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ileum171128)
[ 3일차 목표 ]
— 유적의 비밀을 파헤치고 탈출하라.
잠뜰은 눈 앞에 아른거리는 글자들을 노려보았다. 어딘가 낯익은 풍경과 공간. 지독하게 익숙했다. 잊으려 했으나 잊을 수 없었다. 악몽일까. 서늘한 숨을 뱉으며 잠뜰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먼지 쌓인 책장과 어딘가로 향하는 돌계단. 그리고 고개를 내민…
고막을 찢을 듯한 고함소리에 황수현은 덩달아 뒤로 나자빠졌다. 적잖이 당황한 듯한 표정에 잠뜰은 기가 막혔다. 잠뜰은 찬찬히 황수현을 살폈다. 옅은 갈색을 띄는 고고학복. 돌계단이 향하는 곳의 문이 개방되어있음이 꼭 과거로 돌아간 것처럼 똑같았다. 정말 말도 안 되지만 아마 이곳은 유적. 시간은 마지막 날. 잠뜰은 문득 떠오른 무언가에 잠 교수, 왜 소리를 지르고 그러나? 하고 장난스럽게 이야기하는 황수현의 멱살을 잡아챘다. 처음부터 이상했다. 전부 엉망이었다. 내막을 알 수 없을 불가사의의 연속이었다.
— 뭐야, 너?
영문도 모른 채 덜미를 잡힌 황수현은 그저 두 손을 양쪽으로 들어올렸다. 그 얼굴에 띄어진 것은 오로지 혼란임에 잠뜰은 이 모든 것이 그저 악몽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분명 그도, 잠뜰도 이 곳에 존재해서는 안될 존재들이었기에.
— 너 죽었잖아.
어딘가가 괴이하게 뒤틀려 모든 것을 망쳐버리고 있었다.
끊어진 사다리와 출구 없는 악몽에서 모두가 온전히 벗어나기에는 너무 순진했던 탓일까. 아니면 끝까지 협회를 믿었던 그들이 미련했던 탓일까. 잠뜰은 가만히 울려퍼지는 통곡 소리를 귓가에 담았다. 신을 향한 원망인가. 의미 없는 절규인가. 그들의 죗값인가.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조차 그들은 알 수 없었다. 감춰진 진실은 참혹했다. 단순 사고사로 마무리 지어진 죽음은 참 허무했다. 모두의 생존을 기약했던 그날의 기억은 흔적 없이 바스라졌다. 분명 데리러 온다고 했잖아. 잠뜰은 황수현이 아무런 의미 없이 뱉었을 그 문장 하나 곱씹으며 중얼거렸다. 언제까지고 정신을 놓고 있을 수는 없었기에, 잠뜰은 넋을 놓아버린 채 바닥을 응시하는 덕개의 어깨를 토닥였다.
— 덕 교수, 목이라도 축여야 하지 않겠나. 값은 내가 치를테니 간단한 요깃거리라도 사러 가세.
덕개는 거뭇거뭇해진 눈 밑을 문지르며 쓰게 웃었다. 감긴 눈꺼풀 속의 눈동자에는 무엇이 담겨있을까. 끝없는 죄책. 오랜 친구를 향한 애도. 숨겨진 진실을 향한 분노. 잠뜰은 황수현이 유적에서 돌아오지 못한 뒤로, 가끔씩 그 수많은 것들을 헤아리곤 했다.
화창하고 따스한 햇볕. 적당히 시원한 바람. 운치있게 흔들리는 녹빛 나뭇잎들. 세상의 시간은 지극히 평범하게, 평소처럼.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흘러갔다. 잠뜰은 날씨가 참 맑음에 씁쓸했다. 누군가에게는 영원한 친구였을 그가 이 세상에서 사라진다 한들 달라지는 것 따윈 없구나. 어딘가 모르게 착잡해진 기분을 달래며 잠뜰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래도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는 기분이 이따금씩 들곤 했다. 적어도 붉은 머리 남자를 마주치기 전까지는.
차마 잠뜰이 덕개를 붙잡을 틈도 없이 그는 우악스럽게 라더의 멱살을 잡아챘다. 라더는 어떠한 변명도 않은 채, 그저 가만히 분노로 물든 덕개를 바라보았다. 텅 비어버린 눈빛이었다. 있어야 할 무언가가 사라진 듯이 싸늘한 붉은 눈동자에 잠뜰은 다급히 덕개를 말렸다. 여유로운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 …오랜만이군, 자네. 어딜 가는 중인가?
검은 넥타이를 정갈히 고쳐맨 라더는 생긋 웃었다. 마치 그들이 우습다는 듯이. 어딘가 조소가 섞인 웃음이었다. 분명히 그것은 악의였다. 잠뜰은 애써 들끓는 분노를 가라앉히며 차분히 라더의 대답을 기다렸다.
— 애도를 표하러 가는 중입니다.
잠뜰은 드디어 자기가 미쳐버린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낮고 담담한 어조로 뱉어낸 그 말 한마디가 진실일 리 없으니까. 적어도 사람이라면 그래서는 안될테니까. 황수현을 죽음으로 내몬 추악한 살인자는 아마도 협회와 손잡은 라더가 틀림 없었으므로. 잠뜰은 울렁거리는 속을 게워내고 싶었다.
따스한 햇살과 적당히 부는 시원한 바람. 잠뜰은 그 모든게 역겨워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그것은 필시 모욕이었다.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그들의 오랜 친구를 향한 분명한 멸시였다. 그러나 수고하십시오. 한마디 남기고 떠나버린 라더를 잠뜰이 막을 수 없었던 이유는 그럼에도 두려웠기 때문이렷다.
— …지금 이게 뭐하자는 거야. 저 자식을 그냥 놔둘 생각은 아니지?
덕개는 라더가 유유히 걸어간 방향을 가리켰다. 잠뜰은 커다란 소리를 내며 쿵쾅거리는 제 심장을 부여잡고 간신히 숨을 내뱉었다. 이미 누군가를 잃어놓고 이정도로는 충분치 않은가. 왜 또 겁쟁이처럼 구는가. 잠뜰은 그럼에도 너무나 두려웠다. 이를 아득바득 가는 덕개의 옷깃을 겨우 붙잡은 잠뜰은 울었다. 왜 우리는 오랜 친구 하나 지켜주지 못했나.
잠뜰은 사실 저가 전부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협회에 밉보이지 않은 이는 그 넷 중 라더 하나였고, 어쩌면 죄다 한패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스쳤음을 잠뜰은 분명 자각하고 있었으니. 그러나 그때의 잠뜰에게는 자신의 생존이 지나치게 우선적이었다. 어떻게든 살고 싶어 아등바등 버텨내고 있었음에, 다른 사람의 생존 따윈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는 건 어쩌면 전부 변명일까. 잠뜰은 저를 구태여 부르며 당황한 덕개를 붙잡았다.
— 라더가… 그랬잖아. 협회에서 전부 알고 우리를 유적으로 보냈다고… 그렇다면 라더랑 협회는 한 패라는 말이잖아. 덕 교수, 아니, 덕개야…
난 죽기 싫어. 잠뜰은 교수가 되고 싶었다. 과거의 흔적을 좇아 제 흔적 하나 남기고 싶었다. 그 뿐이었다. 잠뜰은 위선적인 저가 싫었다. 정의를 당당하게 말할 수 없는. 진실을 모두의 앞에서 밝힐 수 없는 저가 싫었다. 다시 한번 되돌아갈 수 있다면. 그에게 다시 한번 기회가 주어진다면. 잠뜰은 그때만큼은 제 목숨 하나 바쳐서라도 황수현을 구해내겠노라 다짐했다. 정말 기적적으로, 다시 한번만. 한번만 되돌아갈 수 있다면.
그리하여, 잠뜰은 지금이다.
황수현은 잠뜰의 손을 툭툭 두드렸다. 이제 그만 놔요. 언제까지 잡고 있을 거야? 잠뜰은 황급히 손을 떼어냈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꿈이라기에는 어딘가 틈 새로 새어들어오는 바람과 차가운 공기의 내음이 너무나 생생히 느껴졌다. 잠뜰은 멀쩡히 생각하는 것조차 불가능해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넋을 놓은 채 가만히 허공을 응시하던 잠뜰에게, 옷매무새를 정리하던 황수현이 물었다.
— 그나저나, 금방 한 말은 무슨 뜻이에요? 죽었다니.
그래, 넌 죽었지. 먼저 탈출한 줄 알았던 황수현이 숲 속에서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되었을 때는 꼭 어딘가로 추락하는 기분이었다. 뜻 모를 의식을 행한 탓일까. 아픈 사람을 그렇게 몰아붙이는게 아니었는데. 잠뜰은 자신이 황수현의 죽음에 기여했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죽어버린 동료와 사라진 후배. 그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을까. 수상한 행동을 하는 것을 막았다면 무언가 달라졌을까. 너무 자책하지 말라는 덕개의 얼굴이 그 누구보다 먼저 무너져버릴 것 같아 잠뜰은 그만두었다. 달라지는 건 없다고 늘 되새겼으나 과거로 돌아간다면 무언가 바뀔 것 같다는 미련한 생각은 끝끝내 변하지 않았다.
덕개도, 잠뜰도. 이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는 자신들이 너무 싫었으나 범인은 한 사람뿐이었다. 황수현의 탈출을 도운 라더. 그러나 그 까닭은 알 수 없었다. 삼일 밤낮을 고민해도 어두운 유적에서 기어이 탈출한 황수현이 그렇게 죽어야만 했던 이유는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 …아무것도 아니야. 악몽을 좀, 꾼 것 같아.
황수현은 생긋 웃으며 주변을 정리했다. 새하얀 먼지가 폴폴 날렸다. 잠뜰은 기침을 해댔고, 황수현은 또 웃었다. 애통한 절규와 턱 끝까지 차오르던 역겨움들은 전부 꿈이었을까. 이곳이 현실일까. 어쩌면 황수현은 죽지 않았던 걸까. 잠뜰은 알 수 없었다.
과거로 돌아온건지, 꿈을 꾸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지만 잠뜰은 해야할 일이 있었다. 모두가 온전히 탈출하는 것. 그 방법을 찾는 것. 잠뜰은 속도를 높였다. 차가운 공기와 맞부딪힌 얼굴이 시려웠다.
황수현은 그날따라 잠뜰이 참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뜬금 없이 멱살을 잡지를 않나, 저가 죽었다느니 어쨌다느니… 무언가 잘못되어가고 있음을 그는 느꼈다. 그러나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오늘 이 유적을 탈출한다.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 반드시. 황수현이 이를 갈았다.
그 작은 구멍으로 건네받은 탈출 방법. 황수현은 바깥의 빛을 보고 싶었다. 꿈도 뭣도 없었으나 얼떨결에 와버린 대학. 되어버린 교수. 안정적인 직업을 꿈꿨으니, 어딘가 어긋났지만 어찌되었든 꿈은 이룬 셈이었다. 그러니 황수현은 더욱 살아야 했다. 죽기에는 너무 아깝지 않은가. 다른 이의 생존보다는 제 안전이 중요했다. 이기적이라고 질타할지도 모르겠지만, 재난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황수현은 생각했다.
— 황수현, 너 라더가 알려준 탈출방법으로 여기 나갈 거야?
남을 팔아먹어서라도 살아남을 준비가 되어있는 황수현에게 잠뜰이 내뱉은 말은 씨알도 먹히지 않는 건 당연지사였다.
— 내가 우리 셋 다 탈출할 수 있는 방법을 알아.
무조건 탈출할 수 있는 최상의 루트를 눈 앞에 두고, 사실일지조차 모르는 당신의 말을 믿는다는건 말도 안되는 일이었다. 황수현은 그저 웃었다. 그 방법이 실패하면 어떡할 건데. 따져묻고 싶었으나 그러지 않았다. 말했듯, 황수현은 살아남아야했기에.
대충 고개를 주억거린 황수현의 시큰둥한 반응에도 잠뜰은 고개를 한껏 끄덕이며 웃었다. 내가 금방 재료 구해올게. 덕 교수한테도 말해줘. 챙겨주는건 고마운 일이지만요, 잠뜰 씨.
— 내가 뭐하러 당신 말을 믿나요…
황수현은 넓은 유적의 미로에서 덕개의 이름을 불렀다. 텅 빈 공간 안에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여기, 여기네! 하는 소리 또한 메아리쳤다. 황수현은 잠뜰이 미련하다고 생각했다.
잠뜰은 한번 그랬던 것처럼 능숙하게 재료를 모으기 시작했다. 모두가 믿고 따라준다면 이번에는 전부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살아남자는 기약 없는 약속을 지킬 수 있을 것이라고. 잠뜰은 되뇌었다. 살아남아야만 했다. 이번에는 반드시. 한 목숨 바쳐 지키겠다고 다짐했으니, 황수현.
그 뒤로는 기억이 흐릿했다. 전부 다 모은 재료. 메아리치던 황수현의 이름과, 마침내 찾아낸 황수현. 손에는 괴상한 물약을 들고 있었다. 유리병 깨지는 소리와 언성 높인 황수현. 무작정 데리고 뛰었던 것 같기도 했다. 폭발한 유적과 눈부실 정도로 빛나는 태양. 그리고………..
날카로운 칼날.
왜 우리는 클리셰 하나 깨지 못할까. 어째서 우리는 이리 나약할까. 함께 살아남자는 그 기약 없는 약속조차 왜 우리는 지킬 수 없을까. 잠뜰은, 이제는 잘 들리지 않는 귓가에 웃음소리를 언뜻 담았던 것 같았다.
어리석었구나.
참 가엾기도 하지...
간절한 기도를 올리기에 기회를 주었으나
성공하지 못했구나.
유적지 탐사인원 3명.
생존자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