있다. 나를 닮았지만 내가 아니다. 자기_타자다. 그런가 하면 현재하는 내가 과거 속의 나와 만나기도 한다. 자기반성적인 기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하루에도 몇 번씩 겪는 일이고 실제로도 일어나는 일이다. 그렇게 나는 다름 아닌 나 자신의 유령들과 산다. 후회하는, 상실된, 미련으로 남은, 돌이킬 수 없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억압된, 무의식으로 밀려난, 비록 의식하지 못하지만 무의식 그러므로 몸은 기억하고 있는, 그렇게 시시각각 데자뷰(설핏 나를 본 것 같은 착각)를 불러일으키는 유령들이다.
프로이트는 두려움을 머리칼이 일서서는 것으로 표현했다(통속적으로도 그렇게 표현한다). 친근한 것이 생경해질 때(언캐니), 자신이 낯설어질 때(실존주의의 자기소외), 억압된 자신과 맞닥트릴 때(억압된 것들의 귀환과 부채를 청산하기 위해 되돌아온 실재계의 예기치 못한 출현) 머리칼이 일어선다. 머리칼을 닮은, 털 뭉치를 닮은,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은 작가의 분신은 아마도 이 에피소드와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꼭 공포를 떠올릴 필요는 없다. 그 자체 형태도 색깔도 없는 자기반성적인 기질과 존재론적인 물음(성찰)이 육화된 경우로 보면 좋을 것이다. 자기_타자, 분신, 무의식적 자기, 몸이 기억하는 자기 그러므로 어쩌면 원형적 자기를 표상하는 것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단순하게는 존재의 정수에 해당하는 머리에 착안한 형태라 해도 좋을 것이다. 그렇게 작가의 분신이 작가가 그린 그림 도처에 서성거리고, 지켜보고, 번민하고, 부유한다.
작가는 심곡동에서 유년의 상당 부분을 보냈다. 심곡은 깊은 계곡을 의미하며, 순우리말로는 깊은 구지(그 자체 근작의 주제이기도 한)라고 한다. 현재에는 반곡동에 사는데, 인근에는 둔곡이 있고 사곡이 있으며 지곡이 있고 백곡도 있다. 한때 능곡에서도 살았었다. 내가 사는 삶의 터전에는, 내가 지나쳐온 삶의 길 위에는 왜 이처럼 곡이 많을까, 혹 곡은 나의 인격과 무슨 의미심장한 관계라도 있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고, 그 의문이 그림을 그리게 했다고 한다(환경결정론에 의하면, 환경이 인격을 결정한다).
주변을 둘러봐도 지명에 유독 곡이 많기는 하다. 아마도 자연스러운 지형에 따라 붙여진 우연한 지명일 것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뭐 눈에 뭐만 보인다고, 다른 사람들이라면 쉽게 지나칠 수도 있는 일이 작가를 붙잡았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무의미한 일이 작가에게 유의미하게 다가왔을 것이다. 그렇게 일련의 곡 시리즈를 매개로 작가는 어느덧 중년에 이른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한편, 이를 계기로 존재론적 조건이라는 보편적인 물음을 물어 오고 있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외적으로 보아 풍경의 형태를 보여주고 있는 일련의 곡 시리즈는 대개 능선과 공지선을 경계 삼아 화면 아랫부분의 땅과 화면 윗부분의 하늘로 나누어져 있다. 여기에 작가의 트레이드마크에 해당하는 형태가 때로 땅 위에 그리고 더러 하늘 위에 아니면 경계 위에서 서성이고 있다. 땅은 대개 파헤쳐진 벌건 속살을 드러내고 있는데, 실제 지형에 충실한 것이라기보다는 작가의 몸을 표현한 것일 터이다. 그곳에 대한 몸의 흔적을, 몸의 기억을 그린 것일 터이다.
어떻게 그런가. 여기서 메를로 퐁티의 우주적 살 개념이 도움을 줄 수 있겠다. 주체와 객체는 우주적 살로 덮여 있어서 서로 분리할 수가 없다. 주체의 의식과 무관하게 주체는 이미 객체의 일부이다. 그러므로 객체가 없으면 주체도 없다. 그렇게 객체는 주체를 이미 자신의 일부로서 예정하고 있었다. 비록 거기에 지금 나는 없지만, 내 몸(몸의 흔적, 몸의 기억)이 풍경의 살이 되어 거기에 여전히 그대로 간직되고 있었다. 그러므로 지금 그곳을 방문하는 행위는 그 풍경의 일부인 나와 재회하는 것이 된다. 아니면 그저, 아니, 이마저도 이러한 사실(어쩌면 자의식)과 무관하지 않은 것이지만, 파헤쳐진 채 벌건 속살을 드러내고 있는 풍경 자체를 사실은 작가의 황량한 마음을 풍경에 투사해 본 것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땅 위에는 얼핏 점 같기도 하고 작은 막대 같기도 한 비정형의 형태가 패턴을 이루고 있는데, 차양막을 설치하기 위해 그리고 줄을 치기 위해 밭에다 심어 놓은 막대를 연상시킨다. 그렇게 실제 풍경의 일부를 떠올리게 하지만, 동시에 혹은 이보다는 그곳에 얽혀 있는 작가의 흔적을, 일종의 심상 흔적을 표상할 수도 있겠다.
그리고 작가의 그림에서 흥미로운 것이, 유독 늪(늪의 언어)이 많고, 습지가 많고, 사구(사구가 보이는 풍경, 모든 것은 사막에서 마친다)가 많다. 그리고 여기에 곡까지. 작가는 자신의 삶에서 바짝 마른 명확함을 보여주고 싶지만, 정작 그런 명확함과는 거리가 먼 곳들이다. 늪도 그렇지만 습지도 하나같이 물인지 뭍인지 경계가 불명확한 곳이다. 그런가 하면 사구란 불어오는 바람에 따라 움직이는, 가변적인, 변화무상한 모래언덕이다. 그래서 정해진 형태가 따로 없다.
여기에 곡은 어떤가. 질 들뢰즈의 <천 개의 고원>은 천 개의 곡으로 이루어져 있다. 의식을 표상한 것인데, 의식은 표면과 이면이 천 개의 주름으로 접힌 주름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표면의 의식과 주름 속에 숨어서 의식의 레이더에는 포착되지도 않는 무의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의식을 간섭하는 의식의 그림자, 의식의 함정, 의식의 지향호(메를로 퐁티)라고 해야 할까(비록 이로 인해 비로소 의식이 가능하고 또한 수정되기도 하지만, 여하튼).
바로 작가가 실제의 피부로 체감하는 삶의 질감이 그렇다고 해야 할까. 그렇게 작가는 이상과 실제, 표면과 이면의 거리감을 느낀다. 때로 표면과 이면이 뒤집힌 채 혼성되는 삶, 경계 위의 삶, 이중적이고 다중적인 삶의 그림자를, 양가적이고 가변적인 삶의 함정을 실감하는 것이다. 아마도 작가의 분신이 여전히 알 듯 모를 듯한, 그저 머리칼 같고 털 뭉치 같다는 막연한 이름으로 부를 수밖에는 없는, 그런, 유보적인 상황 논리와도 통하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작가의 그림은 바로 그런, 유보적인 상황 논리를, 다만 상황 논리가 유보적이어서 그렇지 분명한 실체를 가지고 있는 존재론적인 조건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 작가만의 아이덴티티가 있고 미덕이 있다.
Landscape with swamps, wetlands, sand dunes, and valleys
Kho, Chunghwan / art critic, 2022
The valleys(谷) reminded me of the Valley of Freud. Uncanny valley. Just as my life is now complicated by many things, countless valleys(谷) enveloped my life. I always want my life to show the clarity of being sun-dried, but the real world isn't like that. There are always uncertain parts, there are ones that are difficult to judge, and there are also dark ones with no sunlight. These became a massive valley and reminded me of a deep valley, the Deep Valley where I lived. (artist's statement)
Unless paintings do not belong to abstract art driven by the modernist paradigm that regarded art as a form and pursued a pure form, paintings usually reflect the personality of the person who drew the picture in some way and the personality (identity) of the creator accordingly. This tendency is the same not only for people but also for landscapes and still life. In this broad sense, there is a difference only in the case and degree, but every picture can be an expression of self-portrait to some extent. Nevertheless, a self-portrait in a general sense, that is, in a common sense, means a picture in which the self appears directly, a picture drawn by directly objectifying the self. I have seen artist Rhee, JooHyeong's paintings from his early stage, but I don't recall seeing any self-portrait in this artist's paintings. I don't think that there have been no self-portraits at all, but, among recent works, there is a painting depicting such a self-portrait, which draws my attention.
In the painting, the artist wearing glasses with half-white hair is looking down at the bottom of the screen with his face tilted slightly. Given that there are multiple canvases, this place is probably his studio Rather than looking at something, his face is facing downwards on the screen, which is probably thought to be immersed in something. In this way, the artist painted the front of himself, but surprisingly, the title of the painting is <Back>. Does it mean to look at the other side of the painting instead of looking at the front, or is it a request to read the hidden meaning behind the picture, not the meaning that is visible on the surface?
If we look at the painting, we can find that something dark is hidden behind the artist. It is a shadow. It is often said that the shadow is a reflection of the subject and an alter ego. Among the many stories about the shadow, there is a story about trading the devil (the shadow here probably means the soul), and there is a novel about the story of the person dying when the shadow stands up and walks. Even in art history, there have been artists who give special significance to shadows. Artists like Edvard Munch and Francis Bacon are such examples. Perhaps they might contain the deep and internal meanings that the shadow talks about the story instead that the face, the surface, and the front surface have not been able to talk.
However, there is another one in the darkness that looks like a shadow. It's hard to see because it's hidden in the dark. However, it always appears in all the paintings the artist drew so it can be called the artist's trademark in a certain sense. In other words, there is an unknown form that looks like hair or hair tuft. I hide myself in the shadow, and shadows also hide my alter ego. My truth (substance) is hidden in the shadows, and my truth (substance) hidden in that way has a substance (although it is an ambiguous form) as clear as myself. As such, the unknown hair tuft (?) that always appears in all the artist's paintings can be regarded as an alter ego of the artist. Therefore, it can be said that the artist sends his alter ego to all the paintings he drew and to all the places that are a subject matter of the pictures. In other words, he sends his envoys to participate as witnesses and testifiers of ordinary, ontological, and historical incident scenes.
Once we see such an unknown form as the artist's alter ego, the artist's other paintings come into view. The <The Speech Bubble> series implied the words the author wanted to say(in a certain sense it looks like a tongue), and in the <Language of the Mountain>, the alter ego seems to be smiling in a way(in a certain sense, it looks like a beard face.
When paying attention to the morphological similarity here, it is said <Tooth Fairy> was probably painted to commemorate the missing baby teeth that were kept in storage. From an external point of view, among the series of many valleys(谷) which use the landscape as the subject matters, some paintings that seem to depict the back of the head are attracting attention. Focusing on morphological similarities, the paintings look like the back of the head, but it would be interesting to find hidden faces there.
Michel Tournier gives a special meaning to the back of a person in <Vues De Dos(Back View)>. As for the front view, what is seen is everything, but as for the back view, it is not possible to see or read its hidden meanings without affection, compassion, and tenacity. Thus, affection, compassion, and tenacity are another third eye(The sense of touch is the second eye) and the back view itself seen with those eyes could be another face. Thus, we can ask the following questions: In this way, can the artist be seen from the back of the head where itself is another face? Which one do we see from the artist? Can we see the artist's inner side, the artist's unconsciousness, the artist's anguish, the artist's wound, and the artist's self-consciousness? We can see it only if we see it with a third eye. If we look at them with affection, they will show you themselves.
Nevertheless, the following questions remains: Why hair? Why hair clumps? Why is it a form that seems to be known and not known? It's called an alter ego, but what on earth is the alter ego? Borges said that the others live in the mirror. When looking in the mirror, there is another me in it. It looks like me, but it's not me. It's self-other. On the other hand, sometimes I currently meet myself in the past. People with self-reflective temperament go through this several times a day, which actually happens. In this way, I live with none other than my own ghosts. Regretted, lost, having remaining unresolved feelings, irretrievable, indescribable, inexpressible, oppressed, pushed into the unconscious, unconscious of unconsciousness but functioning body memory, in that way they are ghosts that evoke deja vu(the illusion that I had seen myself) every moment.
Freud expressed fear as the hair bristling(In a popular vein, it is also commonly expressed in this way). When familiar things become unfamiliar(uncanny) (self-alienation in the existentialism), when oneself becomes unfamiliar (existentialist self-indulgence), when faced with the oppressed self (the return of oppressed things and the unexpected emergence of the Real returned to liquidate debt), the hairs bristle.
The alter ego of the artist that resembles hair, resembles hair tuft, seems to be known and does not seem to be unknown, is probably not irrelevant to this episode. However, there is no need to recall fear. It may be good to think of itself as a manifestation of self-reflecting temperament and ontological questioning (reflection) that has neither form nor color. Since this is the self_other, the alter ego, the unconscious self, and the self that the body remembers, so perhaps it may be good to represent the prototype self. Simply put, it may be good to be said that it is a form based on the head, which is core of existence. In this way, the artist's alter ego wanders, watches, anguishes, and floats all over the artist's paintings.
The artist spent a significant portion of his childhood in Simgok-dong. Simgok means a deep valley, and in pure Korean, it is called a deep valley (It itself is the title of a recent work). He currently lives in Bangok-dong, and there are Dungok, Sagok, Jigok, and Baekgok in the vicinity. At one time, he also lived in Nunggok.
He said that he had questions why there are so many valleys in the places of life where he live and on the road of life he have passed, or whether the valleys have any meaningful connection with his personality, and that questions made him to paint a picture. (According to environmentalism, the environment determines the personality.
Even if we look around him, there are many 'gok' letters in the place names. They are probably an accidental place names given naturally according to the topography. Even so, like the saying that it takes one to know one. something that others could easily overlook may have caught the artist. Something meaningless to others would have been meaningful to this artist. In that manner, while the artist looks back on his life as a middle-aged man through a series of valleys, it may be that he is asking the universal question of ontological conditions using this.
In terms of external appearance, a series of valleys that show the shapes of the landscapes are usually divided into the ground at the bottom of the screen and the sky at the top of the screen using ridges and sensible horizon as boundaries. Here, the forms corresponding to the artist's trademark sometimes are on the ground, sometimes wandering in the sky or on the border. The ground is usually revealing bare skin that has been dug up, which is probably an expression of the artist's body rather than faithfully reflecting the real topography, It may be thought that he painted the traces of the body and the memories of the body about the place.
How is that possible? Here, the concept of cosmic flesh by Merleau-Ponty may be helpful. The subject and the object are covered with cosmic flesh and cannot be separated from each other. Regardless of the subject's consciousness, the subject is already a part of the object. Thus, if there is no object, there is no subject. As such, the object has already determined the subject as a part of it. Even though I am not there now, my body (traces of the body, memories of the body) became the flesh of the landscape and was still preserved there. Therefore, the act of visiting there now is to reunite with me, which is part of the landscape. Or even this is not irrelevant to these facts (or perhaps self-consciousness), but it would be good to regard the landscape itself, which is revealing bare skin that has been dug up, as a projection of the artist's desolate mind on the landscape.
On the ground, an atypical shape, which looks like a dot or a small rod, is patterned, which is reminiscent of rods planted in the field to set up awning screens and to set ropes. These things remind us of a part of the actual landscape like this, but at the same time or rather, but they may represent traces of the artist or a kind of mental image entangled in it.
And what interests us in the artist's paintings is that there are especially a lot of swamps, wetlands, and dunes (A view of the sand dunes, everything ends in the desert). And there are even valleys. The artist wants to show dry clarity in his life, but these things are far from such clarity. Both swamps and wetlands are places where the boundaries are unclear whether they are water or land. The sand dunes move with the blowing wind, is a variable, and unchanging dune. So there is no fixed form.
And, how about the valleys here? Gilles Deleuze's "A Thousand Plateaus" consists of a thousand valleys. This consciousness has a corrugated structure in which the surface and the back are folded into a thousand folds. This is made by the unconsciousness as it is hidden in the surface consciousness and folds and is not even caught on the consciousness radar. Should this be called a shadow of consciousness interfering with consciousness, a trap of consciousness, a directional arc of consciousness (Merleau-Ponty)? (Although this only makes it possible to become conscious, and only may result in the modification, anyway)
Should we say that this is the texture of life that the artist feels with his skin? In this way, the artist feels a sense of distance between the ideal and the real, and between the surface and the other side. Sometimes the artist realizes a life where the surface and the other side are turned upside down and mixed, the life on the border, the shadows of dual and multiple lives, and the pitfalls of an ambivalent and variable life. Perhaps there is a part that is also in line with the logic of the reserved situation in which the author's alter ego is bound to be called by a vague name as the author's alter ego seems to be still known or unknown and the artist's alter ego is just like hair or hair tuft. The artist's painting has its own identity and virtue in that it deals with reserved situational logic and deals with ontological conditions with a clear substance.
박사학위 논문 / paper for D.F.A. , 2020 : 논문 다운로드가 가능합니다. 아래 페이지에서 온라인 이용가능을 눌러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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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형의 회화 - 털과 털 뭉치, 인식할 수 없는 것들의 알레고리
고충환 / 미술평론, 2016
습지에서 사구로. 전작에서 작가는 습지를 그렸다. 여기서 습지는 바싹 마른 것과 같은 명확함을 하나의 이상향으로 설정해 놓고, 그 이상향에 대비되는 축축하고 눅눅한, 뭔가 명확하지가 않은 현실을 대비시킨 것이었다. 그리고 이후 바싹 마른 것과 같은 명확함은 말 그대로 이상향에 지나지 않은 것일 수 있다는 회의가 들었다. 그리고 여하튼 바싹 마른 것 중에서도 바싹 마른 사구를 그린다. 그렇게 작가의 주제의식은 습기로부터 사구로 옮아왔다. 그러므로 습기와 사구는 하나로 통하면서 다르다. 하나같이 바싹 마른 것과 같은 명확함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통하고, 그 명확함이 사실은 하나의 이상향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회의 내지 의심 이전의 지향과 이후의 지향이란 점에서 다르다. 회의 내지 의심 이전은 그렇다 치고, 왜 작가는 회의 내지 의심 이후에도 여전히 명확함을 지향하는가. 그 명확함은 하나의 이상향임이 판명되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명확함을 지향한다는 것은 결국 그것이 이상향임을 인정한다는 것, 따라서 자신의 기획이 곧 불완전한 기획임을 인정한다는 것, 그럼에도 그런 불완전한 기획을 추구한다는 것, 그리고 그 추구가 의미가 있을 수 있다는 것, 곧 불완전한 추구가 의미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 어쩜 예술이란 무의미에서 의미를 캐내는 작업이며, 불완전한 추구에서 의미를 발굴하는 기술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작가의 작업은 예술의 본질을 향하고 있었다. 가시적인 것을 빌려 비가시적인 것을 밀어 올리는, 인식할 수 있는 것을 매개로 인식할 수 없는 것을 상기시키는, 존재를 통해서 부재(어쩜 그 자체 감각적 존재를 넘어선 진정한 존재일지도 모를)를 암시하는, 그런 암시의 기술을 부려놓고 있었다.
털과 털 뭉치, 비결정성과 애매모호함. 그렇담 작가의 그림에서 무엇이 존재하고 무엇이 부재하는가. 무슨 존재를 통해서 무슨 부재를 암시하는가. 그 매개 역할을 하는 것이 털이며 털 뭉치다. 작가는 털을 그리고 털 뭉치를 그린다. 화면을 온통 털이 뒤덮어서 가린다. 아마도 털을 클로즈업해 그린 그림일 것이다. 그리고 좀 더 뒤로 빠지면서 털 뭉치의 형태가 드러나 보인다. 그 형태는 머리의 뒷모습 같기도 하고, 웃자란 머리칼로 뒤덮인 얼굴 같기도 하고, 현미경으로 확대해본 세포 내지는 포자 같기도 하고, 불어오는 바람에 이리저리 풀풀 흩날리는 먼지뭉치 같기도 하고, 스멀스멀 새나오는 불안에 형태를 부여해준 것 같기도 하고, 무의식 아님 알 수 없는 무엇 아님 오리무중의 무엇에 가시의 옷을 덧입힌 것 같기도 하다. 무슨 말인가. 작가의 그림에서 분명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심지어 매개로 그린 털이 털인가 조차 분명치가 않다. 여기서 00같다, 라는 표현에 주목할 일이다. 작가의 그림은 00같아 보일 뿐, 바로 이것 아님 저것, 이라는 지시대명사를 위한 자리는 없다. 그 토록이나 명확함을 추구하는데도 말이다. 어차피 명확함이란 하나의 이상향임이 판명되어졌고, 그래서 오히려 더 불명확한 것에 천착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삶이란 온통 불명확함 투성이다. 존재는 어떻고 죽음은 어떻고 실존은 어떻고 실재는 어떤가. 섹스와 공포의 저자이기도 한, 파스칼 키냐르는 해석학(그러므로 인문학)이 헛소리라고 했다. 결국 인간이 머리로 지어낸 관념에 지나지 않은 것이라고 본 것이다. 그 관념의 코팅을 걷어내고 나면, 인문학 밖에서 인간을 보고 세상을 보면, 온통 불완전 투성이고 암흑천지며 오리무중이다.
혹 털은 바로 삶이, 존재가, 죽음이, 실존이, 그리고 실재가 온통 불완전 투성이고 암흑천지며 오리무중이라는 사실을 증언하기 위해서 호출된 유령 같은 것은 아닐까(여기서도 다시 00같다는, 유보적인 표현에 만나진다). 도대체 털이라니. 털처럼 알 수 없는 것이 또 있을까. 털처럼 오리무중인 것이 또 있을까. 작가가 그린 털과 털 뭉치 그림은 친근하면서 낯설다. 그것이 머리와 같은 털을 상기시켜서 친근하고, 머리와 같은 알만한 형상 이외의 다른 무엇, 왠지 알 수 없는 무엇이 있을 것만 같아서 낯설다. 그렇담 다시, 친근한 건 뭐고 낯선 건 또한 뭔가. 친근한 건 유혹이고 낯선 건 처벌이다. 털은 유혹하면서 동시에 처벌한다. 아님, 유혹하면서 동시에 거세불안을 상기시킨다. 죽음에로 이끄는, 죽음마저 불사하는, 죽음을 넘어서는, 그런 치명적인 유혹이라고나 할까(조르주 바타이유는 에로스를 작은 죽음이며 예비적인 죽음이라고 했다. 그리고 털은 분명 에로스를 상기시킨다). 존 스타인벡의 소설에 보면 쥐 사나이가 나온다. 쥐 털의 부드러운 감촉에 매혹돼 산 쥐를 포켓에 넣어 다니는데, 쥐가 죽은 뒤에도 여전히 쥐가 죽은 줄도 모르고 죽은 쥐를 포켓에 넣고 다닌다. 결국 쥐 털을 만지다가 쥐를 죽이고, 그 연장선에서 여자 머리칼을 쓰다듬다가 여자를 죽인다. 부드러움이 죽음을 넘어선 경지? 죽음충동이 삶 충동을 넘어선 차원? 부드러운 유혹을 매개로 죽음충동을 실현하는 반복강박? 쥐 털에서 여자 머리칼로, 그리고 모르긴 해도 또 다른 무언가로 옮겨갈, 그리고 그렇게 계속해서 전이되고 이행할 죽음충동의 반복강박? 그래서 치명적인 유혹이고, 삶 충동을 넘어선 죽음충동이다. 그렇게 작가는 털 그림을 매개로 친근하면서 낯선, 캐니하면서 언캐니한(프로이트는 낯선 것은 원체는 친근한 것이었다고 했다. 그렇게 친근한 것이 불현듯 낯설게 다가올 때 바로 두려움이 생긴다고 했다), 온통 중의적인 의미들의 지층으로 뒤덮인 세계의 맨살을 그려내고 있었다.
다시, 사구에 서서. 사구란, 바람에 불려온 모래가 쌓여 만든 언덕이다. 바람이 만든 언덕인 만큼, 다시 바람이 불면 그 언덕은 또 다른 형태로 쌓일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쌓일 수도, 아님 아예 흔적도 없이 사라질 수도 있을 것이다. 바람이 움직이듯이 언덕도 움직인다. 바람이 이행하듯이 언덕도 이행한다. 그리고 그렇게 고정적이고 결정적인, 분명하고 명확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이런 사구는 어쩜 불모의 땅일지도 모른다. 그런 불모의 땅에는 그러나, 모래의 여자가 산다. 일본의 카프카로도 불리는 아베 코보의 소설에 등장하는 곤충학자는 우연히 모래의 여자를 만나게 되고, 모래의 여자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마침내 모래의 여자로부터 벗어나는데 성공하고, 종래에는 다시 모래의 여자에게로 되돌아간다. 여기서 모래의 여자는 신기루다. 삶은 신기루다. 다시, 부드러움을 매개로 죽음충동이 자기를 실현하는 순간을 본다. 치명적인 유혹이 자기를 실현하는 순간을 본다. 여기서 도대체 부드러움이란 뭔가. 그건, 불모고 유혹이고 죽음이고 신기루다. 모래 이야기가 나와서 하는 말이지만, 작가의 사구 그림은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라는 슬라보예 지젝의 저작을 상기시킨다. 라캉주의자이기도 한 지젝은 이 저작에서 상징계(언어와 기호로 구조화된 세계)를 위협하는 실재계(거세불안으로 억압된 상상계)의 출현을 불모의 사막에다가 비유한다. 죽은 아버지의 이름으로 집행되던(남근으로 표상되던) 제도와 상식, 합리와 정상, 도덕과 윤리, 그리고 인본주의가 붕괴되면서 불모의 사막이 열리는 것. 쾌락주의가 손익계산을 따지기 위해 되돌아오고, 억압된 것들이 자기를 실현하기 위해서 귀환하는 것. 그렇게 작가가 그린 사구 그림은 치명적으로 유혹하는 신기루와도 같은, 불모의 사막 위로 열리는 쾌락과도 같은 삶의 알레고리처럼 읽힌다.
공리(公理)적 풍경 Undefined Scene
김진섭 / 성곡미술관 큐레이터, 2010
공리(公理) : 하나의 이론에서 증명 없이 바르다고 하는 명제 즉 조건 없이 전제된 명제를 말함. 수학에서는 ‘이론의 기초로서 가정한 명제’를 그 이론의 공리라고 함.
작가 이주형은 머리카락을 그린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는 스스로의 뒷통수를 그린다. 결 따라 집요하게 그리고 또 그려진 머리카락들은 다발들, 즉 일련의 개체군들을 만들며 증식하고 있다.
우리는 생각지도 않은 배신이나 충격을 당했을 때 흔히 ‘뒷통수를 맞는다’란 표현을 쓴다. 이처럼 뒷통수란 눈의 반대편에 달려있기에 스스로는 절대로 직접 볼 수 없는 미지의 장소라 할 수 있다. 분명 스스로의 신체이지만 아무리 돌아보려 노력해도 볼 수 없는 부분인 동시에 또한 나의 눈으로는 보지 못했지만 어떠한 증명도 필요 없이 분명히 그것이 존재함을 알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사각의 캔버스를 기초로 시작되는 이주형의 작업은 무한의 공간으로 확장하듯 여백의 미를 보여주는 흰 배경과 세밀하게 그려진 대상 즉, 검은 부분이 대조를 이루고 있다. 심플한 단색의 배경과 밀도 높게 묘사된 대상이 주는 깊이감은 서로를 긴장시키며 관함객의 눈을 화폭에서 뗄 수 없게 만든다. (중략 1)
2009년부터 시작된 ‘포자(The Spore)’시리즈에서는 보다 내용적인 측면이 강조된다. 이 양감을 얻게 된 ‘종(種)’을 결정 짓기 힘든 기이한 혼성체는 일련의 방향성을 갖고 세밀하게 묘사된 머리카락들로 이루어진 하나의 덩어리가 되는데, 그는 작가의 뒷통수이자 머리카락으로 이루어진 이 덩어리를 ‘포자’ 라 정의한다. 포자란 무성적인 생식세포로 보통 홀씨라고도 하며, 다른 것과 결합하는 일 없이 단독으로 발아하여 새로운 개체가 되는 것이다.
앞선 조형연구를 거듭한 뒤 본격적으로 시작된 포자시리즈에서는 외형을 넘어선 내면의 이야기들이 첨가된다. 선 작업만으로는 담아내기 어려워 끊임없이 부연설명을 필요로 했던 무언의 실체들은 점점 이미지를 획득해나간다.
포자시리즈에서 두말 할 나위 없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숨 막힐 정도로 세밀하게 묘사된 머리카락들이다. 작가는 이것을 곧 ‘불안’이라고 설명한다. 성인이 되면 신체는 성장을 멈추지만 머리카락만은 계속해서 자라난다. 원하지 않아도 끊임없이 자라 온몸을 뒤덮는 머리카락은 곧 작가 내면에서 자라나는 두려움의 증식으로 연결된다. 생계에 대한 두려움, 작업에 대한 두려움, 관계에 대한 두려움 등 아무리 부정하려 애써도 천천히 내면으로부터 스멀스멀 피어나는 실체를 알 수 없는 두려움은 조금씩 그 부피를 팽창시킨다.
생명의 최소단위인 포자는 특이한 생리구조를 지닌다. 작가 자신으로 대변되는 포자는 독립적으로 분열하고 증식하며, 타자를 필요로 하지도 전제하지도 않는다. 즉 외부의 개입 없이 독자적인 생명성을 지닌 이 복합물은 마치 무한히 자가 재생과 증식을 거듭하며, 적절한 외부 자극에 의해 신체의 어떠한 기관으로 바뀔 수 있는 줄기세포(stem cell)와도 같다.
그의 작품에서 보이는 이미지들은 매우 사실적인 형태인 동시에 그 무엇의 형태도 아니다. 증명할 수 없지만 분명 실체하는 존재들이자 명백히 정의하기 힘든 이른바 비형태적 형태라 할 수 있다.
차이와 반복을 거듭하며 한올한올 가늘고 섬세하게 그려진 머리카락들은, 외부의 자극에 민감하게 반응할 듯한 생명성을 포함하고 있다.
회화의 가장 대표적인 특징인 '평면성‘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생명의 에너지와 미세한 움직임은 시작도 끝도 없이 모든 점들이 열려있는 리좀(Rhizome)과 같다. 불안, 욕망, 관계, 사유, 두려움 등 온갖 감정은 작업의 근원이자 생성의 원천이 된다.
휜 색의 배경 중앙을 차지하고 있는 이 털 복숭이 개체는 삐죽삐죽 튀어나은 돌기를 갖거나, 커다란 구멍을 만들어 내거나, 자극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신경세포의 모습이 되거나, 검은 균염들과 갈라진 틈을 통해 깊이를 가능할 수 없는 공포감을 주기도하고 때로는 〈미궁(The Labyrinth) 2009〉에서 알 수 있듯 입구도 출구도 없는 미로가 되기도 한다.
이번 전시에서 그는 자명하지만 쉽게 정의내릴 수 없는 기이한 풍경(Undefined Scene)을 만들어 낸다. 본인의 뒷모습에서 시작된 이미지는 이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하나의 사건 혹은 장면이자 기묘한 풍경으로 읽힌다. 이 기괴하면서도 흥미로운 풍경들은 다분히 심리적, 정서적 풍경 즉 작가 내면에서 기인한 상상의 공간이라 할 수 있다.
〈어린왕자 The Little prince〉에 등장하는 각기 다른 캐릭터의 등장인물들이 살고 있는 소행성과도같이 이주형이 만들어낸 친숙하면서도 낯선 풍경은 각각의 이야기들을 내포한 자명하지만 정의내리기는 모호한 경계의 장면들이 된다. 시작과 끝, 안과 밖, 걸과 속, 앞과 뒤 등 구분이 모호한 이주형의 소우주들은 특유의 깊은 공간감과 양감으로 부유하듯 허공에 홀로 떠서 관객들과 교감을 기다리고 있다.
그가 보여주는 반복적이고 노동집약적인 작업은 비록 작가내면에서 출발했을지라도 관람객들과 묘한 공감을 형성한다. 성인이 되어서도 쉽게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 실타래처럼 엉키고 설킨 관계들, 변하지 않고 반복되는 일상들 그 안에서 소리 없이 증식하는 두려움과 불안만이 비 위계적이고 수평적인 반복을 통해 끊임없이 생성되고 있는 과정 그 자체를 담고 있다. (중략 2)
또한 이번 전시에서는 풍경에서 ‘공간’ 그 자체로 작품을 확장시킨다. 어두컴컴한 전시공간에서 집중적으로 조명을 받으며 마치 곧 발아라도 할 듯 설치된 개체들은 관람객에게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며, 관객들의 반응을 이끌어낸다. 감싸고 있는 것인지 감싸인 것인지의 구별조차 모호한 형상들은 세부를 확장하여 검은 사각형의 공간이 되기도 하고, 내부에서 빛을 내는 듯한 신비로운 푸른 물결을 이루기도 한다. 점차 형태역시 입방체(큐브)나 곧 부화하려는 듯한 ‘알'의 형태를 포함한다.
그런가하면 설치작업 역시 선보였는데, 바닥 전체를 뒤덮는 실제 머리카락들과 그 위에 설치한 평면작업이 이질적인 공간을 만들어낸다. 설치의 주재료가 되는 머리카락은 대부분은 작가 주변사람들에게 구하거나 직접 헤어샵을 통해 가져온 것이다 이처럼 머리카락은 작품뿐만 아니라 그의 삶 전반에 걸쳐 중요한 소통의 매개물이 된다. 바닥에 뿌려진 머리카락들은 개개인의 사람들로 의인화 되고 마치 작은 사회를 은유하듯 함축적이고 상징적인 의미를 포함한다.
최신 푸른빛을 사용한 일련의 작품들 특히 근작 <배아(Embryo)2010>에서 알 수 있듯 금방이라도 터질 듯 팽창한 혹은 갈라진 틈 속에서 앞으로 무엇이 새롭게 탄생할지 사뭇 궁금해진다.
공리(公理)적 풍경 Undefined Scene / Review - Art&Culture magazine
이선영 / 미술평론, 2010
머리털이라는 소재가 가지는 물신의 환상적 구조 때문인지, 다소 어둑하게 연출된 전시장은 매혹으로 가장된 공포가 출몰하는 무대가 된다. 멀리서보면 얼룩이나 점처럼 보이는 어두운 형태(Gestalt)들은 미세한 선들로 채워진 면을 이루며, 면은 다시 굴곡진 표면과 덩어리로부터 탈주하는 외곽선들로 흐트러진다. 다양한 변곡의 계열로 이루어진 이주형의 포자(The spore) 시리즈는 무수한 선의 집적이 부피를 만들며, 내부로부터 파동 치는 힘이 발현되는 장이다. 바닥을 가늠할 수 없는 깊이에서 출몰하는 것은 희열과 공포, 사랑과 욕망, 탄생과 죽음 같은 원초적 감성이다. 포자들은 엄습하는 두려움으로 쭈뼛 선 머리털로부터 기괴한 웃음을 흘리는 듯한 마스크까지 고딕적 그로테스크함으로 가득하다. 머릿속 깊은 곳으로부터 융기하여 구불거리는 털이라는 공통점만이, 변신 중인 형태들을 동질이상(同質異像)의 것으로 짐작하게 한다. 내포적 다양성을 가지는 형상들은 상이한 곡률과 주름을 가지는 우주와 생명의 이미지로 확장된다. 빈 공백처럼 보이는 바탕에 펼쳐진 형상은, 위상학적으로는 구면이지만 휘어진 정도가 제각기 다른 복잡한 곡면을 가진 n차원의 다양체로, 가능한 세계들의 모형을 제시한다. ‘공리적 풍경’이라는 전시부제는 주먹구구식의 상상을 넘어, 진정한 다양성과 차이를 가능하게 하는 수학적 엄밀성을 예시한다. 그러나 공리적 방식은, 형식적 체계의 일관성이 정작 증명될 수 없다는 역설을 내포한다. 증명이 필요치 않은 원칙들과 불확정성은 동전의 양면을 이루는 것이다. 실제가 가능하기 위한 자명성에의 요구와 그 요구를 채워주지 못하는 결여는, 우리로 하여금 실제의 이면을 직시하게 한다. ‘공리적 풍경’은 물질에서 정신으로, 이성에서 감성으로, 지각에서 욕망으로, 요컨대 예술의 본령으로 강조점을 이동시킨다. 이주형의 작품에서 개체가 자극에 반응하는 방식은 예측 불가능하다. 포자는 물론, 최근 시작한 배아(Embryo)시리즈에서 차용한 생물학적 개념은 의미 있는 형식이라는 점에서, 미적 가치도 내포한다. 자연과학적인 대상을 넘어서는 포자나 배아의 개념은 고전주의 시대의 수학자이자 철학자인 라이프니츠가 이론화한 단자(單子)와 비교될만하다. 그것들은 물리적 힘보다는, 의지와 욕망에 의해 움직이는 단순하고도 근원적인 실체이기 때문이다. 단자의 예는 개인이나 씨앗 등에서 발견된다. 포자와 배아는 단자처럼 부분을 가지지 않으며, 이러한 단수성을 통해 다수성으로 확장될 수 있다. 하얀 캔버스 하나하나에 놓인 단일한 개체는 각각의 테두리를 가지는 세계에 거처하며, 그 세계 내부에 깊이 패인 틈과 그림자는 존재 내부에 똬리를 튼 무(無)를 암시한다. 그것은 라이프니츠의 단자처럼, 창이 뚫려 있지 않으며 우주의 다른 단자들을 지속적으로 반사하는 살아있는 거울이다. 검푸르게 빛나는 이 단자적 거울은 대우주를 담는 소우주로 작동하면서, 눈망울 같은 물방울 속에 빛의 파동으로 출렁이는 우주적 대양을 담아내곤 한다. 육화된 외피인 머리털은 기원이 불분명한 빛살과 어우러져 응집하거나 팽창한다. 지각의 수용기이자 반응기인 머리털은 피부의 확장이며, 표면과 이면이 통합된 몸은 시공간이 얽혀 있는 세계와 상호작용 한다. 그의 작품에서 개체 전체를 뒤덮는 털은 세계와 연결된 살아있는 끈이다. 메를로퐁티가 말하듯이, 이 끈은 다양한 몸의 두께를 만들며, 나를 세계로 세계를 나로 만든다. 나와 세계, 이 두 존재 사이에는 경계선이 아니라, 접촉면이 존재한다. 이 접촉면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구조화될 수 없으며 공적으로 소통시키기 힘든 무의식과 욕망을 가시화한다. 끝없이 자라는 머리털은 무의식과 욕망의 화신이다. 기관 없는 몸체가 더듬어 파악하는 세계에 대한 지각은 욕망으로 추동된다. 욕망의 절정은 사랑이다. 그러나 사랑은 결코 채워질 수 없는 욕망처럼, 아귀가 맞아 떨어질 수 없는 상상처럼, 근본적인 불일치가 내재한다. 라깡이 말하듯이, 결핍의 주체이며 욕망의 주체로서 사랑하는 자는 현실에서는 결코 만날 수 없는 상실된 대상과 계속 만나게 될 뿐이다. 삶 자체가 계속되는 불일치, 이 끝없는 어긋남과 지연의 과정이다. 그러나 모체에서 벗어나는 탄생의 순간부터 공포와 만날 수밖에 없는 운명적 존재에게 공포란 살아있음의 증거이다. 엄습하는 공포의 순간에 응결된 포자들의 다음 단계는, 어둠 속 봉인이나 생의 응집력을 잃고 흩어져 버린 세계의 잔해 속에서 또 다른 변모를 위해 내부로 접힌 주름을 펴기 시작하는 배아들이다.
잠재적 시각장에서 일어나는 사건들 : 빛과 반전, 쓰기와 감춤
유진상 / 미술비평, 2008
“나는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안다. 나는 내가 그것의 일부이며 마찬가지로 나의 눈도 그 시각적 장의 일부라는 것을 안다.” -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
회화가 지니는 가장 중요한 특질들 가운데 하나는 그것이 화가에 의해 규정된 절대적 공간 안쪽에 시각의 장(場)을 형성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가장자리를 지님으로 인해 세계가 새로운 영역으로 확장된다는 것을 선언한다. 회화의 프레임은 한편으론 관객에게 작품을 바라보는 장소를 지정하는 역할을 하면서 동시에 이 시각적 장의 주체가 작가나 관객이 아닌 다른 어떤 것임을 알려준다. 미셸 푸코가 벨라스케즈를 통해 확인해준 바 있는 이러한 탈-원근법적 주체의 생산, 탈-영토화된 회화의 구조는 그것이 다른 매체들과 지니는 많은 차이들의 하나에 불과하다. 회화는 설치미술이나 건축물에서처럼 그 안을 거니는 이가 갖게 되는 자신의 시선이 자신의 움직임에 속한다는 믿음을 허물어 버린다. 회화의 사각형은 그 자체가 주체의 생산자로서 기능한다. 시선의 움직임은 전적으로 회화적 장의 내부에서 이루어지며 심지어 어디에서 어느 방향으로 바라볼 것인지를 결정하는 시선의 잠재적 운동 역시 그 안에서 이루어진다. 관객은 회화 앞에 서있지만, 작가와 마찬가지로 그가 이동하는 공간은 회화적 가장자리의 안쪽인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회화가 제시하는 잠재적 시각장(visual field)에 대한 이러한 관점은 회화를 다른 매체들과 확연히 구분해주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그렇다고 이러한 잠재성이 회화를 사진보다 가상공간을 묘사하는 디지털 합성 이미지에 더욱 가까운 것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아니다. 회화적 잠재성은 해석의 공간, 더 나아가 비평적 해석으로 이어지는 존재론적 가상의 공간과 동일시된다. 다시 말해 신체적 흔적, 물질적 질감, 시선의 시간적 운동과 그 기록 등을 통해 특정한 시간과 공간의 특이성(singularity)이 잠재적 시각장이 형성하는 해석학적 층위(layer)와 겹쳐진다. 디지털 이미지가 구현하는 공간은 프레임에 대한 해석(interpretation)이 아닌 그것의 위치에 대한 해독(deciphering)을 요구하는데 머문다. 사진은 회화와 마찬가지로 시각장의 잠재성에 대한 질문을 제기하지만, 이 광학적 기록의 메커니즘이 실재의 세계와 갖는 관계는 잠재성에 대한 해석을 매우 좁은 영역으로 한정한다. 회화가 단순히 시각적이고 물리적인 운동의 기록에 국한되지 않는 이유는 그 잠재적 시각장이 매우 강력한 주체로서 작동하기 때문이다.
이주형의 회화는 우리가 흔히 ‘회화성’이라고 일컫는 이러한 핵심적 특성들에 대한 명확한 예시를 보여준다. 그의 회화는 한마디로 ‘회화적 장’(pictural field)이라고 말할 수 있는 공간을 표현한다. 그것은 캔버스의 가장자리 안에서 빛나는 밝은 공간과 그것이 유추케 하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심도’(depth) 혹은 회화적 원근성의 ‘기본요소들’(elements)에 연동되어 있다. 이 공간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일어나는 사건은 하나의 가장자리에서 이 시각적 장 안에 들어온 뒤 다른 가장자리를 통해 사라지는 선의 운동이다. 이 강력한 선의 운동이 의미하는 것은 분명하다 : 회화적 공간은 세계의 연속성(continuum)의 한 단면을 드러낸다. 그것은 사건의 결절들(nods) 혹은 사건들이 조우하는 극장(theater)을 사각형의 면 위에 가시화한다. 이를 통해 그것은 바깥의 공간으로 이어지는 운동 전체를 가시화한다. 선들은 바깥으로부터 들어와 예외적인 굴곡들을 만들어낸 뒤 다시 화면의 바깥으로 사라져 간다. 그것을 ‘바깥-화면-바깥’(outside-scene-outside)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즉 무정형의 힘들은 비-유기성(non-organique)의 공간으로부터 회화적 장 안에 들어옴으로써 의미화(organization)의 과정에 참여한다. 그리고 다시 비-유기적 영역을 향해 명멸해간다. 그림에는 이 굴곡들, 사건들의 크기가 어떤 것인지에 대한 아무런 단서도 없다. 그것은 단지 사건의 형태와 유기화의 과정만을 기록한다. 그것은 매우 거대한 궤적들의 기록 (고도, 나락)일 수도 있고, 아주 미세한 것의 한들거림(플라나리아)이기도 하다. 중요한 것은 선이 화면을 가로지른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보는 것은 선들이 정지하거나 휘어지거나 반사하는 예외적 순간이다.
이 선들이 이주형의 그림 속에서 일으키는 사건의 조직은 두 종류의 선들을 통해 이루어진다. 하나는 가늘고 섬세한 섬유질의 선들이다. 이는 정확한 형태를 결정하기 위해 그어 본 가늘고 흐릿한 선의 다발들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 선들 위로 굵은 붓글씨의 획과도 같은 날렵하고 리드미컬한 선들이 겹쳐진다. 때문에 두 종류의 선들이 엮어내는 관계의 울림은 마치 원근법적 공간 안에서 선의 다발이 이루어내는 입체적 교차처럼 보이기도 하고, 또는 숱한 작은 신경들이 떠받들거나 감싸고 있는 구조물의 출현처럼 보이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이 그림들에는 의도적으로 빠른 속도감이 재현되어 있다. 그것은 순간적으로 화면을 가로지른다. 일견 그것은, 무한히 먼 곳에서 날아온 여러 개의 핵과 먼지들로 이루어진 혜성처럼 바로 눈앞의 공간을 짧은 찰나에 스쳐 지나가거나, 다른 예를 들자면 물리학적 미립자의 예측할 수 없는 운동처럼 가장 강력한 전자현미경이나 입자검출기의 필터를 통과하는 순간의 속도감 같은 것을 그려내고 있다. 따라서 그림이 구현하는 시각장은 예외적이라는 말로는 부족할 정도의 드라마틱한 공간이 된다.
다른 한편으로, 이 그림들은 아크릴 물감으로 그려져 있다. 유화적인 터치의 질감을 표현하는 대신 각각의 선들은 상당한 두께의 폭을 지니고 있으며 동시에 평면적이다. 선들의 운동방향이나 커브에 따른 변화는 더욱 더 가속적인 느낌을 만들어낼 뿐 아니라 비물질적인 평면을 고수하고 있어 훨씬 더 빛의 질감에 가까워지고 있다. 그런데 왜 어두운 선들로 표현되어 있는 것일까? 일종의 반전(反轉)에 의한 것일까? 이것은 작가가 의도적으로 청람(靑藍)색을 띠는 화학적 색채의 주조를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 이주형의 그림을 대하면서 가장 먼저 놀라게 되는 것은 바로 색채다. 그는 일반적으로 회화에 사용되지 않는 색, 바로 화학적으로 제조된 잉크의 색을 연상시키는 짙은 보라색을 사용한다. 인디고(indigo)에 가까운 이 색 -이집트 바이올렛-은 사실 가장 오래된 염료의 색채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라색은 일반적으로 회화에서 독자적으로는 잘 사용되지 않는 범위의 색에 속한다. 창백한 백색의 배경 위에 아크릴 물감으로 그려진 드로잉에 가까운 그림일 경우에는 특히 그렇다. 검은색에 가까울 정도로 진하게 발려진 이 안료가 인디고의 여운을 드러내는 것은 선의 윤곽에서 번져 나오는 듯한 흐릿한 터치들과 다발을 이루는 가는 선들 때문이다. 이 흐릿한 빛들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은 사진의 화학적 반전, 즉 네거티브 필름의 밝은 빛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컬러 네거티브 필름을 사용해서 밝은 빛을 촬영할 경우 실제로 필름 상에 기록되는 것은 보라색에 가까운 짙고 푸른 얼룩이다. 이주형의 그림들 속에 나타나는 선들의 빠른 운동은 마치 일정한 시간 동안 노출을 유지하면서 빛의 움직임을 기록한 네거티브 필름의 얼룩처럼 보인다. 붓의 움직임은 곧 광원(光源)의 움직임이기도 하다. 그것은 화면 위에서 순간적으로 교란을 일으키는, 혹은 회절(回折)하거나 서로 간섭하는 빛의 다발(faisceaux)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렇다면 왜 반전일까? 아마도 그것은 회화가 안고 있는 기초적인 관념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앞서도 언급한 것과 같이, 회화는 다른 매체들과 달리 잠재성에 대한 해석학적 층위를 다룬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보이지 않는 것을 가시화하는 사각형의 틀인 것이다. 그 앞에서 관객이 발견하는 것은 완벽하게 화면의 이편과 분리되어 있는 공간의 해석학적 위상이다. 현실적 공간의 측정 가능한 어떤 좌표들도 화면 안으로 직접 이어지지 않는다. 이러한 회화적 공간의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사실적 재현 보다는 관념적 전이의 단계들이 요구된다. 그리고 이주형의 그림들 속에서 이러한 전이는 바로 색채의 반전을 통해 이루어진다. 프란츠 클라인(Franz Klein)이나 술라쥬(Pierre Soulages)의 회화가 포지티브로 이루어진 붓의 움직임(stroke)들 사이로 형이상학적 빛을 드러내었다면, 이주형은 정반대의 과정으로 이루어져 있다. <플라세보>는 ‘위약’(僞藥)을 의미한다. 그의 작품들 가운데 하나에 붙은 이 제목은 회화가 실재의 그림자 혹은 반전이라는 사실을 암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구체적 효과를 불러일으키는 실제의 약이기도 하다. 그의 그림들 속에서 밝은 빛들은 어둠의 반전이다. 반대로 어두운 선의 빠른 움직임들은 밝은 빛의 강렬한 교차와 결절들이다. 이주형의 반전된 빛은 클라인과 술라쥬의 형이상학적 빛처럼 형이상학적으로 해석될 수 있다. 예컨대, 회화는 내재적(immanent)인 빛을 더욱 실제적(real)인 것으로 작동하게 하기 위한 위약이다.
이주형의 선들은 신과 성인들의 이름을 적은 아라베스크를 떠올린다. 굵고 유연하게 흐르는 선의 운동이 종교적인 각성을 통해 완성된 서예(calligraphy)를 연상시키는 것은 단지 그것이 흰 바탕에 어두운 색으로 그려졌기 때문만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그의 회화는 빛에 대한 연상들로 가득 차 있다. 마치 오랜 과거의 서예가 빛을 발하는 존재의 이름을 적기 위한 것이었던 것처럼, 그의 선들도 그러한 이름의 일부를 확대하여 보여주는 것처럼 보인다. 대상의 존재를 이름과 동일시한 유명론(nominalism)적 전통이 그러했듯이 여기서도 이름은 부분에 의해 감추어져 있거나 작고 추상적인 분절들로 치환된다. 동양의 서예에서도 그것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쓰기’(-graphy)는 드러나지 않는 어떤 것의 기록인 것이다. 그러므로 빛과 반전, 쓰기와 감춤이 이주형의 회화가 구축하는 해석학적 공간의 층위들인 것이다. 회화는 소비나 향유에 대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생산을 생산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감상자의 내면에서 떠오르리라 간주되는 어떤 것을 생산해 낼 회화를 어떻게 생산할 것인가에 대한 것이다. 이 이상하고도 단순한 -우리는 그의 작품을 처음 본 순간 그것의 익숙해지기 쉽지 않은 간결한 표현에 대체로 당황하게 된다- 회화는 바로 이러한 생산방식을 전제로 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서만 감상자는 이주형이 다루는 회화의 시각적 장을 이해하게 된다. 이 기본적 구조에 대한 이해의 끈을 놓지 않는 것은 다른 모든 회화에서도 동일하게 요구되는 조건이다. 그러나 나아가 이주형의 회화에서 그것은 일반적 회화의 조건에 대한 것을 넘어서 좀 더 추상적인 관념으로 나아가는 경로를 구현한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무엇을 부르거나 그것의 이름을 적을 때 그 대상보다 훨씬 더 광범위한 어떤 것을 떠올리는 경험을 연상시킨다. 그것 역시 회화성의 일부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