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07. 06. 작성.
나의 길
한 분야의 일을 계속 하다 보니 “당신은 어떻게 이 분야의 일을 하게 되었습니까?” 하는 질문을 받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또 내가 자란 모국인 한국을 떠나 미국에 사는 것에 대해 “왜 미국에서 살게 되었나요?”라는 질문도 반복해서 받곤 했습니다. 그에 대한 답은 재미있지도, 누군가를 감화시킬만하지도 않은 이야기이지만, 나의 특별한 여정이 1990년대 이후 한국복식사 연구의 한 갈래로 증언될 수도 있기에 기록을 해 둡니다.
어떻게 이 분야의 일을 하게 되었나요?
저는 대학에서 의류학을 전공했고, 대학원에서 한국복식사를 세부 전공으로 택했습니다. 흔히 의류학과를 간다고 하면 어릴 때부터 그림을 잘 그리고, 디자인하고, 또 바느질 하는 데 소질이 있거나 적어도 좋아는 해야 그 쪽으로 전공을 정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런데 저는 그림에도, 바느질에도 소질이 없었고, 창의적이지도 않았습니다. 특히 옷을 입힌 인체를 그리는 것은 제게 너무나 어려운 일이었고, 바느질도 시작하면 잘못 박아서 세 번 뜯고 새로 박는 건 기본이었습니다.
고등학교 때 저는 수학을 좋아해서 계산통계학을 전공하고 싶었는데 학력고사 점수가 예상 커트라인에 약 5점 정도 모자랐습니다. 제 점수로 지원할 만한 학과로 약대 제약학과를 지원했는데 커트라인에 걸려서 2지망인 의류학과에 합격을 했습니다. 사실은 먹는 걸 좋아해서 식품영양학과를 2지망으로 쓰려고 했었습니다. 고 3 담임 선생님하고 대학 원서를 쓰면서 2지망은 식품영양학과라고 말씀드렸는데, 그 순간 담임 선생님께서 “식품 영양학과 보다 의류학과가 더 취직이 잘 돼”라고 하셨습니다. 1986년 87년 즈음, 의류 기성복 산업이 한창 잘 나가던 때였습니다. 저는 곧바로 “그럼 의류학과 써주세요” 했습니다. 참으로 세상 모르고 주입식 시험문제 풀이만 했던 저의 무성의한 결정이 저를 미래로 인도했습니다.
의류학은 옷에 관한 모든 측면을 연구하는 학문이어서 과학, 인문학, 예술, 등 다양한 분야가 있으니 다니면서 맞는 분야를 찾아보라고 교수님들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학부 4년동안 제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탐험을 했지만, 소질이 없으니 흥미가 없었고, 그 과정을 마치는 것이 고역이었습니다. 졸업이 가까와지니 취직을 해야 하는데, 당시 마음만 먹으면 취직이 어렵지는 않았지만, 디자이너의 삶은 상상만해도 두려웠습니다. 그나마 공부하고 시험보는 것이 내가 더 잘 할 수 있는 일인 것 같아서 대학원에 진학하기로 했고, 합격을 했습니다.
대학원에서의 전공을 정해야 했는데, 당시 기성복 산업에 고객 중심 마케팅, 비주얼 머쳔다이징 전략 등이 중요한 담론이었고, 나는 패션 마케팅을 가르치신 이은영 교수님의 카리스마에 매료되어 그 쪽으로 결정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잠시 다시 생각하니 그 분야는 석사 후에 해외 유학이 필요할 것 같았습니다. 대구에서 서울로 가서 유학한 것도 힘들었는데, 해외 유학을 할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진로를 결정해야 하는 중대 순간에 막판 뒤집기를 순간적으로 한 번 더 합니다. 유학을 가지 않아도 될 것 같은 한국복식사로 전공을 정했습니다.
전공을 한국복식사로 정한 이유는 비단 그 이유 하나만은 아니었고 두 가지가 더 있습니다. 하나는 학부 내내 고민했던 것인데 “패션”을 위해 일하는 것에 대한 회의였습니다. 제가 정말 디자인을 좋아하고 소질이 있어서 좋은 제품을 만들어 내더라도 그것의 최종 귀착은 무엇인가를 반문해 보았습니다. 디자이너의 입장에서는 좋은 제품을 만들어서 고 부가가치를 창출해서 높은 가격에 내놓고 잘 파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속적으로 팔리도록 진부해진 현재의 유행을 대체할 새 유행을 창출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디자이너가 그렇게 열심히 일한 결과가 결국 돈 많은 사람의 허영과 사치 습관을 채우는 데 기여하는 것 외에 어떤 의미 있는 일을 할 수 있을까 물었을 때 35년 전의 나는 4년의 공부로부터 답변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한국복식사를 연구한다면 우리 것을 연구한다는 데 대한 보람은 최소한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점은 저의 순간적인 결정 번복을 합리화하기에 충분하고도 남았습니다.
또 하나는 학부 때 배운 한국복식사 내용이 너무 어려워서 입니다. 존재 가치가 있는 학문 분야이지만 1960년대 이후 연구가 본격화 된 아직 갈 길이 먼 분야였습니다. 교과서의 내용은 단편적이고 흐름을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공부를 하면 할수록 답변을 구하기 어려운 질문이 끝없이 제기되었습니다. 그래서 제 스스로가 연구하여 이해가 쉬운 책을 쓰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이러한 이유들이 지금껏 저를 변함없이 이 분야에 묶어두고 있습니다.
1991년 제가 대학원을 진학할 당시 한국복식사 전공 지망자는 없었습니다. 1980, 81년에 석사를 졸업하신 선배 김찬주 선생님과 조우현 선생님 이후 10년 만에 제가 지원하였습니다. 이순원 교수님께서는 서울대에서 한국복식사도 인재를 길러야 한다고 하시며 저를 받아 주셨고, 관련 과목들을 개설해서 제가 졸업할 수 있게 도와 주셨습니다. 발해 복식으로 석사 논문을 쓸 때 발해사 전문가이신 국사학과의 송기호 선생님께 저를 직접 데리고 가셔서 논문지도를 부탁하시기도 하셨습니다. 송 교수님께 자료 도움을 받아 석사과정을 마치고 운 좋게 전주 기전여자 전문대학에 전임강사로 취직이 되어서 1998년까지 5년간 근무했습니다. 1996년부터는 서울대 박사과정에 들어가서 2000년에 박사를 졸업할 때까지 서울대 학부의 한국복식사 강의도 했습니다. 고민 많은 학부시절을 보냈지만 일찍 교수가 되어 바쁘지만 일하는 보람을 알아가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왜 미국에 가게 되었나요?
2000년 8월 지도교수님이셨던 이순원 교수님의 퇴임이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연구실 내에서는 가능한 교수님 퇴임 전에 졸업을 하라는 말이 돌았습니다. 그러려면 논문을 4월까지 마무리하여 5—6월에 심사를 받아야 했습니다. 저는 첫 아이를 1999년 5월에 출산하여 그야말로 처음하는 육아에 정신이 없었고, 남편마저 한국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어찌 논문을 완성하고 심사를 통과했는지 지금은 기억조차 가물가물한 과거가 되었지만, 아뭏든 교수님의 퇴임과 함께 저도 박사 학위를 받고 졸업하였습니다. 교수님의 후임은 한국복식사 분야로 뽑기로 과 내의 교수님들이 모두 동의를 하셨다고 해서 당시 우리 연구실 동학들은 다소 희망적인 기대에 부풀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막상 교수님께서 퇴임을 하고 나시니 한국복식사 아닌 패션 마케팅 교수를 뽑았습니다. 이 결정은 2000년 5월 과 회의에서 이은영, 김민자 두 교수님의 주도로 결의되어 소문으로 나돌았습니다. 한국복식사 연구실에는 당시 약 15명의 대학원생이 있었는데 그들에게 그 결정을 되돌릴 수 있는 힘은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도 없었습니다. 저희의 의견을 교수님들께 전달하여 늦기 전에 사안을 재고해 주시기를 부탁드려야 했습니다. 저는 그 글을 기초하였고, 연구실 멤버들과 교통하며 서명을 받아서 두 차례 우리의 의견을 학과의 모든 교수님들께 전달했습니다. 교수님들께 올렸던 편지와 연구실 멤버에게 썼던 글은 지금도 간직하고 있습니다.
저는 졸업은 했지만 앞 길이 보이지 않았고 연구실에 남은 친구들은 뿔뿔이 흩어져 다른 교수님 지도 하에 각자 살 길을 찾아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학교 밖의 학계에서는 “서울대가 이렇게 하면 다른 지방대와 사립대도 따라 할 것이다” 라는 소문이 돌았고, 실제로 지난 30여년 동안 의류학계에서 한국복식구성과 한국복식사학 분야는 지속적으로 축소되어왔습니다.
그 때 저는 개인사적으로도 결혼 생활의 초창기에 감당해야 할 어려움에 직면해 있었습니다. 미국 유학생인 남편과 결혼해서 남편은 미국에서 저는 한국에서 떨어져 살면서 남편이 공부를 마치고 한국으로 올 것이라고 기대하며 아이를 한국에서 낳고 키웠습니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저는 출산하고 아이가 돐이 될 때까지가 논문을 마쳐야 하는 시기여서 아이에게 충분한 사랑을 주지 못하고 여러 사람의 도움에 의존해야 했습니다. 그렇게 졸업하고 보니 가족이 함께 사는 것보다 내 삶에 더 우선하는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국에서의 제 커리어를 고집하기에는 그 길이 너무 막막했습니다. 2000년 12월, 남편이 있는 미국 일리노이주로 아이를 데리고 떠났습니다. 그 때 저의 영어는 형편없었기 때문에는 미국에서 일을 계속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꿈도 꾸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이 분야에 대한 애정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한국 학회지에 논문을 내고, 한국 방문을 하면 한국 교수님들과 만나 프로젝트도 간간이 했습니다. 2001년 남편의 취직으로 캘리포니아로 이사한 후 미국 박물관의 한국실 유물에도 관심을 가져가던 중 한국복식의 역사를 영어로 강의할 첫 기회가 왔습니다. 2013년에 게티 박물관에서 루벤스 화가의 한복입은 남자 (Men in Korean Costume)를 내세운 특별전을 하면서 로스 앤젤레스 한국 문화원과 함께 한국복식사 강좌를 제공했을 때 한국을 떠난 뒤 13년 만에 미국에서 일을 다시 하게 되었습니다.
미국에서는 한국복식사를 저 만큼 알고 있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 후 저는 감사하게도 박물관 강의와 대학 복식사 수업 등을 할 기회를 지속적으로 얻었고, COVID 이후로는 영상 강의도 하면서 소설가, 출판사, 극 의상 디자이너 등 고객층도 넓어졌습니다. 지역적으로는 미국 서부 뿐 아니라 동부, 유럽의 영국, 네덜란드까지 저의 서비스를 제공하게 되었습니다.
다양한 고객을 접하면서 제가 하는 일에 대한 폭 넓은 시각이 형성되었습니다. 미국에서 일을 시작한 초기에는 한국에서 배운 내용을 영어로 표현하여 전달하는 것에 초점을 두었지만, 점차 저는 그 동안 제가 배운 지식이 얼마나 일천한가를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영미권 학계에서 수립된 내용을 깊이 공부하지 않고 일국사적 시각에서 한국복식 문화 만을 이야기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곧 깨달았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서구에서 옷과 패션에 대한 연구의 역사를 공부했고, 그 과정에서 어떤 방법론적 대립이 있었는지, 그 대립을 어떻게 넘어서고 지금의 총체적인 시각의 방법론을 수립하는 데 까지 왔는가를 공부했습니다. 또 서구 학계에서 중요하게 초점을 두고 연구하는 큰 주제들이 무엇인지도 파악했습니다. 옷과 패션은 오직 인간만이 가진 문화로서 인간에게 아주 복잡하고 복합적인 의미를 갖고 있으며, 일찌기 영미권 학계에서 연구해 온 다양한 접근 방법으로 한국복식의 역사를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그 풍부한 비판적인 시각은 제가 미국을 오지 않았으면 과연 평생토록 깨달았을까 싶을 정도로 제 인생의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깊은 생각을 하게 한 값진 지식이었습니다.
가끔 이런 제 이야기를 미국 교수들과 만난 자리에서 할 때가 있는데, UC Irvine의 Marcy Froehlich 교수는 제가 “적시에 한국을 떠났다”고 말해 준 적이 있습니다. 옷과 패션은 나의 역사관과 세계관을 더욱 깊이 탐구하게 만드는 훌륭한 주제들을 제공했고, 저는 그 탐구의 시간과 세계인과 공유했던 기회들이 감사합니다. 너무나 미미하게 시작했던 일이 조금씩 발전해감을 느낍니다. 앞으로도 제게는 풀어내야 할 이야기가 많습니다. 더욱 신선하고 깊이 있는 콘텐츠로 고객과 만날 것을 고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