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켄슈타인 원작을 읽은 것은 고등학생 때였다. 사실 그 전에 훨씬 어릴 적에 세계 명작이랍시고 권장도서로 처음 접했었는데 그때는 그 내용의 깊이를 전혀 알지 못했었다. 하지만 고등학교 때에 다시 읽었을 때에는 그 안에 담긴 철학과 사상들이 너무나 흥미롭게 다가왔었다. 그래서 프랑켄슈타인은 나에게 매우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었기에, 이번 연극도 보기 전부터 기대가 컸었다.
연극의 첫인상은 원작과 비슷하게 음침하고 무엇인가 기괴했다. 시작부터 비바람이 몰아치고 빅터가 창조물을 실험하는 장면으로 강렬하게 막을 열었다. 약간의 각색이 이루어진 듯했지만, 전체 적인 흐름은 빅터와 창조물의 대립을 가지고 그 안에 양측간 각자의 고뇌를 담으며 원작과 비슷하게 흘러갔다. 다만 다른 점이 있었다면, 등장인물들이 조금 달랐다. 이 부분이 이 프랑켄슈타인의 흥미로운 점들 중 하나였던 것 같다. 시인 바이런이 등장하고, 원작자 메리 셸리도 등장하는 등 실존의 인물들을 넣고 그 인물의 성격까지 투영시켜 그 인물들을 아는 사람이라면, 이 연극을 더욱 흥미롭게 봤을 것이 분명했다.
다만 한가지 아쉬운 점이 있었다. 바이런은 등장할 때마다 계속해서 시를 읊고, 장황한 말들을 던지는데, 그 대사들이 시인이었다는 바이런과 그 인물의 성격과 특징을 보여주기에는 적절했으나, 그 양이 너무나 많아서, 게다가 그 대사들 자체가 철학적이고 운문이라, 모든 것을 다 받아들 이기에 관객의 입장으로서 부담스러웠던 것 같다. 게다가 무대에 혼자 올라 조용히 독백을 하는 것도 아닌 다른 급박한 상황이 동시에 진행되면서 커다란 음향들이 들이 터져나오는 상황에서 그 러한 대사들이 쏟아져 나와, 그럴 때에는 크게 집중하기 힘들었던 것 같다. 물론 배우의 대사를 모두 다 가져가야 할 필요는 없지만, 그런 것 하나하나 놓치고 싶지 않았던 나에게는 약간 부담으로 다가왔던 것은 사실이었던 것 같다.
그 외에는 전체적인 흐름, 각자의 고뇌를 잘 보여줬고, 특히나 제한된 러닝타임 안에 창조물이 고뇌하면서 이룬 성장과정을 잘 보여줬다. 또 인상 깊었던 것은 빅터의 고뇌 속에 인간으로서 신처럼 이렇게 살아 움직이는 최초의 창조물을 만들었다는 자부심 또는 자만감과, 자신이 만든 창조물이지만 제어 불가이고 많은 살인을 저지르고 자신까지 위협하여 느껴지는 자괴감, 위기감 등 서로 상충되는 마음들의 공존으로 인하여 결국 타락하는 미치광이 과학자 모습이 잘 드러났다.
그리고 또 하나 연극을 본 뒤에 계속해서 내 머리 속에 남았던 대사가 있었는데, 창조물이 빅터에게 성선설과 성악설을 논하던 중 자신은 아무것도 아닌 무의 상태라고 주장했던 것이 기억났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나도 계속해서 고민을 해왔었다. 그런데 만약 창조물의 주장대로 무의 상태라면 나는 오히려 그것이 선에 가까운 개념이라고 생각한다. 무라는 것은 말 그대로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상태,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깨끗한 상태일 것이고, 그렇다면 결국 선의 개념으로 생각된다. 그래서 나의 생각이 성선설로 결정된 것은 아니지만, 창조물의 주장대로 라면 인간은 성선설에 가깝지 않을까?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이러한 주장을 펼친 대상이 창조물이기 때문에 논란의 여지가 있을 듯 하긴 하다. 왜냐하면 그는 창조되자마자 사람들을 죽였고, 그것은 이 사회가 규정하기엔 불법이고 악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 그는 악을 행한 것인가? 라고 물을 때 그의 주장에 따라 내린 결론으로 답한다면 아니라고 하고싶다. 단순하게 그는 불법을 저지르고 인명피해를 끼쳤지만, 그는 그것이 잘못된 것인지 전혀 몰랐고 알 길이 없었다. 태어난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누가 그걸 알려주지도 학습시켜주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잘못된 것 인걸 알고도 행했다면 그것은 명백한 악이지만 그러한 경우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불법과 악은 비슷한 듯 하지만 구분해 보아야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불법적인 것들은 어디까지나 인간 들이 사회에서 불이익이 되는 것들을 규정하여 정한 것들이기 때문에 그것이 언제나 반드시 악으로 귀결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렇기에 창조물의 살인은 명백한 불법이지만 악을 행함으로 따져본다면 또 다른 얘기가 되는 것 같다.
이러한 생각들로 빠져들다 보니 창조물의 연기를 펼친 배우분께서 너무나 대단해 보였다. 위대한 철학자들이나 학자들도 쉽사리 결론내지 못한 이런 원초적인 문제를 가지고 그것을 자신의 생각으로 분석하여 연기로 녹여내는 일은 분명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 멋지고 훌륭한 연기를 펼쳐주셨다.
확실히 이 연극은 원작도 그렇고 심오하고 철학적인 내용들을 다루고 있고, 분위기 자체도 밝거나 가볍지 않고 음침하고 기괴하기 때문에, 프랑켄슈타인이라는 내용을 처음 접하거나 연극 초심자들은 접하기 어렵고 부담이 느껴지는 작품인 것 같긴 하다. 하지만 난이도는 있으나 원초적인 질문을 내던지고, 관객들 스스로 문제에 대해 사고하게 하는 것이 분명 품격있는 작품이고, 내용, 인물, 철학이나, 작품에 대하여 알면 알수록 더욱 흥미롭게 느껴지고 재밌는 연극임에는 틀림없다.
김성인 (경성대학교)
극작가를 꿈꾸고 있는 학생입니다. 『프랑켄슈타인』은 제게 극작가라는 꿈을 처음 불어넣어준 작품이라 여러모로 감회가 새롭습니다.
먼저, 원작 소설은 극지방에서 탐험을 하던 월터가 조난당한 빅터를 구출하며, 빅터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누나에게 편지로 보내는 극중극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본 연극도 원작처럼 극중극 형식으로 연출되었습니다. 『프랑켄슈타인』이 탄생했던 배경을 극 중 상황으로 각색하고, 바이런의 주치의 폴리도리를 빅터로 설정한 것이 흥미로웠습니다. 각종 생체실험과 연구로 박식해진 빅터가 의사(박사) 학위는 없어도 바이런의 몸 상태를 잘 파악한다는 설정도 설득력 있게 다가왔습니다.
메리가 경찰의 수사를 받으며 사건을 회상하는 장면과 소설을 집필하는 장면은 계속해서 소설과 현실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듭니다. 관객은 극 중 사건이 소설 속 이야기인지, 메리가 미래를 예지한 것인지 점점 구분할 수 없게 되며 두 사건을 하나로 인지하게 됩니다.
또한, 메리가 작성한 소설이 빅터에게 생명 창조의 영감을 주게 되는데, 이는 크리처의 탄생으로 이어져 남편과 친구들을 잃게 되는 비극적 결말을 낳습니다. 이에 충격을 받은 메리가 소설을 원안 그대로 비극적으로 끝냄과 동시에 막이 내리게 됩니다. 이처럼 철저하게 극중극을 지킴으로써 작품에 통일감이 생겨나 끝까지 작품에 깊게 몰입할 수 있었습니다.
바이런은 짙은 다크서클을 가진 인물로 등장하는데, 현실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작 중 배경이 되는 괴담 만들기 때 바이런은 『조각』이라는 짧은 미완성 글을 씁니다. 바이런에게 실망을 하고 있던 주치의 폴리도리는 이야기의 플롯을 듣고 바이런을 돌려 까기 위해 그의 플롯을 가져다가 몰래 소설을 쓰게 되는데, 그 소설이 바로 『뱀파이어』입니다. 소설의 주인공인 루스벤은 ‘창백하고 잘생겼다’고 묘사되었는데, 루스벤의 모델이 바이런이었기 때문에 소설에서 모티브를 얻어온 게 아닐까 하는 추측을 해보았습니다.
여섯 살 무렵 인간이 모두 죽는다는 걸 알게 되자 사랑하는 어머니 품에 안겨 죽음을 두려워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래서 그런지 시시포스 신화가 많이 생각났습니다.
갓 태어난 크리처는 자신이 누구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어떤 삶을 살 것인지 끊임없이 고찰한 뒤, 빅터에게 말합니다. 제멋대로 자신을 창조해 원하지도 않은 고통을 겪게 한 것은, 빅터가 다른 것을 보지 못하고 신이 되고픈 욕망에만 사로잡혀 버렸기 때문이라고.
인간은 언젠가 모두 죽는다는 사실은 모든 삶을 무의미하게 만들기에 충분합니다. 시시포스 신화에서 삶이란 신이 내린 형벌이며, 죽음으로 고통의 굴레에서 해방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무의미하고 무기력한 삶을 살아가는 것에 반감을 갖고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자신의 삶이 유의미하길 바라는 욕망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빅터의 행위가 정당하였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유의미한 존재가 되기 위한 인간의 처절한 발악이 느껴져 어느 순간 마음 한편으로 그를 응원하게 되었습니다. 의미를 갖기 위한 발악. 그것이 삶이라면, 인간은 살아가며 괴물과 천사, 혹은 그것과도 다른 무언가를 만들어 자신을 증명하게 됩니다. 삶이 나아가는 방향을 정하는 것은 오롯이 자신의 손에 달려있습니다. 삶은 죽는 순간까지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기 때문에 살아간다는 건 삶을 채우는 일과 같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무의미한 삶을 벗어나기 위해 삶을 살아가지만, 죽는 순간 삶이 가득 차게 되며 비로소 우리의 삶이 유의미한 것으로 변하게 됩니다.
삶이 재미있고 행복할 수 있는 이유는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를 죽는 순간까지 모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빅터는 누구보다 이지적이지만, 실험에 빠져들 때면 눈빛과 행동이 몹시 과격해집니다. 그런 빅터에게서 태어난 크리처가 어느 정도 공격적인 성향을 띠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 같기도 합니다. 빅터가 광기에 휩싸이는 과정이 일관적으로, 점진적으로 잘 드러나서 정말 좋았습니다. 특히 광기에 빠져있을 때의 연기는 정말 미쳐버린 것 같다는 생각에 이따금씩 소름이 끼치곤 했습니다. 덕분에 즐거운 시간이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세상의 모든 일에는 어둠이 있으면 빛도 있습니다. 집시몽키는 자칫 어둡게만 흘러갈 수 있는 극의 분위기를 환기시켜줌과 동시에 극 자체의 재미를 크게 높이는 역할을 충실히 해냈습니다. 음악을 통해 인생의 즐거움(樂)을 배우는 크리처는 누구보다 순수하게 보였습니다. 그래서인지 그가 죽었을 때 크리처가 느꼈던 분노를 납득하고 함께 느낄 수 있었습니다. 프랑켄슈타인의, 세상의 빛이 되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세상의 편견과 손가락질을 감내하고 사랑을 택한 메리는 사랑의 결정체인 아이를 유산하고, 사랑하는 친구, 의붓자매, 남편까지 모조리 잃었습니다. 그 상태에서 살인사건의 목격자로 심문을 받는 절망적 상태에 놓입니다. 모두 깊은 감정선을 갖고 있는 이번 프랑켄슈타인 인물들 중에서도 메리는 가장 표현하기 어려우면서도 다치기 쉬운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관객을 설득시킬 만큼 캐릭터에 감정을 이입하는 일이 결코 쉽지 않았을 텐데 정말 좋은 연기를 보여주셔서 감사합니다. 특히 마지막에 소설을 집필하며 독백하는 장면은 메리의 고통을 간접적으로나마 느낄 수 있어 좋았습니다.
크리처가 처음 등장해서 A-D-A-M이라는 대사를 했을 때, 온 몸에 소름이 끼쳤습니다. 누더기처럼 덧붙어 비틀어진 턱에서 줄줄 새는 발음은 어딘가 뒤틀린 크리처의 내면을 연상시키는 것 같았습니다. 또한 말을 능숙하게 할 수 있게 되었을 때도 발음은 여전히 새어나갔지만, 말은 전혀 뭉개지지 않고 또렷하게 잘 들려 관람에 전혀 불편함이 없었습니다. 정말 오랜 시간을 들여 연습을 하셨다는 게 느껴져서 관람하는 내내 기분이 좋았습니다.
제 체력과 일정이 허락하지 않아 모든 분들을 언급하지 못했지만, 연극에 참여하신 모든 분들에게 좋은 연극을 만들어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날이 갑자기 추워졌는데 감기 조심하시고 다들 행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또 다른 작품에서 뵙기를 고대하고 있겠습니다. :)
(익명의 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