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몸이 뜻하지 않게 둥둥 떠져 옮겨져 있다.
엄지만 한 바퀴벌레와 조우해서 안락한 서울 방을 급히 옮겼을 때를 제외하면, 대개는 떠밀리듯 머무는 자리가 바뀌었다. 그래서 싫었다는 건 아니지만, 푸는 일보다 싸는 일을 염두에 두며 물건을 놓는 버릇 같은 것이 생기는 것이 좀 지쳤을 뿐이다. 그래서 아무 데도 가지 않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을 때면, 후퇴인지 휴식인지 분간 하지 못하면서도 그냥 가만히 있는 쪽을 택해 버리고. 조용히, 더 잃지 않으려고, 이러는 것도 덜 흔들리고 싶어서인가 보다 생각해버리고 만다.
이런 몸뚱이 하나 해 먹일 요리를 한다는 것도 작정해야 하는 일이 되어있다. 그래도 좀 기운이 나면 한 솥 끓여 놓고 퍼먹을 수 있는 음식을 해 놓는다. 카레와 미역국 같은. 언제 먹어도 큰 변형이 없고 꿀떡꿀떡 넘어가는 부드러운 무언가. 어느 날은 중요한 일정을 앞둔 밤에 알 수 없이 크게 앓았다. 속이 계속 울렁이고 누워만 있어도 몸이 제자리에 놓이지 않는다. 일을 먼저 소화하고 나서야 속이 뒤집혀 한숨도 자지 못한 이유가 전날 만들어 먹은 감자 카레였다는 걸 짐작했다. 오른쪽 뺨에 작고 푸른 싹이 나 있던 감자였다. 잠시간 고민했지만, 손으로 힘을 조금 내어 쥐었을 때 물컹한 면이 없어서 잘 갈라서 조금만 쓰기로 하고, 그래도 솔라닌[1]이라는 독소가 얼마나 퍼졌을지 육안으로 쉽게 구분되지 않으니 분명 아깝지 않게 파냈다. 움푹 팬 자리가 크게 남을 만큼, 충분히 도려서.
싹은 겉에서 보기엔 위험한 기미지만, 제 몸을 다른 방향으로 밀어 올리는 일이 쉬웠으려나. 이미 한 번 땅에서 뿌리째 뽑혀 털어져 나온 몸이 너절해진 잔뿌리와 몽땅 잃은 흙의 감각만으로 자기 내부의 힘으로 가까스로 버틴 무엇이었을 것이다. 꼭 내가 아는 누구처럼 말이다.
“엄마는 엄마가 살던 곳으로 가고 싶지 않아?”
움푹 팬 감자를 보고 있자니, 자기 몫을 덜어낸 사람에게 한 번쯤은 그렇게 떨어져 나가도 될 만큼 정말 필요 없는 사람이었냐고 묻고 싶었다. 왜 다른 사람들에게 그만큼이나 파내어 준 것인지 날이 선 채로 묻고 싶었다. 시집와 곧장 고향과 가족을 떠나 시부모님 옆에 붙어서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왜 당신이 남아 살뜰히 모시는 것인지 묻고 싶었고. 그럼에도 나 역시 그들을 사랑했기에, 그런 결속에 이기적으로 안심하면서도 그녀가 다 닳아버릴까 그게 또 가장 불만이었다. 멋대로 살지 못하는 것이 죄라도 되는 것처럼, 어쩌지 못하고 계속 내어주기만 하다가 “이제 올라가자.”라는 말을 한 것은 엄마 자신이었다.
감히 그렇게 힘들었으면서. 붙잡듯 울어주는지. 조금의 원망도 없이 온몸의 힘을 실어 절규하는지.그 소리를 듣고 있다 보면 어떤 물음도 꺼낼 수 없는 것이 돼 버렸다. 묻는다고 알 수 있는 것이 영영 아니기도 하고. 그렇게 몇 년 전 가족은 조부모님 두 분의 장례를 모두 마치고 30여 년의 삶,이웃, 집들을 정리하고 엄마의 고향인 서울로 돌아왔다. 마침내 떠날 수 있을 때조차 그곳에 있는 죽음과 사랑을 묻어주고 천천히 자신을 옮겼다. 한동안 엄마는 짐을 완전히 풀지 못했다. 오래 머문 자리에서 빠져나온 몸은 곧장 가벼워지지 않겠지. 손가락이라도 걸고 이제라도 전처럼 무르지 않고 쉽게 내어주지 말자고 하고 싶은데, 함부로 부끄러워할 수 없는 사람에게 대체 무슨 다짐을 받고 싶은건지.
늑대의 앞발
시큰둥하게 기사 하나 훑다가 지금 있는 데서 조금 더 밀려나야 한다는 것을 늑대의 몸이 어찌 알았을까 신기하다. 단단한 벽보다 서 있는 바닥의 흙이 더 부드러울 수 있다는 것을 또 어떻게 알고. 그나저나 바깥을 되뇌면서 얼마나 오래 앞발을 움직인 것일까.
흥미로웠던 점은, 한 쪽은 늑대의 탈출을 응원하고 한 쪽은 포획을 간절히 바란다는 것이었다. 양쪽의 입장이 무엇을 지시하는지 명확히 알 것 같았다. 가본 적 없는 곳이 곧 자유가 되는 것은 아닐 테다. 밟아본 적 없는 땅으로 나서는 일은 더 큰 불안을 들여오기도 한다. 그렇게 빠져나간 울타리에서 태어난 늑대의 탈출은 곧장 생존으로 이어지지 않겠지. 밖의 공기와 땅이 한 번도 자기 것이었던 적 없는 존재에게는 더 그럴 것이다. 실은 바깥에도 견뎌야 할 것들이 있다.
그럼에도 파내고 싶어지는 돌파의 순간들이 있다. 지겨워서가 아니라. 여기에서 더는 버틸 수 없을 것을 짐작해서. 밖으로 나간다고 해서 더 잘 살아낼 수 있는 것은 아니고, 안에 있다고 해서 처참히 갇혀 있는 것도 아니다. 누구는 그 자리를 지켜서 끝내 그 바닥을 자기 것으로 만들기도 하고. 그 바닥을 개서 다른 곳으로 성큼 움직이기도 한다. 이동은 도망이 아니라 살기 위해 파는 일이고, 머묾은 포기가 아니라 지키는 방식일 수 있다는 것. 감자와 엄마 그리고 늑대, 모두 살기 위해 밀어내면서 버틴 것이겠지. 그들의 자리를 보며 여전히 물을 것이 많은 얼굴로 서 있을 테지만, 그런 나도 떠밀리는 대로, 파이는 대로, 파다 만 채로 살고있다. 그래서인지 지난 감자 카레가 ‘속은 상해도 맛은 있었지’라는 생각이 들고 만다.
[1] 솔라닌(solanine) : 알칼로이드 배당체(당알칼로이드)의 일종으로, 일부 가지과 식물이 해충 등 외부 환경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생산하는 대사산물(생물독)로 감자나 토마토 등에 널리 함유되어 있다. 솔라닌의 어원은 솔라닌을 처음으로 분리해낸 식물인 가지과의 한해살이풀인 까마중(Solanum nigrum)의 학명이다. 출처: 나무위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