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필균
백필균
유리가 깨지기 전에 구의진의 유리는 풀밭으로 향한다. 흔들리는 풀과 풀 사이에서 구의진은 이미지를 옮기는 유리로 또 다른 유리를 바라본다. 종로에서 용산로 옮긴 유리는 투명하지만 그 너머 서있는 자는 나뭇가지에 가려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다. 바람에 흔들리는 깃발에서 애달픈 무궁화가 웅장한 건물을 가린다. 용산 공원에 내리는 소나기 혹은 장마를 그대로 맞으며, 구의진은 도시 가운데 눈높이가 다른 두 장소를 사진으로 오간다. 사진공간에서 풀밭은 유리를 따라 갈아입은 색으로 서슬퍼런 이미지를 깨트리는 향연이다.
유리가 깨지는 중에 조정환의 유리는 허공으로 흩어진다. 도시 생태에서 우화를 꿈꾸는 번데기 혹은 재난 현장에서 잔해를 뭉친 쓰레기, 바위가 깨진 돌덩이 혹은 감정이 쌓인 뭉텅이가 조정환의 회화공간을 부유한다. 상승하는 동시에 하강하고, 세워지는 동시에 무너지는 도시에서 우리는 우리를 지킬 수 있을까. ‘폭격처럼 개발하는’ 현장에서 가까운 미래를 경고하고, 차디찬 문명을 비판하는 회화에 불안이 범람한다. 그의 회화는 불안에 밀린 사람들을 태우는 배. 바다를 표류하는 사람들과 재난 현장에서 깨졌어야 할 유리를 상상한다. 유리는 누군가 응시하는 힘, ‘바라보기’로 마침내 깨진다.
유리가 깨진 후에 박호은의 유리가 해변으로 흐른다. 태양 아래 테라스에서 빛은 한밤이 간직한 기억을 한낮이 웅변하는 바람이다. 누군가 살아야할 이유가 무엇인지 되묻는 당신에게 박호은은 푸른 돌을 내보인다. 그가 돌을 주운 곳은 누군가 쓴 소설, 소리와 소리가 마찰하는 도시, 발 아래 흩어지는 햇볕을 머금은 해변이다. 해변 아래 자살자 30명이 남긴 유서가 파도에 씻겨 민낯을 드러낸다. 한 시대를 함께 겪은 10대 소년부터 80대 노년은 사회적 타살이 남긴 흔적을 응시하는 한편, 청년의 역사를 비추고 세상을 향해 웅변하는 유리다. 그가 작업을 처음 공개한 지 10여 년이 흐른 지금, 애도하는 청년은 개개인이 거대한 폭력 앞에 겪은 부조리와 불합리를 차례로 호명한다. 흰 죽음을 새긴 검은 바탕에, 떠난 사람의 작별은 남은 사람의 얼굴에서 그 몫을 마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