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일 (@Tidal_wave_0)
수현은 억울했다. 유적에 진입할 때부터 탐사를 빠르게 끝내자는 생각뿐이었고 머리에서 시키는대로 충실하게 움직였다. 그러나 그의 행동은 잠뜰과 덕개가 의심을 품을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쟤 왜 자꾸 혼자 다녀? 설마 우릴 배신하고 혼자서 탈출하려는 건 아니겠지? 잠뜰과 덕개가 지나가듯 흘린 말에 수현은 쓰게 웃었다. 본의 아니게 동료들 사이에서 악역이 되어버린 그는 탈출할 방법이 있다면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혼자 나갈까 하는 생각을 잠시 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동료들의 의심이 짙어질수록 그러지 않겠다고, 그래선 안 된다고 마음을 잡았다.
해명하려 할수록 깊어지는 의심에 자연스럽게 혼자가 된 수현은 3층 작은 틈새를 통해 구조요청을 보냈다. 그 결과 다행히 라더와 접선할 수 있었고 점점 희망이 생겼다. 이대로 잠뜰과 덕개에게 알려 오해를 풀고 세 사람이 함께 탈출하고 말 것이라는 달콤한 상상을 했다. 그 말을 듣기 전까지는 말이다.
'구조요청 너 혼자 살려고 보낸 거잖아.'
그 말을 듣자마자 수현은 머리를 한 대 맞기라도 한 것처럼 멍해졌다. 동료들이 자신을 의심한다는 건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이렇게까지 믿음이 사라졌을 거라곤 생각조차 못 한 터였다. 고작 이 정도에 깨져버릴 신뢰였던가. 마음이 상해 버린 수현은 유물을 가지고 혼자 탈출해버릴까 하는 나쁜 마음을 먹었다가 금세 고개를 내저으며 다시 한번 심호흡을 했다.
늘 자신의 신변과 목숨이 최우선이었지만, 그간 함께 해온 동료들을 등질 만큼 잔인한 성정은 가지지 못한 수현이었다. 라더는 어째서 모두를 구해주지 않은 걸까. 왜 모두가 탈출할 수는 없지? 깊은 고뇌에 빠진 채로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유물이 있던 방에서 나오는 덕개를 마주쳤다. 뭐 찾은 거 있냐고 가볍게 물었지만 돌아오는 건 싸늘한 무시였다. 입안에 괜히 쓴맛이 맴돌았다. 그러다 문득 대화 도중에 꺼낸 유물 이야기에 라더가 보였던 표정이 떠올랐다. 사실 평소에도 수현은 라더를 주시하고 있었다. 라더는 끓어오르는 욕망을 속에 감추고 선함을 얼굴에 쓴 자신과는 확연히 다른 사람이었다. 그가 미심쩍다는 걸 눈치챘으면서도 가볍게 넘긴 잠뜰이나, 남들보다 조금 더 뛰어난 감을 가진 덕개도 상상하지 못한. 수현의 눈에 비친 라더는 원하는 것을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얻어낼 그야말로 거친 성정을 가진 인물이었다.
생각을 이어나갈수록 답은 명확해졌다. 여기서 유물을 들고 라더에게 간다면 탈출은 하겠지만 실적을 쌓는데 안달 난 라더에게 유물을 빼앗기고 말 거란 걸. 그 후에 제가 어떻게 될 것인지도 뻔했다. 틀림없이 라더 그 아이의 손에 죽고 말겠지. 볼수록 영악한 사람이야. 명쾌하게 답을 내린 후, 수현은 자신의 동료들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이 유적에 진입할 때 떨어진 바로 그곳으로.
두 사람에게 다가가자 곧바로 차가운 시선이 그를 맞이했다. 내가 어쩌다 이런 처지가 되었을까. 수현은 호흡을 가다듬고 차분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다들 우리가 여기 보내진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 협회에서 왜 그 많고 많은 동료들 중에 우리가 선택되었을까. 덕개 네가 발견한 그 방. 바로 그곳이 증거야. 앞서 이곳에 유적 탐사를 왔던 우리의 동료들. 여기까지 들었는데도 이해가 안 돼?"
고요하기만 했던 눈동자에 그제야 파문이 일었다. 그런 두 사람을 보며 수현은 나지막이 다음 말을 내뱉었다.
"협회에선 탐사라는 명목으로 눈엣가시인 사람들을 제거한 거라고. 그러니까 여기서 우린 서로 의심을 할 게 아니라 힘을 합쳐서 다 같이 살아 돌아갈 방법을 찾아야 해. 그게 우선이야. 그렇지 않으면 협회가 바라던 대로 해골들 사이에서 조용히 잊겠지."
인상을 찌푸린 덕개와 달리 잠뜰은 무언가 할 말이 있어 보였다.
"그리고 이건 심증만 있는 거라 너희가 믿을지 모르겠지만 내 생각엔 라더도 협회와 한통속인 것 같아. 안 그래 보여도 욕심이 많거든. 만약 내가 너희의 말대로 혼자 유물을 챙겨 그와 손을 잡았다면 그 녀석은 날 죽이고 내 자리를 차지할 거야. 실적과 권력에 사족을 못 쓰는 녀석이니까."
잠뜰이 입을 열기 전에 수현이 덧붙여 말했다. 평온한 상태를 유지하며 말을 마친 수현은 어딘가 후련한 마음이 들었다. 그럼 이제 뭘 해야 해? 여기서 셋 모두가 어떻게 나갈 건데? 옆에서 묵묵히 듣고 있던 덕개가 일그러진 얼굴로 말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수현 또한 아무 말도 할 수 없어 그저 막막한 얼굴로 고민에 빠질 때쯤 옆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거라면 방법이 있긴 한데... 나한테 왕의 저서라는 책이 있거든. 뒷장을 보니까 이 방법을 이용해서 탈출하기 위해서는 두 명 이상의 사람이 필요하다고 적혀있었어."
잠뜰은 순순히 자신의 정보를 털어놓았지만 여전히 미심쩍다는 얼굴이었다. 반면 풀이 죽은 얼굴로 바닥만 보고 있었던 덕개의 얼굴은 빛을 찾은 것처럼 환해졌다. 수현도 가벼운 미소를 띠며 덕개와 잠뜰을 바라보았다. 잠뜰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앞장서서 길을 걷기 시작했다.
씨앗을 심을 방을 찾은 세 사람은 눈빛을 주고 받았다. 잠뜰은 책에 적힌 대로 씨앗을 심고 기름진 거름을 뿌렸다. 그런 다음 물을 뿌리고 불사의 토템을 바친 후 마지막 과정인 나무 제단의 뿌리까지 뿌렸다. 그러자 땅이 흔들리며 진동과 함께 녹색 잎사귀들이 하나둘씩 피어났다. 신비함에 홀려 식물 앞으로 다가가던 수현의 눈에 초록색 이파리 안쪽에서 팔랑이는 종이 한 장이 보였다. 그 종이는 잠뜰이 가지고 있던 왕의 저서의 찢긴 뒷부분이었다.
책에는 생명의 씨앗을 이용할 때 둘 이상의 사람이 필요한 이유에 대해 서술되어 있었다.
"생명의 씨앗은 주변 사람의 생명력을 빨아들이는데 일정 기간 이상 생명력을 얻지 못했을 시에는 마구잡이로 뿌리를 내려 생명력을 강제로 취하기 때문에 재앙과 다름없다. 따라서 한 사람이 혼자 씨앗을 사용할 시에는 한 명의 생명력으로 버틸 수 없으므로 반드시 두 명 이상이 있어야 한대."
"근데 우리는 세 명이잖아. 그럼 상관없는 거 아니야?"
"그래도 알아둬서 나쁠 건 없으니까."
이어진 수현의 말에 덕개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작은 잎새로 시작한 식물이 한순간에 성장을 마쳤다. 덩굴처럼 자라난 식물은 입구를 막고 있던 철문을 부숴버렸고 세 사람은 무사히 탈출했다. 잠뜰과 덕개 그리고 수현은 주황빛 하늘과 옅은 구름 사이 보이는 태양 아래를 걸었다. 수현은 이런 게 진정한 동료가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옆에서 걷고 있는 두 사람도 그렇게 생각할 거라고.
셋은 밤이 찾아오는 하늘 아래에서부터 새벽노을이 찾아올 때까지 계속해서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