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이트는 한국외국어대학교 큐레이션 플랫폼 수업의 일환으로 제작되었습니다.
2002년, 김준영은 의성김씨 28대손 장손으로 태어나 집안의 큰 기쁨 속에 세상에 첫걸음을 내디뎠다. 장손의 탄생은 집안에 오랜만에 찾아온 축복이었고, 어른들은 그의 작은 손과 맑은 눈동자에서 특유의 총명함을 일찍부터 읽어냈다.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란 만큼 그는 자연스레 주는 법도 알고 받는 법도 아는 아이로 성장했다.
어렸을때부터 김준영 유난히 영특했다. 새로운 것을 보면 금방 익히고, 한 번 들은 이야기는 잊지 않았다. 숫자와 글자에 대한 감각도 빨랐지만, 무엇보다도 사람의 마음을 기가 막히게 읽어내는 눈이 있었다. 어른들이 농담 삼아 “말귀를 세 살에 다 알아듣는다”고 했을 정도였다.
뛰어난 머리와 더불어 타고난 운동 감각도 두드러졌다. 걷기 시작하자마자 남들보다 빠르게 균형을 잡았고, 달리기·공놀이 등 어떤 움직임에도 두려움이 없었다. 또래 친구들이 아직 서툴러하던 동작을 그는 자연스럽게 해내며 주변을 놀라게 하곤 했다.
이처럼 지적 재능과 신체 능력이 함께 돋보이던 김준영은 ‘엄친아’라는 말이 어울리는 아이였다. 하지만 무엇보다 빛났던 것은 따뜻한 마음씨였다. 장손으로서 사랑받은 만큼, 누군가를 돕거나 양보하는 일에 주저함이 없었다. 가족들은 “준영이는 참 특별한 아이”라고 말하곤 했고, 그는 그 기대에 맞게 차분하고도 단단하게 자라났다.
2008년에 이르기까지, 김준영은 총명함·배려심·운동신경을 고루 갖춘 채 밝게 성장하며 훗날 펼칠 가능성들을 조용히 품어가고 있었다.
2009년, 김준영은 초등학교에 입학하며 새로운 세상으로 걸음을 내딛었다. 그는 책상 앞에 오래 앉아 있는 타입은 아니었지만, 그 어떤 교실도 그의 재능을 담기엔 좁을 만큼 다재다능한 아이였다. 어른들은 “공부는 억지로 시켜야 하지만, 다른 건 시키지 않아도 다 잘한다”고 말할 정도였다.
입학 첫 해부터 김준영의 운동 감각은 또래를 압도했다. 1학년 계주 대회에서 자연스럽게 주자로 나서더니, 빠른 순발력과 강한 추진력으로 팀을 승리로 이끌었다. 이 순간은 시작에 불과했다. 이후 1학년부터 6학년까지 전 학년 계주 주자를 도맡아 하며 학교 체육대회의 상징 같은 존재가 되었다.
4학년이 되자 재능은 더 명확해졌다. 축구를 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그는 순식간에 두각을 나타냈고, 결국 4학년 때 지역 축구팀의 스카우트 제안을 받는 이례적인 일을 겪었다. 지도자들은 그의 순간 판단력과 경기 감각을 높이 평가했다.
하지만 김준영의 재능은 축구에만 머물지 않았다. 6학년이 되자 그는 야구에서도 눈부신 기량을 보여 야구 스카우트 제안까지 받을 만큼 다방면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단지 빠르고 힘이 좋은 것이 아니라, 어떤 운동에서도 ‘흐름을 읽는 능력’이 탁월했던 것이다.
재능은 운동장에서만 빛난 것이 아니었다. 학급과 학교 안에서도 그는 자연스럽게 중심이 되었다. 친구들을 잘 챙기고, 갈등을 조용히 풀어내는 능력은 선생님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결국 6학년이 되던 해, 그는 전교 부회장에 선출되며 초등학교 시절을 화려하게 마무리했다. 공부는 스스로 “열심히 한 편은 아니다”라고 말했지만, 그럼에도 항상 자신만의 방식으로 인정받고 사랑받는 학생이었다.
2014년에 이르기까지 김준영의 초등 6년은 ‘재능이 처음 모습을 드러낸 시기’였다. 운동장에서는 누구보다 빠르고 강한 주자였고, 학교 안에서는 자연스러운 리더였으며, 무엇보다도 사람들과 어울리는 따뜻한 마음을 잃지 않은 아이였다.
그의 여러 가능성들은 이미 이 시기에 조용히, 그러나 뚜렷하게 빛나고 있었다
2015년, 김준영은 중학교에 입학하며 새로운 무대에 올랐다. 초등학교에서 이미 운동과 리더십을 인정받았던 그는 들어가자마자 다시 한 번 주목을 받았다. 그는 학교 축구팀에서 유일한 1학년 선수로 선발되었다. 당시 학교 축구팀은 시대표가 되었는데, 그 속에서 1학년이 주전으로 뛰는 일은 거의 없었다. 감독과 선배들은 김준영의 경기 감각과 판단력을 보고 “얘는 다르다”고 평가했고, 그는 그렇게 당당히 첫해부터 팀의 일원이 되었다.
교내 활동에서도 그는 주목받았다. 학급 대의원으로 선출될 정도로, 많은 친구들이 그를 신뢰하고 따랐다. 하지만 그 시절의 김준영은 앞만 보고 나아가는 성격뿐 아니라, 자신의 생각을 솔직히 말하는 용기도 갖고 있었다. 그 때문에 뜻하지 않은 사건도 찾아왔다. 재능을 미처 알아보지 못한 한 선생님의 오해와 갈등으로 인해, 그는 취임 1주일 만에 대의원 자리에서 탄핵되는 드문 경험을 하게 된다.
이 시기 김준영은 남들보다 한 발 앞서 세상을 바라보았다. 당시 그는 급진적이고 비판적인 사고를 많이 하던 시기로, 기존의 틀에 의문을 던지는 학생이었다. 그러나 이런 태도는 어른들의 눈에 ‘문제적’으로 보였고, 특히 몇몇 선생님들은 그를 지나치게 억압하기도 했다. 아직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엔 버거운 갈등들이었고, 김준영은 그 스트레스를 공부 대신 ‘사는 재미’를 찾으며 풀어냈다. 놀기도 잘 놀았고, 친구들과 어울리며 세상을 넓게 체험하던 시기였다.
하지만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그 흔들리던 시간들이 훗날 김준영을 더 크게 성장시키는 발판이 되리란 사실을. 축구팀에서의 경험은 그에게 경쟁과 책임을 가르쳤고, 대의원 탄핵 사건은 조직과 인간 관계의 복잡함을 일찍 깨닫게 했다. 또한 억압 속에서 겪은 갈등들은 그에게 자신을 지키는 법과, 세상을 보는 자신만의 시각을 단단히 심어주었다.
2017년이 되었을 때, 김준영은 누구보다 넓은 시야를 가진 학생으로 성장해 있었다. 흔들렸지만 무너지지 않았고, 방황했지만 그 속에서 길을 찾았다. 그 시절은 돌이켜 보면 격동의 시간이었다. 그러나 바로 그 격동이, 훗날의 김준영을 만드는 중요한 조각이 되었다.
2018년부터 2020년, 그의 고등학교 시절은 오랜 방황을 조용히 마무리하던 시기였다. 어린 시절부터 이어지던 재능과 기질은 여전히 빛났지만, 그는 일부러 더 큰 소리를 내지 않았다. 마치 다음을 준비하는 사람처럼.... 필요 이상으로 튀지 않고 묵묵히 자신만의 속도로 시간을 흘려보냈다.
겉보기에는 조용히 놀며 평범한 일상을 보내는 학생 같았지만, 그 속에서는 어느새 새로운 결심이 자라나고 있었다. 그는 스스로의 길을 찾기 위해 체대 입시에 도전했고, 특유의 운동 감각과 집중력으로 차근차근 준비해 나갔다. 중학교 때의 폭풍 같던 시절과는 달리, 이번에는 조용하지만 단단한 힘이 있었다.
그리고 결국, 그는 체대 입시를 통해 경기대에 진학하며 고등학교 시절을 ‘화려하지 않지만 의미 있는 완성’으로 마무리했다. 그의 고등학교 3년은 겉으론 무난했지만, 그를 다음 단계로 끌어올린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2020년은 그의 인생에서 특별한 해였다. 어린 시절부터 운동과 사회성으로 빛났던 그는, 단 한 번쯤은 ‘공부’라는 영역에서도 자신의 한계를 시험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스스로 선택한 재수. 누구의 강요도 아닌, 자신의 의지로 삶을 다시 정비한 첫 번째 결단이었다.
당시 성적은 5등급에 머물러 있었지만, 그는 그것을 한계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만의 방식으로 조용히. 그러나 집요하게 공부하며 자신의 가능성을 다시 써 내려갔다. 그 과정에서 그는 단순히 점수만 올린 것이 아니라, 내적으로 가장 많이 성장한 해를 보냈다. 생각은 깊어지고, 마음은 단단해졌고, 앞으로의 삶을 바라보는 태도에도 성숙함이 깃들기 시작했다.
그 결과, 그는 결국 한국외국어대학교에 당당히 합격하며 인생의 첫 번째 큰 반전을 만들어냈다.
그는 외대에 와서도 자신만의 방식으로 대학 생활을 펼쳐갔다. 수업과 시험만으로 채워지는 삶을 원하지 않았던 그는, 서울 곳곳에서 다양한 활동을 경험하며 ‘스스로 성장하는 법’을 익혔다.
특히 야구부 활동은 그의 대학 생활을 상징하는 장면이었다. 단순한 동아리 활동이 아니라,
팀워크·책임감·리더십·경쟁·승부의식… 공부만으로는 절대 배울 수 없는 값진 경험을 몸으로 익힌 시간이었다.
그는 시험 성적에 집착하지 않는 대신, 사람을 배우고, 조직을 배우고, 관계 속에서 성장하는 법을 배웠다. 이 시기 역시 그의 인생에서 또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