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이 활동했던 후배 멘토들 중, 연극을 되게 좋아하는 후배가 있다. 생각, 가치관부터 봤던 웹툰이나 애니의 장르가 비슷해 동류의 사람으로 느꼈고, 이 친구가 재밌다면 나에게도 재미있지 않을까? 생각해 연극을 보기 시작했다. 마침 반복되는 삶에 재미도 없던 참이었다.
두서없이 나의 생각과 글을 작성하니, 목차를 보고 알아서 읽었으면 한다.
연극은 좀 생소한 취미이긴 하다. 장소, 시간과 비용의 제약이 크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시간을 맞춰 극장과 같은 공간에 가야 하고, 티켓 비용을 몇 만원 지불해야 되기 때문이다. 이런 제약들 때문인지 티켓 값 할인, 온라인 연극 등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연극이 대중적이라는 인식은 별로 들지 않았다. 그럼 이런 연극을 통해서 어떤 것을 느끼고 배울 수 있을까? 사람들은 본인이 살아온 환경으로 인해 느끼고 생각하는 것이 각자 다르기 때문에, 인터넷의 감상 평이나 후기 같은 주관적인 생각 100%의 글은 별로 와닿지 않았다. 그래서 연극을 되게 좋아하는 후배(그냥 연극 쌤이라 하겠다)에게 추천받은 연극 '붉은 낙엽'을 보러 갔다.
극장은 생각보다 매우 컸다. 내가 봤던 오백에 삼십, 자메이카 헬스클럽과 같은 대학로 연극은 지하에 되게 좁은 곳에서 진행되었기 때문에 연극은 원래 그런 곳에서 보는 건 줄 알았다. 그래서 그런가 이런 큰 극장에서 연극이 진행된다는 것이 신기했다. 내가 지금까지 봤던 연극은 뭐였지? 그냥 장난이었나 싶었다.
혹여나 늦게 도착해 못 들어갈까 걱정해서 나는 40~50분 정도 일찍 도착했다. 먼저 극장에 들어가 자리에 앉은 뒤 입장하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한껏 꾸민 사람들, 오늘만을 위해 옷장에 고이 모셔둔 가방과 코트, 목도리를 꺼낸 듯한 사람들이 내 주위에 앉았다. 뭔가 상류층 신사가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연극을 시청하였다.
붉은 낙엽은 한 가정의 붕괴를 다룬 내용이다. 꾸준히 돌봐주던 어린 여자아이의 실종을 시작으로 아버지는 자신의 아들을, 형을, 아내와 아버지까지 의심하게 되며 결국 가정의 불화와 자신을 제외한 가족의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삼촌은 어린 여자아이를 좋아하는 성적 욕망을 들켜 총으로 자살했고, 실종된 여자아이의 어머니가 총으로 아들을 죽였지만 경찰들의 조사를 통해 이미 사회적으로 죽은 거나 마찬가지였다. 범인은 가족이 아닌 피자 배달부였으며 여자아이는 살아 돌아왔음에도 주인공 가족은 사회적으로, 육체적으로 사망했다.
왜 이야기는 비극적으로 마무리되었을까? 이 비극의 시작은 어디였을까? 연극의 앞에서부터 시간 순서대로 따라갔을 때, 가정의 분화가 시작된 시점은 실종 사건의 다음이었다. 여자 아이가 자는 모습을 보고 아이의 집에서 나와, 자신의 집까지 오는 데 걸린 2시간의 공백이 의심을 시작이었다. 밤 12시 집 앞에 차량이 들렀다 간 것을 본 아버지와, 걸어왔다는 아들의 주장이 서로 맞지 않음으로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합당한 의심이 시작되었다.
그럼 의심이 나빴던 걸까? 그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가 가장의 책임자인 아버지였더라면 나의 가족의 무죄를 사회에 입증하기 위해 진실을 알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 자신이 아는 것과 틀린 내용에 대해 하나씩 살펴가며 주위를 의심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라 생각한다. 가족을 지키기 위해 시작한 의심이 스스로를 좀먹고 결국 의심은 전파되어 감당할 수 없는 비극적 결말을 만들게 된 것이다. 그럼 대상을 바꿔서 내가 아버지라면 어떻게 할 지 고민할 수도 있다. 어떻게 해야 가족의 평화를 유지한 채 실종 사건을 마무리할 수 있는지 말이다. 먼저 경찰의 조사에 확답하기 위해선 내 가족 구성원이 언제,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 구체적으로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아들, 아내와 형을 모두 모아 사건 당일 자신이 했던 행동을 적을 것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믿음이다. 나는 가족을 믿으나, 사회는 우리를 믿지 않는다. 따라서 믿게 하기 위해 결백을 증명해야 하고, 따라서 자신의 알리바이를 확실하게 적을 필요가 있다. 따라서 어떠한 거짓 없이 적어주기 바란다. 라는 식으로 얘기를 할 것이다. 그러면 아들과 형은 이를 위해서라도 거짓말을 하지 않았을까 싶다.
연극은 되게 재미있었다. 나는 책의 장르 중에서 단편 소설집을 제일 선호하는데(장편 소설은 읽다가 지친다) 연극은 그 단편 소설을 말과 행동, 조명과 소품으로 희극의 내용을 나에게 전달해주었다. 특히 조명의 연출을 통해 극장이란 하나의 공간을 여러 개로 나누고, 배우들의 동선을 통해 공간 활용을 하는 것이 신기했다. 가정집 주방이 펍(Pub)이 되고, 아들의 방이 취조실이 되며 그 공간에 대한 의미를 배우들의 말과 행동으로 통해 부여하는 것이 참 재미있었다. 세트장은 단순히 하나의 공간이지만 생각하는 대로 개별 공간이 되는 점이 연극을 볼 때 세심하게 보면 좋을 내용이라 생각한다.
또한 뮤지컬과는 다르게 음악이 없이 진행된다는 것이 연극의 매력이 아닐까 생각한다. 소리가 큰 음악이나 많은 배우의 춤 동작이 없으니 배우의 숨 소리, 걷는 동작 같은 세심한 것에 집중하게 된다. 거북목을 하고, 느린 말투와 게임에 빠진 듯한 눈빛 처리, 후줄근한 옷에 천천히 걸어가는 모습으로 아들이 소심하고 음침한 성격임을 알 수 있었다. 극의 마지막에서 의심받은 아들이 억울함을 호소할 때 터질듯한 파열음의 목소리, 갑자기 커진 동작과 무대 앞으로 뛰쳐나오는 저돌적인 행동은 그만큼 아들의 감정이 고조되었음을 보여주었다. 이런 익숙한 동작에도 배우가 전달하고자 하는 의도를 분명히 담아내는 것, 연극을 볼 때 집중하면 더 재미있게 연극을 즐길 수 있을 것 같다.
이번 극장은 경희대학교 서울캠퍼스의 학생회관에 있었다. 서울캠은 되게 오랜만에 가는 길이라, 가는 길에 감회가 새로웠다. 학교 행사로 파릇파릇한 학생들이 줄지어 가고, 해가 질 무렵의 빛에 비치는 건물을 올려다보니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회기역부터 학교까지 가는 길이 오르막이라, 경치를 구경하는 동안 숨이 가빠지긴 했다. 그래도 뭐, 기분은 좋았으니까.
나는 시간 약속을 좀 중요하게 여겨, 일정 시간의 30분 정도의 여유 시간을 둔다. 이동할 때에도 변수를 없애려고 지하철, 기차처럼 교통 체증이 적은 대중교통을 이용하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그런가, 이번 연극은 시작 시간보다 45분 일찍 와버렸다. 극장 문 앞에서 기다리는 날 보던, 연극부원의 당황한 기색이 조금 웃기면서 미안했다. 덩치 좋은 친구가 나에게 되게 조심히 얘기해주던데, 난 그 정도의 사람은 아님을 얘기하기 위해 일부러 활짝 웃었다. "아, 괜찮아요! 여기서 기다리겠습니다!" 40분 정도 멍 때리다 연극이 시작되었다.
법정에 있던 검사, 변호사, 피고인과 판사는 같은 대학교 연극 동아리 출신이다. 언론의 자유를 펼치기 위해 언론사 팩스를 통해 은밀히 전해지던 보도지침을 수집해 이를 책으로 엮어 출판하였다. 보도지침에는 고위직 관료의 악행을 국가 기밀이란 명목으로 신문의 보도를 막는 내용이 적혀있었고, 이 때문에 출판을 막고자 하는 검은 조직에서 연극 동아리를 탄압하고 고문하였다. 이를 겪고 동아리원은 각자 목적을 갖게 된다. 정의를 찾기 위해, 자유를 위해, 진실을 알리기 위해 노력하며 검사, 변호사, 피고인, 판사가 되어 한 법정에 서게 된다. (연극을 보면서 비슷한 내용을 본 기억이 있었는데, 노무현 변호사의 일생을 담은 영화 '변호인' 과 흐름이 유사하다. 법정에 대해 어려워한다면 영화를 먼저 보고 와도 좋을 듯 하다.)
연극의 등장인물은 크게 두 분류로 나뉜다. 언론 자유에 대해 탄압을 받은 뒤 1. 폭력과 두려움에 순응하고 눈을 감는 자(검사)와 2. 탄압을 반대하고 적극적인 자유 운동에 앞장서는 자(피고인, 변호사)로 나뉜다. 검사의 주장은 '나라 발전에는 부정적인 면도 있으나, 긍정적인 면도 있다! 왜 부정적인 면만 들추어보냐? 고속도로, 올림픽 개최했잖아?' 라면, 피고인의 주장은 '대한민국 시민은 알 권리가 있다! 나의 아이에겐 정직한 나라에서 살게 하고 싶다!' 이다. 이 사이에서 듣는 입장인 판사는 결국 둘 중 하나의 편을 들어줘야 하는데, 피고인에게 징역 1년을 선고하곤 재판이 끝나게 된다. 판사도 결정하지 못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판사는 이 얘기를 꺼내며 연극은 마무리된다.
"서로 의견을 양보할 생각은 없습니까? 누구 하나 가까워질 노력하지 않나요!"
(내가 요약하느라 내용을 많이 축약해 담은 내용이 많이 적고 왜곡이 있을 수 있다. 내용에 대한 관점은 보는 사람 마음이니, 꼭 봤으면 좋겠다.
이 연극에서 듣고 있던 위치의 사람은 판사이며 우리(방청객)이다. 우리는 연극을 제 3자의 입장에서 듣고 판단하는 입장이었고, 나도 연극이 끝날 때 까지 나의 방향은 어디와 평행한 지 고민하였다. 사회 발전에 큰 기여를 했으나 폭력과 고문의 과정으로 약자를 밟아온, 소위 엘리트 집단인지. 자유를 외치며 국민의 계몽을 선두했으나 그거 빼곤 한 거 없는 언론 집단인지. 아니면 이를 보고 경험했지만 공포와 두려움으로 방관하고 도망친 사람들인지. 솔직히 나는 전자의 검사 역할이 '나라 발전'에는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1%의 엘리트가 나머지 99%의 국민을 이끄는 형태가 경제 급성장이란 목적에는 맞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큰 돈을 굴릴 수록 더 많은 돈을 벌게 되는 경제 시장처럼, 더 많은 것을 아는 엘리트들이 나라를 굴리면 더 빨리 굴러가긴 한다. 다만 그 과정에서 악습과 부조리, 고문과 성착취 등의 어두운 면도 생길 것이다. 하지만 이는 '나라 발전'의 목적에만 적합하지 '인권의 나라' 라는 주제에는 전혀 맞지 않는 선택일 것이다. 발전의 변곡점을 겪고 있는 현재의 대한민국에 중요한 건 더 높은 발전이 아닌, 사람 개인의 인권이 더 중요하다. 지금 같은 시대에 학생들을 잡아가 구타하고 실종사시킨다면, 그건 심각한 범죄가 될 것이다.
나는 서로 양보하지 않는 두 집단이 바보같았다. 팽팽한 줄처럼 누구 한 쪽이 양보할 생각이 없는 모습은 이분법적인 사회를 비판하는 것 같았다. 사회 구성원들을 정확히 2개로 나눌 수 있는 의견, 통념은 존재하지 않는데, 어떤 의견이든 장단점이 있는데 이를 무시한 채 누구 하나 죽을 때 까지 부딛히는 모습은 참으로 안타까웠다. 왜 중간은 없었나? 서로 각자의 선만 지켰더라면 누구 하나 피해보는 일은 없었을텐데. 자신의 이익을 위한 욕심 때문인가? 무너지지 않기 위한 기득권의 권력 다툼 때문인가? 이유는 많겠지만 결과만 보면, 이분법적인 사고는 재판이 끝난 뒤에도 합쳐지지 않았다. 그냥 전에도, 미래에도 이분법적인 사고를 갖고, 마치 평행한 두 쌍의 선처럼 누구 하나 양보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오랜만의 소극장이었다. 한 줄에 8명 정도로 3줄의 관객석이 있던 좁은 공간이지만 그만큼 배우들의 연기를 가까이서 볼 수 있음이 좋았다. 배우들이 얘기할 때의 떨리는 진동, 말투와 표정, 행동이 한 눈에 들어와 몰입하기 너무 좋았다. 클라이막스로 갈 때 배우들의 외침의 진동은 음향 기기 없이도 나를 울렸다. 그 정적을 깨는, 터져나오는 파열음의 매력은 단순하게 비유하자면 닭가슴살의 단백한 맛과도 같다. 비유가 좀 이상하지만, 그만큼 깊고 진한 느낌을 내 귀에 때려준다는 것이 너무 좋았다. 다만, 자리가 좁고 의자가 불편한 만큼 앉아있는 행위 자체가 힘들었다. 그래도 그걸 감안하더라도 소극장의 매력은 포기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난 처음에 학생들이 한다고 해서 극단에서 활동 중인 배우들과 비교하게 될까봐 걱정이었으나, 그건 나의 오만이었다. 연극을 시작하며 새로운 등장인물들이 입을 열 때마다 각자의 개성이 오히려 연극의 재미를 높여주었다. 발음이 새는 것, 사투리와 작은 목소리는 나에게 신선한 느낌을 주었다. 이게 진짜 연극이구나, 내가 연극을 보는 입장이라고 연극에 진심이지 못했구나의 자기 반성도 하게 되었다.
희극인들이 가끔 방송에서 '난 연기를 할 때 살아있음을 느낍니다' 라고 얘기하는 걸 tv에서 봤다. 소파에 누워있던 나는 뭔 소린 지 이해가 되질 알았지만, 연극을 보기 시작하면서 그 느낌에 대한 감을 잡아가고 있다. 2시간 가량의 대사를 외우셨을 배우들이 연극이 끝나고 손을 잡고 인사할 때의 눈동자를 보면, 그 동공에 보이는 밝게 빛나는 안광은 부러울 정도로 멋있다. 행복감과 뿌듯함, 자부심과 노력의 결과를 보여줬다는 생각이 내가 보기엔 너무 멋있다. 나도 언젠간 저런 눈빛을 가진 사람이 되고 싶다고 다짐하게 되었다.
세 번째 연극 장소는 국제캠퍼스 예디대 A&D홀 지하 1층에서 진행되었다. 평소에 예디대는 전혀 가보지 않았기에 지하에 그런 넓은 공간이 있는 줄 상상도 하지 못했다. 다른 소극장 정도의 공간으로 생각했었는데 천장도 높고 의자도 많아 신기했다. 재미있던 건 나는 멍 때리며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는데 다른 사람은 익숙한 지, 극장으로 들어가는 길을 자연스레 찾아내는 것이었다. 내가 서울에 놀라간 시골쥐가 된 것 같아 약간은 부끄러웠다.
내가 보았던 연극과 다르게 연극 시작 전 배우들이 무대에 있는 것이 신기했다. 약 20분 정도를 무대에서 각자 감정 연기를 했는데, 관객이 입장하고 웃는 그 시간에 감정 연기를 하는 게 신기했다. 연기자에게 너무 부담을 주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나였더라면 감정 몰입하다 크게 웃었을 것이다.
이번 티켓은 나의 연극 쌤이 대신 끊어줬다. 그만큼 자리가 너무 좋았다. 2번째 정 중앙의 자리를 앉아 무대 전체를 쉽게 볼 수 있어 연극을 보는 동안 연극 쌤에게 너무 고마웠다.
손을 다쳐 더 이상 첼로를 연주할 수 없는 첼리스트 남자와, 남자 대신 돈을 벌어 생계를 유지하는 은행원 여자가 연극의 주인공이다. 연극은 현재 - 과거 - 현재 순으로 구성되는데 서로를 생각하며 행복하게 사귀었던 과거의 얘기를 보여주고, 과거의 서로가 헤어짐에 다시 현재로 돌아와 회상하는 흐름으로 연극은 진행되었다. 첼로 소리를 싫어하던 여자와 싸구려처럼 보이는 케찹을 싫어하던 남자는 현재로 돌아와 첼로와 케찹을 좋아하게 되며 서로를 그리워함을 느낄 수 있었다.
이번 연극의 스토리는 처음에 이해하기 어려웠다. 과거의 좋은 연애가 아무리 미화가 된다고 해도, 서로가 소리지르며 싸우고 다투는 모습이 서로를 그리워하게 만드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첼로 소리가 영혼이라며 여자 친구의 입장도 무시하고, '너 생리해?', '너는 가슴도 작잖아'처럼 모독적인 얘기를 하는 남자는 호구가 맞다. 그냥 호구도 아니고, 천하의 개호구다. 근데 남자 친구가 케찹이 싫다고 해도 밥에다 듬뿍 뿌리고, 낭비벽이 심해 할인만 하면 눈이 돌아가는 여자도 호구다. 아무리 서로가 좋아서 사귄다고 해도 서로를 듣지 않는 연애는 연애가 맞을까? 미화될만한 정도인가? 내 생각으론 이건 그냥 서로에게 상처만 주는 관계 이상을 넘지 못한다.
또한 나눠준 팜플렛에서 연극이 4개의 장으로 나눠져 있다고 적혀있었지만 2, 3장의 내용이 거의 유사한 게 아쉬웠다. 크게 보면 2장은 서로 싸우다 화해했고, 3장은 서로 싸우다 헤어진 내용인데 서로 싸우는 레퍼토리가 거의 유사해 내가 연극을 보는 지, 이혼숙려캠프 프로그램을 보는 지 헷갈릴 정도였다. 서로가 싸우는 모습 위주로 극이 진행되다 보니 보는 나의 답답함으로 편하게 보긴 어려웠다.
나는 기획자가 의도한 바를 알고 싶어 입구에서 나눠준 팜플렛을 정독했다. 요약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물과 기름처럼 전혀 섞이지 않지만 그들에게는 서로를 추억하는 행복한 연애였다. 우리에겐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그들에겐 뜨거운 사랑이었을 연애, 그럼 무엇이 안녕한 연애일까. 안녕한 연애가 존재할 지는 모르지만, 우리에게도 추억할만한 과거의 연애가 있을테고, 그 연애의 잔흔은 지금와서 어떤 기억과 감정으로 남아있는 지 생각하게 되는 연극]
뭐가 안녕한 연애일까? 사람들이 생각하는 완벽한 안녕한 연애란 무엇일까? 상대를 만나면 항상 행복한 관계? 서로의 욕구를 해소하기 위한 뜨거운 관계? 과연 완벽한 연애가 존재는 할까? 이런 연애의 정의에 질문을 던지는 연극이었다. 이를 보며 나의 연애도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과거의 내가 좀 더 상대를 이해하려고 노력했다면 더 좋은 관계가 되었을 텐데. 내가 덜 이기적으로 행동했다면 상대가 눈물 흘린 시간이 적었을 텐데. 여자친구였던 친구는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좀 더 잘해줬더라면, 그때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그녀의 붉어진 눈시울을 보지 않았을 텐데. 나의 다음 여자친구가 될 사람이 더 안녕하고 행복하기 위해선 내가 어떻게 해야 될까... 고민하며, 생각하며 나의 타자 속도는 점점 느려졌다. 처음 생각했던 것과 달리 연극의 겉모습만 보는 게 아니라, 기획자가 의도하는 바를 짚고 보면 연극을 다시 볼 수 있게 되는 것 같다. 나의 개인적이고 부끄러운 모습을 꺼내어 하나씩 정리하도록 생각의 씨앗을 던져준 연극이었다.
이번 연극은 오로지 2명의 배우로 110분을 채운 연극이었다. 그 많은 대본을 감정을 담아 내뱉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일지 상상이 되지 않는다. 배우들이 연기에 집중하는 만큼 나도 그들의 작은 말과 행동에 집중하였다. 눈의 방향과 손짓,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부터 외치는 울림까지. 이를 하나하나 인식하고 느끼는 것이 너무 좋았다. 연극이 재미있는 비중은 배우가 절반, 스토리가 절반이라 생각하는데 배우들의 연기가 너무 멋져 재미의 절반을 다 채운 느낌이 들었다. 사람들의 시선을 주목하고 분위기를 유도하는 게 배우의 매력이 아닐까 싶다.
네 번째 연극도 예술디자인대학 지하 1층의 A&D홀에서 진행되었다. 오전에 도서관에서 자소서를 좀 쓰다가 시간 맞춰 갔는데, 오늘은 유난히 연극을 보러 온 사람이 적어보였다. 이전 연극은 대부분 학생들이 많이 보러 왔는데 오늘은 고등학생부터 할머니까지 연령대가 다양해 신기했다. 연영과의 연극이 잘한다는 소문이 났나? 나만 알고 싶었는데 작은 욕심이 났다.
입장 시간이 돼서 표를 들고 들어가는데, 저번 '첼로와 케찹' 연극에서 남자 배우를 연기하셨던 분께서 입장 진행을 하고 있었다! 순간 내가 아는 사람이었나... 생각해 말을 걸려다 배우 분이라는 게 생각이나 바로 모른 척 하고 들어갔다.
이번 무대는 이전 무대와는 달리 소품이 적고 무대 구성이 간단해서 신기했다. 이만큼 소품이 적으면 연출자가 전달하는 바가 전달이 잘 될까? 소품 대신 말로 설명할테니 오늘은 좀 더 집중해야겠다! 내용이 안 어려웠으면 좋겠다...! 혼자 생각하며 연극은 시작했다.
연극 진행 자체가 거의 말로 진행되어 (오늘은 특히) 이해하기가 어려웠는데 그래도 대충 얘기해보겠다. 등장인물은 총 2명으로 대학교 교수님과 학생으로 이뤄진다. 학생은 평소 자신이 좋아하던 교수님과의 글쓰기 수업을 진행하게 되었다. 학생에게 주어진 수업 과제는 자신의 희곡을 작성해오는 거였는데, 모두 주제가 같고 이야기가 중구난방이라는 평가와 학생의 희곡들은 다 반려되었다. 사실 그 희곡들은 학생이 겪은 동성 성폭행이란 사건을 포함했고, 글을 쓸 때마다 글의 주인공에 자신을 투영해 참을 수 없는 슬픈 감정으로 인해 글을 끝까지 작성할 수 없었다. 이후 교수님과의 예술의 정의에 대한 토론을 통해 글을 끝마칠 수 있었고, 교수님과 같이 작성한 글을 읽어보며 서로의 생각을 확인하였다.
전체적인 내용 구성은 이런 식으로 진행되었는데, 나도 어림짐작으로 이해하고 넘어간 내용이 많아 연극의 세부적인 내용에 대해 이해하진 못했다. 주인공이 겪은 동성 성폭행과 죽은 주인공은 서로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모든 사건에 대해 한 발자국 뒤에서 보는 교수님의 행동이 잘못된 것처럼 주인공은 얘기했는데 왜 그랬는지, 자신이 존경하던 원로 교수님이 학생의 글을 자기 껏으로 훔친 것을 알았을 때 교수님의 마음이 어땠는지... 연극의 막이 끝나고 그 사이의 적막에 열심히 생각해봐도 마땅한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보통 연극을 보면서 연극 내용에 대한 고찰을 적곤 했는데, 많이 이해하질 못해서 적을 내용이 오늘은 많이 없다.
배우들의 연기는 엄청 뛰어났다. 소품이 없는 만큼 사실 조명과 배우의 연기를 통해 작품이 진행되어야 했기에 나도 자연스레 배우의 행동과 손짓, 눈동자의 방향과 말투에 하나하나 신경쓰며 연극을 보았는데 연극을 보는 과정에 전혀 불편한 점이 없었다. 등장인물의 감정이 배우를 통해 나도 느끼게 되었고, 그 사건이 일어났을 때의 감정, 기분이 나에게도 전달될 만큼, 같은 학생이라는 것을 못 믿을만큼의 멋진 연기였다. 그래서 이런 연기를 무료로 보는 게 너무 아까워서 연극을 보고 나올 때 벽에 걸려있던 배우들의 봉투에 응원의 말을 적어 넣었다.
또한 이번 연극은 무대의 경계가 흐릿해서 더 재미있던 것 같다. 죽은 학생을 위한 꽃을 놓는 장소를 관객석으로 하여 나의 호기심을 불러일으켰고, 테라스에서 맥주를 마시는 장면에서 무대의 턱에서 앉아 맥주를 마시는 것으로 하여 더 가깝고 재미있는 연출을 볼 수 있었다. 연극 중간에 한 사람이 들어와서 나는 이 사람이 다른 배역이 있나? 하고 유심히 보고 있었는데 그냥 늦게 들어온 사람이었던 것을 2분 정도 뒤에 알았다. 약간 부끄러웠지만 다시금 연극에 집중하였다.
오늘 연극은 추상적인 개념을 얘기하는 만큼 내용 이해력이 많이 떨여졌다. 다음에 이 연극을 다시 보게 된다면 시놉시스 및 내용 이해에 대해 완벽히 숙지한 다음 보러 가도록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