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빛샤워/2024/oil on canvas/162x130cm
달빛샤워/2024/oil on canvas/162x130cm
별빛 속을 달리며/2024/oil on canvas/194x130cm
축제의 밤 2/2023/oil on canvas/80x80cm
솟아오르는 밤1/2024/oil on canvas/194x130cm
하얀 날1/2023/oil on canvas/100x80cm
<<주술사의 밤>>
전기숙 개인전 /시각미술연구소 필승사 2024.12.13.~12.23
말이 된다
섬으로 이주하기 전 도시인이었던 나는, 제주도의 자연을 아마도 보호나 관조의 대상으로만 여겼던 것 같다.
하지만, 작업실을 제주도의 부속 섬인 우도로 옮기고 4년의 세월을 보냈다. 그 4년 동안 우연히 ‘말’이라는 동물과 만나서 친해지고, 말을 돌보는 말테우리가 되었다. 그들을 돌보면서 위험한 에피소드들도 많이 겪었고, 낯선 종의 몸짓과 언어도 이해하게 되었다. 빠른 속도와 힘찬 근육의 상징으로만 생각했던 말들의 본 모습을 알게 되었다. ‘말’은 인간의 필요에 의해 길들어진 야생 동물과 가축. 그 사이쯤에 있는 덩치 큰 동물이다. 나에게 말들은, 자유롭게 바람을 가르며 초원을 달리는 자유로움의 상징이자, 서열 싸움을 하면서 무리 생활에 적응해서 살아가야 하는 외롭고 연약한 존재이기도 하다. 또한 내가 지키고 돌보아야 할 자연이자, 어떻게 인간과 동물이 공생하면서 슬기롭게 살아갈 수 있을까하는 방법들을 고민하게 만드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제쳐두고서, 내 목소리를 알아듣고, 내 냄새를 기억하며 나를 반기는 말들을 바라보니, 어느새 말들은 다 내 새끼가 되었고, 나는 말들의 어미가 되었다. 내가 간 첫 해에 새로 태어났던 말들이 어른 말이 되기도 하고, 다른 목장으로 팔려 가거나 운명을 달리한 말들을 보면서 나는 몇 날 며칠을 울면서 지내기도 했다. 세상과 자연의 이치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무력감이 들 때도 있었지만, 그런 일들이 나를 더 단단한 사람이 되게 만들기도 했던 것 같다.
인간에게 길들여진 채로 진화되어, 야생에서 혼자의 힘으로는 더 이상 살아갈 수 없는 존재, 더 이상 함께하지 못하고 내 품에서 떠나보냈던 많은 말들을 떠올리며, 한 줌 흙으로 돌아간 말들이 다시 그 땅에 생명으로 피어나 풀이 되고 바람이 되어 흩날리는 상상을 해 본다. 그림과 기억속에서나마 그들에게 평온과 자유를 줄 수 있도록 하늘의 힘을 비는 주술사가 되어 본다.
밤의 감각
말은 나에게 자연을 상징하는 존재가 되었고, 말들을 돌보면서 돌아본 주변 생태계가 내 삶과 작업에도 큰 변화를 이끌었다.
말들의 보금자리가 되는 들판에서 식물들과 곤충들도 자주 관찰했다. 작은 벌레, 곰팡이, 미생물, 가축의 배설물 등 미시적인 자연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짙은 안개나 파도, 강한 비바람과 태풍 등 예측 불가능한 섬뜩한 자연 현상도 종종 겪었다. 아름답게만 바라보았던 상투적인 시선 너머로 따스함과 냉정함이 동시에 존재하는 생태계의 모습을 보았다. 거대하고 모호한 힘으로써 존재하는 자연을 발견한 것 같았다. 이런 과정들이 최근 작업의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올해 초, 우도와 작별하고 제주시로 거주지를 옮겼다. 계절의 흐름 속에 변화하는 우도 들판의 생명력을 한순간에 섞어서 떠올리며, 눈에 보이지 않는 에너지의 상상을 더해 회화 작업을 한다. 네 발로 땅 위에 서서 당당히 바람을 맞서며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을 내 자식 같은 말들, 그들의 배설물을 마법처럼 짧은 시간 동안 분해하는 미생물들, 그것을 양분으로 삼아 땅에서 훌쩍 솟아오르는 풀과 꽃들, 자라난 풀들을 미친 듯이 춤추게 하는 바람, 그 바람을 타고 공기 중에 떠도는 수분과 소금, 씨앗과 꽃가루들, 알 수 없는 궤적으로 날아다니는 곤충과 새들. 잠시도 멈춤 없이 서로 얽혀서 작동하고 있을 생명의 기운들이 함께 떠오른다. 어지러운 들판의 모습이다. 섬의 자연은 이토록 정돈되지 않고 구분될 수 없는 형상이 되어 나에게 남겨졌다.
작품은 주로 밤을 배경으로 하고, 어두운 밤과 대조되는 밝은 노란색이 자주 등장한다. 나에게 낮은 시각 정보 과잉의 시간이다. 너무 밝은 낮의 하늘은 저 멀리 끝없이 펼쳐진 우주가 있다는 것을 자꾸 망각하게 만든다. 낮과 대비되는 밤은, 시각에게 자유를 주는 어둠의 공간이자, 시각 외 청각, 후각, 촉각 등 여러 가지 감각을 일깨울 수 있는 시간이다. 한편, 화면에 자주 쓰이는 레몬색과 유사한 밝은 노란색은 나에게 여러모로 이중성을 상징하는 색이다. 자연적이기도, 인공적이기도 한 색,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색. 생명의 싹 같기도 하고, 죽음의 흔적 같기도 한 색. 이 밝은 노란색으로 생명의 성장과 분해를 돕는 생동하는 에너지를 그리고자 했다.
밤처럼 검게 칠한 캔버스 앞에 서서 밤 들판을 떠올리면 나도 그 들판의 작은 생명들처럼 무질서한 에너지가 장착되어 정신없이 온몸이 분주해진다. 거대하고 기이한 생명의 기운을, 계획된 붓질과 추상적인 우연의 효과로 뒤섞어서 표현한다. 여러 색의 물감을 뿌리고 캔버스를 이리저리 돌리니 풀과 꽃들이 바람에 휘날려 아른거리듯, 색이 서로 뒤섞여 흘러내린다. 분주하게 왱왱거리는 수만 가지 벌레들과 공기 중에 떠다니며 행방이 묘연한 포자들은 캔버스 위에 노란색 물감 방울들이 되어 무질서하게 내려앉는다. 기싸움을 하며 서로 길들이기를 반복하는 말과 인간은 어느새 작은 입자로 분해되었다가 뒤엉켜 하나가 되어 스며든다.
밤의 어두운 들판과 대조되는 여러 색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자연의 모호한 실체를 무질서하고 신비롭게 만들어 줄 것으로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