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한국은 ‘뜨거운 물속의 개구리’… 위기의식조차 없다”

게시일: 2014. 10. 25 오후 4:23:17

정구현(鄭求鉉·66) 전 삼성경제연구소장은 이론과 실물경제를 겸비한 경영학자이다. 연세대 교수로 있던 그는 2003년부터 6년간 삼성경제연구소장을 맡았고 이후 연구소 상근고문을 거쳐 현재 한국과학기술원 교수로 있다. 서울국제포럼 회장, 자유경제원 이사장, 경기개발연구원 이사장직도 맡고 있다.

60대 중반의 나이에 이처럼 왕성한 활동을 하는 것은 다양한 경력과 미래를 내다보는 통찰력 때문이다. 그는 노태우 정부 당시 대통령자문 21세기위원을 비롯해 연세대 동서문제연구원장으로 있으면서 세계경제와 정치, 한반도의 정세 변화, 한국경제의 전망을 체계적으로 연구했다. 삼성경제연구소장으로 있으면서 ‘인접학문 넘나들기’는 계속됐다.

◇중국의 浮上과 블랙스완 북한

그가 최근 대한민국 15년 후의 미래를 다룬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를 낸 것도 이와 유관하다. 대한민국이 향후 15년간 새로운 성장동력을 재(再)가동하기 위해 개인과 기업, 정부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구체적인 해법을 제시했다. 올 10월 9일 서울국제포럼 회장실에서 만난 그는 한국의 미래에 대해 “우려되는 일들이 많다”고 말했다.

- 가장 큰 문제점은 뭡니까.

“먼저 외부 요인으로 중국의 부상(浮上)을 들 수 있어요. 중국이 미국과 경쟁관계를 넘어 갈등양상을 보이면 우리로서는 아주 불리해요. 우리는 안보는 미국에, 경제는 중국에 발을 담그고 있습니다. 줄타기를 잘 해야 해요. 또 다른 요인으로 ‘블랙스완(Black Swan·극히 드물지만 일단 상황이 발생하면 엄청난 충격을 주는 현상)’인 북한의 불안전성을 들 수 있겠지요.”

- 내부적 요인은요.

“뭐니뭐니 해도 고비용(고임금) 문제죠. 우리의 1인당 국민총생산(GDP)은 대만과 비슷한 2만 달러 수준입니다. 그런데 구매력평가(Purchasing Power Parity) 인당(人當) 소득은 3만5000달러로, 대만의 3만8000달러보다 적어요. 그런데도 대졸자 초임(初賃)은 우리가 세 배나 높아요. 대만의 대졸자 초임 월급은 1000달러 내외입니다. 우리 돈으로 100만원 수준이에요. 우리의 사회 전반 급여 수준은 대만보다 두세 배 높아요. 그만큼 경쟁력이 없다는 얘기입니다.”

정 소장은 또 다른 요인으로 강성(强性)노조를 들었다.

“대만에는 정치색 짙은 강성 노조가 없습니다. 대만은 경제적으로 중국 의존도가 우리보다 훨씬 높아요. 대만의 웬만한 기업은 중국에서 사업을 하고 있다고 보면 돼요. 근로자들이 임금을 올려달라고 하면 생산을 중국으로 이전하는 겁니다. 그러다 보니 지난 12년 동안 대만의 임금은 거의 동결 수준이었어요.”

◇삼성전자 착시현상

정구현 소장은 ‘대기업 강성노조가 주도하는 고비용 구조’와 함께 ‘시장테스트를 받지 않는 정부 부문의 비대화’도 한국의 위협요인이라고 했다.

“신(神)이 내린 직장, 신도 모르는 직장이라는 말이 있어요. 이들 직장의 특징은 급여가 높고, 근무조건이 훌륭하며, 직장 안정성이 높습니다. 이런 직장은 정부의 입김이 센 공기업이나 금융기관입니다. 이들 기업들은 시장의 테스트를 받을 이유가 없어요. 그러다 보니 노조의 힘은 더욱 세집니다. 얼마 전 모(某) 공기업에 신임 사장이 출근하는 첫날, 노조가 출근 저지운동을 벌였어요. 신임 사장 길들이기를 하는 거죠. 새로 부임한 사장은 노조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게 공기업의 현실입니다. 국내 금융권, 특히 주요 은행들도 마찬가지예요. 정부 지분이 없어도 업무 성격상 정부의 통제를 받으며 보호도 받고 있지요. 그러면서 시장 경쟁력은 키우지 않아요. 비효율성은 더욱 커지고 있습니다.”

정구현 소장은 “일본을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아야 한다”고 했다.

“일본이 왜 저렇게 됐는지 아세요? 80년대까지는 잘나갔지만 90년대 이후 여러 문제가 복합적으로 나타났지요. 이유가 뭘까요. 일본의 경제·사회적 폐쇄성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지요. 정부와 정치권이 기업 또는 이익집단에 포획된 것도 주요 원인이고, 난국(難局)에 처해 있을 때 과감한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의사결정 구조도 큰 문제지요. 묘하게도 지금 우리나라는 일본이 앓고 있는 문제에 봉착해 있습니다. 정부와 정치권이 국내 이익집단의 논리에 끌려가고 있고, 주요 현안에 대한 의사결정 과정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요.”

- 세계적 경기불황으로 국내 일부 대기업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믿고 싶지 않겠지만 전통적인 국내 대기업의 미래는 어두워요. 30대 그룹 중 12개 그룹은 영업이익으로 이자도 제대로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수익은 없는데 지출은 계속 늘고 있지요. 수익성이 낮은 기업이 높은 임금을 지불하다 보니 문제가 생기는 겁니다. 국내 대기업에는 삼성전자 착시현상이 있어요. 삼성전자를 뺀 대기업의 수익성은 국내 중견기업보다 낮아요. 대기업은 앞으로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게 될 겁니다.”

- 왜 이런 상황이 온 거죠.

“다각화의 함정에 빠졌기 때문이에요. 건설, 조선, 해운 등으로 무리하게 업종을 넓혔어요. 대기업 오너의 구조적 문제도 있고요. 오너 입장에서는 위험을 분산시키기 위해 사업을 다각화할 수밖에 없어요. 감히 말씀드리자면 이제 한국 재벌은 한계에 다다랐습니다.”

- 타개책은 없나요.

“지배구조, 경영전략을 확 바꿔야 해요. 경쟁력 있는 분야를 전문화, 국제화해야 합니다. 오너 중심의 의사결정구조도 바꿔야 해요. 전문경영인 제도도 효율적으로 운영해야 하고요. 오너 체제가 가진 장점과 전문경영인 체제의 장점을 잘 섞어야 해요. 삼성전자가 좋은 모델이라고 볼 수 있어요. 삼성전자는 글로벌 기업입니다. 이건희 회장, 이재용 부회장이 다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안을 들여다보면 그렇지 않아요. 오너와 전문경영인체제가 적절히 융합돼 있어요.”

  강성 노조에 의한 고비용 구조가 한국 경제의 주요 위험요인으로 꼽히고 있다. 지난 8월 ‘2013 중앙쟁대위 출범식’을 가진 현대자동차 노조.

강성 노조에 의한 고비용 구조가 한국 경제의 주요 위험요인으로 꼽히고 있다. 지난 8월 ‘2013 중앙쟁대위 출범식’을 가진 현대자동차 노조.

◇대기업은 세 가지 테스트를 거쳐야 산다

- 정치권은 표를 의식해서인지 걸핏하면 대기업을 손보겠다는 입장입니다.

“대기업들은 세 가지 테스트, 다시 말해 시장(市場) 테스트, 2·3세 후계자 테스트, 사회 테스트를 거쳐야 살아남습니다. 특히 높은 도덕, 윤리적 잣대를 들이대는 사회 테스트를 통과하기란 결코 쉽지 않아요. 기업 하기 점점 어려워지고 있는 거죠. 상황이 이러한데 정치권까지 나서 기업을 손보고 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냥 놔둬도 시장에서 살아남기 어려운 구조입니다. 무너지는 기업들이 계속 나올 겁니다.”

- 우리 사회의 고비용, 공공부문 개혁 등 시급한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합니까.

“사회 전체가 비용을 줄여야 해요. 급여를 동결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입니다. 고통을 분담해야 합니다. 그렇게 안 하면 기업도 근로자도, 노조도 힘들어져요. 공공부문은 과감히 축소해야 합니다. 요즘 민영화라는 말이 슬그머니 사라졌는데 다시 개혁의 칼을 꺼내들어야 합니다.”

정 소장은 “이를 해결하려면 결단력 있는 리더십이 필요하다”며 “더 큰 위기가 오기 전에 현명하게 대처해야 한다”고 했다.

“일본을 봐요. 20년간 지속된 경제적 불황에 이어 지진(地震)·후쿠시마 원전(原電) 사태까지 발생하니까 국민들이 위기감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라고 다를 게 없어요. 지난 4월 세계적 컨설팅 업체인 맥킨지가 ‘한국 경제는 서서히 뜨거워지고 있는 물속의 개구리 같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냈습니다. 경제성장률이 8%򌵵%򌵲%대로 떨어지고 가계부채는 해마다 늘고 있는데 정작 한국은 자신이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고 평가했습니다. 저는 맥킨지의 평가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30대 그룹 중 12개 그룹은 이익으로 이자도 못 내”

- 우리는 6ㆍ25전쟁 이후 배불리 먹고, 잘살기 위해 오로지 앞만 보며 달려왔습니다. 시장경제와 민주주의라는 제도가 한국인의 학습동기, 성과주의라는 가치관과 결합해 기적(奇跡)을 일궈냈습니다. 기존의 성공 방정식이 앞으로도 유효할까요.

“성공 속에서 싹튼 실패의 씨앗이 보이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정학적 상황, 경제정책, 정치민주화 그리고 일과 공부에의 몰입 등으로 성장을 이끌어왔습니다. 하지만 한국의 미래를 위협하는 것들이 너무 많아요. 그동안 미국만 잘 잡고 있으면 경제는 물론 안보·군사적으로 보호를 받을 수 있었어요. 이제는 중국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두 나라 사이에서 균형을 잘 잡아야 해요. 참으로 어려운 상황이죠. 민주화와 관련해 현재 우리는 정치과잉 현상을 보이고 있어요. 정치 논리가 다른 영역까지 침범하고 있습니다. 정치의 선진화가 시급해요. 정치권이나 정부가 관여하지 않는 산업에서는 오히려 좋은 성과를 내고 있다는 점을 정치권은 명심해야 합니다.”

- 우리는 기적의 성과를 냈음에도 행복지수가 높지 않다는 조사가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선진국의 경험을 비춰보면, 1인당 GDP가 2만달러를 넘으면 행복지수는 더 이상 올라가지 않는다고 해요. 물질적인 것에서 행복을 찾을 수 없는 단계에 이른 거죠. 우리 사회도 마찬가지예요. 치열한 경쟁, 남과 비교하는 강렬한 평등의식이 너무 강해요.”

- 현 정부가 출범하면서 창조경제를 내세웠습니다. 성공할까요.

“그동안 패스트 팔로워(fast follower·빠른 모방자)로서 성공했어요. 이제는 창조적 리더 역할을 해야 해요.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개인과 민간(기업)이 창의성을 발현하기 위해서는 경제환경이 자유로워야 해요. 그런데 지금 분위기는 반대로 가고 있어요. 그게 경제민주화로 포장돼 있습니다. 기업 하기 쉬운 여건을 만들어주지 않는 한 창조경제는 성공하기 어렵습니다.”

  공기업 개혁 또한 시급하다. 부채 상위 10대 공기업의 부채와 올해 부채증가액.

공기업 개혁 또한 시급하다. 부채 상위 10대 공기업의 부채와 올해 부채증가액.

◇“기업은 글로벌, 정치는 로컬 수준결단력 있는 정치 리더십 필요”

- 1인당 GDP 3만달러를 달성하기 위해 정부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경제 전문가라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입니다. 경제성장을 촉진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서비스산업의 빅뱅입니다. 여기서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야 해요. 서비스 분야 중에서 의료서비스와 금융서비스가 가장 희망적입니다. 영리병원도 인정하고 금융 분야의 규제도 확 풀어야 해요. 물류, 광고, 컨설팅 등 기업을 상대로 하는 전문서비스 분야도 활성화해야 합니다. 그 출발은 규제완화입니다. 규제를 푸는 데 거액이 드는 것도 아니죠.”

- 복지 문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복지는 명료합니다. 재정건전성을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복지를 확대한다, 이게 답입니다. 그러면 어느 부분을 확대해야 할까요. 세 가지입니다. 노인빈곤 해결, 육아지원, 의료혜택 확대입니다. 노인빈곤 해법은 기초노령연금을 기본적으로 늘리는 겁니다. 최근 정부가 기초노령연금과 국민연금을 연계하겠다고 발표했는데 적절한 조치라고 생각해요. 이런 말이 있어요. ‘선거 중에 공약(公約)을 남발하는 것은 죄악이다. 그러나 선거 후에 모든 공약을 실행하려는 것은 더 큰 죄악이다’라는 말처럼 공약 특히 복지 정책은 국가재정을 고려해야 합니다.”

정구현 소장은 복지 혜택을 늘리려면 기본적으로 세금을 더 거둬들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증세(增稅) 없는 복지 확대’를 계속 말합니다. 일례로 10%인 현행 부가가치세 제도는 1977년에 만들었죠. 지금까지 단 한 차례도 올린 적이 없어요. 유럽의 평균 부가가치세는 19%이고 25%가 넘는 나라도 있어요. 이번에 일본은 소비세를 5%에서 8%로 높였습니다. 우리도 국가 재정을 생각할 때 부가가치세를 10%에서 12%로 올려야 해요. 통일이 되면 14%까지 올려야 한다고 봅니다.”

◇“神이 내린 직장, 神도 모르는 직장에 가지 마라”

정구현 소장은 “한국의 정치문화를 시급히 혁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우선 국회의원들이 자기 말과 행동에 대해 책임을 안 집니다. 4년에 한 번씩 심판을 받기 때문에 거짓말을 쉽게 하지요. 문제 있는 정치인은 국민이 기억했다가 선거 때 꼭 심판해야 합니다. 기업은 매일매일 심판을 받아요. 소비자는 제품 품질 평가를 통해 기업을 심판합니다. 우리 경제는 이미 글로벌화돼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 정치는 아직도 로컬 수준입니다. 선진국이란 어떤 나라를 말합니까. 정치 수준이 글로벌 기준에 오른 나라들입니다. 글로벌 시각에서 경제를 봐야 하는데 로컬 시각에서 문제를 풀다 보니 괴리가 생기는 겁니다. 한국 정치에서 포퓰리즘이 심화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 좋은 정치 지도자의 조건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지옥으로 가는 길은 좋은 의도로 포장돼 있다’는 영국 속담이 있어요. 국민을 위한다고 하지만 그게 망하는 길이라는 뜻이죠. 포퓰리즘도 듣기에는 아주 좋습니다. 그러나 결말은 최악이죠. 정치지도자에게 요구되는 첫 번째 조건은 자신을 위한 정치를 하는 게 아니라 국가와 국민을 위해 정치를 하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대통령과 같은 국가 최고 지도자는 결정적 순간에 과단성 있는 결정을 할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흔히 일본의 리더십을 ‘합의에 의한 의사결정 리더십’이라고 합니다. 이런 의사결정 구조는 평화 시에는 괜찮지만 위기 때는 맞지 않아요. 지금 우리나라는 위기 상황입니다. 이런 시기에 정치와 경제 모든 분야에서 과감한 결정이 필요해요.”

- 한국과학기술원에서 강의를 하고 있는데 학생들에게 어떤 얘기를 주로 합니까.

“‘지금 신이 내린 직장, 신도 모르는 직장에는 가지 마라’고 얘기합니다. 편하고 월급 많이 받는 직장은 퇴직후 할 게 없어요. 자기 계발할 기회를 잃는 거죠. 지금 젊은이들은 앞으로 80세, 90세 넘게 살 거 아닙니까. 오래가는 사람은 계속 공부하는 사람입니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면서 꾸준히 학습하겠다는 삶의 각오를 다져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