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9/ 전기숙 작가_평론

 

존재론적 지도로서의 회화, 얽힘의 사유와 울림

 

권주희(스튜디오126 대표/독립기획자)

 

섬은 고립된 시간 안에서 그만의 속도로 세계를 응축시킨다. 전기숙 작가가 다년간 머무른 우도와 제주에서의 경험은 생명의 질서를 압축적으로 관찰하는 계기가 되었다. 말의 탄생과 성장, 소멸을 지켜보는 일상은 결국 한 존재의 생애를 넘어서,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관계망으로까지 시선을 확장하게 한다.

 

말이 풀을 뜯고, 풀은 바위 위의 흙에서 자라며, 말의 배설물은 다시 균류와 버섯의 영양분이 된다. 버섯은 짧은 생을 살아내며 포자를 흩뿌리고, 그 포자가 흙의 화학 성분을 변화시켜 다시 풀의 뿌리를 돕는다. 그 모든 과정을 지탱하는 바위는 수백만 년 전 용암이 솟구쳐 굳어 만들어낸 지질학적 시간의 흔적이다. 이처럼 서로 다른 생명 주기가 얽히며 만들어내는 생태적 순환 속에서, 작가는 “모든 존재가 서로 의존하며 생겨나고, 조건이 사라지면 소멸한다.”는 불교 연기론의 통찰을 실감한다.

 

이번 전시의 중심에는 바로 이 ‘얽힘’의 감각이 놓여있다. 겉으로는 무관해 보이는 존재들이 사실은 보이지 않는 에너지의 흐름을 통해 서로 맞물려 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그리고 그 흐름은 결코 하나의 직선이 아니라, 장구한 것과 순간적인 것, 거대한 것과 미세한 것이 끊임없이 교차하며 만들어내는 순환 구조다.

 

<한때 뜨거웠던 기억> 연작은 이러한 순환의 시간성을 탁월하게 묘사한다. 단단하게 굳어버린 현무암의 거친 표면과, 뜨겁고 유동적인 용암의 흔적을 대비시키는 화면은, 하나의 존재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서로 다른 상태를 품을 수 있음을 의미한다. 뜨거움과 차가움, 운동과 정지, 격렬함과 침묵이 같은 뿌리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은 역설적이지만, 바로 그 모순적 공존이 자연의 질서이기도 하다.

 

이에 더해, 비정형 캔버스 작업은 주어진 조건을 새로운 창작의 출발점으로 삼는 흥미로운 실험이다. 이미 독립적 형태를 가진 캔버스는 더 이상 중립적 바탕이 아니라, 하나의 사물처럼 작가를 압도했다. 이에 대해 작가는 비대칭적 형태를 돌과 용암이라는 주제로 연결하며, 형상과 물질, 시간의 층위를 담아낸다. 특히 현무암 가루를 직접 물감과 혼합한 방식은, 작품이 단지 이미지를 담는 평면이 아니라, 물질 그 자체의 질감을 환기하는 장치로 작동한다. 메마르고 거친 바위의 질감과 유연하게 흐르는 용암의 색채가 한 화면에 공존하는 모습은, 동일한 물질이 시간과 압력, 온도의 차이에 따라 전혀 다른 상태로 변환된다는 사실을 생생히 드러낸다.

 

그 밖에도 말과 버섯은 작업의 주된 모티프로 등장한다. 여기서 작가는 자연을 단순히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이 품은 보이지 않는 힘을 색채와 행위로 번역한다. 강렬하게 대비되는 색채는 생명의 맥박을 시각화하고, 물감을 흘리고 번지게 하는 행위는 자연의 리듬과 진동을 몸으로 따라가는 실험이 된다. 따라서 화면은 단순히 ‘이미지’를 담는 평면이 아니라, 감각의 파동이 기록되는 현장이자, 에너지가 흔적으로 남는 장(場)으로 전환된다.

 

이러한 회화적 시도에서 중요한 것은 작가의 신체를 매개로 한다는 점이다. 관찰된 자연의 리듬은 단순히 눈으로 본 풍경이 아니라, 몸을 통해 체화된 경험으로 다시 그려진다. 회화의 제스처, 색의 겹침, 물감의 흔적 속에는 자연과 마주한 신체의 감각이 배어 있다. 회화는 자연을 ‘재현’하는 수단을 넘어, 자연과 몸이 교차하며 만들어내는 파동을 기록하는 또 하나의 생명체처럼 작동한다.

 

<유령버섯-포자 드로잉> 시리즈는 이와 같은 태도를 가장 극적으로 드러낸다. 버섯은 단순히 식물도, 동물도 아닌 제3의 존재로서, 생태적 경계와 인식의 관습을 흔든다. 특히 포자가 남긴 흔적을 기록하는 드로잉은, 눈에 보이지 않는 생명의 흔적을 물질적으로 환원하는 동시에, 시간의 층위를 압축한다. 종이 위에 쌓인 뽀얀 입자들은 생명의 미세한 에너지이자, 동시에 우연히 남겨진 조형적 흔적이다. 이 드로잉은 ‘버섯을 재현하는 그림’이 아니라, 버섯 그 자체의 작동 방식이 남긴 자취이며, 작가가 직접 개입하지 않아도 완결되는 또 하나의 예술 행위라 할 수 있다.

 

결국 전기숙 작가는 단순한 자연주의적 관찰에서 벗어나, 섬이라는 공간이 품은 다층적 시간과 생명의 얽힘을 회화로 풀어낸다. 지질학적 시간과 생태적 시간, 그리고 그의 신체적 시간이 한 화면 위에서 충돌하고 공존한다. 관객은 그 흔적을 따라가며, 눈에 보이지 않던 생명의 질서와 에너지의 울림에 귀 기울이게 된다. 화면 위에서 서로 마주치고 얽혀드는 생명들의 흔적은 우리가 속한 세계가 본질적으로 상호의존적이며, 보이지 않는 에너지의 장 위에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한다.

 

최근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는 생태 미학의 관점에서 예술가들은 자연을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인간과 동등하게 발언하는 존재’로 다루고 있다. 이러한 사유는 오늘날 환경 위기의 시대적 맥락에서 더욱 깊은 울림을 갖는다. 기후변화와 생태 파괴가 가속화되는 현실 속에서 작가는 자연의 내적 에너지를 직접 회화로 끌어와 관객에게 다시 환원한다. 그의 화면은 위기와 소멸을 말하기보다, 아직 남아 있는 순환의 가능성과 관계의 연대성을 보여준다.

 

이 지점에서 작가의 회화는 ‘풍경화’의 범주에만 가두기 어렵다. 특정 풍경을 재현하거나 기록하는 회화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관계와 시간을 드러내는 ‘존재론적 지도’에 가깝다. 말과 초원, 돌과 버섯은 단순히 병치된 대상이 아니라, 서로를 매개하며 순환을 이루는 동심원적 구조로 나타난다. 그 위에서 자연은 ‘객체’가 아닌 ‘주체적 힘’으로 자리하며, 인간과 비인간, 동물과 식물, 생과 사의 경계는 느슨해진다.

 

전기숙의 작품을 마주할 때, 익숙한 풍경을 닮았다고 생각하다가도 화면에 뒤엉킨 색과 질감 속에서 마치 땅속을 파고들거나 공기 속으로 흩어지는 듯한 몰입을 경험한다. 이는 단순한 시각적 감상이 아니라, 몸과 감각 전체가 작품과 맞닿는 생태적 체험에 가깝다. 작품은 특정 섬의 기록을 넘어, 인간과 세계가 서로에게 의지하며 살아가는 보편적 서사에 대해 화답하는 것 같다. 작가의 회화는 오늘의 미술이 나아가야 할 생태적, 존재론적 길 위에 조용히 놓여있다.







2024.12/ 전기숙 작가_평론


고요하고 시끄러운 밤

 

 

김지혜(미학)

 

 

이 세상엔 인간의 감각으로 포착할 수 없는 것이 너무도 많다. 인간은 기껏 400에서 700나노미터 사이의 빛을 감지할 수 있고, 20에서 20,000헤르츠의 주파수만 들을 수 있다. 하지만 때때로 우리는 이 세계의 모든 것을 감각하고 지각하고 이해할 수 있다는 착각을 한다. 전기숙은 2008년부터 서울에서 활동하다가 2020년 우도 창작스튜디오에 입주하면서 제주에서 작업을 지속해오고 있다. 초기 작업에서 - 인간 외 다른 생명체들의 감각에 초점을 맞추면서 - 곤충의 겹눈으로 외부 세계를 관찰하고 다 시점으로 분할된 장면을 표현하였던 작가는 우도에 거주하면서 다른 감각과 관계성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전기숙은 우도에서 그림만 그리지 않았다. 말들을 돌보기도 하였고, 어둡고 고요한 밤에는 섬과 유채밭에서 일어나는 시끌벅적하고 은밀한 사건들을 관찰하기도 하였다. 작가에게 낮은 과도하게 많은 시각 정보가 유입되면서 눈앞의 현실을 직시하도록 강조하는 시간이었고, 밤은 우도의 방문객들이 돌아가 드디어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던 것에 오롯이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작가가 관찰하였던, 인간의 시각과 청각의 범위를 벗어난, 그 시공간에서는 미생물부터 크고 작은 벌레, 여러 종의 동물과 식물들이 생존하기 위해 치열한 전쟁을 시끌벅적하게 벌이고 있었고, 태어나고 죽고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는 과정을 바쁘게 반복하고 있었다. 말 그대로 삼라만상이 거미줄로 얽히고설켜 있었다. 이러한 관찰의 과정에 참여하면서 작가에게 우도의 밤은 온갖 존재들이 서로 다른 생명력을 발산하며 혼돈의 축제를 벌이는 몽환적이고 환상적인 시간이 되었다.

많은 화가가 빛이 영글어낸 색채를 화폭 위에 발산하는 작업을 하지만, 전기숙은 빛이 부재하는 시간에 스스로 빛을 토해내는 것들이 발산하는 색채를 캔버스에 얹는 작업을 한다. 따라서 그 색은 총천연색이라기보다는 탄생의 축포와 죽음의 공포를 함께 의미하는 환하고 밝지만 차갑고 냉정한 노란색으로 표현되곤 한다. 전기숙 작가는 유년기에 콘크리트 위 빗물 웅덩이에 떠 있던 유독 환한 노란색 가루를 보았던 일화를 말하면서, 그것이 송진이라는 사실을 알기 전까지 화력발전소에서 뿜어내는 유독물질로 오해하였다고 하였다. 그때부터 작가에게 노란색은 자연과 인공, 종족 보존과 생명 그리고 죽음 사이를 오가는 전령의 빛이 된 듯하다. 그리고 전기숙의 작품들에서 배경에 등장하는 광채들은 상대적으로 다른 시간성을 지니면서, 산란하여 엉겨 붙었다 떨어지고 다시 부둥켜안기를 반복한다. 작가는 이러한 색채들의 관계성을 드러내기 위해 캔버스라는 미디엄을 신체의 일부처럼 활용한다. 그의 캔버스는 바닥에 눕기도 하고 비스듬히 벽에 기대어 서 있기도 하며, 방향을 바꾸어 요리조리 움직이기도 한다. 그리고 그 위에서 물감들은 두껍게 쌓이기도 하고, 여러 방향으로 번지거나 흐르기도 한다.

전기숙의 제주 작업에서 빠질 수 없는 중요한 모티브는 말(馬)일 것이다. 작가는 말을 보살피게 되면서, 그들에게 서로 다른 이름을 붙여주었고, 각기 다른 방식으로 대하였다. 이름을 붙여주는 것은 인식하는 것이고 특별한 존재로 여긴다는 것이다. 고로 작가에게 그들은 서로 다른 개체이자 대상이 되었다. 먹이를 주고 돌보는 일이 버겁고 힘들 때도 있었지만, 그때마다 작가는 그들과 자신의 인연에 대해 생각해보곤 했다고 한다. 이처럼 각별한 관계에 있는 말들이 작품에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흥미로운 점은 우도에서 그린 그림의 표면은 매끄럽게 처리되었지만, 우도를 떠나 제주시로 와서 그린 말 그림은 배경이 매우 거칠게 표현되면서 반구상으로 변화한 듯 보인다는 것이다. 물리적으로 가까이 있을 때는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그 독특한 생명체와의 관계에서 생성되었던 감정과 그리움이 폭발하기라도 하는 듯 말이다. 작가는 자신이 말을 돌보고 길들였던 것이 아니라, 말 역시 자신을 길들여주고 있었다고 말한다. 승마와 경마에 활용되기에 부족하거나 쓸모를 다한 말들은 관광지로 가 사람들을 맞는다. 인간의 관점에서 때때로 그들의 삶이 가엽고 안타깝게 다가오지만, 그 역시 인간이 이 세계의 모든 것을 감각하고 지각하고 이해할 수 있다는 착각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모든 관계는 누구 하나의 노력으로 맺어지는 것도 아니고 영원한 기쁨과 찬란함을 보장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거리를 두고 다시 바라볼 때, 고통과 상처로 점철되어있는 그것은 살아있음의 증거가 되기도 하고 아이러니하게도 살아가야 할 이유가 되기도 한다. 전기숙은 “인간은 세계의 작은 부분”이라는 기준을 가지고 세상을 관찰하고 대상을 바라본다. 그리고 집중하고 사유하고 해석하고 연구하면서 그것들을 그린다. 나는 작가 전기숙이 오랫동안 작업을 할 수 있는 원천이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언제나 자신의 관점이 균형적인지 고민하고, 대상을 바라보는 자세를 가다듬으며, 거시적인 풍경과 미시적 사건을 오가며 관찰하는 일을 소홀히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2024.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