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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성어 견물생심(見物生心)은 물건을 보면 마음이 생겨난다는 뜻이다. 누구나 한번쯤은 남들이 가진 멋진 자동차나 명품을 보며 '나도 저런 것을 갖고 싶다'는 마음이 든 적이 있을 것이다. 이렇듯 견물생심은 좋은 물건을 보면 가지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는 부정적 의미로 많이 사용된다. 그런데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이 사자성어가 꼭 부정적인 의미만 가지고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내가 졸업한 학교는 실용주의 학풍이 강해서 그런지 졸업생 대부분 졸업 후에 취업을 선택했다. 대학원을 진학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았고, 유학을 가는 경우는 더욱 드물었다. 반면에 다른 경쟁 학교의 경우는 대학원이나 유학을 가는 경우가 흔했다. 나는 이러한 차이가 발생한 이유를 개인의 능력 때문이라기 보다는, 보이는 것들이 달랐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보자. A학교는 졸업 후 건설사에 취업하는 선배들이 많이 보이고, B학교는 대학원이나 유학을 많이 가는 선후배 동기들이 많이 보인다고 하자. 두 학교 중 어느 학교 학생이 대학원을 갈 확률이 높을까? 당연히 B학교일 것이다. 왜냐면 가까운 주변의 사람들이 그러한 진로를 택한 것을 실제로 봤기 때문이다. 견물생심이다. 보이면 마음이 생기고, 나도 할 수 있다는 용기도 따라 생긴다.
자신의 세계는 자기가 본 세상으로 구성되고 또 그 안에 한정된다. 자신이 본 만큼 자신의 세상이고, 그 세상 안에서 욕망이 만들어진다. 보지 않으면 마음이 생기지 않고, 마음이 생기지 않으면 우리는 움직이지거나 선택하지 않는다. 나는 학교에 선생으로 있으면서 학교마다 그리고 학생들마다 견물(見物)의 격차가 생각보다 크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다. 또한 이로 인한 생심(生心)의 격차도 매우 크다는 것을 목도하고 있다. 결국 선생으로서의 내 역할은 학생들에게 좋은 것들을 더 많이 보여주는 일이다. 그럼으로써 그들이 바라보는 세상과 꿈꾸는 욕망의 지평을 조금이나마 넓혀주는 일. 그것이 내가 외부 초청 세미나를 주기적으로 여는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는 보통 좋은 스승의 덕목이라고 하면 많은 지식 또는 어려운 이론을 학생들에게 쉽고 정확하고 전달하는 능력을 떠올린다. 이것은 스승의 역할을 지식의 전달에만 한정 한다면 맞는 말이다. 소위 일타 강사들은 그들의 강의 전달력으로 평가 받은 것이기에 유능한 스승이라고 부를 수 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프랑스의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는 자신의 책 (무지한 스승: Le Maître ignorant: Cinq leçons sur l'émancipation intellectuelle)에서 무지한 스승이 유능한 스승보다 더 좋은 스승이라고 말한다. 왜 그럴까?
랑시에르는 19세기 프랑스 교육자 조제프 자코토(Joseph Jacotot)의 실제 사례를 들며 스승은 자신이 모르는 것도 학생들에게 가르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것이 바로 무지한 스승의 역설이다. 프랑스인이었던 조제프 자코토는 네델란드로 망명하게 되었고 루뱅 대학에서 프랑스 문학 담당 외국인 강사를 맡게 된다. 문제는 자코토 본인이 네델란드어를 전혀 할 줄 모른다는 점이었다. 대부분 학생들 역시 프랑스어를 할 줄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러면 어떻게 프랑스어를 가르칠 수 있을까? 고민하던 자코토는 당시 출간된 프랑스어와 네델란드어 대역본이 있는 페늘롱(Fénelon)이 지은 텔레마코스의 모험(Les Aventures de Télémaque)을 학생들에게 준다. 그리고는 학생들에게 이 책의 네델란드어 번역문을 사용하여 프랑스어 텍스트를 스스로 익히라고 지시한다. 방법은 문법이나 언어 강의 없이 책에 쓰인 프랑스어 문장을 외우거나 반복해서 읽게 하는 것이었다. 학생들이 해야 했던 일은 네델란드어 대역본을 대조하며 프랑스 단어의 의미를 추측하고 반복되는 문장 패턴을 보며 문법을 스스로 익히는 일이었다.
자코토가 남긴 기록에 따르면 그 결과는 놀라웠다. 처음에는 당연히 프랑스어를 잘 구사하지 못했던 학생들이 어느 정도 지나자 놀라울 정도로 프랑스어를 쓰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자코토는 이런 실험적 교육법이 성공한 것에 놀라, 자신이 못 치는 피아노도 가르치고, 회화, 수학 등 다양한 분야를 학생들에게 가르쳤다고 한다. 그 방법론은 단순했다. 학생들이 무언가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넣고, 그것을 스스로 배워가도록 독려하는 것.
나는 스승이 모르는 분야도 학생들은 스스로의 능력을 발휘하여 배울 수 있다고 확신한다. 내 대학원 시절이 그랬기 때문이다. 나의 주 연구 분야인 사운드스케이프(Soundscape)는 2010년 당시만 해도 본격적으로 연구된지 10년도 안되는 신생 분야였다. 내 지도교수님은 나에게 사운드스케이프 연구 과제 프로젝트를 맡겼고, 나는 이 과제를 어쩔 수 없이 스스로 진행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문제는 아무도 사운드스케이프가 무엇인지 나에게 명확히 설명해주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다. 당시에는 사운드스케이프 정의에 대한 학계의 국제적 합의도 내려지지 않은 시기였기에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관련 논문을 찾아보고, 해외 학회 발표들을 유심히 들어보고, 무작정 논문을 작성하면서 이 분야를 하나 하나 알아가는 일 뿐이었다. 길을 몰라 마치 안개 속을 해매는 과정이었지만, 이따금 머리를 치는 듯한 깨달음의 순간들이 몇 번씩 찾아와 길을 보여주곤 했다. 우여곡절 끝에 결국 나는 연구실에서 사운드스케이프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은 첫 번째 학생이 되었다.
나는 이러한 교수법을 우리 연구실 학생들에게도 매번 강조한다. 지도 교수가 모르는 분야나 방법론을 스스로 찾고 연구해보라고. 물론 길이 안보이고 때론 긴 시간 헤매겠지만, 그 때마다 스스로 길을 찾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고. 그리고 깊고 넓게 헤맨 만큼 자신의 땅이 된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고.
매년 싱가포르 난양공대 DSP 연구실의 한 해 마지막 랩세미나에서는 연구 발표 대신에 연구원 각자 한 해를 정리하는 시간을 가졌다. 2019년이었던 것 같다. 특히나 정신없이 달려온 한 해를 정리하는 발표 자료를 준비하면서 묘한 감정이 밀려왔다. 2019년은 나와 우리 가족에게 어느 해보다 의미 있는 한 해였다. 박사 졸업 후 5년 만에 처음으로 싱가포르 기술디자인 대학교(SUTD)에 조교수로 임용이 확정된 해였기 때문이다. 박사 졸업 후 5년 동안 포닥(박사 후 과정) 생활을 한 끝에 원하던 학교로 첫 발을 들일 수 있었다. 나름 긴 인고의 여정이었다.
랩세미나 발표 자료 마지막 페이지에 무슨 말을 넣을까 고민이 되었다. 그러다 운칠기삼(運七技三)이라는 사자성어가 떠올랐다. 포닥 기간 5년 동안 국내외 대학 31곳에 지원했고 마자막 단 1곳에서만 합격 소식을 들었다. 서른 번의 불합격 통보를 받으면서 좌절하기도 스스로 자책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마음을 다잡으며 떠올렸던 말이 운칠기삼이다. 운칠기삼은 어떤 일의 성공 여부는 70%는 운에 달려 있고, 30%는 개인의 능력이나 노력에 달려 있다는 뜻이다.
어떤 사람들은 운칠(運七)에 초점을 맞추고 "결국 운이 중요하다."라고 말하며 회의론으로 빠지기도 한다. 나도 인생에서 전적으로 운이 중요하다는 것에 동의한다. 그러나 내가 이 사자성어에서 초점을 맞춘 것은 기삼(技三)이었다. 운이라는 것은 내가 컨트롤 할 수 없는 것이니 내가 컨트롤 할 수 있는 30%에 최선을 다해보자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 당시 내가 컨트롤 할 수 있는 일은 단순 명료했다. 열심히 연구하고 논문을 쓰는 일 그리고 나를 알리는 일. 그것에 집중하고, 내가 바꿀 수 없는 운은 받아들이자. 언젠가 내게도 운이 찾아 올 거라고 믿었지만 그런 운이 안 와도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그건 내가 컨트롤 할 수 없는 영역이니까.
감사하게도 나는 운이 좋은 사람이었다. 이 세상 성공의 70%는 운에 달려 있다. 그러니 실패를 두려워하거나 슬퍼하지 말자. 어차피 운이다.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면 그만이다. 혹여 내가 어떤 성공을 했다고 으쓱거리지 말자. 어차피 운이다. 나에게 사자성어 운칠기삼은 용기와 겸손함을 동시에 주는 말이다.
가끔. 아주 가끔. 우리에겐 기적 같은 순간이 찾아온다. 박사 학위를 마치고 해외 포닥(박사 후 과정)을 가고 싶었다. 가고 싶은 마음은 간절했지만, 방법을 찾지 못했고, 지원하는 곳마다 거절 이메일만 받았다. 그렇게 정신적으로 한계에 다다를 때 즈음, 연구실에서 마지막으로 참석한 국제 학술대회에서 뜻밖에도 해외 포닥 제의를 받게 되었다. 그것도 내 전공과 거리가 먼 싱가포르 난양공대 전기전자공학과 신호처리 연구실에서. 신기하게도 제안을 주신 교수님은 2년 전 한 국제학회에서 우연히 인사드리고 명함을 교환했던 분이었다. 당시 교수님은 사운드스케이프 연구 주제로 과제 제안서를 작성 중이라고 하며, 과제가 채택되면 한 번 지원해 보라고 하셨다. 그런데 그 과제가 된 것이다. 학회가 끝난 뒤 일사천리로 면접과 지원 절차를 거쳐, 두 달 후 싱가포르 난양공대에서의 포닥 생활이 시작되었다.
싱가포르에서의 포닥 생활이 약 3개월쯤 되었을 때였다. 지도 교수님이 Lee Kuan Yew Post-Doctoral Fellowship (LKY PDF) 프로그램의 이메일을 포워딩하며 한 번 지원해 보라고 하셨다. 내용을 읽어 보니, 3년간 유망한 포닥 연구자에게 약 1억 5천만 원의 연구비를 지원하는 프로그램이었다. 동료들에게 물어보니 난양공대에서도 단 한두 명만 받을 정도로 경쟁이 치열하고 명예로운 펠로우십이라고 했다. 일단 교수님께는 지원하겠다고 말씀드렸지만, 속으로는 회의적인 마음이 들었다. 지원하지 않을 핑계는 차고 넘쳤다. 그때까지 지원한 모든 포닥 펠로우십 프로그램에서 낙방했고, 전기전자공학과에서 유일한 건축공학 박사가 이런 기회를 받을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생각했다. 더군다나 한국 대학 출신인 내가 세계적 명문대 출신 박사들과 경쟁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게다가 현재 진행 중인 프로젝트에서도 월급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당장 급한 상황도 아니었다. 교수님께 지원한다고 했지만, 사실 슬쩍 뭉개고 넘어가려고 했다.
몇 주 뒤, 교수님이 내 자리로 오셔서 “지난번에 말했던 LKY PDF 제안서는 잘 쓰고 있냐”고 물으셨다. 나는 숙제를 미룬 걸 들킨 아이처럼 당황해서 “네, 작성 중입니다. 이번 주 내로 완성하겠습니다.”라고 둘러댔다. 교수님은 “초안이 완성되면 내가 한 번 봐 줄 테니 보내 보라”고 하셨다. “알겠습니다.”라고 답했지만, 속으로는 여전히 헛수고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교수님, 솔직히 제가 지원한다고 했을 때 LKY PDF를 받게 될 확률은 굉장히 낮지 않을까요?” 교수님은 미소 지으며 말씀하셨다. “당연히, 될 확률이 낮겠지. LKY PDF는 경쟁이 치열하니까. 하지만 네가 지원하지 않으면 받을 확률은 0%야. 그런데 지원하면 적어도 0%보다는 높지 않겠니? 네가 이걸 쓴다고 손해 보는 건 아니잖아?”
우문 현답이었다. “No harm in trying.” 지금도 선명히 기억나는 문장이다. 나는 서둘러 연구 제안서를 작성했고, 2017 LKY PDF에 지원했다. 그리고 놀랍게도 학과 서류 심사, 면접 심사를 거쳐 최종 발표 심사 면접까지 올라가게 되었다. 모든 심사 절차를 마친 뒤, 평소처럼 사무실에서 일을 하고 있던 어느 날 지도 교수님이 내 자리로 오셨다. 그리고 내 이름을 부르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셨다. “축하한다. LKY PDF에 최종 합격했어.”
나는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이 기쁜 소식을 전하며 오늘은 맛있는 저녁을 먹자고 했다. 집으로 돌아 오는 지하철에서 내려 걸어가는 길. 그 초록 들판 길 위에 아내와 딸아이가 나를 마중 나와 있던 장면이 그림처럼 기억에 남아 있다. 이렇게. 가끔. 아주 가끔. 우리에겐 기적 같은 시간이 찾아온다.
나는 일본의 수학자 히로나카 헤이스케가 쓴 "학문의 즐거움"이라는 책을 좋아한다. 내 기억이 맞다면 내가 처음 이 책을 읽은 것은 중학교 때일 거다. 그런데 지금까지도 하루하루 생활하면서 문득 문득 이 책의 내용이 떠오르곤 한다. 그만큼 나에겐 의미있는 책이라는 뜻일 것이다. 히로나카 헤이스케는 수학의 노벨상이라고 불리우는 필드상을 1970년에 수상한 세계적인 수학자이자 2022년에 필즈상을 수상한 한국계 수학자 허준이 교수의 스승이기도 하다. 소위 천재라고 불려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사람이다. 그런데 그가 이 책에서 강조하고 있는 부분은 본인의 천재성이 아니라 오히려 평범함이다. 그리고 그가 가진 평범함으로 어떻게 이러한 학문적 성과를 이루었는 지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히로나카 헤이스케는 일생 동안 소름이 끼칠 정도의 천재들을 여럿 만났지만 한번도 열등감을 느껴본 적이 없다고 한다. 바로 체념했기 때문이다. 히로나카 헤이스케는 "체념의 기술"을 이야기 한다. 자신은 보통 머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아무리 해도 천재들만큼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체념하는 것이 바로 체념의 기술의 핵심이다. 체념이라는 단어는 마치 루저(Loser)의 변명처럼 들린다. 하지만 이 "체념"을 "기술"로 만들어주는 부분이 있다. 저자는 말한다. "체념한다고 해서 모두를 포기하는 것은 아니다. 자기의 목표를 확실히 잡으면서 포기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질투심이 안 생긴다. 그리고 남을 질투하는 마음이 없으면 자기의 정신 에너지가 조금도 소모되는 일 없고 판단력도 둔해지지 않는다. 결국 그것이 창조로 이어져 갈 것이다."
우리의 뇌는 어떤 대상을 인지할 때 항상 주변과 대상을 비교하고 차이를 지각하면서 작동한다. 예컨대 같은 색이라도 어떤 배경색과 함께 있느냐에 따라 다른 색으로 인지한다. 같은 크기라도 어떤 형태로 주변에 배치되어 있냐에 따라 다른 크기로 지각한다. 따라서 인간은 태생적으로 비교하는 존재다. 자아를 인지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자아는 끊임 없이 타자와 비교함으로써 자신의 위치를 확인한다. 인간의 이런 특성 때문에 다양한 감정들이 발생한다. 대표적인 감정이 열등감일 것이다. 나도 고등학교 시절 열등감 때문에 힘들었던 적이 있었다. 남들보다 못한 존재로 인식되는 것은 견디기 힘든 감정이었다. "나는 이렇게 열심히 노력하는데 왜 내 친구들보다 못할까?" "나는 해도 안되는 것일까?"하는 생각만 머리 속에 맴돌았다. 그럴수록 점점 공부에 집중이 안되고 성적은 더 떨어졌었다. 그 때 다시 읽은 책이 바로 학문의 즐거움이다. 나는 체념의 기술을 마음 속으로 익혔다.
그러면서 깨달은 점이 있다. 우월감과 열등감은 서로 반대인 것 같지만 같은 감정이라는 것. 우월감과 열등감이라는 감정은 비교 우위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느끼는 열등감은 남들보다 우월하고 싶다는 감정선 상의 반대편 끝에 있을 뿐이다. 자존감이란 "상대와 나를 분리해서 내 자신의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내 개인의 가치를 아는 마음"으로 정의한다. 때문에 자존감은 "나보다 나은 상대를 만났을 때 그 점을 인정하되 그 사실이 결코 열등감으로 되돌아 오지 않는다." 즉, 비교를 하되 자기 스스로를 인정하고 긍정하는 마음을 갖는 상태가 자존감이 높은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체념의 기술"의 핵심은 열등감에서 벗어나 자존감을 높이는 방법이다. 자존감은 삶의 행복감과도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자신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긍정하고 사랑할 수 있어야 행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느 분야에나 세상에는 똑똑하고 잘나가는 사람이 많다. 내가 몸 담고 있는 학문 분야도 마찬가지다. 나도 다른 연구자들의 연구들과 성공을 보면서 나의 위치를 확인하곤 한다. 하지만 거기에 부정적 감정을 싣지 않으려고 한다. 다만 내가 할 수 있는 영역에서 발휘할 수 있는 역량을 최대한 발휘하려 노력하면 그만이다. 나는 자신의 삶을 긍정하는 태도가 우리의 삶을 나아가게 만든다고 믿는다.
군복무 시절에 6개월 정도 도서관병으로 일했던 적이 있다. 도서관이라는 공간을 좋아했던 나로서는 너무나도 즐거운 시간이었다. 도서관 업무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했던 일은 반납된 책을 정리하고 도서 대장을 관리하는 것이었다. 특히 책 제목을 읽는 것을 좋아했다. 책 제목을 읽으며 저자는 왜 이런 제목을 지었을까 상상해보는 일은 소소한 즐거움이었다. 그 시절 내가 본 책 중에서 아직도 기억에 남는 책 제목이 있다. "열정과 결핍". 이 책은 이나리 기자가 자신만의 길 걸어오면서 일가를 이룬 12인을 인터뷰한 기록을 담은 책이다. (아쉽게도 지금 이 책은 절판되었다.)
대부분의 인터뷰집이 그러하듯 열 두명의 유명인이 어떻게 성장했고, 어떤 꿈을 꾸었으며, 어떻게 지금의 위치까지 도달할 수 있었는지를 집요하게 탐구한다. 인터뷰를 정리하던 저자는 서로 다른 색을 가진 12인에게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것이 바로 이 책의 제목인 "열정과 결핍"이다. 그들에게 열정과 결핍은 분리된 개념이 아니었다. 결핍이야 말로 삶을 이끈 열정의 연료이자 원천이었다. 자신의 내적 결핍을 찾은 사람은 그것을 채우고자 하는 동기 또는 동경과 같은 강한 감정을 갖게 되고, 그것으로 인해 삶의 방향과 동력을 얻게 되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는 풍요의 시대를 살고 있다. 특히 정보에 있어서는 더할 나위 없이 많은 정보의 바다 속에서 살아간다. 인터넷에 접속하면 예전에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귀한 정보를 손쉽게 얻을 수 있다. 또한 ChatGPT와 같은 인공지능을 이용하면 전문가보다 더 정보를 잘 처리해서 우리에게 제공해 주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이런 시대일수록 삶의 동력이 되어 주는 무언가를 찾아내는 일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아이러니하게도 풍요의 시대에 학생들에게 내적 결핍을 찾을 수 있게 하는 교육이 더욱 필요한 일인지도 모른다.
2014년 위플래시(Whipflash)라는 영화가 개봉했다. 영화의 내용은 단순하다. 주인공 앤드류는 꿈에 그리던 셰이퍼 음악대학에서 최고의 스튜디오 밴드에 보조 드러머로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악명높은 지휘자이자 폭군 플레쳐 교수를 만나게 된다. 플레쳐는 온갖 모멸적인 발언과 폭력으로 학생들을 몰아붙여 학생들의 잠재력을 이끌어내는 인물이다. 앤드류 역시 밴드에서 살아남고자 플레쳐 교수의 채찍질(Whipflash)을 참고, 손에서 피가 날 때까지 드럼 연습을 한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앤드류는 여러 우여곡절 끝에 놀라운 음악적 성취를 보여주는 드럼 연주를 선보이며 영화의 대미를 장식한다. 물론 영화의 결말을 예술적 완성이라고 봐야 할지 아니면 파국이라고 봐야 할지는 보는 사람의 몫이다. 개인적으로는 파국이라고 생각한다. 플레쳐 같은 인물은 절대로 올바른 교육관을 가진 교수라고 말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많은 생각거리를 남긴다. 내용이 어떻든 영화 자체로 좋은 영화라는 의미이다. 나는 이 영화를 곱씹을 때마나 삶의 모양에 대해서 떠올린다. 동그란 삶과 뾰족한 삶. 누구에게나 시간은 공평하게 주어진다. 인생이라는 것은 주어진 시간들을 빚어서 우리 삶의 모양을 만드는 일이다. 만일 누군가가 어떤 분야에서 일가를 이루고 싶다면 주어진 시간을 그 분야에 집중하는 뾰족한 삶을 살아야 한다. 뾰족한 삶을 살지 않는데 그 분야에서 성과를 이루기란 정말 어렵다. 시간 투입은 절대적인 요소이기 때문이다. 물론 뾰족한 삶이 모두에게 정답은 아니다. 어떤 이는 다양한 경험과 삶의 균형을 더 중요하게 생각할 수 있다. 그런 사람들은 동그란 삶을 추구해야 한다. 이건 무엇이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 삶에 대한 개인 가치관의 문제다.
중요한 것은 둘 중 어떤 삶의 모양을 선택하든 후회는 남는다는 것이다. 뾰족한 삶은 어떤 분야의 전문가가 될 수는 있겠지만 그만큼 다른 삶의 경험이나 가치를 포기해야 한다. 동그란 삶은 다양한 삶의 경험을 할 수 있겠지만 어떤 분야에서 전문가가 되기란 쉽지 않다. 개인적으로는 적어도 대학원 기간은 뾰족한 삶의 모양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떤 학문 분야의 전문가가 되는 첫 관문이기 때문이다. 나는 우리 대학원생들이 짧으면 2년 길면 5-6년의 대학원 기간을 밀도 높은 뾰족한 시간으로 보냈으면 하는 바람이다.
공부와 연구는 비슷한 것 같지만 다르다. 보통 공부라고 하면 시험 공부를 떠올릴 것이다. 시험의 목적은 이미 정립된 지식을 우리가 얼마나 정확히 알고 있는지를 평가하는 데 있다. 즉, 공부라는 것은 기존 지식을 습득하는 일이다. 따라서 공부의 과정에는 질문과 정답이 정해져 있다. 반면에 연구는 새로운 지식을 만드는 일이다. 연구의 목적은 지식을 습득하는데 있는 게 아니라 지식을 생산하는 데 있다. 따라서 연구를 하는 과정에는 질문도 정해져 있지 않고 정답이라는 것도 없다.
학부 과정과 대학원 과정의 가장 큰 차이도 목적을 공부에 방점을 두느냐 연구에 방점을 두느냐에 있다. 학부 과정은 기존 지식을 학습하는 공부에 집중되어 있고, 대학원 과정은 새로운 지식을 생산하는 연구에 중점을 둔다. 소위 말하는 "연구 중심 대학"은 다른 말로 하면 "대학원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대학"을 말한다. 세계적인 대학이라고 불리는 대학들은 모두 연구 중심 대학이다.
이 지점에서 많은 대학원생들이 어려움을 겪고 혼란스러워 한다. 어떤 분야에 전문적인 지식을 배울 거라고 생각하고 대학원을 진학했는데, 막상 들어가 보니 전문 지식을 많이 알고 있다고 졸업할 수 있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학원을 졸업하려면 연구 논문을 작성해야 한다. 즉, 대학원생은 전문 지식을 바탕으로 질문(문제)도 스스로 만들어야 하고, 그 질문(문제)에 대한 답도 스스로 찾아야 한다. 다행인지는 모르겠지만 연구는 시험처럼 하나의 정답이 존재하지 않는다. 연구란 어떤 문제에 대한 자신만의 답을 찾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세상 일에 한 가지 정답만 존재한다는 것이 더 이상한 일인지도 모른다.
이 과정이 생각보다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많은 대학원생들이 어렵다고 느낀다. 하지만 연구에 익숙해지면 생각보다 재미있고 흥미로운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사실 연구라는 것이 방송국 PD나 예술가와 같은 콘텐츠 크리에이터가 하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다. 새로운 것들을 발견하고 여러 사람과 공유하는 일이 바로 연구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나의 직업은 연구자다. 솔직히 아직도 나에게 "연구자"라는 말은 낯간지럽다. 남들 보기에 다소 거창해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연구자는 단지 연구를 하면서 밥벌이를 하는 사람이지 특별한 사람은 아니다. 나도 지금까지 연구 프로젝트를 진행 하면서 생계를 이어나가고 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연구자(과학자, 공학자)라고 하면 수식을 거침없이 적으면서 문제를 풀어 나가는 모습을 떠올릴 것이다. 물론 그런 모습도 연구자의 한 단면이다. 수학적 사고 능력이 뛰어난 연구자는 좋은 공학 연구자가 될 좋은 자질을 가진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나는 좋은 연구자가 되기 위해서는 그것보다 더 중요한 자질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바로 글쓰기다. 나는 글을 잘 쓰는 연구자가 좋은 연구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연구는 결국 "논문"이라는 글쓰기 형태로 마무리되기 때문이다.
아무리 훌륭한 연구 결과도 글로 정리하지 않으면 논문이 되지 못한다. 논문이 되지 못한 결과는 학술적으로 의미가 없다. 내가 대학원 시절 후배들에게 자주 말했던 속담 구절이 있다.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다." 아무리 좋은 연구 결과도 잘 꿰어내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 그리고 별로 특별해 보이지 않은 결과들도 그것들을 잘 엮어 해석해 내면 훌륭한 논문이 될 수 있다. 내가 만나본 훌륭한 연구자들은 대부분 글을 쓰는 능력이 굉장히 뛰어난 분들이었다. 그리고 글쓰기를 진심으로 즐기는 분들이었다. 결국 연구자라는 직업은 또다른 형태의 작가라고 볼 수 있다. 소설가나 시인들이 삶에서 얻어지는 재료로 글을 쓴다면, 연구자들은 실험 연구 데이터를 재료로 글을 쓴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그럼 "나는 글을 못쓰니까 연구자를 하면 안되는 것인가?"라고 생각하는 분도 있을 것이다. 그런 것은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다. 다행히도 연구자에게 필요한 글쓰기 능력은 시를 쓰거나 소설을 쓰는 문학적 재능처럼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반복 훈련을 통해서 충분히 능력을 키울 수 있는 기술적인 글쓰기이기 때문이다. 결국 누군가가 연구자가 되고 싶다면,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던져봐야 한다. "나는 글쓰는 일을 평생 즐기면서 살 수 있는가?"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연구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이 스스로에게 물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첫 질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