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형 (@tntn951_px)
나는 선인인가. 글쎄다. 적어도 선장이 -이름이 정확히 뭐였더라 라더라고 했던가- 악인인 건 분명하다. 어디서 찾아낸 건지, 멋들어진 선장복을 입고 우리 앞에 나타났지. 선장이나 직원 전용 탈의실이라도 뒤졌나. 거긴 분명 일반인 출입 금지 구역일 텐데. 아니다. 다 죽었으니까 멋대로 들어가도 막을 사람이 없었겠구나. 가만 생각해 보면 해적 주제에 준비성이 철저하다니까. 환풍 시스템으로 전 객실에 청산가리를 살포했으면서, 그때 사람이 객실에 없을 걸 예상해? 이야, 독하다 독해. 해적이라서 더 그런 건지, 아닌 건지. 뭐, 그 허술함에 두 명이나 살아남긴 했지. 저쪽 입장에서는 다행이었을 수도 있겠네.
하여튼 승객들은 크루즈에서 일하는 직원의 얼굴도 잘 모르는 마당이다. 지인이 아니라면 누가 승객인지도 잘 모르겠지. 그러니 선장의 얼굴을 대체 어떻게 알겠어. 솔직히 승객과 직원은 복장으로 구분하잖아. 라더가 -딱히 존칭을 쓰고 싶진 않네- 선장 같은 단정한 복장을 하고 자신을 선장이라 지칭하는데, 그냥 그러려니 했지. 튼튼해 보이는 가죽, 접착제, 밧줄을 가져와달라는 말에도 순순히 응했고. 망가진 구명보트를 수리할 거니까 저것들을 가져와 달라? 뭔가 그럴싸하잖아. 그걸로 구명보트를 잘 고칠 줄 알았어. 선장실에 있던 헬기 호출용 무전기와 전화기를 망가트린 걸 발견하기 전까지는 말이야. 얼마나 알뜰살뜰하게 망가트렸는지 작동할 생각을 안 하더라. 이게 바로 손 안 대고 코 풀기? 쓸데없이 머리는 잘 굴러가. 그래서 나랑 같이 갈 사람이 있냐며 한 명을 제 편으로 끌어들이려고 했나.
'저한테 유리 조각이 있어요.'
'아니, 그러니까 죽일 수는 있는데. 그다음에 어떡하냐고.'
'제가 살인 저지르고 감옥 들어갈 테니까, 나머지 버스 타실 분.'
'아니, 정당방위니까 괜찮은데. 그 배가 지금 수리된 게 어딨는지 모르잖아. 그거 어떡하냐고.'
'제가 한번 따라가서 죽이고 부를게요.'
이 모든 게 진심이었어. 살인을 저지르고 감옥에 갈 각오가 있었고,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라더를 따라갈 각오가 있었어. 빈틈을 노려 라더에게서 탈출 방법을 알아낸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였지. 만약 내가 잘못되더라도 남은 둘이 힘을 합쳐서 잘 탈출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어. 그런데 해적의 쓸데없는 준비성이 여기서 발휘될 줄은 누가 알았겠어.
'그러면 이제… 나머지 둘은 필요 없겠지?'
라더의 말이 끝나자마자 환풍구에서 이상한 향이 흘러나왔어. 정신이 아득해지면서 그대로 쓰러졌지. 정신을 차리고 보니 밖이더라고. 갑판 쪽이라고 해야 할까. 난간 밖으로 빙하 몇 개가 둥둥 떠다니는 바다가 보였거든. 차가운 바람이 내 머릿결을 스치고 지나갔어.
'빠른 시간 내로 둘 중에 한 명을 죽여와. 원하는 상대 아무나. 알겠지?'
어쩐지 분위기가 서늘하더라. 바람 때문인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니었나 봐. 라더를 따라가면 그들이 아닌 내가 잘못될 줄 알았어. 3대1과 1대1의 차이가 크잖아. 바로 처리될 줄 알았지. 따지고 보면 당장 시간을 벌었으니 그리 나쁜 건 아니었더라. 그래서 고민이 됐어. 내가 정말 라더 편에 붙는다면 살아 나갈 확률이 높아질 수도 있는 거니까. 그 대신에 아무나 한 명을 죽여야 하지만. 최대한 구석으로 몸을 옮겨, 가만히 생각을 정리하려 했어. 내가 무슨 생각을 하든 결국에는 본인의 제안을 수락할 줄 알았나 봐. 라더가 난간에 팔을 기댄 채, 바다 너머를 구경하고 있더라. 나를 그물망에 들어온 물고기 취급하는 게 빤히 보였어. 오히려 여유로워 보였지. 무엇을 선택하는 게 나에게 가장 이득일까? 가장 먼저 든 생각이었어. 선이야? 악이야? 어떤 걸 기준으로 선과 악이 나뉘는 걸까. 정답 없는 철학적인 질문이 불쑥 나타나더라. 그래도 예상했던 것보다 고민은 짧았어.
'살아남는 놈이 선이야.'
비록 3일밖에 되지 않은 인연이지만, 동료들을 저버릴 수 없었어. 마음을 다잡고 주머니에 넣어둔 유리 조각을 꺼내 들었어. 한 손에 쏙 들어갈 만큼 작아서 그다지 쓸모 있어 보이진 않았지. 다만 이 유리 조각이 웬만한 흉기보다 날카롭다는 건 알아. 한 번 쓰면 날이 무뎌질 테니 신중해야겠지만. 방심한 라더의 등 뒤로 살며시 다가갔어. 발걸음 소리를 죽이니 눈치채지 못했지. 라더가 내게 제안했던 순간부터 방심하지 않았더라면 필패였을 수도. 이건 순전히 자신이 이겼다며 축배를 들던 라더의 잘못이지. 유리 조각을 쥐어 잡은 손을 재빠르게 휘둘렀어. 갑작스러운 공격에 라더는 반항 한 번 하지 못하고 그대로 쓰러졌어. 정말, 눈 깜빡할 새였어.
나는 악인인가. 사람을 죽이는 행위만을 선악으로 나눈다면 악일 수도 있으려나. 잘 모르겠다. 쓰러진 라더를 보니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내면에서 요동쳤어. 내뱉을 수 없는 생각을 곧바로 환기했어. 이걸로 조금 괜찮아졌을 수도. 결국 라더에게서 아무것도 듣지 못했네. 이렇게 됐으니 다른 탈출 방법을 찾으러 가는 수밖에 없겠지. 무뎌진 유리 조각을 난간 너머로 던졌어. 쓸모도 없는 거 가지고 다녀봤자 뭐 해. 쓰러진 라더의 품속에서 비상용 망치를 찾았어. 그것 말고는 딱히 없더라. 구명정의 단서조차 없다니. 끝까지 철저한 녀석. 난간 아래가 바다였다면 그대로 던져버렸을 텐데. 하필이면 바로 아래층 난간이어서. 던지나 마나 똑같은 상황이란 게 조금 아쉽더라. 여기서 할 수 있는 건 더 이상 없었지. 이제 동료들을 구하러 가자.
차분하게 배 안으로 들어갔어. 둘을 먼저 찾은 다음에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해 보려고 했거든. 그런데 확실히 혼자서 돌아다니기엔 배가 너무 넓더라. 주변을 아무리 둘러봐도 둘을 찾을 수 없었어. 라더가 어딘가에 보내놨다고 했으니 더 못 찾는 걸 수도. 그러다가 라더에게서 얻은 망치를 사용할 수 있을 법한 공간을 찾았어. 유리로 된 창문이었는데, 깨부수지 않는 이상 밖으로 나갈 수 없는 공간이었지. 아무리 봐도 수상하잖아. 라더가 숨겨둔 배가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어. 그때쯤에 수현을 -라더랑 똑같이 존칭을 쓰고 싶진 않네- 만났어. 유리 창문 앞에서 기웃거리는 나에게 뭐하냐고 묻더라. 말보다는 행동이 더 빠른 법. 망치를 휘둘러 창문을 부수고 밖으로 나갔어. 별다른 특이점이 없는 작은 공간이 나타났지. 혹시 몰라서 난간을 넘어보니 그 아래로 사다리가 설치되어 있더라고.
'그런데 선장님은 어디 갔어요? 선장님이랑 같이 다니지 않았어?'
'찔러 죽였어요.'
'어?'
'해적이래 해적. 괜찮아, 정당방위야. 내가 만약에 그걸로 해적을 안 찔렀으면 당신이 찔려 죽었거나, 잠뜰 씨가 찔러…. 아, 잠뜰 씨는요?'
'잠뜰 씨 모르겠어요. 나랑 따로 있었는데?'
내가 조금만 눈치가 빨랐더라면 여기서 이상을 찾았을 텐데. 지금 생각해 보니 조금 아쉽네. 어차피 결말은 같았을 테니 상관없었으려나.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니 어느 한 공간에 도착했어. 사람 몇십 명은 거뜬히 들어찰 만한 방에 별다른 건 없었어. 전시관에 있던 보물들만 빼면 말이지. 라더가 따로 빼돌려놨던 모양이더라고. 들어가자마자 오른편에 보이는 문은 잠시 무시했어. 락픽 같은 게 있어야 열릴 거 같아 보였거든. 열리지도 않을 문을 잡고 씨름할 생각은 없어서 말이지.
왼편, 그러니까 가장 안쪽의 구석진 벽엔 유리 상자가 걸려 있었어. 길고 매끄러운 무언가가 유리 상자 안에서 반짝였어. 설마 싶어서 그 앞으로 달려갔어. 아니나 다를까, 다이아몬드 검이 있었어. 작고 하찮은 유리 조각보다 더 날카롭고 튼튼해 보였지. 혹시 모르니 가져가서 나쁠 건 없었어. 다이아 검을 꺼내 입고 있던 구명복 안에 살며시 숨겼어. 수현이 내게 무엇을 찾았냐며 물어봤는데, 알려줘야 할 이유가 없어서 굳이 답하진 않았어. 오히려 말하지 않은 게 다행이었을 수도.
수현과 자연스럽게 헤어졌어. 혼자 어디론가 가더라. 탈출이라는 목표를 가지고 있는 건 같다만, 그렇다고 매번 같이 다니진 않았으니 크게 신경 쓰지 않았어. 잠뜰 씨를 찾고 나서 다시 부르면 될 일이고. 수현을 내버려 둔 채, 주변을 돌아다녔어. 그러다가 드디어 잠뜰 씨를 만났어. 온몸이 밧줄로 묶여있더라. 다행히 하체 쪽이 헐거워서 어떻게든 탈출한 거 같았어. 잠뜰 씨는 나를 보자마자 목소리를 낮추라는 듯, 쉿 하는 소리를 냈어. 곧이어 조졌다며 말문을 열었어. 큰일 났다며 호들갑도 떨었지. 잠뜰 씨는 잘 움직이지 않는 팔을 꼼지락대다가 내 앞으로 서류 하나를 던졌어.
'이거 봐봐.'
'뭔데 이게.'
'나 갇혀있다가 나오는 길인데, 나 이거 뒤에 줄 좀 끊어줘.'
대체 어떻게 꺼낸 건지 내 앞으로 나무 검도 던졌어. 내게 다이아 검이 있다고 초 칠 생각은 없어서 그냥 잠뜰 씨가 준 나무 검으로 밧줄을 끊었어. 그러고는 다시 돌려줬지. 나무보다는 다이아가 더 나으니까. 잠뜰 씨는 그거 읽어보라며 급히 재촉했어. 중대한 사항이라도 알아낸 것처럼 보였지. 서류를 제대로 잡아들고 맨 앞 장에 쓰인 단어를 읽었어. 승객 명단. 이게 뭐가 문제길래. 페이지를 한 장씩 넘기며 수십 명의 이름을 눈에 담았어. 3등석에는 모르는 사람들의 이름. 2등석에는 잠뜰 씨와 내 이름. 1등석에는 모르는 사람들의 이름. 어라.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확인했어. 아무리 읽어봐도 한 명의 이름이 없었어.
'라더, 어디 있어? 선장 어디 있어요?'
'아, 걔는 선장이 아니고 일단 해적이었고요. 이 배를 탈취하기 위해서 온… 해적이었고.'
'어디 있냐고.'
'찔러 죽였는데요?'
'잘했어. 잘했어!'
라더와 수현이 한편이었다는 진실이었어. 어쩐지. 대형 크루즈를 어떻게 혼자서 탈취했겠어. 이것저것 공작한 것도 많아 보였는데. 조력자가 적어도 한 명은 있었겠지. 그게 수현이었고. 나와 잠뜰 씨는 얼떨결에 살아남은 생존자일 뿐, 이것으로 우리 둘은 해적과 아무런 관계가 없었어. 그게 아니라면 내가 라더를 죽였다는 소식에 잠뜰 씨가 저리 기뻐할 리가 없으니. 잠뜰 씨와 내가 같은 상황에 부닥친 만큼, 말이 잘 통할 줄 알았어. 적이 확실하게 특정되었으니 이제 남은 건 협력이니까.
'우리 빨리 나가야 돼 여기서. 나한테 튼튼한 목재들이 있거든? 양털만 있으면 우리 나갈 수 있어.'
'나 이거 있는데 찔러 죽이면 안 돼요?'
'아유. 최대한 일단 튀자고. 양털 찾아야 돼.'
'아, 맞아요. 그래도 우리 저놈들과는 다른 사람으로서의 도리가 있으니까.'
잠뜰 씨의 말에 잠시 의문을 느꼈어. 잠뜰 씨에게 그냥 검도 아니고, 다이아 검을 보여줬어. 물론 내가 해적보다는 못할 테지. 그래도 라더는 보내버린 전적이 있으니 마음만 먹으면 수현 정도야 바로 보내버릴 수 있었어. 그런 쉬운 길을 놔두고 우선 튀자고 하다니. 생각보다 마음이 여린 사람인가. 다이아 검을 구명복 안에 다시 숨겼어. 굳이 불화를 만들 이유가 없어서 잠뜰 씨의 말에 동의했어. 그러면서 되는 대로 아무 말이나 내뱉었지. 사람으로서의 도리. 우리에게, 나에게 아직 사람으로서의 도리가 있던가. 내가 어긋난 건지, 잠뜰 씨가 어긋난 건지 알 수 없었어. 양털을 찾기 위해 발걸음을 옮기다가 비상용 망치를 사용한 곳에 다다랐어. 이곳에 처음 온 잠뜰 씨를 위해 길을 안내했지. 라더와 수현의 계획을 설명했고, 락픽을 사용해야만 열 수 있을 법한 문을 알려줬어. 다만 우리에겐 락픽이 없었어. 잠뜰 씨는 양털만 있으면 나갈 수 있다며 락픽을 뒷순위로 뒀어. 그러다가 문득 생각난 게 있는지 종이 하나를 내게 건넸어.
'맞아, 이것도 있어. 무전기 수리법. 근데 문제가 있어. 무전기 수리할 재료가 다 수현한테 있어. 조졌다는 얘기지.'
'철 조각, 레드스톤 조각. 망가진 무전기만 나한테 있는데?'
'그거 수현이 다 가지고 있어. 철 조각, 레드스톤 조각. 죽여야 될까?'
'죽이고 얻는 것도 나쁘지 않을 수도.'
다이아 검을 숨긴 구명복 위로 손을 얹었어. 솔직히 무전기를 고쳐서 헬기를 호출하는 게 가장 안전한 탈출 방법이긴 하지. 그런데 수현이 우리에게 친절하게 대할까. 라더와 수현이 한편이라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을 때, 내가 라더를 찔러 죽였다고 말했지. 그래서였나. 개인 활동을 한 이유가. 수현이 마음을 고쳐먹고 무전기 수리 재료를 건네주기는 무슨. 오히려 우리를 죽이러 올 때를 대비해야 할 판이네. 탈출하기 전, 적어도 한 번은 수현을 마주할 테지. 그때도 도망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어. 이 기회에 확답받으려고 은근슬쩍 내 의견을 전달했어. 잠뜰 씨는 잠시 고민하는가 싶더니 말을 얹었어.
'이 녀석이 날 죽이려고 했거든. 안 그래도?'
'죽이려고 했다고요?'
라더는 나와 잠뜰 씨를 떨어트려 놓았어. 내가 라더의 제안을 거부했다면. 라더를 죽이지 않았다면. 수현이 앞뒤 생각하지 않고 곧바로 잠뜰 씨를 죽였다면. 잠뜰 씨가 탈출하지 못했다면. 소름이 돋았어. 나나 잠뜰 씨나 까딱 잘못했다면 그대로 죽은 목숨이었을 테니까. 우리는 탈출 도구를 찾아 자리를 옮겼어. 우선 뭐든 찾아야 탈출하든 말든 할 거 아니야. 딱히 목적지는 없고, 그냥 주변을 둘러보며 무작정 걸어갔어. 잠뜰 씨가 선두에 나섰지. 힘찬 걸음으로 나아가던 잠뜰 씨가 잠시 멈칫하더니 뒤를 돌아봤어. 그러고선 나를 마주했지. 잠뜰 씨의 얼굴에 옅은 불신이 깔려있었어.
'일단. 아니지, 너는?'
'아잇. 아, 진짜. 제가 라더까지 그.'
'알았어, 알았어. 내가 배신을 한 번 당했더니. 이거 못 믿겠어.'
잠뜰 씨는 제 머리를 한 번 헝클어뜨리더니 다시 앞으로 나아갔어. 잠뜰 씨의 말투를 보아하니 불신이 완전히 씻겨 내려간 건 아닌 것 같았지. 승객 명단에 잠뜰 씨와 내가 있는 걸 봤잖아. 그러고도 못 믿는 거야? 반박의 언어를 입 밖으로 내뱉지 않고 그대로 삼켰어. 조용히 잠뜰 씨의 뒤를 따라갔어. 우리 둘이 해적과 관계가 없다는 증거가 버젓이 있잖아. 그렇게 따지면 아까 수현을 죽이지 말자고 한 당신이 더 수상해. 뭔가 불안했어. 이건 잠뜰 씨 때문일까 아니면 나 때문일까. 그 순간이었어. 잠뜰 씨가 급히 숨을 들이마셨어. 무언가를 보고 놀란 눈치였지. 뭐야.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봤어. 피 묻은 철검을 든 수현이 내게 달려들었어. 급히 구명복 안쪽에 손을 넣어 다이아 검을 꺼내 들었어. 이어서 날아드는 철 검을 맞받아쳤지. 전력 차이가 극심하다는 걸 눈치챈 까닭일까. 수현은 나와의 거리를 벌리고 잠뜰 씨에게 검을 휘둘렀어. 다이아 검보다 나무 검 쪽이 더 쉽다고 느꼈나 봐. 하지만 그게 패착이었지. 잠뜰 씨가 수현의 시선을 끌어준 사이에 수현의 뒤로 다가갔어. 다이아 검을 쥐어 잡은 손을 재빠르게 휘둘렀어. 갑작스러운 공격에 수현은 반격 한 번 하지 못하고 그대로 쓰러졌어. 이 역시도, 눈 깜빡할 새였어.
그녀는 선인인가. 글쎄다. 적어도 수현이 악인인 건 분명하다. 잠뜰 씨와 함께 수현의 소지품을 전부 털어봤어. 불행히도 락픽은 찾지 못했어. 다만 이 정도는 예상했어. 락픽은 뒷순위니까. 있으면 좋고 아니면 말고였지. 가장 중요한 건 수현이 가지고 있다던 철 조각과 레드스톤 조각이었어. 철 조각은 쉽게 찾아냈어. 문제는 수현에게 레드스톤 조각이 없었다는 것 정도.
'레드스톤 지가 가지고 있다고 했는데.'
'우리 사기당한 거?'
잠뜰 씨의 말이 거짓인 거 같진 않았어. 레드스톤 조각이 없으면 본인도 탈출하지 못할 텐데, 이런 거짓말해봤자 뭐 해. 결국은 수현이 잠뜰 씨를 속인 거였지. 절망할 시간은 없었어. 어찌 됐든 무작정 발걸음을 옮겼어. 락픽이든 레드스톤 조각이든 양털이든. 우선 찾고 봐야 할 거 아니야. 문득 다이아 검을 쥐었던 손의 감각이 아직도 남아있다는 걸 깨달았어. 내 손에는 아무것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상처 하나 없는 멀쩡한 손을 바라보았어. 가뿐하게 쥐었다가 피길 반복했지.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다시금 올라오려고 했어.
'저 얼떨결에 두 명 죽였는데요?'
'걱정 마요. 신고 안 할 테니까.'
'감사합니다.'
정말 그럴까. 가벼운 웃음 속에 감정을 숨겼어. 아직도 날 믿지 못하는 잠뜰 씨가 정말로 진실을 묻어줄까. 헬기나 뗏목을 타고 크루즈에서 탈출하는 잠뜰 씨와 나를 상상에 그려봤어. 검은색 크레파스로 낙서한 것처럼 얼굴이 까맣게 지워져 있었어.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없었지. 진실일까. 불안일까. 아직 알 수 없었어. 잠뜰 씨는 주변을 얼추 돌아보더니 어느 한 방향을 가리켰어.
'덕개 씨. 저쪽 끝으로도 한 번 가봐요. 거기 물 찬 쪽. 내가 이쪽 끝에 갔다 올게. 중간에서 만나.'
확실히 두 명이 함께하는 것보다 혼자서 다니는 게, 레드스톤 조각과 락픽을 얻을 확률이 더 높았지. 별다른 불만을 가지지 않은 채, 잠뜰 씨와 헤어졌어. 나도 노력했어. 가본 곳도 다시 가보고, 평범한 땅바닥도 훑어가며 샅샅이 뒤져봤어. 1일 차에 얻은 수영 장비를 머리에 쓰고 물이 찬 곳에 들어가 보기도 했지. 당장 가지고 있는 게 무전기니까, 레드스톤을 찾아볼까 싶었고. 사실 선장실에도 뭐가 있을까 싶어서 가보려고 했거든. 문제는 어떻게 가는 건지 기억이 안 난다는 거? 잠뜰 씨가 벽 어딘가를 삽 같은 거로 뚫고 가지 않았나. 거기가 정확히 어딘지 알 수 없었어. 그렇게 할 수 없이 주변만 빙빙 돌다가 약속 장소에 도착했어. 아무도 없더라. 내가 잠뜰 씨보다 늦을 줄 알았어. 물에 들어갔다 나오느라 분명 시간이 지체됐을 테니까. 그런데 내가 잠뜰 씨보다 먼저 도착했다고? 심장 뛰는 소리가 서서히 커졌어. 식은땀이 흐르는 게 느껴졌어. 잠뜰 씨는 어디 간 거지? 나 버림받은 건가? 아니야. 잠뜰 씨가 날 버렸을 리 없어. 누군가가 비웃음 가득한 목소리로 '정말?'하며 물었어.
'덕개 씨!'
잠뜰 씨가 눈앞에 나타났어. 버림받지 않았음에 기뻐해야 할 터인데. 어째서일까. 그리 기쁘지 않았어. 잠뜰 씨에게 찾았냐고 물었어. 잠뜰 씨는 못 찾았다며 선장실에도 없다고 답했어. 이것으로 원점. 크루즈의 침몰 속도를 보아하니 오늘 안에 탈출하지 못하면 진짜 죽을 판이었어. 이제 어떻게 하지. 가만히 생각하던 참이었어. 잠뜰 씨가 흐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다 내 머리 위를 손으로 가리켰어.
'근데 그거 뭐야? 머리에 쓴 거?'
'아, 수영 장비.'
아까 물이 찬 곳에 들어갔다 나오면서 벗는 걸 깜빡했네. 잠시 흠칫했지만, 꿇릴 건 없어서 당당히 말했어. 수영 장비 덕분에 가라앉은 곳도 다시 가볼 수 있었지만, 단지 그것뿐이었고. 바다로 헤엄쳐서 나갈 -고작 장비 하나로 저체온증을 견딜 수 있다면야- 게 아니라면 쓸모도 없는 거여서. 잠뜰 씨는 여전히 흐린 눈으로 나를 보았어.
'그, 좋아 보이는데 왜 혼자…. 어디….'
'살건… 살아야지.'
'아니, 나는.'
'살건 살아야지~.'
'나는!'
반쯤은 농담이었어. 수영 장비가 있다고 살 확률이 높은 것도 아니잖아. 지금 당장 필요한 건 수영 장비가 아니라 락픽과 레드스톤 조각, 양털인데. 내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잠뜰 씨의 행동이 어딘가 이상했어. 마치 개인 활동을 할 것 같은, 말도 없이 자리를 떠났던 수현과 비슷한 기분이 들었어. 잠뜰 씨에게서 시선을 놓치지 않았어. 내 시선에 찔리는 거라도 있는지 잠뜰 씨는 연신 헛기침을 날렸어. 나 역시 흐린 눈으로 잠뜰 씨에게 물었어.
'뭐야. 뭐 하… 뭐 하세요?'
'아니. 왜 너 혼자 살려 그래? 웃기는 애네.'
'아니. 어차피 락픽 찾으면은 다 같이 살 건데, 뭘.'
'맞아요?'
'락픽만 찾으면 돼. 락픽만.'
그래, 그놈의 락픽. 라더가 전시관에서 빼돌린 보물이 있는 방. 락픽을 사용해야만 열 수 있을 법한 문. 양털과 레드스톤 조각을 찾지 못해도, 락픽만 있으면 어떻게든 될 거 같았어. 본인도 알고 있는 사실 아닌가. 이걸 대체 몇 번을 설명하고 있는 건지. 그리고 대체 어찌해야 불신이 풀리련지.
'그럼 수영 장비 나 줘.'
'갑자기 수영 장비 달라고?'
잠시 고민했어. 수영 장비야 더는 필요 없을 테니, 줘도 상관없었지. 게다가 여러 개 가지고 있기도 했고. 이걸로 조금이나마 신뢰가 회복된다면 더는 충돌할 일도 없을 거 같았어. 머리에 쓰고 있던 수영 장비를 벗어서 잠뜰 씨에게 건넸어. 잠뜰 씨는 수영 장비를 빼앗듯 가져가더니 비릿한 웃음을 내보였어. 그렇구나, 싶은 순간에 반대편으로 뛰어가더라.
'잘 있어라!'
'두 개야 멍청아.'
뭐랄까. 놀라진 않았어. 배신당했다는 생각도 안 들었고. 이걸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었지. 따로 숨겨뒀던 수영 장비를 꺼내서 머리에서 썼어. 내 행동에 깜짝 놀란 잠뜰 씨는 종종걸음으로 내게 돌아왔어. 자신이 들고 있는 수영 장비. 내가 쓰고 있는 수영 장비. 번갈아 바라보다가 허 하며 눈살을 찌푸렸어.
'어? 왜 두 갠데 나 안 줬어? 야, 미쳤냐?
'네가 그럴 거 같아서. 아, 지금 딱 봐도 이런 행동 하는데 주고 싶겠냐?'
'아니. 나는 그걸 테스트해 본 거야. 나 찾았어 락픽. 나 혼자 간다?'
잠뜰 씨는 나를 약 올리려는 듯 락픽을 꺼내 들고 내 앞에서 살살 흔들었어. 어디서 찾았는지는 몰라도 찾았구나. 선장실에 있었나. 숨을 크게 들이마시다가 내쉬었어. 당장 싸움이 중요한 게 아니야. 우선 여기서 탈출하고 봐야지. 차분히 감정을 가라앉혔어.
'아, 오케 오케이. 나도. 나도 테스트해 보고…. 야, 누가 여기까지 비상 망치로 깨고 어? 누가 해적들 죽여주고 어? 마, 임마. 내가 다 했어 임마!'
'어후, 꼰대. 야, 일단 가보자.'
그래도 말하다 보니 짜증 나는 건 어쩔 수 없었어. 라더에게 붙지 않고 라더를 처리한 건 나다. 라더의 소지품을 뒤져서 비상용 망치를 찾아낸 것도, 유리를 깨서 비밀 방을 찾아낸 것도, 수현을 처리한 것도. 전부 내가 했다. 잠뜰 씨는 내 외침에 귀를 틀어막았어. 그러고는 한마디 내뱉더니 보물이 있는 방으로 걸어갔어. 여기서 개인행동 해 봤자 손해 입는 건 나라서, 할 수 없이 따라갔지.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 잠겨있는 문 앞에 도착하자, 잠뜰 씨가 열쇠 구멍에 락픽을 넣었어. 락픽으로 문 따는 방법은 알고 있으려나. 그런 생각으로 바라보고 있자니 딸칵 소리가 들리며 문이 열렸어. 안쪽에 나무 상자 하나가 보였지. 잠뜰 씨는 그대로 방 안에 들어가 상자를 열고 물품을 싹 다 쓸어갔어. 아마도 양털과 레드스톤 조각이 있었겠지. 방이 좁아서 같이 들어가진 못했어. 그래서 뒤꿈치를 최대한 들어 안을 이리저리 살펴보기만 했어. 고개를 휙 돌린 잠뜰 씨는 나를 바라보더니 씨익 웃었어. 그러더니 곧바로 튀더라. 손을 뻗어 붙잡을 새도 없었어. 창을 넘어서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는 잠뜰 씨의 뒤를 따라잡으러 달려갔어.
'야, 임마! 이 배은망덕한 녀석이! 야! 구명보트에 두 명은 탈 수 있잖아!'
진심으로 도망칠 듯 달려 나간 잠뜰 씨는 발걸음을 멈췄어. 나 역시도 몇 걸음 다가가다 발걸음을 멈췄어. 잠뜰 씨는 아까처럼 고개를 휙 돌려 나를 바라보았어. 단순 장난이었다는 의미였는지, 짓궂은 어린아이가 내보일 법한 웃음을 지었어.
'일로 와. 구라야. 우리 일단 헬기…를 먼저 부르고. 그다음에 가야 할 거 같아.'
'레드스톤은 어딨어.'
내가 묻자, 잠뜰 씨는 레드스톤 조각을 꺼내 들었어. 그때쯤에 난 선택해야만 했지. 망가진 무전기와 철 조각을 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동일한 목적을 가진 우리에겐 갑도, 을도 없었어. 협력자라는 입장일 뿐이었지. 다만 잠뜰 씨는 아직도 나를 믿지 못했어. 장난? 죽느냐 사느냐의 갈림길에 선 우리에게 장난이 통용되는 말인가. 망가진 무전기와 철 조각을 꺼내 들었어. 뱉지 못한 한숨을 속으로 삼켰지. 곧바로 잠뜰 씨에게 건넸어. 이걸로 잠뜰 씨가 더 이상 장난치거나 불신하지 않기를 빌었어. 그것이 내가 가진 마지막 카드였으니. 잠뜰 씨는 망가진 무전기와 철 조각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어. 그러고는 삽을 꺼내 들어 평범해 보이는 벽을 파내렸어. 단단한 벽인 줄 알았는데, 삽질 한 번에 쉽게 무너졌어.
'선장실은 일로 가는 거야, 바보야. 알았어?'
'오! 이 자식 일부러 닫아놨구만. 아주 요망한 녀석이야.'
내가 선장실을 찾지 못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구나. 그래도 더 이상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줄 알았어. 이 정도면 꽤 신뢰를 주긴 줬잖아. 선두로 가던 잠뜰 씨가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면서 내게 발길질하기 전까지는 말이야. 눈앞에서 발이 왔다 갔다 하는 모습에 든 생각은 하나였어. 도라인가 봐. 사실 크게 위협적이진 않았어. 잘못 맞아서 손을 놓친다면 땅에 떨어져서 즉사할 정도? 이쯤 되니 내 선택에 고민이 되더라. 얘를 살려두는 게 아니었나. 셋 다 죽였어야 됐나. 이제와서 잠뜰 씨를 처리하기엔 너무 늦었고. 애초에 잠뜰 씨도 나와 같은 피해자잖아. 그래서 그만뒀어. 여기서 탈출하기만 하면 문제없으니까. 사다리를 타고 끝까지 올라가 선장실에 도착했어. 거기서 무전기를 고칠 수 있을 줄 알았거든.
선장실에 도착하고 보니 절반 가까이 둘러싼 유리 창문이 어딘지 모르게 익숙했어. 가까이 다가가 이마를 대고 창 너머를 바라보았어. 저 멀리 헬기장이 보였어. 순간 비상용 망치로 유리를 깨고, 헬기장으로 갈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어. 곧장 비상용 망치를 꺼내 들었어. 잠시 숨을 고르고, 유리창을 향해 있는 힘껏 비상용 망치를 휘둘렀어. 유리창에 금이 가며 작은 구멍이 생겼어. 사람이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큰 구멍을 낸 다음, 밖으로 나갔어. 차가운 바람이 내 피부에 닿았지. 헬기장에 도착하자마자 라이터를 꺼내 들었어. SOS 모양으로 바닥에 불을 붙였어. 어차피 가라앉을 배. 불 좀 냈다고 처벌받진 않겠지. 잠뜰 씨는 헬기장 끝에 있는 수리기에 무전기와 철 조각, 레드스톤 조각을 넣었어. 바로 고쳐졌는지 수리기에서 무전기를 꺼내 들었어.
'무전기 고쳐졌다고. 무전기 내가 칠게.'
잠뜰 씨가 무전기에 대고 여러 번 소리쳤어. 답변은 빠르게 오지 않았어. 설마 객실용 무전기인 건 아니겠지. 혹시나 싶어 조심스레 물어보았어. 잠뜰 씨는 헬기용 무전기가 맞다고 답했어. 대답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지. 그렇게 몇 초가 흘렀을까.
- 치… 치익….
무전기에서 잡음이 들리기 시작했어. 구조대와 통신이 됐다는 이야기였지. 드디어 탈출할 수 있어. 눈에 보이는 희망에 기쁨이 샘솟았어. 헬기가 올 하늘을 올려다보며 답변을 기다렸어. 잠뜰 씨는 그런 나를 가만히 바라보더니 튼튼해 보이는 목재와 양털을 건네줬어. 우선 주니까 받긴 받았지.
- 구조 요청 확인.
- 승객 잠뜰 1인 확인 완료.
어라. 잠시 숨이 멎었어. 천천히 고개를 돌려 잠뜰 씨를 쳐다봤어. 잠뜰 씨는 별말 없이 내 손을 잡았어. 바스락. 손에서 종이 질감이 느껴졌어. 잠뜰 씨의 손이 떨어지자 차가운 바람이 나를 맞이했어. 피가 싸늘하게 식는 기분이 들었어. 시선을 돌려 손에 들린 종이를 응시했어. 뗏목 제작법. 검에 찔린 것 같은 아픔이 느껴졌어. 상처 따윈 없는데도 불구하고. 잠뜰 씨는 무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어. 내가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는 모르겠다만, 아마도 배신감에 치를 떨었으려나. 나도 모르게 한마디 내뱉었어.
'너 도라이니?'
'고마웠어.'
잠뜰 씨는, 아니. 잠뜰은 싱긋 웃어 보였어.
그녀는 악인인가. 사람을 죽음의 구렁텅이로 밀어넣는 행위만을 선악으로 나눈다면 악일 수도 있으려나. 잘 모르겠다. 고맙다고 말하는 잠뜰을 보니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내면에서 요동쳤어. 내가 이제까지 한 모든 게 헛수고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지. 잠뜰은 헬기가 1인용인 걸 숨겼어. 어차피 둘 중에서 한 명만 탈출할 수 있다는데, 적어도 본인이 탈출하고 싶었겠지. 헬기의 자리를 두고 나와 경쟁하기 싫었겠지. 무작정 숨기고 자신의 신원만 확인된다면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겠지. 그 무전기는, 수현은, 철 조각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이 내 공임에도 불구하고.
'덕개 씨. 그거 줘 봐. 내가 바꿔놓은 게 있어 그거에서. 바꿔줄게.'
잠뜰은 내 손에 들린 뗏목 제작법을 빼앗아 갔어. 갑작스러운 상황 변화에 당황한 나머지 반항할 새도 없었어. 잠뜰은 뒷걸음질 치며 내게서 멀어졌어. 입가에 웃음기가 여전히 남아있었어. 순수한 어린아이의 짓궂은 웃음. 정말 즐겁고도 소름 돋게.
'덕개 씨. 잘 외웠지? 혹시 모르니까 이건 내가 가져갈게.'
'사이코패스 아니야 저거.'
잠뜰이 책을 가져간 이유를 알 것 같았어. 저 책에는 잠뜰의 지문이 묻어있을 테니까. 혹시 모를 증거를 남기지 않기 위함이지. 잠뜰은 SOS를 남기기 위해 붙여둔 불에 뗏목 제작법을 던졌어. 얇디얇은 종이는 금세 제가 되어 사라졌어. 뗏목 제작법 따위, 문항도 몇 개 없어서 받자마자 외우긴 했지. 다만 그것과 이거는 별개였어. 잠뜰은 종이가 완전히 타버린 걸 확인하고는 나를 바라봤어.
'덕개 씨. 우리가 수현 씨를 같이 죽인 건… 영원한 비밀로 남기자고.'
웃었어. 즐겁게 웃었어. 웃음소리가 들렸어. 아주 즐거워 보이는 웃음소리가. 뭐가 그리 즐거운 거야. 사고가 돌아가지 않았어. 해맑게 웃던 잠뜰은 무언가를 떠올렸는지 가볍게 눈을 깜빡였어. 제 소지품을 이리저리 뒤지더니 무언가를 꺼냈지. 한 손에 쏙 들어가는 작은 유리병이었어. 잠뜰은 내게 다가와 다짜고짜 유리병을 쥐여주었어. 서늘한 유리의 감촉이 느껴졌어. 투명한 유리병 안에 오묘한 빛깔의 액체가 찰랑거렸어.
'아, 맞다. 혹시 혼자 죽어가는 게 너무 슬프면 이 독해 보이는 술이라도 마셔.'
용건은 이게 끝이라는 듯, 잠뜰은 뒤로 물러섰어. 그러더니 곧장 난간으로 다가가 하늘을 올려다보았어. 둘 곳 없는 팔은 난간에 기대더라. 그 모습이 왠지 모르게 익숙했어. 구명복에 손을 넣어 다이아 검을 꺼냈어. 방심한 잠뜰의 등 뒤로 살며시 다가갔어. 발걸음 소리를 죽이니 눈치채지 못했지. 모든 게 끝났다며 방심하지 않았더라면 상황은 달라졌을 수도. 이건 순전히 자신이 이겼다며 축배를 들던 잠뜰의 잘못이지. 다이아 검을 쥐어 잡은 손을 재빠르게 휘둘렀어. 갑작스러운 공격에 잠뜰은 반항 한 번 하지 못하고 그대로 쓰러졌어. 우습게도, 눈 깜빡할 새였어.
500m 거리를 단숨에 주파한 것도 아니었다. 숨을 한계까지 참은 것도 아니었다. 단순히 검을 휘둘렀을 뿐이었다. 그런데도 숨이 가빴다.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온몸을 옭아맸다. 심장이 뛰는 게 느껴졌다. 차가운 바람이 너무나도 아팠다. 내가 잠뜰 씨를 죽이는 게 맞았을까? 잠뜰 씨 역시 피해자다. 그저 탈출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럼 난? 나도 탈출하고 싶었어. 내가 정신 나간 놈이라서 라더와 수현을 죽인 줄 알아? 그들을 내 손으로 직접 떠나보내고도 멀쩡해 보이는 줄 알아? 내가 어떤 마음으로, 어떤 생각으로 검을 휘둘렀는지. 잠뜰 씨의 모든 행동이 불현듯 스쳐 지나갔다. 최대한 튀자고 말하는. 나를 의심하는. 수현을 상대하는. 수영 장비를 받고 도망치는. 양털과 레드스톤 조각을 들고 도망치는. 무전기를 고치는. 1인용이란 걸 말하지 않은. 뗏목 제작 물품을 건네주는. 뗏목 제작법을 빼앗는. 태우는. 독해 보이는 술을 건네는. 모든 게 끝났다는 의미의 웃음을.
하하. 웃음이 나왔다. 어떤 웃음인지는 모르겠다. 헛웃음이었을 수도. 활짝 웃는 웃음이었을 수도. 웃음을 빙자한 울음이었을 수도. 정답이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뭐 어때. 이제까지 모든 걸 삼키기만 했던 입 밖으로 웃음이 미친 듯이 새어 나오는데. 이건 업보다. 업보야. 적어도 내게 1인용이라는 사실을 말하기만 했다면. 누가 무엇으로 탈출할지를 정했다면. 그랬다면 이렇게까지 되지 않았을 거라고. 잠뜰이 손에 쥐고 있던 무전기를 빼앗았다. 나도 알아. 잠뜰의 곁에 다이아몬드 검을 던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뗏목보다는 헬기가 탈출 확률이 더 높겠지. 독해 보이는 술을 던졌다. 그래서 말하지 않았겠지. 튼튼해 보이는 목재를 던졌다. 그런데도 내게 뗏목 제작법을 알려준 이유는 양심 때문인가. 양털을 던졌다. 그 양심을 조금만 더 내보였다면 이리 되지 않았을걸. 수영 장비를 던졌다. 잠뜰이 문제였을까. 비상용 망치를 던졌다. 내가 문제였을까. 무전기 수리법을 던졌다. 누구 때문일까.
'덕개 씨. 우리가 수현 씨를 같이 죽인 건… 영원한 비밀로 남기자고.'
이젠 존재하지 않는 잠뜰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렸다. 라이터를 꺼내 불을 켰다. 그대로 바닥에 떨어트렸다. 목조 바닥이 아주 손쉽게 타올랐다. 작은 불씨는 화마가 되어 주변을 집어삼켰다. 모든 것이 불 속에 갇혔다. 그래. 이걸로 영원한 비밀이 되었다. 잠뜰이 원하던 대로.
나는 어떤 사람인가. 저 멀리서 헬기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몇 분 뒤면 이곳에 도착하려나. 차분하게 눈을 깜빡였다. 대형 크루즈의 모든 인원이 증발했다. 여기서 살아남은 사람은 나밖에 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의심스러운 상황. 그래서 어쩔 건데. 어차피 증거 따윈 없잖아. 나를 헬기에 태우고 떠나면 크루즈는 바닷속에 완전히 가라앉을 터다. 추가 증거를 수집할 수도 없는 상황. 남는 것은 나의 증언뿐이다. 내 죄를 뒤집어씌울 사람은 많다. 상황을 날조하여 정당방위를 주장할 수도 있다. 내가 잠뜰의 자리를 빼앗았다는 진실이 걸림돌이 될 테지만, 이건 어쩔 수 없지. 이제와서 돌이킬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이제 슬슬 헬기의 형체가 보이기 시작했다. 저 헬기에 타는 순간, 나는 잠뜰이다. 탈출하고 나서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내가 덕개라는 사실을 들키지 않는다면 별일 없겠지. 만약 들킨다면. 글쎄.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기로 했다. 드디어 머리 위에 다다른 헬기를 보며 싱긋 웃었다. 사회가 내게 어떤 낙인을 내린다 해도 신경 쓰지 않으리. 세상이 나를 악인이라 칭한 들, 살아남는 놈이 선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