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ith Article
Shin Banpo Church
Shin Banpo Church
Breakaway Ministry에서 들은 말씀 중 일부를 이미지화 했습니다. 왜 성령 충만을 누리지 못하는가?
넘쳐 흐르는 생명의 강인 성령으로부터 멀어져 있기 때문에. 성령 하나님 앞으로 가까워져야 한다!
이미 내 안에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들로 가득 채운 상태에서 받으려 하기 때문에. 나를 비우고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라!
성령의 강한 임재가 내 삶의 주도권을 가져갈까 무서워서. 성령을 막는 내 손을 치우고 잠잠히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바라보라!
은혜를 받는 순간은 있지만 아주 잠깐 누리고 바로 떠나서. 그 자리에 머물러서 성령의 채우심을 받으라!
우리는 단지 성령 하나님 앞에 1. 다가가야 한다. 2. 빈 상태로 나아가야 하며, 3. 그 자리에 머물러서 4. 채워져야 한다. 그러면 지속적으로 채움받고 채워지는 역사가 일어날 것이고 성령의 은혜가 넘쳐 흘러 다른 사람에게도 그 은혜를 나눠줄 수 있다. 이게 바로 성령충만한 삶이다.
세상은 행동에 집중한다. 범죄의 성립요건을 보면 해당성, 위법성, 책임성이 필요하다. 범죄 사실이 존재해야 하고, 사회통념상 허용되지 않아야 하며, 행위자에게 책임이 있어야 한다. 이 모든 것은 범죄가 구체적인 행동으로 드러났음을 전제로 한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는 다르다.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요일 3:15)라는 말씀처럼, 하나님은 행동의 기저에 있는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신다. 잠언에서는 사람의 행위가 정직하고 깨끗해 보일지라도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하신다고 말한다(잠 16:2, 21:2).
구약 시대부터 하나님은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여호와는 중심을 보신다"(삼상 16:7)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외적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만이 아니라, 삶의 중심이 하나님으로 가득 찬 예배자를 원하신다.
성경은 "그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고 말한다. 좋은 나무는 아름다운 열매를, 못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마 7:17).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열매를 최대한 보기 좋게 가꾸려 했다. 예물과 십일조 같은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을 하며 남에게 보이기를 좋아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에게 "먼저 안을 깨끗하게 하라, 그러면 겉도 깨끗해지리라"고 말씀하시며 "회칠한 무덤"과 같다고 하셨다(마 23:26-27). 신약에서는 바리새인을 통해 겉이 아닌 속에 무엇이 있는지를 바라보라고 지속적으로 가르치신다.
로이드 콰스트(Lloyd Kwast)에 따르면, 행동은 가치에서, 가치는 신념에서, 신념은 세계관에서 비롯된다. 이러한 4중 구조를 우리는 '문화'라고 부른다. 교회를 오래 다니면 크리스천의 행동들은 따라할 수 있다. 하지만 진정한 크리스천이 되는 것은 행동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세계관을 뒤바꾸는 것이다.
예수를 믿고 구원받은 사람은 단순히 행동이 아닌 마음이 변화되어야 한다. 수동적인 교인이 아닌 능동적 성도가 되어야 한다. 그러려면 내 세계관이 바뀌어야 한다. 그리스도를 믿기 전과 후는 아예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이다. 나와 내 주변의 시각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관점과 마음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참된 성도는 어떤 성도일까? 하나님의 정신과 세계관으로 무장된 주님의 군사요 자녀요, 예배자일 것이다. 자녀는 부모를 닮을 수밖에 없다. 모습, 행동, 습관, 성격 모두 조금씩이라도 유전적으로 닮아있는 부분들이 있다.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도 마찬가지다. 만약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맞다면 하나님의 모습, 행동, 습관, 성격을 닮아야 한다.
참된 교회는 어떤 교회일까? 좋은 교회의 특징들을 생각해보자. 사랑이 많고 따뜻한 교회, 성도 간의 교제가 활발한 교회, 구제와 사회 변화에 힘쓰는 교회, 선교적 비전이 있는 교회, 명확한 말씀이 선포되는 교회. 모두 옳다. 하지만 뭔가 부족하지 않은가? 진정으로 좋은 교회는 교회에 모인 성도들 중 복음의 재생산자가 얼마나 되는지에 달려있다.
스스로 생각해보자. 나는 복음의 종착지인가? 아니면 새로운 발산지인가? 나는 교회에서 양분을 끌어들이기만 하는 나무인가? 아니면 좋은 열매를 맺어내는 좋은 나무인가? 무엇보다 나의 삶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드러내고 있는가?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시고, 세상 모든 민족에게 그 복을 전하기 위해 우리를 먼저 부르셨다(창 45:5). 우리는 넓은 세상 속에서 우리는 내 몸 하나 건사하기 위해 끙끙대며 살아가도록 설계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설계하신 세상 모든 민족을 구원하기 위한 일에 우리 모두를 부르셨다.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한다.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히 10:39). 또한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의 주인공은 바로 '우리'다.
퍼스펙티브스 선교훈련을 듣고 기도제목이 달라졌다. 선교에 대한 퍼즐조각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되며 평생 선교적 비전을 가지고 살아가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나가는 선교, 보내는 선교, 동원하는 선교, 환영하는 선교 이 네 가지 방식 중 어떤 방식이라도 평생 선교를 내려놓지 않고 살아가겠다는 결심이 생겼다.
아직 단기선교학교나 퍼스펙티브스 선교훈련을 들어본 적 없는 형제자매들이 있다면 청년의 때에 꼭 들어보기를 권한다. 나 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 하나님 중심적 사고와 삶의 방식이 무엇인지 배울 수 있는 소중한 기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8월에 있는 선교한국 대회도 참여해 보자.
우리에게는 선택권이 있다. 계속해서 나 중심의 신앙생활을 할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 중심의 선교적 삶을 살 것인가? 편안한 교회 생활에 안주할 것인가, 아니면 복음의 재생산자로 살아갈 것인가? 하나님은 이미 우리를 부르셨고, 우리는 그 부르심에 응답할 책임이 있다.
이제 중요한 것은 실천이다. 오늘부터 나의 기도제목을 점검해보자. 내 삶의 우선순위를 재정렬해보자. 하나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복음의 발산지로서의 삶을 시작하자. 작은 것부터라도 선교적 비전을 품고 살아가는 것, 그것이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언젠가 주님 앞에 설 그날,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서게 될까? 받은 은혜만큼 흘려보낸 은혜가 있는가? 구원받은 한 영혼으로서 또 다른 영혼들을 주님께 인도한 삶이었는가? 그날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는 음성을 들을 수 있기를 소망한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정치적으로 극단에 서 있었다. 열혈 애국자로 로마를 거부하던 시몬과 로마에 협력해 세금을 징수하던 마태가 같은 공동체에서 함께 있었다는 사실은, 복음이 어떤 장벽도 넘어서는 화해와 연합의 힘을 지녔음을 보여 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차이를 외면하거나 정치 자체를 무시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유대인의 왕”이라는 정치적 죄명으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써, 신앙과 정치·사회 현실이 결코 분리될 수 없다는 사실을 몸소 증명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많은 교회는 정치 이야기를 꺼리거나 회피한다. 진영 논리, 혐오 발언, 개인적 욕심이 복음의 빛을 가리기 때문이다.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가 예수께 좌우편 자리를 요구했던 일처럼(마 20:20–23), 우리는 종종 예수님을 ‘수단’ 삼아 자신의 욕망과 정치적 입장을 정당화하려 한다. 이때 복음은 분열의 언어로 전락하고, 하나님 나라의 정의와 사랑은 뒤로 밀려난다.
다가오는 제21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크리스천 청년들이 취해야 할 바른 자세는 무엇일까? 첫째, 우리는 “천국 시민권”을 지닌 나그네임을 기억해야 한다(빌 3:20). 정치 참여가 중요하되, 이 땅의 권력과 성공이 우리의 최종 목표가 아니다. 마태복음 6장 33절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투표장에서든 거리 모임에서든 우리의 우선순위가 하나님 나라와 그분의 정의에 있어야 함을 상기시킨다.
둘째, 모든 세상 나라는 유한하다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 다니엘서 2장의 신상 비유처럼, 바벨론에서 현대 열강에 이르기까지 어떤 제국도 영원히 서 있지 못한다. 결국 “손대지 아니한 돌”,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세워질 하나님의 나라만이 영원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특정 후보나 이념을 절대화하지 말고, 하나님의 주권 아래 겸손히 판단해야 한다.
셋째, 우리는 ‘기도하며 행동하는’ 시민이어야 한다. 바울은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라”고 권면하며, 특히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말한다(딤전 2:1–2). 기도는 소극적 회피가 아니라, 우리의 양심을 깨우고 올바른 행동으로 나아가게 하는 능동적 행위다. 동시에 청년들은 투표권을 행사하고, 정책 자료를 읽고, 끊임없이 토론하고, 사회적 약자를 위해 목소리를 내야 한다. 야고보서 1장 27절, “하나님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 미가 6장 8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두 말씀을 기억하며 각자의 자리에서 기도하고 행동해야 한다.
넷째, 대화의 태도는 언제나 존중과 사랑이어야 한다. 갈라디아서 3장 28절이 선포하듯, 복음은 유대인과 헬라인, 보수와 진보, 남자와 여자 모두를 하나로 묶는다. 신앙 안에서 형제자매인 이들을 정치적 반대편에 섰다는 이유로 폄훼하거나 적대시해서는 안 된다. 의견이 다를수록 “속히 듣고, 더디 말하며, 더디 성내는”(약 1:19) 성숙한 대화를 훈련해야 한다.
끝으로, 선거가 끝나도 우리의 책임이 사라지지 않는다. 공직자를 위해 쉬지 않고 기도하고, 정책을 꼼꼼히 감시하며, 각자 자리에서 봉사와 사회 참여를 이어가야 한다. 베드로전서 2장 15절의 “선행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의 무식한 말을 막으시는 것이라”는 말씀처럼, 우리의 부르심은 단 한 번의 투표로 완성되지 않는다. 일상 속 정직과 섬김, 공익을 향한 실천이야말로 복음에 대한 신뢰와 크리스천의 진실성을 증명한다.
그러므로 크리스천 청년들은 이번 21대 대선을 단순한 정치 이벤트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시 다짐할 기회로 삼아야 한다. 기도와 연구, 정직한 토론, 사랑의 실천을 통해 복음이 분열이 아닌 연합의 능력임을 한국 사회에 증언하자. 그 길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나 되고, 세상의 어느 이념보다 강력한 하나님 나라의 정의와 평화를 앞당기는 도구가 될 것이다. 무엇보다 본질에는 일치를, 비본질에는 자유를, 그리고 모든 것 위에 사랑을 세우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힘을 드러내기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자.
하나님의 시선으로 돌아가는 길
민수기 11장은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시선으로 돌아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건을 담고 있다. 백성들은 고기를 원하며 불평하고, 모세는 지쳐버린 나머지 하나님께 죽여달라고까지 호소한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문제지향적 시선을 가진 모세에게 하나님의 시선이 있음을 알려주신다. 그리고 성령의 임재를 통해 완전한 회복으로 이끄신다.
1. 나를 향한 시선에서 하나님을 향한 시선으로
모세는 백성들의 끊임없는 불평과 원망 속에서 자신의 한계를 절감하며,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이 너무 무겁다고 하나님께 토로한다(11-15절). 극도로 지친 그는 자신의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현실 앞에서 절망하고, 심지어 하나님께 차라리 자신을 죽여달라고까지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책망하시기보다 그를 돕기 위해 70명의 장로를 세우신다(16절). 하나님은 사명을 혼자 감당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 감당할 수 있도록 사람들을 붙여주신다. 더욱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강조하신 것은 ‘너의 힘이 아니라, 나의 힘으로 하게 될 것’이라는 점이었다(17절). 하지만 아직도 모세는 온전히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한 채 자신의 제한된 시야 속에 갇혀 있다.
2. 2차원에서 3차원으로
하나님께서 고기를 주시겠다고 하셨을 때, 모세는 ‘어떻게 그렇게 많은 고기를 마련할 수 있을까?’라는 현실적인 고민에 빠진다. 그는 인간의 관점에서만 문제를 바라보며, 자신이 직접 잡아올 수 있는 고기의 양을 따져본다(22절). 그러나 아무리 계산해도 답이 나오지 않는다.
이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신다. “여호와의 손이 짧으냐?”(23절)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시야를 넓히셨다. 땅과 바다만 바라보던 그의 시선을 하늘을 향하게 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능력은 인간의 한계를 초월하며, 사람의 생각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도 그분께는 아무런 제약이 되지 않는다.
3. 성령 임재로 자유를 얻어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돕기 위해 세우신 70명의 장로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셨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그 중에서 회막에 모이지 않은 두 사람에게도 성령이 임하여 진영에서 예언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26절). 이를 본 소년이 모세에게 보고하고, 여호수아는 그들을 말리라고 요청한다(27-28절).
그러나 모세는 더 이상 자신의 시선으로 판단하지 않는다. 그는 하나님의 시선과 마음을 품고 이렇게 선언한다. “여호와께서 그의 영을 모든 백성에게 주사 다 선지자가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29절). 모세는 자유로워졌다. 이제 모세는 더 이상 사명의 무게에 눌려 있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성령의 임재를 통해 하나님과 함께하는 자리로 돌아간 것이다. 하나님을 알고, 자신을 알았으며, 본인이 해야 하는 일의 본질을 알게 되었기에 자유를 얻었다. 하나님의 시선을 경험한 모세는 본질에는 일치를, 비본질에는 자유를, 모든 것에는 사랑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었다.
하나님의 품속으로 달려가자
모세는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하나님 앞에서 울부짖었을 때, 하나님의 도우심을 경험하고 성령의 임재를 통해 다시 회복되었다. 모세는 회복을 바라고 울부짖은 것이 아니었다. 도저히 길이 보이지 않았기에 하나님 앞에 괴로움을 토해냈던 것이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다.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이 버겁고 힘겨울 때, 스스로 해결하려고 애쓰기보다 하나님의 품속으로 달려가야 한다. 쏟아내야 한다.
신반포교회 청년부 한 사람 한 사람도 모세와 같은 경험을 하길 소망한다. 자신의 힘으로 꾸며내고 부담을 지려 하기보다, 하나님 앞에서 솔직하게 울부짖기를 바란다. 성령께서 우리의 시선을 돌려 문제보다 크신 하나님을 발견하게 하실 것이며, 그 때 치유가 시작될 것이다. 모세가 그랬던 것처럼 맡겨진 자리를 다시 감당하게 될 것이며 이전과는 다른 새롭고 놀라운 삶이 시작될 것이다.
세상은 진리를 갈망하며, 정답을 찾고 공허를 채우려 한다. 끊임없이 무언가를 추구하고 도전하지만, 자신을 보호하려는 방어막은 오히려 더 큰 메마름을 가져온다. 혐오와 갈등이 만연한 이 시대에 사람들은 서로에게 상처받지 않기 위해 자신을 더욱 단단히 감싸고 있다.
기독교 콘텐츠가 많지만, 그 주요 타겟은 항상 크리스천이었다. 비신자들의 시각에서 말씀을 탐구하려는 시도들이 있었으나, 솔직히 큰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갈등이 커지고 기독교에 대한 오해가 쌓여가는 가운데, 가장 공격받기 쉬운 유튜브 공간에서 성경의 말씀과 복음이 흘러나왔다. 그것도 무종교인의 입을 통해서.
2024년 8월, 성경을 주제로 한 4부작 시리즈가 시작되었다. 첫 번째 영상인 ‘무신론자를 위한 [성경] 완전판 (구약)’은 48분이라는 긴 영상임에도 불구하고 조회수 127만 회를 기록했다. 더욱 놀라운 점은, 익명성이 보장된 온라인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신자와 비신자 할 것 없이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며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반응이 이어진 점이다.
그림 1 워드클라우드(무신론자를 위한 구약)
그림 2 상위 20개 단어(무신론자를 위한 구약)
사람들이 신약을 기다리는 가운데 한 달 뒤 두 번째 영상이 공개되었다. ‘모태신앙도 모르는 "인간" 예수 요약’이라는 27분짜리 영상은 조회수 102만 회를 기록하며, 평균 조회수 30만 회를 기록한 ‘유교’ 영상과 비교해도 월등히 높은 수치를 보였다. 첫 번째 영상이 하나님과 성경에 대한 이해를 돕는 내용이었다면, 두 번째 영상은 성육신하신 예수의 사랑을 전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댓글 창에는 예수의 무조건적인 사랑에 놀랐다는 사람, 기독교가 이렇게 아름다운 종교인지 몰랐다는 반응들이 가득했다. 성경의 진리를 처음으로 알아보고 싶다는 사람, 눈물이 난다는 사람, 예수를 오해하게 만들어 죄송하다는 사람, 종교를 떠나 예수와 그의 사랑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는 사람 등 다양한 반응이 이어졌다.
그림 3 워드클라우드(인간 예수)
그림 4 상위 20개 단어(인간 예수)
비판과 손가락질이 난무하는 세상 속, 인간 예수 영상은 신자와 비신자 모두에게 치유와 반성의 시간을 선물했다. 많은 이들이 인생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고, 다음 이야기에 대한 기대감이 커졌다.
그로부터 한 달 후인 10월 말, 세 번째 영상 ‘세계 최초, 예수의 비밀 폭로’가 공개되었다. 러닝타임이 1시간 7분에 달하는 긴 영상임에도 165만 회라는 시리즈 최고 조회수를 기록했다. 시청자들은 “생각보다 성경이 흥미롭다,” “혐오의 시대에 사랑이 싹트길 바란다,” “편견에 가려 예수를 몰랐다,” “기독교인은 아니지만 예수라는 인물에 호감을 느끼게 되었다,” “평생 이단으로 고통받았지만 언젠가는 성경을 읽고 교회를 신뢰하고 싶다” 등 예상보다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 시리즈는 종교의 경계를 넘어서, 무엇이 옳고 그른지 판단하거나 잘잘못을 따지기보다 ‘성경’ 그 자체에 집중한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접근은 비신자와 범 기독교인을 하나로 묶었으며, 성경이 전하는 본질적 메시지에 대해 함께 이야기하게 했다. 그 결과, 많은 이들이 스스로를 돌아보며 절제 속에서 감사와 사랑을 나누는 시간으로 이어졌다.
세 번째 영상의 마지막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제작자는 "크리스천들에게 할 말이 있다"며 특별한 부록이 있다고 예고했다. 이어 자신에 대한 오해는 마지막 4편에서 모두 해소될 것이라고 암시하며 영상을 마무리했다.
그림 5 워드클라우드(예수(신))
그림 6 상위 20개 단어(예수(신))
이후 공개된 ‘그리스도인을 위한 부록’은 36분짜리 영상으로, 조회수는 약 7만 회에 그쳤지만 그 내용은 매우 깊고 밀도 있게 담겨 있었다. 비록 대중적 인기를 끌지는 않았지만, 이 부록에서는 성경과 신앙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도전이 촘촘하게 담겨 있어, 크리스천들에게 깊은 여운을 남겼다..
‘저는 지극히 최근까지도
눈이 닫혀 ‘죽은’ 예수만 바라볼 때는
그를 비난하고 조롱했지만..
제가 눈이 뜨이니
모든 게 그분의 계획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그랬듯이..
여러분도 보지 않으면 믿지 못합니다.
진실로 그렇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글을 다시 쓰는 이유는,
지금 세상에는, ‘살아 있는’ 예수님을 보고
예수님이 마련한 비밀의 문을 열어 줄..
최소한의 여지는 분명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 문은 제가 마련한 게 아닙니다. 진실로
주님이 마련하셨지요.
예수님 말처럼 정말로,
한 번 보이기 시작하면 계속 보이고
한 번 가지기 시작하면 계속 가지기 마련입니다.
반대로 말하면, 보이지 않으면
계속 보이지 않는다는 뜻이지요.
분명히 그리스도를 향한 세상의 심각한 오해를
반대로, 세상을 향한 그리스도인의 심각한 오해를
종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제가 미쳐버린 것 같죠.
하지만, 진심이 전해졌으면 합니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를 전하는 이유 또한
여러분이, 복음을 직접, 다시 읽어 보셨으면 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직접 읽으셔야 합니다. 혼자 망상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게 주님이 여러분에게 마련한 방법입니다.
진실로 그렇습니다. 문자로 읽든. 상징으로 읽든.
직접 보셔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해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건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을 아시면 망상이 없습니다.
예수님과 다르면 망상입니다.
최소한 그분이 ‘진실로’, ‘참으로’ 하신 말씀만큼은
온전히 이해해야 하고, 이해돼야 합니다.
예수님이 가장 위에 있습니다.
성경보다도 그렇습니다.
이 사실만 알면
자의적인 해석이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중요한 건, 오해의 불식입니다.
교회와 예수님을 살리는 일입니다.
하지만 결국, 제가 하는 일은 한계가 너무나도 명확합니다.
저도 그리스도인이지만, 교회의 사람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마지막으로, 전할 말이 있습니다.
진실로, 예수님은 성경 위에 계십니다.
예수님은 모종의 이유로 언약을 완성하셨고
세상 모든 사람을 위해 화목제물이 되셨습니다.
인류가 가장 처음부터 듣고 배웠던 계명은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 입니다.’
그림 7 워드클라우드(그리스도인을 위한 부록)
그림 8 상위 20개 단어(그리스도인을 위한 부록)
성경을 열심히 탐독하던 한 무종교인은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다. 영상 제작을 시작할 무렵만 해도 그는 믿음이 없었지만,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읽던 그의 눈을 열어주셨다.
마치 하나님께서 다메섹 도상에서 자신을 박해하던 사울을 만나 그의 눈을 뜨게 하셨던 것처럼, 예수를 박해하던 바울의 열정을 그대로 두고 그 방향만 바꾸셔서 오히려 복음을 전파하게 하신 것처럼 말이다.
이 영상 제작자는 교회 공동체에 소속된 신앙인이 아니며, 신학을 깊이 공부한 사람도 아니다. 다만 성경을 깊이 읽었고, 성령의 조명하심으로 하나님께서 그의 삶에 찾아오셨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가 가진 재능과 통찰을 사용하셔서 그만이 할 수 있는 방법으로 복음이 전파되도록 역사하셨다.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디모데후서 3장 15-17절)”
하나님의 말씀은 힘이 있다. 복음은 능력이 있다. 세상에는 수많은 지식과 정보가 넘쳐나지만, 사람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힘은 없다. 그러나 말씀은 다르다. 성경은 다르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히브리서 4장 12절)”
해석에 오해나 부족함이 있을 수 있고, 영상 제작자도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며 피드백을 요청하고 있다. 그러나 그보다 중요한 것은, 이 일을 통해 여전히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시다는 사실과 세상이 여전히 복음을 필요로 한다는 진리가 드러났다는 점이다.
“그러면 무엇이냐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빌립보서 1장 18절)”
밤이 깊을수록 작은 불빛 하나가 더욱 선명하게 빛나듯, 시대가 어두워질수록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빛은 더욱 찬란하게 드러난다. 세상이 더 악해질수록 진짜로 믿는 자들은 더 드러나게 되어 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마태복음 5장 14절)”
우리 모두 말씀을 힘써 알아가자. 성령께서 우리에게 빛을 비추시고 눈을 열어주실 것을 믿으며, 말씀을 깊이 탐독해보자.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호세아 6장 3절)”
생각 없이 그리스도인으로 머물러 있지 말자. 힘 빠진 상태로 신앙생활을 이어가지 말자. 우리의 정체성은 다음의 말씀에 담겨 있다.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히브리서 10장 39절)”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베드로전서 2장 9절)”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을 깊이 알고 그 은혜를 누리자. 또한, 우리는 그 아름다움을 세상에 선포할 의무가 있다. 세상은 언제나 복음을 필요로 해왔지만, 우리가 지혜롭지 못하고 준비되지 않았다는 핑계로 나아가지 않았을 뿐이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마태복음 10장 32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마가복음 9장 23절)”
“마땅히 할 말을 성령이 곧 그 때에 너희에게 가르치시리라 하시니라 (누가복음 12장 12절)”
하나님은 이미 준비되어 계시다. 지금 바로 우리의 믿음을 다른 누군가에게 증언해보자. 하나님은 우리의 크고 작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크심으로 역사하시는 분이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사도행전 1장 8절)”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로마서 10장 17절)”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누가복음 10장 2절)”
말씀을 읽되, 제대로 읽고, 성령을 구하며 읽고, 스스로 깊이 묵상하며 읽어야 한다. 그렇게 하나님을 더 깊이 깨닫고, 그분과 인격적인 교제를 나눌 때, 우리 모두는 선교사로 부름받게 된다.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방법으로, 각자가 가진 힘과 에너지를 통해 일하실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놀라우심을 기대하자.
신반포교회 청년부가 다시 전도와 선교가 자연스러운 공동체로 회복되길 기대한다. 또한 우리 안에 더 깊은 말씀 묵상과 성령 안에서의 교제가 더욱 활성화되기를 소망한다.
[참고자료]
[무신론자를 위한 [성경] 완전판 (구약)] https://youtu.be/9k1UZJ5VIKY?si=dNwfg4jnp0zDgbc9
[모태신앙도 모르는 "인간" 예수 요약] https://youtu.be/SR3CWvY_L1E?si=eKfJ32_FHeR7OSPy
[세계 최초, 예수의 비밀 폭로] https://www.youtube.com/watch?v=X9aSi-8TGe8
[그리스도인을 위한 부록] https://youtu.be/zrgutRLXhRs?si=_j8hKcEcVKah0o3n
[부록 대본]
https://blog.naver.com/kim_song01/223633388238
하나님은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다. 하지만 사람만큼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흙으로 직접 빚으시고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셔서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 이로 인해 사람은 세상에서 유일하게 영혼을 가진 존재가 되었다. 모든 것이 풍족하고 아름다운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사랑 속에서 동산의 모든 존재들에게 이름을 붙이고 관리하며 살아갔다. 그러나 아담의 반역으로 인해 인간은 타락하였고, 에덴에서 쫓겨나 평생 수고해야만 먹고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인간은 창조주이시며 왕이신 하나님을 망각한 채 살아남아야 한다는 욕구와 핑계로 아담이 선악과를 받으며 꿈꾸었던 내가 주인인 삶을 살아가게 되었다. 서로 자신의 이익을 주장하며, 하나님께로부터 공급받던 사랑에서 단절된 인간은 그 공허함을 세상의 다른 곳에서 채우려 했다.
노아의 홍수 사건이 있어도 인간은 계속 타락해 갔고, 바벨탑을 쌓고 역리대로 살아가려 했다. 출애굽 중에도 끊임없이 필요와 욕구를 주장하며, 가나안 땅에 이르러서는 말씀대로 순종하지 않고 왕을 요구했다. 아담의 행동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순종 중심에는 내가 내 삶을 조종하고자 하는 욕심이 있었다. 하나님으로부터 떠나 자유롭게 무엇인가를 결정하고자 하는 욕구가 있었다.
그러나 그 결정이 우리를 행복하게 했는가? 오히려 더욱 비참하게 만들었다. 절대적 진리되신 하나님의 자리에 상대적 진리가 가득 차버렸고, 혼란 속에서 스스로를 정답이라 생각하며 본인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도 그런 삶을 살아가게 부추겼다.
이런 모습을 보시던 하나님은 답답하셨을 것이다. 안타까우셨을 것이다. 그러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모두 관통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가 에덴에서 쫓겨나기 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계획하셨다. 그리고 그를 믿는 자는 구원을 얻게 하시려고 작정하셨다.
사람이 가장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성령 안에서 새 사람으로 살아가는 방법밖에 없다. 이미 타락한 인간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갈 수 없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새 사람으로 거듭나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다.
하지만 이것조차 쉽지 않다. 우리는 이미 너무 오랜 기간 동안 내가 주인인 삶을 살아왔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내 삶의 구주로 인정합니다, 고백합니다" 하는 순간조차도 우리의 믿음은 우리의 자발적인 선택이 크다고 착각하고 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예수께서 부르심에 순종하여 생업을 포기하고 따랐지만,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그들도 도망쳤다. 두려움과 앞날에 대한 걱정 때문이었을 것이다. 베드로는 모두가 예수님을 버린다 해도 자신은 그렇지 않겠다고 했지만(막 14:29), 예수님께서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세 번 자신을 부인하리라는 예언을 하셨을 때도 베드로는 당당하게 외쳤다(막 14:31). 그러나 결국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했다(막 14:71).
그러나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못 박히실 때 한 제자만은 곁에 남아 있었다.
"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요 19:26)
예수님께 사랑받는다는 확신이 있던 이 제자는 예수님과 함께하는 시간조차 달랐다. 예수님의 발을 씻겨주시던 날, 베드로는 자기의 온 몸을 씻겨달라고 강하게 말했지만, 정작 예수님께서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하셨을 때 직접 물어보지 못했다.
"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의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 시몬 베드로가 머릿짓을 하여 말하되 말씀하신 자가 누구인지 말하라 한대 그가 예수의 가슴에 그대로 의지하여 말하되 주여 누구오니이까"(요 13:23-25)
모든 제자들이 함께 있었으나 예수님과의 친밀함의 정도는 제각각이었다. 사랑받는다는 확신이 있었던 제자는 자신의 가장 편안한 모습으로 예수님께 다가갔으며 마지막까지 예수님의 곁에 있었다. 우리를 진정으로 움직일 수 있는 원동력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 이렇게 교회사에 남을 고백을 한 베드로도 결국 실족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하는 고백보다 강한 것은 "예수님께서 저를 사랑하시는 것을 제가 압니다, 감사합니다 주님" 하는 고백이다.
사랑을 아는 사람의 삶은 단순해진다. 내 힘과 고집, 의지를 버리기에 온유해진다. 미사여구를 버리고 담백해진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살아가지만 그 자체로 힘이 있다.
어떻게 내가 사랑받는 주의 자녀라는 사실을 깨닫고 살아갈 수 있을까? 물론 말씀과 기도가 가장 우선이다. 하지만 또 하나 중요한 것이 있다. 우리가 드리는 '찬양'을 통해 새 힘과 능력을 얻을 수 있다. 현대사회는 내가 주인인 삶을 살아가라고 말하지만, 우리는 찬양가사를 통해 창조주이시며 왕이시고 주인이신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아름다우심을 찬양할 수 있다. 응축된 가사 속에서 주님의 크고 진하고 놀라운 사랑을 고백할 수 있다.
언젠가부터 예배에 화면이 도입되어 자막을 띄워주는 것이 당연해졌지만, 진정한 찬양은 내가 그 가사를 다 외우고, 그 가사가 내 삶의 고백이 될 때부터 시작된다. 단순하지만 그 가사를 외우고 내 입술로 찬양가사를 읊조리는 것에서 진정한 힘이 나온다. 찬양곡은 들으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부르라고 있는 것이다. 화려하고 거창하지 않아도 된다. 단순하고 담백하며 쉬운 가사가 오히려 더 큰 은혜가 될 때가 많다. 오래된 찬양이라고 해서 식상한 것이 아니다. 가사와 멜로디가 새롭다고 해서 새 노래가 아니다. 말씀을 암송하고 그 말씀으로 내 신앙을 고백할 수 있듯이, 자막 없이도 부를 수 있는 찬양들이야말로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의 모습과 같이 내가 진정으로 편안한 모습으로 주님을 높여드릴 수 있는 찬양곡들이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믿음의 선배들 덕분에, 우리는 선교사를 받던 나라에서 선교사를 보내는 나라로 변화되었다. 하지만 그때 불리던 수많은 찬양들은 우리의 예배 자리와 삶의 자리에서 많이 사라졌다. 단순하지만 힘 있고, 쉽지만 능력 있는 찬양들로 다시 한 번 예배의 자리를 세운다면, 지금 이 시대에 그 찬양들이 오히려 하나님을 높이는 새 노래로 사용될 수 있지 않을까?
최근 듣고 따라 부르며 찬양 인도의 자리에서도 함께 은혜를 나눴던 찬양집회 영상을 공유하며 이 글을 마치려 한다. 내 힘으로 무엇인가를 하려고 애쓰기보다, 단순하게 담백하게 예수님의 사랑을 누리고 그 사랑을 고백하는 것부터 시작해보자. 우리 삶의 참된 행복과 소망, 사랑이신 예수님을 찬양하는 것부터 시작해보자.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사랑이 찬양하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넘쳐흐르는 은혜를 허락해 주실 것을 믿는다. 또한 그렇게 되길 소망하며 기도하겠다.
[청춘찬양단 덕적도 집회] https://youtu.be/LjL54UGyW_M?si=6HjOLDNEeirUIWBX
* 공예배에 적합하지 않은 곡들도 있지만, 집회로 보고 삶의 예배에서 부르면 좋은 찬양들이다.
창조주 하나님은 피조물인 우리와 교제하고 싶어하시는 인격이시다.
우리는 그의 인격을 따라 만들어진 인격체로, 사람과의 의사소통 관계는 하나님과의 교제관계와 유사하다. 새로운 사람과 교제할 때, 먼저 만나서 서로를 보고 인사한다. 어떻게 생겼는지, 어떤 분위기를 풍기는지를 파악한다(형상). 그리고 그 사람과 대화를 나누며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를 알게 된다(능력). 더 깊은 대화를 나누다 보면 마음 속 이야기를 하게 되고, 한 사람의 인격(성품)까지 깊게 알게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창조되었다(사 43:7). 이는 하나님의 위대함, 능력, 위엄을 인정하며 그를 높이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형상, ㉡능력, ㉢성품과 같은 세 가지 주요 속성을 인식하고 찬양(Praise, 讚揚 : '기릴 찬', '오를 양',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훌륭함을 높이고 그에게 영광을 돌리는 모든 행위를 포함)하는 것을 포함한다. 하나님의 이러한 속성들을 알아가는 과정은 인간 상호간의 교제와 유사하게 점차적으로 이루어진다.
사람과 사람 사이 관계도 만나는 장소, 시간, 때에 따라 달라지듯 하나님과 나의 관계도 단편적으로만 정의할 수는 없다. 크게 ①창조주와 피조물, ②왕과 백성, ③주인과 종, ④신랑과 신부, ⑤아버지와 아들, ⑥친구, ⑦나의 하나님 이렇게 7가지 영역으로 나타난다.
또한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의 방향성에 따라 아래 표와 같이 크게 3가지로 나눌 수 있다.
표) 현대 찬양의 종류|작성자 두리비즈|박연훈 목사(프레이즈음악신학교 학장)
간단하게, 회중과 함께하는 예배 때 적합한 찬양은 상향, 개인의 묵상이나 부흥집회, 기도회 찬양은 내향과 상향, 전도집회나 노방전도, 전도여행에서 부르면 좋은 찬양은 외향이라고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자면, 찬양가사의 중심이 ‘하나님’을 향해 있는지 ‘나’의 상황이나 행동을 향해있는지에 따라 상향과 내향 찬양이 나뉜다. 예를 들어 마커스워십 “다윗의 노래”의 경우 주께서는 내 피난처, 요새되신다는 시편의 고백이지만 나의 어떠함을 호소하며 나의 관점에서 끝나는 내향 곡이다. 하지만 “나의 기도하는 것보다” 찬양의 경우 마지막이 ‘모든 영광과 존귀 찬양과 경배를 돌릴지어다’ 라며 나의 상황을 넘어 하나님께로 시각을 돌려 영광을 돌리며 상향 곡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속성에 따라 3가지, 하나님과의 관계에 따라 7가지, 찬양의 방향성에 따라 3가지, 크게 크게 63가지 혹은 그 이상의 종류의 속성과 관계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하거나 증거할 수 있다.
첫째로, 하나님은 ㉠형상의 영역에서 찬양 받으신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우리(창 1:26-27)에게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포함되어 있기에 우리는 그 개념을 알고 찬양할 수 있다.
그가 지으신 자연, 사람을 볼 때, 하나님의 얼굴을 찾고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을 높이 찬양할 때, 주님의 이름을 높일 때 하나님은 영광 받으신다.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①⑵, 나의 예수 온 맘 다해②③⑴, 예수 가장 귀한 그 이름②⑦⑵, 해 뜨는데 부터③⑴, 아름다우신⑦⑴등)
회심하고 처음으로 하나님과 인격적 교제를 나누었을 때를 되돌아보면, 하나님은 정말로 아름답고 경이로운 분이셨다. 그때 너무나도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하나님을 경험하며, 세상의 모든 것이 창조주의 손길에서 비롯된 작품임을 깨달았다. 섬세하고 정교한 창조 세계와 사람의 모습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발견했다. 온 우주에 새겨진 하나님의 지문을 발견했을 때, ‘하나님, 참으로 아름다우십니다’라는 고백을 주께서는 기뻐 받으신다.
둘째로, 하나님은 ㉡능력의 영역에서 찬양 받으신다.
우리 주는 창조주 하나님이시다. 세상을 지으셨고, 여전히 주관하시는 만유의 주재이시고 능력의 하나님이시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뒤쫓던 애굽 병사들을 홍해 속에 묻으셨고(출 15:1-21), 병든 자를 고치시고(막 2:2-12), 죽은 자를 살리시고(요 11:43), 믿는 자마다 구원을 얻게 하신(요 1:12-13) 능력의 주님이시다.
하나님과의 교제가 깊어질수록 내 삶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고, 찬양가사가 남의 가사가 아닌 나의 가사로 다가오게 된다. 삶을 나의 관점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바라보시는 관점으로 바라보며 하나님을 찬양하며 오히려 주 안에서 자유함과 기쁨, 능력을 얻게 된다.
이처럼 하나님의 행하신 일을 높이며 주님 정말 놀라운 분이시군요, 높여드릴 때 하나님은 기뻐하시고 영광 받으신다. (나는 자유해(내가 주 찬송하리)②⑴⑵, 비 준비하시니②⑵, 예수 나의 치료자②⑵, 영광의 주님 찬양하세③⑴, 크신 일을 이루신 하나님께③⑴ 등) 성령의 능력을 찬양하고 높이는 것도 이 부분에 해당한다. (은혜가 풍성한 하나님은③⑴⑵, 빈 들에 마른 풀 같이③⑴⑵, 오소서 진리의 성령님③⑵ 등)
셋째로, 하나님은 ㉢성품의 영역에서 찬양 받기 원하신다.
교제하길 원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단계까지 나아와서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길 원하신다. 형상과 능력은 하나님을 잘 알지 못하더라도 지속적으로 교육받아 출력 값으로 나올 수도 있지만 성품의 영역에서는 이제 하나님과 나의 관계가 필연적으로 수반되어야 하기에 여기서 부터는 찬양자의 영적 성숙에 따라 그 고백의 깊이가 두드러지게 달라진다.
나는 변하지만 하나님은 불변하신다. 세상은 변하지만 복음은 영원하다. 신실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여기에 속한다. 하나님은 자비로우시고 오래 참으시며(출 34:6), 의롭다 하실 뿐 아니라(롬 5:1) 자녀 삼으셨다(요 1:12-13). 또한 신랑되신 우리 주님께서는 다시오실 그날 신부로의 소망과 약속을 주셨다(계 19:7). 더 나아가 우리를 종이 아닌 친구라 부르셨다(요 15:15).
이러한 하나님의 성품을 묵상하고 찬양하면 ‘남의 하나님’이 아닌 ‘나의 하나님’과 대면하게 된다. (우리 함께 기뻐해④⑴, 날 자녀라 하시네⑤⑵, 저 장미꽃 위에 이슬⑥⑵, 오 신실하신 주(하나님 한 번도 나를)⑦⑵, 하나님은 너를 지키시는 자①⑦⑵ 등)
이 세 영역이 가장 완벽한 균형을 이루는 그곳이 바로 십자가이다.
아름다움과 능력과 선하심이 공존하는 십자가 찬양과 보혈 찬양은 우리가 믿는 예수 신앙의 본질이기에 찬양에 힘과 능력이 있다. (모든 능력과 모든 권세②③⑴⑵, 복의 근원 강림하사②③⑴⑵, 변찮는 주님의 사랑과②③⑴, 죄에서 자유를 얻게 함은②③⑴, 구주의 십자가 보혈로②③⑴ 등)
이렇게 하나님을 알아가고 찬양하면 자연스레 주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되고, 그 때부터는 우리가 자발적으로 하나님을 높여드리는 ‘찬양’의 단계에서 주님 앞에 엎드리는 ‘경배(Worship, 敬拜 : ‘공경할 경’, ‘절 배’, 몸을 굽히거나 무릎을 꿇어 엎드리거나 그 밖의 자세로 복종의 자세를 나타내는 자세를 취하는 행동)’의 단계로 넘어가게 된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얼굴은 너무나 빛이 나서 그대로 대면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우신 분이다. 그 누구도 주님 앞에서 얼굴을 대면하여 볼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주께서 찬양중에 임재하시면 그 때부터는 우리가 하나님께 찬양을 일방적으로 드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섬세한 손길 아래 그 강렬한 임재 아래 우리는 주께 온전히 엎드려 순종하며 진정한 교제가 시작된다.
(㉠형상 : 주의 아름다움은 말로 다③⑦⑴, 예수 아름다우신③⑴, 주님 큰 영광 받으소서②③⑴, 왕이신 나의 하나님②⑦⑴, 모든 이름위에 뛰어난 이름②③⑴ / ㉡능력 : 당신은 영광의 왕②⑴, 주께서 높은 보좌에③⑴, 내가 만민중에③⑦⑴, 예수 우리 왕이여②③⑴, 온 땅이여(심형진)②③⑴ / ㉢성품 : 주의 나라가 임할 때③⑴, 목마른 사슴③⑦⑴, 주 앞에 다 엎드려(we fall down)③⑴, 송축해 내 영혼③⑴, 주님만 사랑하리②③⑦⑴ 등)
사람 사이 관계의 발전에도 순서가 있듯 하나님과의 교제에도 순서가 있다. 주일학교에서는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①⑶’, ‘아주 먼 옛날㉡㉢①⑶’ 등 나를 부르신 하나님께 모여서 ‘아름다운 마음들이 모여서㉢②③⑶’, ‘무화과 나뭇잎이 마르고㉡③⑶’ 등 신자의 삶을 배우고 ‘나는 예배자입니다㉢③⑴⑵’, ‘주님 앞에(나를 만지시는 주님 앞에)㉢③⑴⑵’ 찬양을 통해 성도의 예배와 경배를 배워왔다.
청년의 삶과 예배에서도 이와 같은 교제의 순서, 찬양의 순서가 필요하다. 나열한 찬양의 특징에서 보이듯 하나님의 존재를 모르거나 처음 알아갈 때는 ⑶외향 찬양을 통해 관계를 시작하지만, 하나님을 알아갈수록 ⑵내향 에서 ⑴상향 으로 향하게 된다. 갈수록 깊은 묵상을 통해 함축된 가사로 주님을 찬양하길 원하게 되고, 진정한 힘과 능력은 주님을 기뻐하는 것, 무엇보다 주님을 찬양하는 것에서 나온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내 삶이 힘들고 어려울 때 이겨낼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내가 하나님을 찾고 원하는 만큼만 위로를 얻는 것이 아니다. 온전히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바라보고 7가지 관계의 하나님께서 내 삶의 주인 되시고 날 이끌어가시는 능력의 주님이요, 인자하시고 선하심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위대하신 분이심을 선포하는 찬양하는 것이다. 그 순간 주께서는 우리 눈의 비늘을 벗기시고 주님이 함께하시는 새로운 세상을 보게 하신다. 이게 주께서 ‘시선’을 고쳐서 일하시는 방법이다.
갈수록 세상이 어두워지고 있다. 찬양가사들도 모호해지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힘 주시고 능력 주시기를 원하시는데 우리는 자꾸 나의 삶에만 치중한 내향적인 가사들만 읊조리고 있다.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높이고 기려야 하는 찬양의 자리에, 찬양의 시간에 자꾸 내 삶의 탄원과 고백들이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하나님은 이 시대의 찬양을 어떻게 바라보고 계실까?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은 우리와 교제하길 원하신다. 형식만 남은 피상적인 교제가 아니라 깊고 진한 교제를 원하신다. 기술적인 부분이 핵심이 아니다. 아모스 5장 23절에서 하나님은 분명히 말씀하신다. “네 노랫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지어다 네 비파 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아무리 멋진 세션과 음악으로 하나님을 찬양한다 해도 실속없는 예배는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신다.
주께서 어떤 찬양을 기뻐하실지 고민하고 기도하고 결정하여 찬양하자. 복음성가 책에 있다고, 교회에서 불렀다고, 찬송가에 있다고 모든 노래들이 다 찬양은 아니다. 치열하게 고민하고, 찬양 받으시기 합당하신 하나님께 찬양다운 찬양을 올려드리자.
무조건 찬송가나 오래된 찬양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하늘 보좌㉠㉡㉢②⑤⑴’, ‘하나님의 빛㉡㉢②⑴’ 등 최근 새롭게 발굴된 찬양들도 많다. 다만 간혹 가다 ‘입례㉢⑴→⑵’와 같이 상향에서 시작해서 내향으로 끝나는 곡들도 있는데 되도록이면 한 찬양에서는 ⑵내향이면 ⑵내향, ⑴상향이면 ⑴상향으로 확실히 분리된 곡으로 선정하거나, ⑵내향에서 ⑴상향으로 향하는 찬양을 택해서 묵상하는 것이 더 좋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시다. 제사도 명확한 법률을 알려주셨고, 교회에도 질서를 세우셨으며, 예배에도 순서와 질서가 바로서 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도 온전한 교제를 위해서는 위와 같은 질서를 세워 나가야 할 것이다.
먼저, 찬양 중 하나님의 ㉠형상, ㉡능력, ㉢성품이 명확하게 드러나 있는 찬양들을 우선적으로 선정하자. 수 많은 찬양들 중 이 찬양들만 추려내도 찬양의 밀도는 한층 높아진다. 그 다음으로 하나님과 나의 7가지 관계 중 어떤 범주에 이 찬양이 들어가는지 고민해보자. 이 찬양가사가 어떻게 쓰여졌으며, 나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고민하는 순간부터 묵상은 시작된다. 마지막으로 전도집회, 전도시에는 ⑶외향 찬양을, 개인의 삶의 자리에서는 ⑵내향 에서 ⑴상향 찬양을, 깊은 묵상의 자리에서 주 앞에 엎드려 경배를, 함께 모여 예배하는 자리에서는 ⑴상향 찬양을 올려드려 주를 높이고 하늘 문이 열리고 주님께서 찬양을 기뻐 받으실 때 그 임재 속에서 경배를 드리는 질서를 회복하길 원한다.
교제에도 순서가 있고 기도에도 단계와 방법이 있듯 찬양에서 경배로 넘어가는 그 진한 교제의 기쁨과 감사함을 모두의 삶의 자리에서, 그리고 우리 예배에서 함께 누리길 소망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들이 더 많이 작용한다.
사람들은 세상의 현상들을 분석하고 이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즐기지만,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각자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 이미 벌어질 큰 일처럼 보이는 문제들에 대해서는 분석은 하되, 해결을 위한 적극적인 행동보다는 문제를 지적한 뒤 자신의 일상으로 돌아가는 경향이 있다. 이는 현대 사회의 특징이다. 혼란한 시대 속에서 모두가 답을 찾고자 하지만, 희생을 기꺼이 하려는 이는 많지 않다.
‘자기주도학습’, ‘주체적 자아’, ‘워라밸’ 등의 사회적 풍조는 개인주의로 흐르며 ‘나’를 강조하는 방향으로 변하고 있다. 이러한 흐름은 코로나 팬데믹으로 더욱 가속화되었으며, 결국은 함께 모이기보다는 각자의 길을 걷는 시대가 도래했다(히 10:25). 지금은 마지막 때이다. 서로를 이해하고 존중한다는 명목하에 각자의 가치관이 모두 올바르다고 주장하는 것은 진정으로 상대방을 위한 것이 아니다. 단지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기에 자신을 보호하고자 하는 방어기제거나 말씀을 잘 모르기에 해줄 말이 없는 것이다(호 4:6).
크리스천들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고민하고 또 고민하던 와중, 고등학교 시절 찬양과 예배를 나누던 친구들과 연락이 닿았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제 갈길로 가고자 했지만 각자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너무나 갈급했다. 경쟁적인 사회 속 허덕이고 방황하고 넘어지고 무너졌던 우리는 생수가 필요했다.
11월 12일, Personal Bible Study를 위한 첫 모임이 시작되었다. 매일의 삶을 일기로 남기고 한 주 동안 한 장에서 두 장의 말씀을 묵상하고 매주 주말 모여서 깊게 연구한 말씀을, 삶으로 살아낸 그 말씀을 나누기로 했다.
이번주로 4주차, 잠언 6-7장을 함께 묵상하고 있다. 잠언 6장의 말씀을 묵상하며 ‘형제 사이를 이간하는 자’의 해석이 눈에 들어왔다.
“‘이간하는 자’는 ‘다툼과 분쟁을 보내는 자’ 란 문자적 의미를 가지는 바, 본 문구는 자신의 이기적 욕망을 충족시키려는 악의적인 범죄를 지적하고 있다. 관계의 단절과 분리는 사탄의 도구인 반면, 화목은 그리스도께서 그 보혈을 흘리시기까지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다(고후 5:18, 골 1:18, 요일 2:2).” – 베들레헴성경주석
세상의 갈등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이념, 성별, 문화, 정치 등의 갈등의 실상은 표면에 있는 것이 아니다. 영적 전쟁이다. 이번 1년 동안 PBS를 묵상하며 우리는 많이 느꼈을 것이다. 나와 하나님의 관계가 좋다면, 상황과 환경이 어떠하든 하나님과 교제하는 그 시간이 달고 참 평안을 누리게 된다. 하지만 나와 하나님의 관계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단절되고 있다면, 그 때부터는 표면적으로 인생이 꼬이기 시작한다. 별 것도 아닌 일들에 놀라고, 화나고 나를 드러내려 하고 아쉬워하고 인상을 찌푸린다.
예수 믿는 자들을 죽이려 했던 바울의 그 열심을 하나님께서는 방향을 바꾸심으로 누구보다 강력한 복음 전도자의 추진력으로 본을 보이게 하셨다. 역으로 마귀도 마찬가지다. 내 삶의 에너지를 하나님을 먼저 찾으며 나의 일들을 해나가는 데 사용했다면, 마귀는 그 에너지를 온전히 내 삶을 지탱하는데만 사용할 수 있도록 방향을 바꾸려고 부단히 노력한다.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모든 것이 은혜인 만큼, 세상 속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모든 것들이 영적 전쟁 속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인정해야 한다.
우리가 누리는 것 중 세상에 당연한 것은 없다. 모든 것이 누군가의 희생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삶의 메커니즘이 그렇다면, 영의 세계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매 번 죄로 인해 가축을 잡아 제사드리지 않아도 되는 그 당연함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부터 나왔다는 사실처럼 말이다.
PBS를 통해 하나님을 더 알아가며,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가며(물론 주기와 진폭은 늘 존재하지만) 하나님이 지으신 이 세상과 하나님은 어찌 보면 누구나 받아들이고 살아갈 수 없지만 그 누구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더더욱 느끼게 된다. 그렇기에 더 섣불리 판단하고 결정해서는 안된다는 것도 깨닫게 된다(벧후 1:20).
하지만 한 가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있다. 주는 평화, 막힌 담을 허무셨다(엡 2:14). 세상이 더 어지러워지고 완악해질수록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믿는 자들을 더욱 가깝게 할 것이다. 모일 수 없는 날들이 오더라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돌이 되사 서로 연결될 것이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갈 것이다(엡 2:20-22).
진정한 평안과 안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누릴 수 있다. 나머지는 진짜를 어느정도 표방할 수는 있지만 언젠가는 깨지기 마련이다. 크리스천은 세상 사람들처럼 가짜를 좇아 살아가는 자들이 아니라 진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살아가는 자들이다.
말씀을 더 깊이 탐독하며 더 크고 넓은 하나님의 품으로 빠져들자. 그리고 그렇게 살아내자. 나의 생각과 줏대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무어라 말하는지를 더 깊이 깨달아 지혜(하나님을 아는 것)롭게 살아가자. 골로새서 2장 12절 말씀처럼, 갈라디아서 2장 20절 말씀처럼 예수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이 내 자아의 죽음과 말씀으로 거듭남으로 스며들 수 있도록 성화의 과정으로 우리를 견인하실 하나님의 선한 계획을 믿으며 살아보자.
세상 속에서 어떤 이는 스데반처럼, 어떤 이는 바울처럼, 어떤 이는 오네시모처럼.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그 믿음의 분량 속에서 질그릇에 담긴 보배를 전하다 기쁨으로 하나님과 만나서 이야기 할 날을 기다리며 걸어가자.
회복 : 원래의 상태로 돌이키거나 원래의 상태를 되찾음.
몸이 아프거나 마음이 아프면 병원을 찾는다. 하지만 그 이전에 내가 아프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아픔을 인정하지 않고 덮어두거나 외면한다면 병은 더 커진다. 하지만 아프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나 스스로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시인하고 의사를 찾아간다면 치료는 시작된다.
하나님을 찾는 과정도 마찬가지다. 내가 지금 이 상태로 괜찮다는 생각 속에서는 결코 하나님의 세밀한 어루만지심을 느낄 수 없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랬다. 스스로 보기에는 올바른 삶을 살았다. 후회 없이 사는듯 보였다. 하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그들의 삶은 병들어 있었다. 하나님은 백성들이 자신에게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선지자를 보냈다. 제사장을 통해 죄악의 무서움을 알려 주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께로 돌아가지 않았다. 하지만 몇몇은 하나님께로 돌아왔다.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동일한 사례가 적용되었다. 모세가 이끌고 온 10가지 재앙을 보고 애굽은 두려워 떨었다. 그리고 그들 중 일부는 이스라엘이 출애굽 할 때 광야로 따라 나왔다. 이스라엘 백성 중에 거류하던 타국인들은 할례 후 본토인과 같이 되어 그들은 ‘온 이스라엘 자손’으로 불린다. 그들은 ‘회복’ 되었다. 하나님의 손으로 빚으신 아담의 후손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로 돌아왔다.
예배의 자리로 나아와 이 글을 읽고 있는 우리 모두는 나의 힘으로는 도저히 살아갈 수 없는 나약한 존재임을 겸손하게 인정해야 한다. 내 삶의 주권을 내려놓고 하나님 살려주십시오. 주님이 아니면 난 살 수 없습니다. 고백하는 그 순간부터 내 삶의 치료는 시작된다.
하지만 겸손하게 병원문을 열고 들어왔다고 해서 병이 바로 고쳐지는 것은 아니다. 의사선생님의 말을 듣고 꾸준히 약을 복용하거나 생활을 고쳐나가야 한다. 간혹 권고를 무시하거나 거부해서 병이 악화되는 경우도 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다. 말씀을 조금 듣고 성령의 은사를 조금 경험하고 이제 다 안다고 착각하고 스스로 하나님을 끊고 살아보려고 발버둥 친다. 올바른 길로 나아가고 있다고 착각하지만 더 깊은 수렁으로 빠질 뿐이다.
겸손해야 한다. 낮아져야 한다. 나의 건강을 지키고자 작정한 사람은 강한 결단으로 삶을 교정한다. 자신이 살아왔던 삶의 모습과 정반대라 할지라도 내려놓음으로 처방에 순응하는 인내와 연단이 가장 빠르게 본인을 치료할 수 있는 길이다. 신앙도 마찬가지다. 하나님 앞에 내가 죄인이며 도저히 나의 힘으로 살아갈 수 없는 환자임을 인정했다면 말 그대로 낮아져야 한다. 하나님 제가 항복했습니다. 저를 이끌어 가 주십시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하나님 없이 살 수 있다는 착각에서 빠져나오자. 부르심에 반응하여 나왔으니 이제 예수그리스도의 멍에를 매고 말씀을 배우자. 잠시 잠깐의 짧은 행복과 쾌락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기쁨을 바라는 피조물의 모습으로 회복되자. 마지막 때 하나님 얼굴 보고 행복하게 웃을 그 시간을 기대하며.
“오늘은 내일이 없는 것 처럼 살되, 영원을 꿈꾸면서 살아라.” 어노인팅 9집에서 강명식 예배인도자께서 곧 오시네 찬양 직후 하시는 말씀이다.
최근 죄를 그래프로 그린다면 아마 지수함수와 비슷한 형태를 띄고 있지 않을까 하는 묵상을 했다.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당하기 전 동성과 관계를 하려고 했던 그 사람들이 과연 처음부터 그 모습이었을까? 바늘도둑이 소도둑 된다는 속담이 있는 것처럼,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5). 말씀처럼, 사소해보이는 하나의 트리거가 어느 임계점을 넘어가면 걷잡을 수 없는 상황이 되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고속성장의 임계점이 꺾여버린 한국은 저성장, 소멸시대로 접어들었다. 많은 과학자들은 앞으로 10년 내로 지구가 지속가능할지 아닐지 결정이 날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 가정조차 지금의 탄소배출량을 유지했을 때를 가정한 말이다. 인공지능은 Chat GPT를 시작으로 임계점을 서서히 넘어서는 중이며, 많은 전문가들은 1년내 인공지능을 활용한 해킹범죄가 확산될 것이며 AI가 인류에게 유익한지 그렇지 않을 지 5년 내로 판가름 날 것이라고 보고있다.
AI의 대부 ‘제프리 힌튼’은 2023년 5월 1일 구글을 퇴사하며 말했다. “앞으로 인간은 진실과 거짓을 구분하지 못하는 세상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이 점이 가장 두렵다.”, “일평생 연구한 AI 연구에 대해서도 후회한다.”
우리는 모두 끝을 향해 달려나가고 있으며 세상의 많은 것들이 끝이 존재함을 드러내고 있다. 또한 그 마지막이 빠르게 다가오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다.
이미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진실과 거짓이, 본질과 비본질이 뒤섞이며 알맹이와 껍데기의 중요성이 뒤집어지고 있다.
일상단어만 보더라도 맛집은 맛집이지 찐맛집과 인스타맛집이 나뉠 이유가 없다. 대체제가 있지만 원래의 목적을 제하고 누리길 원하는 무알콜맥주, 디카페인커피 등도 비슷한 맥락으로 볼 수 있다. 교회 다니는 친구와 믿음좋은 진짜 크리스천이 웬말인가
에베소서 5장 16~17절은 말한다.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예수그리스도를 제외한 모든 것들은 우리를 본질에서 멀어지게, 눈을 멀게 하고 있으며 좋은게 좋은거지 라는 지극히 비성경적인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사고는 지금도 우리 속에 차곡차곡 쌓여가고 있다.
이도저도 아닌 혼합주의로 뒤섞인 크리스천은 결국 모두로부터 버림받음에 이르게 된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마 5:13)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계 3:16)
예수그리스도를 잃어버린 크리스천은 단순히 비신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먼저는 쓸모가 없어졌기에 비난 받는다. 다음으로 하나님께서도 토해버리신다.
알곡과 쭉정이가 뒤섞여 살아가는 세상 가운데 복음이 점점 희미해져가는 그 어느날 주님은 다시 오실 것이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2절 주의 날이 밤에 도둑 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알기 때문이라. 혼란 속에서 가속화되는 죄악은 우리를 진짜 소명과 사명에서 멀어지게 하고 결국 우리의 삶 가운데 갇히게 한다. 우리의 진짜 목적을 망각하게 한다. 시험, 취업, 집 구하기, 결혼, 자녀교육 등등. 이것들은 모두 우리의 삶의 과정은 될 수 있지만 목적이 될 수는 없다. 소요리문답 1문1답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 하는것입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셨다. 빌립보서 4장 6절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아멘.
그리고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 6:33)
우리 청년부는 1월부터 PBS로 체계적으로 말씀을 먹어나가고 있다. 아는것들이 켜켜이 쌓이면 거기서 끝나면 안된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약 1:27) 야고보서는 행하는 믿음을 중요시하고 있다.
하나님은 특별히 우리 신반포교회를 선교하는 교회로 부르셨다. 마가복음 13장 13절,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고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받기 이전, 마가복음 13장 10절이 있다. 또 복음이 먼저 만국에 전파되어야 할 것이니라
4월30일 신반포교회 선교축제에서 말씀을 전해주신 한국OM대표 조은태 선교사님의 말씀을 빌리면 다음과 같다.
- 세상은 발달하고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지만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서는 사람을 사용하신다-
하나님은 마지막 날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마 25:21) 말씀하시며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받고, 한 사람이라도 더 칭찬해주고 싶어 하실 것이다.
교회가 많은 이 한국 땅 가운데서도, 여전히 복음을 들을 기회조차 없는 자들이 많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 지어다” 라고 말하기 이전,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라고 말하기 이전에 로마서 10장 14절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입술을 열어 복음을 전하는 연습을 해야 한다. 노방전도를 통해, 택시를 타고 갈때, PBS 나눔을 할 때, 친구들과 이야기할 때, 동료들과 이야기할 때, 믿지 않는 자와 이야기 할 때도 예수그리스도가 중심되게 내가 예수로 인해 부요함을 자랑하며 증거하며 복음을 선포하자. 나의 부족함과 연약하면 하나님의 일하심에 전혀 장애물이 되지 않는다. 힘은 하나님의 말씀에 있지, 나의 어떠함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거부하고 싫어할 것을 먼저 생각하고 주저하지 말자. 오직 나를 통해 복음만이 순수하게 전해지기 위해 기도하고 서로를 위해 중보하자. 혼탁한 세상 속 순수하고 귀한 복음은 듣는이로 하여금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히 4:12)하여 거듭나게 한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1:1~3)
복음은 통한다. 받아들여지거나 거부당하거나. 우리의 역할은 복음을 전하는데 까지 있다. 머리로만 생각하지 말고 실제로 연습을 하자. 우리 주님 오실 날이 가까워지고 있다.
올 한해가 가기 전 우리 신반포교회의 모든 청년들이 한 사람에게라도 온전한 복음을 전하고 그 기쁨을 맛보기를 소망한다. 받아들여지던 그렇지 않던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고후 2:15)
복음전도는 하나님의 존재를 드러내며 스스로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과정이며 인생의 목적을 확실하게 드러내는 강력한 도구이다. 마633. 말씀을 의지하며, 당신은 누가복음 9장 57절의 삶을 살아내겠는가? 아니면 62절의 삶을 살아내겠는가? 마음 속 깊은 동기를 점검해보자. 주님 다시 오실 날이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
(누가복음 9장)
57 길 가실 때에 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따르리이다
58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
59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나로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60 이르시되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
61 또 다른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주를 따르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하게 허락하소서
62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인공지능의 발달로 세상이 떠들썩하다. ChatGPT에 물어보았다. 인생의 목적이란 무엇인가?
입력하자마자 바로 타이핑이 시작되더니 1분도 안되어 다음과 같은 답변을 받았다.
The purpose of life is a complex and deeply personal question that has been pondered by philosophers, theologians, and scientists for centuries. Different perspectives and belief systems have various explanations for the purpose of life.
From a religious or spiritual perspective, the purpose of life may be seen as fulfilling a spiritual journey or connection with a higher power, and/or following the teachings and commandments of a deity.
From a philosophical perspective, the purpose of life may be seen as the pursuit of happiness, self-actualization, or the attainment of a certain ideal or goal.
From a scientific perspective, the purpose of life may be seen as the continuation of the species through reproduction and the passing on of genetic information.
Ultimately, the purpose of life may be different for each individual and can change throughout one's lifetime. The purpose of life may be found in personal values, beliefs, and experiences, and it can be influenced by cultural, social, and family background, and life events. Some people find purpose in their career, others in their relationships, and others in their spiritual or personal growth.
It's important to note that there is no one definitive answer to this question, and it is ultimately a matter of personal perspective and beliefs.
삶의 목적은 수세기 동안 철학자, 신학자, 과학자들에 의해 숙고되어 온 복잡하고 깊이 개인적인 질문이다. 다른 관점과 신념 체계는 삶의 목적에 대한 다양한 설명을 가지고 있다.
종교적 또는 영적인 관점에서 삶의 목적은 더 높은 권력과의 영적인 여행 또는 연결을 성취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고, 또는 신의 가르침과 계명을 따르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철학적 관점에서 삶의 목적은 행복의 추구, 자아실현 또는 특정 이상이나 목표의 달성으로 볼 수 있다.
과학적 관점에서 생명의 목적은 생식을 통한 종의 지속과 유전 정보의 전달이라고 볼 수 있다.
궁극적으로, 삶의 목적은 개인마다 다를 수 있고, 일생 동안 바뀔 수 있다. 삶의 목적은 개인의 가치관, 신념, 경험에서 찾을 수 있으며, 문화적, 사회적, 가족적 배경, 삶의 사건에 의해 영향을 받을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그들의 직업에서, 다른 사람들은 그들의 관계에서,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그들의 영적 또는 개인적인 성장에서 목적을 찾는다.
이 질문에 대한 단 하나의 결정적인 대답은 없으며, 궁극적으로 개인적인 관점과 신념의 문제라는 것을 주목하는 것이 중요하다.
지금 시대와 굉장히 맞닿아있는 대답으로 보인다. 단 하나의 결정적인 대답이 없고 개인적인 관점과 신념의 문제라고 이야기하는데 마치 사사기 21장 25절이 떠오른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이것이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를 나타내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말씀이 아닐까?
흥미가 생겨서 더 깊게 물어보았다. 크리스천의 삶의 목적은 무엇인가?
역시 질문을 받자마자 답변이 시작되었다.
From a Christian perspective, the purpose of life is to glorify God and enjoy Him forever. Christians believe that God is the creator and sustainer of all life and that He has a specific plan and purpose for each individual. The Bible teaches that the ultimate purpose of life is to have a personal relationship with God through faith in Jesus Christ and to live a life that is pleasing to Him.
Christians believe that God created human beings in His image, and that the purpose of life is to reflect that image and to glorify God by living a life that is consistent with His will and character. This includes living a life of love, righteousness, and obedience to God's commandments.
Additionally, Christians believe that the ultimate purpose of life is to spend eternity in heaven with God, which is only possible through faith in Jesus Christ and His sacrifice on the cross. This faith is the foundation of the Christian belief, and it is the only way to eternal life.
In summary, the purpose of life for Christians is to know God, love Him and serve Him by living a life of faith, obedience and love towards God and others, and to attain eternal life in heaven.
기독교적 관점에서 삶의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을 영원히 누리는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이 모든 생명의 창조자이자 유지자이며 각 개인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과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성경은 삶의 궁극적인 목적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해 하나님과 개인적인 관계를 맺고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삶을 사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이 그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하셨고, 삶의 목적은 그 형상을 반영하고 하나님의 뜻과 인격에 부합하는 삶을 살아가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여기에는 사랑과 의로움,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는 삶이 포함됩니다.
게다가, 기독교인들은 삶의 궁극적인 목적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십자가에서의 그의 희생을 통해서만 가능한 하나님과 함께 천국에서 영원을 보내는 것이라고 믿는다. 이 믿음은 기독교 신앙의 기초이며, 영생으로 가는 유일한 길이다.
요약하면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적은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며 하나님과 다른 이들을 향한 믿음과 순종과 사랑의 삶을 살며 천국에서 영원한 삶을 얻는 것이다.
놀라울 정도로 압축되어있으며 명쾌하다. 인공지능의 미흡한 점들로 인해 아직 수정되어야 할 사항이 많다고는 하지만 이정도면 나름 괜찮은 것 같다.
소요리문답 1답으로 시작된 1문단은 2문단에서 창조주 성부 하나님으로 이어지고 3문단에서 성자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으로 연결되며 마지막 4문단은 율법의 완성이신 예수그리스도께서 율법과 예언서를 압축하여 말씀하신 마태복음 22장 37-40절로 연결되며 끝난다.
크리스천의 삶의 모습은 세상 사람들과 달라야 한다. 아니 다를 수 밖에 없다. 삶의 목적이 다르기 때문이다. 무엇이 어떻게 다른가? 라고 묻는다면 앞의 인공지능도 충분히 잘 대답해 준 것 같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달라야 하는가? 마지막 문단에 그 실마리가 조금은 있는 것 같다. 그리스도의 삶의 목적은 “하나님을 알고” 로 시작한다. 그렇다. 우리는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
소선지서, 호세아서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호 4:6).” 크리스천이라고 하지만 삶의 모습이 다르지 않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이다.
이번 한 주 간사, 리더의 PBS 본문은 룻기 1장이었다. 룻기는 사사기 바로 다음 순서에 자리하고 있다. 사사기 1장,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가나안에 입성하며 승리를 얻은 것 같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19절, 처음으로 적들을 이겨내지 못한다. 21절 거주민들을 쫓아낼 수 있었음에도 같이 살아가며 타락이 시작된다. 많은 사사들이 잠깐동안 영적 승기를 잡지만 타락은 지속된다. 그리고 21장 25절 말씀이 나오며 사사기는 끝난다.
한 번 하나님을 놓치기 시작하면 그 댓가는 언젠가는 치루게 되어 있다. 지난주 홍문수 담임목사님의 설교말씀에서 아브람은 “그 땅에 기근이 들었으므로(창 12:10)” 하나님이 말씀하신 땅을 떠나 애굽으로 향한다. 여러 고초를 겪고 그 땅을 빠져나오게 된다. 하지만 하나님을 떠난 굴레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에게 한 여종이 있으니 애굽 사람이요 이름은 하갈이라(창 16:1).” 이스마엘이 태어났고 이슬람의 창시자 모하메드의 조상이 된다. 여전히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에서는 크고 작은 포격들이 오가고 있다. 하나님을 떠난 것에 대한 댓가는 처절하다.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흉년이 들고 엘리멜렉의 가문은 아브람과 같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땅을 떠나 모압 땅으로 가서 거류한다. 두 아들은 이방 여인과 결혼했다. 사사기를 거치며 혼탁해져버린 믿음의 계보가 여실히 드러난다.
하지만 나오미는 하나님을 여전히 섬기며 일상을 살아냈을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져버리지 않고 삶을 살아냈다.
룻은 그러한 나오미를 통해 하나님을 발견했다. 더 나은 삶을 위해 갔던 곳에서 모든 것을 잃어버린 나오미는 자신을 ‘마라’라 부르라며 본인의 모습을 한탄하며 자신을 떠나라고 했지만 룻은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룻 1:16).”라고 말하며 시어머니를 따라 베들레헴으로 간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통해 사사기를 통해 무너진 이스라엘과 왕의 계보는 룻기를 거쳐 다윗왕, 예수그리스도의 계보로 이어진다.
하나님은 나오미의 일상의 예배를 사용하셔서 룻기를 써내려가셨다.
다윗이 골리앗과 맞서 싸울 수 있었던 비결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일상에 있었다. “주의 종이 아버지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 떼에서 새끼를 물어가면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죽였나이다(삼상 17:34-35)”
크리스천이 크리스천 답게 살아내려면, 하나님의 자녀로, 종으로, 군사로 살아내려면 일상을 거룩하게 살아내야 한다.
일상을 되돌아보았다. 나는 그렇게 거룩하게 살아내지 못했다. 매일의 삶에서 말씀이 사라져갈수록 내 영은 메말라갔고 하나님과 단절되어 살아가는 삶 그 자체가 고통이요 고난이었다. 그리고 하나님을 떠나서(죄)부터 오는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하지만 성경은 약속한다. 하나님을 향해 내 마음의 문을 열고 눈을 돌릴 때, 미쁘시고 의로우사 내 모든 죄악을 용서하시고 주홍같던 내 모습을 양털처럼 희게 덮으신다. 이 또한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하나님은 회복시키신다. 세상 모든 민족에게 구원이 이를 때까지 하나님은 일하실 것이며 일상을 성실하게 살아내는 자들을 쓰실 것이다.
우리는 말씀을 알아야 한다. 누가복음 21장은 성경은 마지막날이 다가올수록 거짓 선지자가 많아진다고 말하고 있다. 민족과 나라가 대적하고, 곳곳에 큰 지진과 기근과 전염병, 무서운 일과 하늘로부터 큰 징조가 있다고 한다. 익숙하지 않은가?
2020년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전쟁, 코로나 대유행, 신천지
2021년 미얀마 군부 쿠데타,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재집권
2022년 러시아 우크라이나 침공, 세계적인 폭우와 폭설
2023년 튀르키예 대지진
하나님 다시 오실 날이 가까워지고 있다. 하지만 예수님은 “난리와 소요의 소문을 들을 때에 두려워하지 말라 이 일이 먼저 있어야 하되 끝은 곧 되지 아니하리라(눅 21:9)” 라고 말씀하신다.
앞으로 예수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한다는 것 만으로 핍박받고 세상의 법정에 세워질 날이 올 것이다. 하지만 그 모습을 통해 성령이 우리 입술로 역사하셔서 복음을 만국에 전파시키실 것이다.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막 13:3)”
견디기 위해서는 말씀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를 알아야 하며 거짓선지자의 미혹을 분별해낼 수 있어야 한다. 코로나와 함께한 영적 침체기 끝에 청년부에 PBS가 찾아왔다.
성경 전권 PBS를 진행하는데 23.5년이 걸린다고 한다. 그 사이에 예수그리스도가 다시 오실 수도 있고 혹은 우리가 먼저 하나님 얼굴 보러 갈 수도 있다.
지금이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했던 이스라에 백성들은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호 6:1)”,“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호 6:3)” 라고 말하며 열심을 다했지만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 6:6)”
하나님의 마음을 제대로 알기 위해 천천히, 하지만 꾸준하게 일상 속에서 하나님과 깊게 교제해 나가자. 진정한 부흥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수련회를 통해, 어떠한 행사를 통해 받는 단기적인 은혜에서 더 깊어지자.
PBS를 통해 하나님으로 인해 더 울고 하나님으로 인해 더 웃고 하나님으로 인해 더 풍성한 삶을 살아내자.
하나님은 일상의 예배를 지키는 자를 사용하신다.
저는 작년 8월부터 중앙대기독학생연합회(CUSCM) 선교단체의 회장직을 맡아 지금까지 주께서 제게 맡기신 일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코로나가 한창이던 시기 모든 활동은 비대면으로 전환되었고, 기독교에 대한 이미지가 급격히 나빠졌던 시기였기에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 10:25) 말씀을 어떻게 바라보는게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일지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많은 사역들도 생각했습니다. 어떻게 해야 형제자매들을 동참시키고 함께할 수 있을지, 지금 이 시기에 어떻게 전도할 수 있을지 고민했습니다.
하지만 두 학기의 사역이 끝나가는 지금 주를 더 알아가고 많은 교제를 나눈 지금에서야 깨닫게 된 것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제게 원하신 것은 제가 주를 위해서 어떤 것을 할 수 있는지, 어떤 능력과 역량이 있는지가 아니었습니다. 다만 제가 주를 위해 얼마나 포기할 수 있는지를 보시는 분이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마 11:28)
하나님은 제 짐을 내려놓고 주님께 온전히 삶을 맡겨드리길 원하시지 나의 어떠함으로 인해 좌지우지 되는 분도 아니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나 하나 때문에 더 완전해지는 분도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삶으로 경험했습니다.
하나씩 포기하는 연습을 했습니다. 우선 제 진로를 포기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비전을 내려놓았습니다. 주께서 어느날 갑자기 제게 “너는 나를 사랑하는거니 아니면 내가 준 비전을 사랑하는 거니” 질문하셨습니다. 20대 초반까지 제 삶을 움직이게 한 원동력이었던 그 꿈을 주님께선 포기하라고 하셨습니다. 놓기가 싫었습니다. 놓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비전과 사명인데 왜 포기하라고 하시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몇 날 며칠을 울며 씨름하다가 포기하듯 내려놓았습니다. 제 고집보다 하나님의 고집이 훨씬 강하다는걸 느끼며 제 삶은 주님 것이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해달라는 고백을 했습니다.
제 능력에 과분한 자취방을 주심에 순종하며 집이 멀거나 여건이 되지 않는 형제들 몇 명과 함께 살기 시작했습니다. 집이 아닌 게스트하우스가 되었고 이미 집 비밀번호는 선교단체 센터 비밀번호와 같아서 많은 형제들의 쉼터가 되고 있습니다.
우선순위를 예수로 확실히 돌리고 개인의 삶보단 하나님의 영광에 초점을 맞추는 연습을 하고 살아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자 주께 아끼지 않는 자에게 주가 일하신다는 찬양은 그저 가사가 아니라 실제로 다가왔습니다.
주님께서는 주 앞에 엎드리는 법을 제게 알려주셨습니다. 능력의 한계가 다가와서 더 이상 할 수 없음을 느낄 때 주님을 의지하고 모든걸 맡겨드리는 법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칠 때의 심정과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어린 양을 보았을 때의 심정이 어땠을지 완벽하진 않지만 어렴풋이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내가 너에게 한없는 복을 주어 네 후손을 하늘의 별과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많게 하겠다. 네 후손들이 그 원수들을 정복할 것이다.(창 22:17) 라고 말씀하셨고 이를 신실하게 이루셨습니다.
오히려 시간이 부족하고 예전보다 훨씬 바빠졌음에도 하나님께서는 저를 세워가셨습니다. 이전의 저였다면 마땅히 감당하기 어려웠을 일들을 해낼 지혜와 능력을 주셨고, 학업적으로도 원래 가지고 있던 비전이 더욱 선명해지게 인도하셨습니다.
모두 다 주님 앞에 내려놓고 마음을 비우고 순종하며 하나씩 하나씩 맡기신 일들을 해 나갔습니다.
수련회와 각종 행사들로 많은 형제자매들이 은혜받고 영혼이 치유받으며 새로운 영혼이 주님께로 나아오는 모습을 보며, 코로나 이전과 비슷하거나 오히려 더 많은 형제자매들이 참여하고 비대면 상황에서 은혜받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2월 수련회에서는 40명이 넘는 형제자매들이 줌으로 장장 2시간 반이 넘는 시간동안 간증과 찬양과 기도를 했고 5월 수련회를 통해서는 많은 형제자매들의 영적 갈증이 해소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결과에 집중했습니다. 역사하신 주님을, 상황을 뚫고 성공적으로 마치게 하신 주님을 찬양했습니다. 물론 중요한 일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 과정에서 더 귀한 것을 발견했습니다.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웃고 떠들며 포도주와 잔치를 즐기고 있던 수많은 사람들은 더 좋은 포도주를 받고 주인을 칭찬했지만 예수님께서 물을 포도주로 바꾼 기적을 본 사람은 동참했던 하인 몇 명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자리를 지키며 예배를 지키며 하나님과의 관계를 지키며 저는 하나님께서 공동체에, 그리고 저에게 행하시는 기적을 가장 가까이서 목도했습니다.
말도 안되는 상황도 많이 경험했지만 그럴 때 마다 경험을 앞세우기 보다는 하나님의 진짜 뜻이 무엇인지를 구하며 참고 순종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간장이 녹는다는 말처럼 속의 내장이 다 녹아서 하나가 되는듯한 나날도 보냈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주님께서는 그 과정이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 (욥 23:10) 의 과정임을 알게 해주셨습니다. 대장장이가 불순물을 제거하기 위해 끊임없이 용광로에 철을 집어넣는 것과 같이 인생에서 주님만 남도록 제련하는 과정임을 알려주셨습니다.
저의 작음과 주님의 크고 광대하심이 주님을 알아갈수록, 주님과 함께하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더욱 크게 도드라져 갔습니다. 저를 둘러싸고 있는 껍데기들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있는 제 모습을 그대로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주님과 동행하며 그 능력을 맛볼수록 인생에 자신감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이제는 말씀이 점점 더 입체적으로 느껴집니다. 아브라함과 욥의 고백이 그저 하나의 스토리로 여겨지는 것이 아니라 이게 주께서 말씀으로 제 삶을 투영해서 보여주신다는 것이 갈수록 생생하게 느껴집니다.
하나님의 크신 계획, 위대하신 일들이 보여서 포기하고 순종한 것이 아닙니다. 그저 하나님을 사랑했고 보이지 않았지만 믿고 순종했습니다. 주님이 주신 달란트와 재물, 인간관계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려고 노력했고, 주님께서는 그렇게 저를 바꿔주셨습니다.
지금 집에서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에도 제 등 뒤에는 올해부터 예수님을 믿기 시작해서 아직 교회도 한 번 가보지 못 한 새내기 친구가 앉아있습니다. 마침 오늘 친구를 위해 주문했던 성경책이 와서 복음의 정수인 로마서를 읽고 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고 그 말씀은 제 마음 밭에 심겨 싹을 틔웠으며 어느덧 삼십배 육십배 백배 혹은 그보다 더 큰 결실을 맺어 나무가 되었습니다. 어느덧 주님께서 키우신 그 나무그늘 아래 한 명씩 한 명씩 쉬어갈 수 있도록 저를 사용하고 계십니다.
주님께서 저를 사랑하셨고 키우셨음을 너무도 잘 알기에 앞으로의 인생도 예수그리스도께 온전히 맡겨드릴 것입니다. 그 사랑을 먼저 경험했기에 저는 이 복음을 전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한 영혼이 주님께로 돌아올 때 누리는 주님의 그 기쁜 마음을 그 자리에서 주님과 함께 누린다는게 얼마나 큰 축복인줄 모릅니다.
대학을 재학중인 청년부 형제자매들에게 저는 각 대학에 있는 건전한 선교단체들에 참여해서 활동하기를 강력하게 추천합니다.
물론 교회에서 채움받고 충분히 양육받을 수도 있지만 청년의 때에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매일매일 예수그리스도를 배우고 나누고 채움을 받는 삶은 지금의 때가 아니면 경험하기 쉽지 않습니다.
예수그리스도를 알고 더욱 깊게 만나며 뜨겁게 삶을 불태워 보시길 추천합니다.
물론 제가 감히 여러분에게 이래라 저래라 말할 자격이 있는 사람은 아닙니다. 하지만 확실히 제 삶을 걸고 단언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예수에 미쳐봅시다. 하나님 그 사람 절대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모든걸 맡기고 따라가봅시다. 열두제자들의 인생은 그때부터 바뀌었습니다.
화려하지 않더라도 예수그리스도와 동행하는 것이 인생의 가장 큰 행복입니다.
우리 주님은 주께 아끼지 않는 자를 끝까지 책임지시고 인생을 이끌어 가십니다.
자기를 드러내기 바쁘고 이런저런 스펙을 쌓기 버거운 요즘 오히려 모든 걸 내려놓고 예수께 맡겨봅시다. 주님께서 채우십니다. 나중에 천국에서 하나님을 대면하게 될 때 착하고 충성된 종으로 불리며 기쁨으로 하나님의 잔치에 참여하는 날을 기대하며, 주님께 맡겨봅시다.
저는 신학을 배운 사람도, 성경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람도 아닌 그저 예수를 믿고 사랑하는 한 청년입니다.
많이 아는것도 잘 아는것도 아니지만 제가 확신하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주의 말씀은 영원하다는 것, 그로 말미암아 우리 주님 결국 다시 오신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변하고 사람들의 사고방식도 변합니다. 10년 전과 지금의 세상과 교회의 모습만 비교해봐도 확연히 다른 것이 느껴집니다. 그게 코로나로 인한 것이던 아니던 말입니다. 전대 선교단체 회장을 맡은 형의 카카오톡 프로필의 “변하는 세상, 변하지 않는 복음”을 보며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선 분명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라고 말씀해 주셨는데 과연 나는, 그리고 예수를 믿는다는 우리는 과연 바르게 살아가고 있는 것인가 하는 고민을 말입니다.
그러다 군복무중 출석한 교회에서 동참하게 된, 말씀을 배우면서 지금까지 제 삶 속 가장 깊게 박혀있는 하나님과 나의 관계 “He and I”의 성경공부 필기본을 다시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내일은 환란이지 평안이 아니다’ 로 시작하는 필기는 하나님은 누구신가? 나는 누구인가? 그분과 나의 관계는 무엇인가? 이 세 가지 갈래가 바로잡힌다면 ‘나로 하여금 요동치지 않게, 미혹되지 않게, 내 자리로 돌아가게 하시고 장성하게 하신다.’고 하며 ➀창조주와 피조물, ➁왕과 백성, ➂주인과 종, ➃아버지와 자녀, ➄남편과 아내, ➅친구와 친구, ➆나의 하나님 총 7가지의 관계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딸 내 백성의 상처를 가볍게 여기면서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예레미야 8:10~11)” 예레미야 말씀에서와 같이 세상은 괜찮아질거야, 곧 나아질거야 라고 말하지만 오히려 문제와 상황은 심각해져가는 것을 우리는 오랜 기간 봐왔습니다.
사고의 논리를 잃어가고 경기는 어려워지지만 더욱 고급진 것을 원하고, 상식이 희미해져가고 인권과 개인주의가 강조되어지고 쾌락주의와 물질만능주의로 절제와 인내의 능력이 상실되어가고 신중한 삶에 대한 판단, 진지한 고민이나 양심이 사그라져가며 옳은 것이 악하고 악한 것이 옳은 것으로 뒤바뀌고 있는, 날이 갈수록 빛이 보이지 않는 지금
세상이 어려워질수록 제정신으로 살아가기 힘들고 바로 서있기 어렵기에 많은 청년들 특히 우리들은 유튜브, 넷플릭스, 인스타에서 또한 각종 커뮤니티와 삶의 순간순간 가운데 더 자극적이고 더 감성적이고 더 쾌락적으로 내 안에 있는 갈급함을, 그 부족한 무언가를 채우기 위해 끊임없이 탐닉해가는 것이 당연시 되고 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여호와께서 또 이르시되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무거우니(창 18:20))를 지나고 사사시대(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삿 21:25))를 지나 말라기(그러나 너희는 말하기를 여호와의 식탁은 더러워졌고 그 위에 있는 과일 곧 먹을 것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하여 내 이름을 더럽히는도다(말1:12))를 지나 신약시대를 지나 현재로 넘어오며 사람들은 역사는 반복된다고 이야기합니다. 사람들은 윤리적, 도덕적 기준과 법률이 세워졌기에 괜찮다고 하지만 역사는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그 행태들이 과거에 비해 더욱 악해져가고 있고 결국 주님 다시 오시는 마지막 날로 달려가고 있습니다.
세상의 급류에 휩쓸려가는 것이 아니라 위의 7가지 관계를 기반으로 하나님과 나 사이 현재 관계의 상태를 점검하며 바르게 서 있는지 점검해야 합니다. 교회가, 친구가, 가족이 해 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성령의 조명하심을 구하고 말씀을 떠먹으며 점검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나의 갈급함과 부족함을 주님으로부터 온전히 공급받을 수 있고, 상황과 환경에 관계없이 온전한 한 사람으로 설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 다시 오십니다. 그 사실을 기억하며 하나님과 나의 관계를 재정립해 나가야 합니다. 내가 지금 있어야 할 위치를 정확히 알기 위해, 주님 다시 오시는 그날 기름을 준비해 잔치에 참석한 현명한 다섯 처녀들의 자리에 서기 위해 우리 삶의 모습을 돌아봐야 합니다.
그 날은 도적같이 온다고 합니다. 언제, 어느 때가 될지 아무도 모르지만 적어도 예수를 믿는 크리스천, 기독인이라면 그 날을 대비하며 준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다시 오신 주님 만나서 천국 갔는데 하나님과 친하지 않아서 아무런 할 말이 없다면 영원히 지속되는 하나님 나라에서 얼마나 뻘쭘하고 부끄러울까요.
마라나타 영광의 우리 주님 다시 오실 날을 기다리며 말씀으로 하나님과 나의 관계를 정립하고 더욱 깊이 알아가야 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피조물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순종하는 주님의 노예로, 아버지 하나님의 자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로, 애정과 사랑이 넘치는 친구로 바로 서게 된다면 나만의 사랑의 언어로 다가오시는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을 온전히 누리며 영원한 사귐의 자리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 깊은 교제의 자리로 나아갈 때 세상으로부터는 얻을 수 없는 차고 넘치는 풍성한 채움으로 내 갈급함이 채워집니다.
오늘부터, 지금부터라도 다시 말씀을 읽읍시다. 유튜브, 넷플릭스, 인스타, 커뮤니티 등에 할애하는 각종 시간을 주님을 향한 시간으로 열납드립시다. 기도로 성령의 조명하심을 간구하고 말씀을 읽고 암송하고 마음에 새깁시다. 주님 다시 오실 그날을 기다리며, 나를 나 된 자리로 회복시킬 주님을 기대하며.
약 200여년 전 영국 웨일즈 대부흥이 일어났고 그 결과 많은 선교사들이 인도 북동부로 선교를 떠났습니다. 그 중 아삼(Assam)이란 지역은 상대 부족들의 머리를 잘라오는 관습이 있던 원시적이고 야만적인 부족들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선교사들은 부족들에게 환영받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평화, 희망의 복음을 전하러 그 땅으로 찾아갔습니다. 당연히 환영받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복음의 씨앗이 심겨졌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 두 아들로 이루어진 마을의 한 가족이 예수그리스도를 구주로 시인하고 따르기로 결심합니다. 이들의 믿음은 전염성이 있음을 증명했고 많은 마을 사람들이 기독교를 받아들이기 시작했습니다.
마을의 족장이 화를 내며 마을의 모든 사람들을 광장에 한데 모아 “우리가 들어본 적도 없는 새로운 믿음을 가졌다고 말했다! 너와 네 가족이 믿음을 부인하지 않으면 오늘 모두 죽을 것이다.”고 말하며 공개적으로 믿음을 포기하라고 했습니다.
그는 예수를 믿으며 자신의 삶을 드리기로 결심했을 때 작곡한 곡을 부르기 시작합니다.
I have decided to follow Jesus. No turning back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 뒤돌아 서지 않겠네)
그의 대답에 격분한 족장은 궁수들에게 두 아이를 화살로 쏘라고 명령했습니다. 두 아이가 바닥에 경련을 일으키며 죽어갈 때 족장이 다시 한 번 물었습니다. “이미 두 아이를 잃었다. 믿음을 부인하지 않는다면 아내도 잃게 될 것이다.”
그는 노래를 이어나갑니다.
Though no one joins me, still I will follow. No turning back (이 세상 사람 날 몰라줘도. 뒤돌아 서지 않겠네)
족장은 격분하여 아내에게 화살을 쏘라고 명령했습니다. 아내도 두 자녀처럼 목숨을 잃었습니다. 족장이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물었습니다. “믿음을 부인하고 살 마지막 기회를 주겠다.”
죽음 앞에서 그는 여전히 노래를 부릅니다.
The world behind me, the cross before me. No turning back (세상 등지고 십자가 보네. 뒤돌아서지 않겠네)
그렇게 일가족은 그 자리에서 모두 순교합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기적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살해를 지시한 족장의 마음속에 그 남자의 믿음에 대한 감동과 동시에 그에 대한 의문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약 2000년 전 다른 대륙 먼 땅에 살던 한 남자를 위해 이 남자와 그 아내, 그리고 두 아이가 왜 죽어야 하는가? 그들이 믿는 믿음 뒤에는 분명 놀라운 힘이 있을 것이고 나도 그 믿음을 맛보고 싶다.”
족장은 일가족이 순교했던 그 광장으로 마을 사람들을 다시 모아 말합니다. "나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다! 나도 우상을 버리고 예수그리스도를 믿기로 했다." 그의 자발적인 신앙고백으로 인해 복음은 확산되어 마을을 넘어 온 지역으로 퍼져나갔습니다.
우리가 한 번씩 부르던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 찬양은 인도 아삼 가로족(현재의 메갈라야와 일부 아삼 일부) 출신의 남성 녹생(Nokseng)의 마지막 말을 바탕으로 한 것이라고 합니다.
1세대 초대교회 성도들은 이름 앞에 ‘티테디오스’라는 별칭을 붙였다고 합니다. 이는 ‘결코 염려하지 않는 사람‘ 이라는 뜻으로 예수 믿는 사람들은 죽음이나 어떠한 환경 앞에서도 걱정, 근심, 염려에서 해방되었음을 나타내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결국 이러한 믿음은 로마도 크리스천 앞에서 무릎꿇게 만들었습니다.
인도 작은 마을 한 남자의 믿음으로 예수그리스도가 널리 퍼져나갔고 초대교회 성도들의 염려하지 않는 믿음으로 복음이 널리 전파되었습니다.
익숙하고 가까웠지만 무거운 복음의 무게를 가지고 있는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 내용과 가사를 묵상하며 우리 모두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염려하지 않는 담대함을 마음에 새기는 믿음의 사람 되기를 소망합니다.
스토리 비디오) https://www.youtube.com/watch?v=_KOBSu_A4LU
뮤직 비디오) https://www.youtube.com/watch?v=1u15rLnL9Gc
출처
1. Dr. P.P. Job in ‘Why God Why’
2. Youtube_Shocking Story From Meghalaya India Behind “I have Decided to Follow Jesus” Song
3. Open Doors USA_Stories of Christian Persecution | I Have Decided to Follow Jesus (Ft. Jadon Lavik)
4. ONEBODY 한몸기도편지 2020.11.05
전도서 7장 29절 말씀에 ‘내가 깨달은 것은 오직 이것이라 곧 하나님은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이 많은 꾀들을 낸 것이니라’(개역개정) 는 말씀이 있습니다. 새번역으로 읽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렇다. 다만 내가 깨달은 것은 이것이다. 하나님은 우리 사람을 평범하고 단순하게 만드셨지만, 우리가 우리 자신을 복잡하게 만들어 버렸다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지속적으로 분열합니다. 이전에는 없었던 수많은 신제품들, 유행들, 사상들이 쏟아져 나오며 갈수록 복잡해집니다. 미디어와 SNS의 발달에 따라 유행은 삽시간에 변해가고 있으며 이에 따른 수많은 가치관들이 난립하고 있습니다.
개개인의 목소리가 커져가는 세상 속에 하나의 사건일지라도 각자의 경험과 관점에 따른 주장들은 이전보다 더욱 다양한 방식으로 뻗어져 나오고 있고 이 주장들이 공론화되며 법정공방을 펼치기도, 새로운 법이 제정되고 정책이 시행되는 등 수많은 현상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현상에 대한 수많은 해석들이 나올 수 있지만 그 해석과 주장이 진짜 옳은 것인지를 판단하는 확실한 기준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기준은 인간으로부터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야 합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시고 사람을 빚으시고 생기를 불어넣으셨습니다. 모든 것을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시기에 모든 것을 가장 잘 알고 잘 이해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모호해져가는 세상의 기준 속 우리는 하나님의 관점을, 하나님의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아무리 좋아 보이는 주장과 가치관이라 할지라도 그 뿌리가 인간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면 결국 바벨탑처럼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지만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속한자요, 예수님께 속한자라는 진리만이 우리의 중심을 잡아줄 수 있습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기준이 내 위치와 이해관계가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이 될 때 우리는 크리스천으로서, 사회구성원으로서 살아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선 이미 야고보서 1장 5절을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세상을 바라보는 지혜, 유일한 지혜는 오직 예수그리스도로부터만 얻을 수 있고 이미 후히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구할 수 있었던 솔로몬 왕이 구했던 것은 다름 아닌 ‘지혜’였던 것처럼(왕상 3장) 지금의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시대 가운데 우리가 하나님께 구해야 하는 것은 시대를 통찰하는 하나님의 관점과 지혜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어느덧 3월이 지나갔습니다.
벌써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린지도 한달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각자의 자리에서 믿음의 민낯을 마주하고 있을 것입니다.
교회의 프로그램들에 맞춰 예배, 수련회 등 각종 모임엔 함께했지만
혼자 있을때는 말씀을 30분 이상 읽지 못하는건 아닌지
혼자 있을때는 영혼 깊숙한 곳에서 나오는 기도로 하나님과 대화가 되지 않는건 아닌지
평소보다 시간은 더 많아졌지만 그 시간들을 하나님께 더 집중하고 있는지 우리 모두 돌아봐야 할 때입니다.
분명 지금 이 시기도 지나갈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마지막날이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내일은 환란이지 평안이 아닙니다.(마24,막13,눅18)
앞으로 모이지 못할 이유는 더 많아지고 더 힘들어 질 것입니다.
우린 모두 하나님 앞에 홀로 서는 예배자로 준비되어야 합니다.
전반적인 구조조정이 필요합니다.
기독교적 문화에만 익숙해져있는건 아닌지, 진짜로 홀로 하나님과 교제하고 있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숨을 거두실 때 지성소의 휘장이 반으로 찢어졌고(마27:51) 이미 우리에게 주님과 일대일로 교제할 수 있는 통로는 얼마든지 열려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제자들조차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뒤 무엇을 해야할지 몰라 각자의 생업으로 돌아갔듯 우리도 헤맬 수 있습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뿔뿔이 흩어진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다시금 찾아오셨고 예배자로 세우셨습니다. 다시 기회를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우리에게도 말씀하고 계십니다.
익숙했던, 보편적이었던 큰 예배와 모임이 아니라 본질인 내게 집중하라고.
우물가의 여인에게 하신 말씀처럼(요4:24) 예배의 장소가 중요한게 아니라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를 찾고 있다고.
지금의 이 시기를 그저 고난이 아닌 성장의 기회로, 말씀 읽는 능력, 기도하는 능력을 길러내는 시간으로 사용해야 합니다.
내 믿음은 내 책임이라는 마음으로, 말씀과 기도로 일대일로 하나님과 마주보며 홀로선 독립예배자로 훈련해 나가야 합니다.
주님 다시오실 그 날, 정말 마지막 날에는 주님 앞에 홀로 서는자,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자만이 진짜 크리스천으로,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남을 것입니다.
앞으로 더 나아질거야, 괜찮아질거야, 이것만 합격하면 될거야, 이것만 가진다면, 이것만 이룬다면 모든게 다 괜찮아질거야.
정말로 더 나아졌나요? 정말 그 상황이 해결되고 나니, 정말 가지고 싶었던 것을 가지고 나니 모든게 다 괜찮아졌나요?
또 이르시되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큰 지진과 기근과 전염병이 있겠고 또 무서운 일과 하늘로부터 큰 징조들이 있으리라 누가복음 21장 10~11절
오히려 말씀은 시대가 흘러갈수록, 마지막때가 다가올수록 거짓선지자들과 환란이 다가오지 평안이 다가오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모이는것이 꺼려질 뿐만 아니라 공식적으로 금지되고 서울의 한 교회는 문을 닫고 인터넷 예배를 드리는 모습을 우린 모두 보았습니다. 얼마전 기독교윤리실천운동에서 시행한 설문조사에서는 국민 10명중 6명이 한국교회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모임이 폐하여지고 흩어지게 된다면 믿는 우리에게 남는건 성경말씀밖에 없습니다. 남는건 말씀밖에 없고 심지어 말씀마저 자유롭게 읽지 못하는 시대가 온다면 우리를 지켜줄 수 있는것은 우리가 외우고 암송한 구절들 밖에 없습니다.
결국 남는건, 우리가 붙들어야 할것은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시대나 상황에 영향받는 상대적 진리가 아닙니다. 시공간을 초월할 뿐만 아니라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 이사야 40장 8절의 말씀과 같이 세대와 시대를 초월하는 절대적 진리, 결국 남는것은 하나님 말씀밖에 없습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 (신명기 6:4~6절)
진짜 크리스천이라면, 다른것이 아니라 말씀 그 자체를 붙들어야 합니다. 사람의 말이나 경험, 노하우에 의존한 신앙생활이 아니라 66권 신구약 말씀을 붙들어야 합니다.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암송해야 합니다. 모든 신앙서적들, QT책들, 성경교재들은 모두 말씀에서 나왔지만 말씀 그자체는 아닙니다. 어렵더라도 성경말씀 그 자체를 읽어야 합니다.
쉽게 풀어진 성경말씀이 지성적 이해를 도울순 있지만 능력을 행사하지는 않습니다. 영적인 것은 영적인 것으로 풀어야 합니다. 아무리 쉬운말, 아무리 어려운 말이라고 해도 성령님의 조명하심이 없으면 이해할 수 없는게 성경입니다.
마지막때를 준비하며 매일의 삶 가운데 성령님의 조명하심을 구하며 삶으로 말씀을 경험하며 살아냅시다.
수많은 예배와 찬양들, 사역들이 있습니다. 다들 각기 다른 목적과 사명을 가지고 그 자리에서 열정을 가지고 열심히 살아냅니다. 그 안에 속한 개개인들은 그냥 자기것을 챙기며 살기도 바쁜 삶 가운데 시간과 물질을 쪼개서 하나님을 위해 바친다는 마음으로, 혹은 해야 한다는 의무감과 사명감을 가지고 주어진 자리에서 살아냅니다.
많은 교회들, 선교단체들, 모임들이 열심을 다해 프로그램들을 진행하고 이전부터 진행되어져오던 행사들은 간혹 이유를 모른채 진행되기도 합니다. 익숙하고 당연하니까, 지금까지 해 왔으니까 그대로 진행됩니다. 행사를 잘 마치고 나면 사람들이 더욱 친해지고 공동체는 더욱 활발해집니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10:25)
말씀처럼 더 자주 모이고 더욱 친해집니다. 다들 좋아보이고 문제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끝난다면 세상의 여느 모임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냥 좋아서 모이고 책임이 주어지니 의무를 다하고 더 나아가서 사명감을 가지고 모임을 이끌어가는 것에서 그친다면 굳이 그렇게 열심을 내서 모일 이유가 없습니다. 그 중심에 예수가 있어야 합니다.
교회가 세상의 많은 모임들과 다른 이유는 그 안에 예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간단하지만 가장 중요한 사실을 망각하고 그저 물 흐르듯 살아간다면 그 모습이야말로 맛 잃은 소금이요, 믿지 않는 자들에게 ‘너네도 별 다를거 없네?’라는 인식을 심어줍니다.
교회는 방주처럼 산 위에 있기에(마5:14) 세상사람들에게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그들은 모두 크리스천을 의식하며 살아갑니다.
믿지 않는 자들이 믿는 자들을 통해 진짜 보고싶어하는 것은 한 번씩 봉사하는 것,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을 부르며 축복해주는 것이 아니라 진짜 크리스천이 진짜 예수로 인해 삶을 살아가는 모습을 보기를 원합니다. 예수의 능력으로 살아내는 모습을 보기를 원합니다. ‘진짜 크리스천들은 뭔가 다르다’는걸 경험하고 싶어합니다.
우리의 사역안에, 모임안에, 찬양안에, 예배안에, 그리고 우리의 삶 가운데 “오직 예수와 그 십자가”만 남으면 됩니다. 투박해도, 어설프고 엉성하고 부족해도 그 안에서 예수만 구하고 예수만 드러낸다면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서 기름부으실 것이고(삼상16) 우리의 모임도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권능을 받고 세상을 향한 담대한 한 걸음을 딛을 수 있습니다.(행1:8)
예수만 남으면 됩니다.
어느날 책을 읽다가 논크리스천이 쓴 글에서 ‘기독교(개신교)는 자기부정의 종교이다.’라는 짧은 한 문장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두려워합니다. 나를 부정함으로, 내 자아를 내려놓음으로 ‘나’라는 존재가 사라지는게 아닌가 하고 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내 자아를 내려놓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자에게 감히 그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이루지 못할 일들을 이뤄 나가십니다.
성경에서 실질적으로 가장 큰 영향력을 끼쳤던 사람이 누구일까? 하고 살펴본다면 많은 성경인물 중 가장 큰 지역에서 영향력을 행사했던 사람은 요셉일겁니다. 한 족속의 장이었던 아브라함, 이스라엘의 왕이었던 다윗도 있지만 요셉은 고대근동 이집트 지역의 국무총리로서 지도상으로 볼 때도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했던 사람입니다. 왕이 아니니 그정도까지는 아니지 않나? 라고 물을수도 있지만
창 41:40~41) ‘너는 내 집을 다스리라 내 백성이 다 네 명령에 복종하리니 내가 너보다 높은 것은 내 왕좌뿐이니라. 바로가 또 요셉에게 이르되 내가 너를 애굽 온 땅의 총리가 되게 하노라 하고’.
바로(파라오)가 자신의 권한을 전적으로 요셉에게 위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실질적인 권력자는 요셉이었단 말이지요. 창세기 37~50장에는 요셉이야기가 나오고 많은 사람들이 요셉의 꿈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어려서부터 그런 꿈을 꿨기 떄문에 ‘총리’가 되어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하지만 그렇게 바라본다면 우리는 그 안에서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예수그리스도를 찾아내기가 어려울 뿐더러 ‘나도 꿈을 꿔야하나..?’라는 결론으로 빠집니다.
요셉은 단순히 ‘꿈을 꿨던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사람’ 이었습니다.
창 45:5)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창 50:19)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았기에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줄을 알았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기에 하나님께 모든 것을 내어드릴 수 있는 자였습니다. 좋게 말하면 하나님께 모든 것을 묻는 겸손한 자이지만 삐딱하게 말하자면 하나님 없으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나는 죽고 하나님으로 사는 사람이었던 것이죠.
꿈이 중요한게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나의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기에 내가 어떤 존재인지 알고 하나님과 나의 관계가 어떤 관계인지를 알기에 요셉은 노예로 팔려갈때도, 감옥에서도 하나님과 함께했기에 ‘형통’할 수 있었습니다. 요셉에게 중요한건 총리의 자리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였습니다.
하나님을 알고 나를 알고 하나님과 나의 관계를 앎으로 하나님께 내 모든것을 내어드릴 수 있고, 그 관계속에서 누리는 풍성함으로 형통하고 진짜 평안을 누리는 우리 신반포교회 청년이 되길 축복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