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 문해력 탐구, 가슴과 가슴을 연결해주는 금실 찾기
_소현문 《평화 문해력》 전시에 보내는 글
김성희
Ⅰ. 여는 시
어두워지기 전에
그 말을 들었다.
어두워질 거라고.
더 어두워질 거라고.
지옥처럼 바싹 마른 눈두덩을
너는 그림자로도 문지르지 않고
내 눈을 건너다봤다,
내 눈 역시
바싹 마른 지옥인 것처럼.
어두워질 거라고.
더 어두워질 거라고.
(두려웠다.)
두렵지 않았다.
― 한강의 시 ‘어두워지기 전에’ 전문
사랑이란 어디 있을까?
팔딱팔딱 뛰는 나의 가슴 속에 있지.
사랑이란 무얼까?
우리의 가슴과 가슴 사이를 연결해주는 금실이지.
― 한강의 생애 첫 시, 노벨상 수상 기념 강연 ‘빛과 실’ 중에서
Ⅱ. 폭력의 경계 너머 평화를 읽는 눈
요즘 전 세계는 더 어두워질 세상에 대한 두려움이 지배하고 있다. 두려움을 넘어 두렵지 않는 밝은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지구촌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화를 원하고 있지만, 세상에서는 온갖 전쟁과 폭력이 끊이지 않고 일어나고 있다. 전쟁이나 내전, 내란의 소용돌이에 휘말려있지 않다면 우리는 평화롭다고 할 수 있는가?
평화학자 요한 갈퉁은 평화의 반대말이 ‘전쟁’이 아니며 ‘평화 부재’의 총체적 상황이 문제라고 말한다. 즉, 평화의 반대는 ‘폭력’이며, 세상이 평화롭지 않은 이유는 폭력이 많기 때문이다. 갈퉁은 평화를 소극적 평화와 적극적 평화로 구분하고, 폭력과 연결하여 설명한다. 소극적 평화는 직접적이고 물리적인 폭력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 전쟁이 일어나지 않고 총기로 죽는 사람이 없으면 소극적 평화가 달성된 것이다. 이에 비해 적극적 평화는 직접적이고 물리적인 폭력뿐만 아니라 구조적, 문화적 폭력까지 존재하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
직접적 폭력은 상대에게 물리적으로 상해를 입히기나 위협을 가하는 것으로 그것을 의도한 가해자가 분명히 드러난다. 반면에 구조적 폭력은 의도자와 행위자가 분명히 드러나지 않아 간접적 폭력이라고 부른다. 직접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간접적으로 사람들의 삶을 통제하고, 잠재적 능력을 발휘할 수 없도록 방해하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박탈한다. 많은 개발도상국에 만연해 있는 독재와 부패, 그로 인한 구조적 폭력이 대표적인 예이다. 선진국에도 구조적 폭력은 존재한다. 사람들을 민주적인 정치․경제 제도 때문에 사회 구조나 환경에 문제가 있다는 생각을 하기 보다는 자신의 잘못 때문에 삶이 힘든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문화적 폭력은 모든 상징 작용, 즉 종교, 사상, 언어, 예술, 과학, 법, 대중 매체, 교육 등에 내재하는 것으로 사람들에게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설득함으로써 직접적 폭력과 구조적 폭력을 정당화하는 역할을 한다. 문화적 폭력은 그 자체가 폭력의 형태로 나타나지는 않지만 정치적․경제적 폭력을 경유하여 궁극적으로는 군사적 폭력에 이르게 한다. 많은 사람들이 평화는 군사력을 강화함으로써 지켜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사상은 평화는 무기가 아니라 대화와 협력으로 이뤄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사회적으로 소외시키는 문화적 폭력이 된다. 막대한 군사비의 지출과 그에 따른 복지비의 감소를 정당화하고 가난한 사람들의 생존을 위협하는 구조적 폭력의 토대가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적극적 평화에 도달할 수 있을까? 일상에서의 구조적 폭력, 문화적 폭력을 넘어서 폭력의 어둠에서 벗어나길 원한다면 평화에 대한 문해력을 가져야 한다. 미국에서 20여 년간 비폭력 평화 수업을 해 온 교사 콜먼 매카시(Colman McCarthy)는 자신이 개설한 수업에 참석한 학생들에게 왜 평화 수업을 들으려고 하는지, 평화 수업을 통해 무엇을 얻어 가고 싶은지 묻는다.
이에 대해 학생들은 다음 같이 대답한다.
“저는 ‘사람다움’, 곧 제가 사람이라는 사실에 대해 부끄럽게 생각하기 떄문에 이 수업을 신청하였습니다. 우리 사람들은, 우리 자신을 포함해 아름답고 위대한 모든 것들을 죽이고, 마구 부수어 버리는 한 가지 목표에만 매달리는 것 같습니다. 제가 더 나은 사람이 되어, 이 세상을 조금이라도 바꿀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는 정치적 시각의 폭을 넓히기 위해 이 수업을 선택하였습니다. 또한 다른 사람들의 정치적 시각에 대해서도 더 열린 마음을 갖게 되기를 바랍니다. 저는 어떤 사건을 대할 때 제 방식대로만 이해하려는 보수적인 경향이 있는데, 이 수업을 통해 평화주의자들의 관점을 폭넓게 이해할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저는 중학교에 들어간 뒤로 언제나 간디를 존경하고 있습니다. 제가 원하는 세상이 이르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비폭력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비폭력 운동의 역사에 대해 배우고 싶습니다. 저는 전쟁이나 폭력적 혁명을 배우는 데는 이제 질려 버렸습니다. 그리고 평화적인 대안에 대해서는 배워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이 수업을 신청하였습니다.”
콜먼 매카시는 ‘평화를 원한다면 평화를 가르쳐라’는 명확한 메시지를 우리에게 준다. 디터 젱하스(Dieter Senghaas)는 ‘평화를 원하면 평화를 준비하라’고 말한다. 우리는 학교에서, 사회에서 평화를 배우고 준비하고 있는가? 우리는 학교에서 평화사가 아닌 전쟁사를 배운고, 일상에서 평화 놀이가 아닌 전쟁놀이로 게임하며, 평화박물관이 아닌 전쟁박물관을 체험한다. 그럼 한국 교육에서, 한국 사회에서 평화 문해력은 아득히 먼 이상인가?
“아이들이 폭력적으로 변하고 사회가 불안정한 것은 단지 개개인의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역사에서 평화사가 아닌 전쟁사를 배워서 문제를 폭력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을 심는 교육과정 또한 평화를 위해 개선해야 한다.”
한 중학생이 갈등과 폭력 단원을 학습한 후 쓴 성찰적 글쓰기에서 어둠을 넘어설 수 있는 평화 문해력을 본다.
피카소(Pablo Picasso)는 「게르니카」, 「한국에서의 학살」, 「전쟁과 평화」 로 우리에게 평화 문해력을 보여준다. 케테 콜비츠(Kathe Kollwitz)는 그의 작품으로 “씨앗들을 짓이겨서는 안된다.”라는, 사람들에게 차별과 폭력을 넘어서 밝은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는 평화 문해력을 보여 준다. 뱅크시(Banksy)가 팔레스타인 분리 장벽에 남긴 평화 문해력은 현재 진행 중이다.
작가 한강은 현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상충되는 두 질문을 동시에 던진다. “세계는 왜 이토록 폭력적이고 고통스러운가? 동시에 세계는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가?” 예술은 두 질문 사이에 놓인 심원의 장벽을 잇는 금실을 우리에게 내밀어 보인다. 직접적 폭력과 사회 속의 구조적 폭력, 이를 정당화하는 문화적 폭력을 읽어 낼 수 있는 눈을 부여한다. 우리의 가슴과 가슴을 연결해주는 금실인 평화 문해력은, 정치·군사적인 차원을 넘어 경제·사회·문화·생태적인 차원 등으로 확장되는 적극적 평화의 길을 낼 것이다.
참고 문헌
『비폭력 평화수업』, 콜먼 맥카시 지음, 이철우 옮김, 책으로여는세상, 2013.
『빛과 실』, 한강 노벨상 수상 기념 강연, 2024.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한강 지음, 문학과지성사, 2013.
『평화교육, 새롭게 만나기』, 전세현 엮음. 피스모모.
『평화적 수단에 의한 평화』, 요한 갈퉁 지음, 강종일 외 옮김, 들녘,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