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업노트
<<마주친, 얽혀있는 것들>>
2025 작업노트
고립된 우도라는 섬에서 말을 돌보며 지낸 시간은 동식물의 탄생과 성장, 죽음에 이르는 생의 전 과정을 가까이에서 압축적으로 마주하는 계기가 되었다. 자연과의 밀접한 체험은 단순한 관조를 넘어, 다양한 감각을 통해 자연의 순환성과 생명력, 그리고 그 이면에 작동하는 비가시적인 에너지에 대한 깊은 인식을 남겼다. 이러한 신비롭고 경이로운 자연의 에너지를 회화작업으로 표현해 왔다.
이번 전시에서는 작품의 소재를 말뿐만이 아니라, 말이 사는 초원에서 몇 년 동안 지켜봤던 자연의 다른 부분들로 확장하였다.
척박한 기후 속에서도 말이 살아가는 초원 아래, 절벽의 화산암은 웅장한 존재감으로 섬을 지탱하고 있다. 그 바위는 단지 지형의 일부일 뿐 아니라, 화산섬인 제주도의 형성과 시간의 축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기억의 매개체이기도 하다. 섬의 탄생을 가능케 만든 땅속의 용암은, 뜨겁고 유연하며 폭발적인 운동 에너지로 시끄러웠지만, 그것이 식어 굳어진 암석은 뜨거웠던 과거의 에너지를 가둔 채 침묵하는 존재이다.
그리고 땅속에 퍼져 네트워크를 이루는 균류는 그 시작점과 끝을 파악하기 힘들 정도로 넓고, 그러한 균류의 열매 격인 버섯은 말의 배설물에서도 어느 날 갑자기 솟아났다가 사라지거나, 집 안의 화분에서 갑자기 나타나는 등 돋아나는 시기나 위치 또한 불규칙하며, 종류는 다 파악하기 힘들 정도로 다양하고, 포자를 퍼트리는 방식 또한 불확정적이고 모호한 에너지들이다.
인간과 같은 포유류인 말의 생명 주기는 몇십 년으로, 대략 짐작할만하지만, 용암에서 시작된 바위는 인간이 상상하기 힘든 오랜 시간을 통해 지금의 형상을 만들었고, 버섯의 주기는 아쉬울 정도로 생각보다 짧다. 이처럼 이들 각각은 생명 주기마저 너무도 달라서, 얼핏 보면 아무런 상관없는 것들처럼 보이나, 그들은 각자 독자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서로 얽혀서 작동하는 생태의 순환에 맞물려 있다. 이러한 서로 얽혀있는 자연의 소재를 탐구하고, 그들의 생명을 유지시키는 신기한 비가시적 에너지를 형상화해서 회화로 담아보고자 했다.
수백만 년 전 용암이 솟아올라 굳어진 오름의 바위. 그 위에 풀이 덮여 초원이 되고, 그 풀을 먹이 삼는 말들이 뛰어놀고, 또 그 말들의 배설물을 영양분 삼아 식물과 군류가 퍼져 풀들이 자라고, 버섯이 생기고, 포자가 날리고, 흙 속의 화학성분을 만들고. 그 흙 속에 식물의 뿌리는 균열을 만들고 그 틈으로 바람과 빗물과 산성이 들어가 바위는 다시 침식되어 땅속 깊이 마그마로 돌아가고, 또 그 마그마가 솟아올라 다시 바위가 되는. 이런 억겁의 시간 동안을 쉼 없이 작동하게 만드는 순환 구조, 이렇게 보면 자연은 불필요함이 하나도 없는 아귀가 딱 맞는 톱니바퀴일지도 모른다. 이것을 가능케하는 에너지가 신기하고 경이롭다.
이처럼 자연을 관찰하고 공부하면서, 신비로운 생명의 에너지를 온몸으로 느끼고, <모든 존재와 현상은 서로 인연과 조건에 의존해서 생겨나고, 그 조건이 사라지면 함께 소멸한다>는 불교의 연기론을 실감하는 중이다.
<한때 뜨거웠던 기억> 시리즈에서는 현무암의 단단한 비정형의 형태와 대비되는 유동적인 용암을, 과거의 뜨거웠던 에너지로 보고, 질감과 색채대비를 통해, 하나의 존재가 시간에 따라 어떻게 변화하고, 충돌하며 상반된 상태를 품을 수 있는지를 환기시키고자 했다. 말과 버섯작품들은 비가시적인 자연의 경이로운 에너지를 물감의 강렬한 색채대비로 주목시키고, 내 몸이 감각했던 자연의 흐름, 리듬, 진동의 에너지를 따라가는 행위적 실험을, 물감을 뿌리고 흘리고 번지게 하는 행위로 치환하여 시각화하고자 했다. 이런 관점에서 캔버스는 단지 형상을 그리는 도구가 아니라, 그들 사이에 발생하는 에너지의 흔적을 기록하는 장소가 되고, 회화는 단지 ‘이미지’가 아니라 내 몸의 흔적이자 감각의 파동이 남긴 현상이 된다.
<<마주친, 얽혀있는 것들>>
전기숙 작업노트 추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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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작품에서 강한 대비-콘트라스트는 시선을 그림으로 끌어들이고, 또 그 안에서 낯선 차원으로 이끄는 방법에 효과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여기서 대비는 색상끼리의 대비도 있고, 표현 방법의 대비도 있습니다. 먼저 색상 대비를 보자면, 주로 밤처럼 느껴지는 어두운 배경이 있고, 화면의 중심부에 최소한의 익숙한 단서로서 형태가 묘사된 대상(말, 버섯, 유채꽃등)을, 비현실적인 빛의 밝기나 색상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모든 것이 잘 보이는 낮은, 눈앞의 현실만을 직시하게 만들고, 한없이 펼쳐진 우주에 떨궈진 우리는 작은 존재들이라는 것을 외면하게 만듭니다. 반면 밤처럼 보이는 어두움은 일상을 벗어나 우주의 세계가 있음을 상상하게 만드는 배경입니다. 또, 색이라는 것은 빛에 의해 가변적입니다. 태양 빛에서 벗어난 밤이라는 설정은 자유로운 빛을 상정하고, 그에 따라 색도 자유로울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합니다. 대상과 짝지어진 고유색이란 없고, 색도 빛에 따라 상대적이라는 전제가 저에게 있기에, 고유색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비가시적인 생동의 에너지를, 붓이 아닌, 물감을 뿌리고 흘리는 등 중력의 힘을 이용하여 표현합니다, 속도도 빨라지고, 즉흥적이며, 캔버스를 이동시키기 때문에 제 몸도 분주해집니다. 이런 우연적인 부분이 대상을 재현한 부분과도 섞여서, 예상치 못한 흔적으로 고착되기도 하고, 추상적인 효과를 만들어냅니다. 이런 변속과 리듬, 즉흥성이 뒤섞이는 와중에 이런저런 나의 에너지까지 그 속에 녹아드는 것을 느낍니다.
<유령버섯>-포자 드로잉시리즈를 하고 있습니다. 말을 돌보면서 겪었던 많은 일 중, 말의 배설물 위에 돋아난 버섯을 발견했던 일은 강렬한 기억으로 남았고, 어쩌면 그것이 현재 버섯 작업을 하도록 이끌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나중에 찾아보고 알게 되었는데 그 말똥버섯은 환각작용을 일으키고 신경계통을 해치는 독버섯이었습니다. 최근 다시 버섯을 관찰하기 위해 숲을 찾아다니고, 집에서 키워보기도 했습니다. 버섯을 식물로 착각하면서 가졌었던 선입견을 깨고, 동물도 식물도 아닌, 균류가 가진 특성에 대해 많은 것을 깨우치게 되었습니다. 사실 버섯에 관해 여러 가지 재밌는 부분들이 많지만, 번식을 위한 포자의 퍼트림 방식이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집에서 키우던 느타리버섯이 밤사이에 갓 아래 주름에서 조용히 뽀얀 포자를 퍼트려 흔적으로 남겼던 일을 계기로, 숲에서 발견한 이름 모를 버섯들을 채취해서 종이 위에 올리고, 포자가 남기는 흔적을 기록하는 드로잉을 했습니다. 뽀얀 포자는 다양한 색채로 표현되지는 않지만, 버섯의 실루엣을 예상할 수 있는 단서를 주고, 포자 알갱이가 두께로 쌓여서 종이 위에 남긴 요철과 농담은 생명의 실체이자 에너지의 흔적이었습니다.
여러 가지 상황들이 맞물리면서 화산암-바위 작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전시 준비 중 함께 전시하는 작가와 협업과정에게 제공받은 비정형 캔버스를 두고 뭘 그려야 할지 몇 달 동안 고민했습니다. 형태가 강한 그 캔버스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 텅 비어있는 중성적인 공간이라기보다는 이미 독립된 사물의 성질을 지닌 듯이 다가와서, 그 형태에 어울리게 그려질 대상을 찾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리고 전시 공간인 <갤러리레미콘>이 건물외부 바위를 그대로 노출시켜 벽으로 만든 것에 주목하여 그 바위 자체를 이용하여 용암을 연상시키는 작업을 계획하던 중, 캔버스의 비대칭적인 특이한 형태 그 자체를 이용해보자는 생각과 맞물리게 되었고, 보편적인 형태로 특정되지 않는 성질을 지닌 암석-돌과 흐르는 용암으로 제작하게 되었습니다.
화산암은 내가 우도에서 몇 년동안 말을 돌보던 초원 아래의 기암괴석이자, 제주에서 가장 흔한 소재이고, 몇 십만년 전, 제주의 시작을 만들어낸 화산 폭발의 흔적이자, 현재 모든 생명들의 삶의 터전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는 대단합니다.
돌은 그 형태가 제각각이어서 표면의 질감과 무게, 색상, 입자 등으로만 인식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형태를 빼고 질감과 색만으로 암석을 잘 표현하고자, 석재상을 돌아다니며 현무암가루를 구해오고, 직접 물감으로 제작하여 사용하였습니다. 현무암 가루와 미디엄 연구를 거쳐서 최대한 광택을 없애, 거칠고 메마른 느낌으로 암석을 표현하고, 유연하게 흐르는 듯한 강렬한 색상의 용암을 대비시켜 한 화면에서 서로 이질적으로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이를 통해 같은 성질의 물질이 시간과 압력, 온도 차이로 인해 달라진, 에너지의 변환을 연상시키고 싶었습니다.
또한 전시 공간인 <갤러리레미콘>이 바위를 그대로 노출시켜 벽으로 만든 것에 주목하여, 전시되었을 때 건물의 벽이 된 암석과 비정형 캔버스에 그려진 암석이 서로 마주할 수 있게 설치하고자 했습니다. 앞서 언급했던 ‘혼자 두는 바둑’처럼 이번 <한때 뜨거웠던 기억-다른 사용> 화산암 시리즈는, 주어진 전시 공간의 바위벽과 주어진 캔버스의 비정형의 태라는 각각의 두 번째 수를 활용하여 그다음을 이어간 셈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주술사의 밤>>
전기숙 개인전 /시각미술연구소 필승사 2024.12.13.~12.23
말이 된다
섬으로 이주하기 전 도시인이었던 나는, 제주도의 자연을 아마도 보호나 관조의 대상으로만 여겼던 것 같다.
하지만, 작업실을 제주도의 부속 섬인 우도로 옮기고 4년의 세월을 보냈다. 그 4년 동안 우연히 ‘말’이라는 동물과 만나서 친해지고, 말을 돌보는 말테우리가 되었다. 그들을 돌보면서 위험한 에피소드들도 많이 겪었고, 낯선 종의 몸짓과 언어도 이해하게 되었다. 빠른 속도와 힘찬 근육의 상징으로만 생각했던 말들의 본 모습을 알게 되었다. ‘말’은 인간의 필요에 의해 길들어진 야생 동물과 가축. 그 사이쯤에 있는 덩치 큰 동물이다. 나에게 말들은, 자유롭게 바람을 가르며 초원을 달리는 자유로움의 상징이자, 서열 싸움을 하면서 무리 생활에 적응해서 살아가야 하는 외롭고 연약한 존재이기도 하다. 또한 내가 지키고 돌보아야 할 자연이자, 어떻게 인간과 동물이 공생하면서 슬기롭게 살아갈 수 있을까하는 방법들을 고민하게 만드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제쳐두고서, 내 목소리를 알아듣고, 내 냄새를 기억하며 나를 반기는 말들을 바라보니, 어느새 말들은 다 내 새끼가 되었고, 나는 말들의 어미가 되었다. 내가 간 첫 해에 새로 태어났던 말들이 어른 말이 되기도 하고, 다른 목장으로 팔려 가거나 운명을 달리한 말들을 보면서 나는 몇 날 며칠을 울면서 지내기도 했다. 세상과 자연의 이치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무력감이 들 때도 있었지만, 그런 일들이 나를 더 단단한 사람이 되게 만들기도 했던 것 같다.
인간에게 길들여진 채로 진화되어, 야생에서 혼자의 힘으로는 더 이상 살아갈 수 없는 존재, 더 이상 함께하지 못하고 내 품에서 떠나보냈던 많은 말들을 떠올리며, 한 줌 흙으로 돌아간 말들이 다시 그 땅에 생명으로 피어나 풀이 되고 바람이 되어 흩날리는 상상을 해 본다. 그림과 기억속에서나마 그들에게 평온과 자유를 줄 수 있도록 하늘의 힘을 비는 주술사가 되어 본다.
밤의 감각
말은 나에게 자연을 상징하는 존재가 되었고, 말들을 돌보면서 돌아본 주변 생태계가 내 삶과 작업에도 큰 변화를 이끌었다.
말들의 보금자리가 되는 들판에서 식물들과 곤충들도 자주 관찰했다. 작은 벌레, 곰팡이, 미생물, 가축의 배설물 등 미시적인 자연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짙은 안개나 파도, 강한 비바람과 태풍 등 예측 불가능한 섬뜩한 자연 현상도 종종 겪었다. 아름답게만 바라보았던 상투적인 시선 너머로 따스함과 냉정함이 동시에 존재하는 생태계의 모습을 보았다. 거대하고 모호한 힘으로써 존재하는 자연을 발견한 것 같았다. 이런 과정들이 최근 작업의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올해 초, 우도와 작별하고 제주시로 거주지를 옮겼다. 계절의 흐름 속에 변화하는 우도 들판의 생명력을 한순간에 섞어서 떠올리며, 눈에 보이지 않는 에너지의 상상을 더해 회화 작업을 한다. 네 발로 땅 위에 서서 당당히 바람을 맞서며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을 내 자식 같은 말들, 그들의 배설물을 마법처럼 짧은 시간 동안 분해하는 미생물들, 그것을 양분으로 삼아 땅에서 훌쩍 솟아오르는 풀과 꽃들, 자라난 풀들을 미친 듯이 춤추게 하는 바람, 그 바람을 타고 공기 중에 떠도는 수분과 소금, 씨앗과 꽃가루들, 알 수 없는 궤적으로 날아다니는 곤충과 새들. 잠시도 멈춤 없이 서로 얽혀서 작동하고 있을 생명의 기운들이 함께 떠오른다. 어지러운 들판의 모습이다. 섬의 자연은 이토록 정돈되지 않고 구분될 수 없는 형상이 되어 나에게 남겨졌다.
작품은 주로 밤을 배경으로 하고, 어두운 밤과 대조되는 밝은 노란색이 자주 등장한다. 나에게 낮은 시각 정보 과잉의 시간이다. 너무 밝은 낮의 하늘은 저 멀리 끝없이 펼쳐진 우주가 있다는 것을 자꾸 망각하게 만든다. 낮과 대비되는 밤은, 시각에게 자유를 주는 어둠의 공간이자, 시각 외 청각, 후각, 촉각 등 여러 가지 감각을 일깨울 수 있는 시간이다. 한편, 화면에 자주 쓰이는 레몬색과 유사한 밝은 노란색은 나에게 여러모로 이중성을 상징하는 색이다. 자연적이기도, 인공적이기도 한 색,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색. 생명의 싹 같기도 하고, 죽음의 흔적 같기도 한 색. 이 밝은 노란색으로 생명의 성장과 분해를 돕는 생동하는 에너지를 그리고자 했다.
밤처럼 검게 칠한 캔버스 앞에 서서 밤 들판을 떠올리면 나도 그 들판의 작은 생명들처럼 무질서한 에너지가 장착되어 정신없이 온몸이 분주해진다. 거대하고 기이한 생명의 기운을, 계획된 붓질과 추상적인 우연의 효과로 뒤섞어서 표현한다. 여러 색의 물감을 뿌리고 캔버스를 이리저리 돌리니 풀과 꽃들이 바람에 휘날려 아른거리듯, 색이 서로 뒤섞여 흘러내린다. 분주하게 왱왱거리는 수만 가지 벌레들과 공기 중에 떠다니며 행방이 묘연한 포자들은 캔버스 위에 노란색 물감 방울들이 되어 무질서하게 내려앉는다. 기싸움을 하며 서로 길들이기를 반복하는 말과 인간은 어느새 작은 입자로 분해되었다가 뒤엉켜 하나가 되어 스며든다.
밤의 어두운 들판과 대조되는 여러 색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자연의 모호한 실체를 무질서하고 신비롭게 만들어 줄 것으로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