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어진 너의 침묵
壊れたあなたの沈黙
壊れたあなたの沈黙
처음 송미령과 작업을 하기로 생각해 본 건 그와 나의 사이에 특별한 계기나 스토리가 있어서는 아니다. 그동안 누군가와 함께하는 전시도 결국 나 스스로 처음부터 끝까지 고민해야만 하는 일로 여겨왔다. 이번만큼은 함께한다는 마음을 가지고 싶었다. 그리하여 나는 당장은 혼자 출발선에 설 수 없던, 그러나 작은 출발만 주어진다면 누구보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끊이지 않을 사람을 떠올렸다. 부르짖을 이야기가 있던 사람, 미령이었다.
작업을 지속하다 자연스레 창작과 멀어진 사람들을 꼽으라면 그 수가 너무 많기에 개인의 이야기로 다룰 바엔 사회적 현상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다지만, 나는 그녀가 멀어진 것처럼 보이는 상황이 단지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말할 수가 없다. 오히려 그녀는 내 눈에 언제든 무언가 할 준비가 되어 보였다. 작업을 하려면 공간도 작업실도, 주변인들의 배려 혹은 희생도 필요하기에 그런 것들이 당연하지 않은 상황에서는 [돌아오기]가 무척 힘이 든달까. 그렇지만 어디로 돌아온다는 말인가? 퇴출당한 명왕성(plutoed)*을 떠올려 본다.
송미령은 인간관계 혹은 집단 속에서 겪는 스트레스를 작업으로 다루어왔다. 지속적인 상처에 좀처럼 무뎌지지 않았던 작가는 오히려 상처를 줄 수 있거나 다소 위험해 보이는 유리-혹은 비슷한 물성의 재료-를 깨는 행위를 지속, 그리고 그 후 유리에 불을 가해 결합하며 새로운 형태를 만들고자 시도했다. 상처와 파괴 이후 회복의 가능성을 이야기하고 스스로 해소해 보고자 한 것이다. 비록 결과물이 이전과 같지 않을지라도 말이다. 관계에 기민하게 반응하던 작가는 이제 ‘나의 외부’가 아닌 ‘내부’에서 오는 부담감, 피로감, 그리고 이 모든 것이 본인에게 당연시된다는 무력감과 고독 가운데 서 있다. 이번 <깨어진 나의 침묵>에서는 다루기 까다로우며 방심하면 너무도 쉽게 상처를 내는 유자철선(有刺鐵線, barbed wire)을 통해 무엇인가를 지키려고 하는 동시에 계속해서 자잘한 상처를 입게 되는 과정을 표현하고자 했다. 계속에서 내상을 입는 자신의 따뜻한 성정과는 반대로 늘 차가운 재료를 선택하게 된다면서. 그러나 작업을 자세히 보면 상처-로 보이는 날카로운 부분-에 무언가 돋는 형상이 있거나 다시 덮인 행위를 반복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원망스럽게도, 더 큰 회복은 찢어질 듯한 고통 위에 내려앉는 것이다.
송미령은 지난 3년간 ‘일들’을 겪어왔다. 어떤 일을 겪지 않는 사람은 없다. 겪고 흡수하거나 떠나보내거나 잊거나 머물러있거나 붙잡고 있거나 눈물짓거나 할 뿐이다. 그중 미령은 큰 기쁨도 있었지만 죽을 뻔하거나 힘겹거나 아프거나 고통스럽거나 내려놓지 못했고 그 모든 일들을 수행과 같은 침묵으로 보내왔다. 사람이 수행적일 때는 어둠이 깊어지고 그 어둠의 고요에서 고독한 자신을 발견할 때다. 그녀는 3년간 하늘이 밝을 때나 어두울 때나 이러한 침묵과 내면의 어둠을 짙게 경험하였다. 스스로 그 어둠 속에 잠겨있거나 창조하지 못한 채 머물러있었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그래서 그녀가 침묵 속에서 기도할 때, 그 내용은 얼마나 처절한가. 너무 괴로우면 절로 기도하게 된다. 그에 대한 응답으로 침묵을 깰 기회가 찾아왔다고 믿는다.
폭풍우는 불안정한 상태에서 시작하나 에너지를 모으며 밀고 나아간다. 시작과 끝은 명확하지 않지만 어느새 생겨난 바람과 물이 어떠한 조건을 따라 형성과 소멸을 주고받듯 반복하게 되는 것이다.** 이미 자신의 몸을 통해 두 번의 창조를 경험하고 고독감이 지독했던 만큼 깊이를 가지게 된 작가가 이제 오랜 침묵을 깨고 문을 열어놓을 준비를 마쳤다. 언제 고갈될지 모르나 끊임없이 반복되어온 상반된 것들이-상처와 회복- 결국 나아가게 하는 에너지가 되어주었던 것처럼, 이 전시가 자신만의 재료로 만들어내는 창작 순환주기의 시작이 되길 바라며.
글 변 혜 은
*명왕성되다, 2006년 8월 24일 국제천문연맹의 새로운 행성 기준이 마련되면서 그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명왕성은 왜소행성 134340으로 분류되어 태양계 행성 지위가 박탈되었다. [위키백과, 명왕성] 필자가 작가를 명왕성에 대입한 것은 단지 주변으로 밀려났다거나, 누군가가 중심이냐, 아니냐를 판단하는 것과 상관없이 그냥 자신의 자리에 있었을 뿐이라는 말을 하고 싶었다.
** 키나 레스키, 『창의성은 폭풍우처럼』, 에피파니, 2017, 26쪽
ソン・ミリョンと一緒に制作することを初めて考えた時、そこに特別なきっかけやストーリーがあったわけではありません。これまで誰かと共に展示をする場合でも、最初から最後まで結局は自分で悩み抜かなければならないことだと思ってきました。ですが今回だけは、「一緒にいる」という気持ちを持ちたかったのです。
そうして私は、すぐには一人でスタートラインに立てなかった、けれども小さなきっかけさえあれば誰よりも伝えたいことが止まらない、そんな人を思い浮かべました。叫びたい何かを持っていた人――それがミリョンでした。
創作から自然と遠ざかっていった人々を挙げるなら、その数はあまりにも多く、もはや個人の問題というより社会的な現象と見なすのが自然だという意見もあるでしょう。
けれども、私には彼女が遠ざかってしまった状況がただ“自然”なことだとは思えませんでした。むしろ彼女は、私の目にはいつも何かを始める準備ができている人のように映っていました。
制作をするには空間も作業場も、周囲の人々の配慮や時には犠牲すら必要です。そのような条件が当然に整っていない状況では、「戻る」という行為がとても困難になるのだと思います。けれど、どこに“戻る”というのでしょうか?私は「退場させられた冥王星(plutoed)」を思い浮かべました。
ソン・ミリョンは、人間関係や集団の中で経験するストレスを制作のテーマとしてきました。持続する傷に鈍感になれなかった彼女は、むしろ自らが傷つけてしまうかもしれないという不安のなかで、どこか危うさのあるガラス――あるいはそれに似た物質を壊す行為を続けてきました。
そしてその後、ガラスに火を加えて再び接合し、新しい形を作ろうとする試みを続けてきました。傷や破壊の後にも回復の可能性があるということ、それを自らの手で解いてみようとしたのです。たとえ、結果が以前と同じではなかったとしても。
関係性に敏感だった彼女は、今では「外」からではなく「内」からやってくる負担感、疲労感、そしてそれらすべてが当然のこととして自分に押し寄せてくるような無力感と孤独の中に立っています。
今回の《割れた私の沈黙》では、扱いを誤ると簡単に傷を負わせてしまう有刺鉄線(barbed wire)を通じて、何かを守ろうとしながらも、同時に小さな傷を負い続ける過程を表現しようとしました。
「家庭の中で内傷を負う自分の温かい性質とは裏腹に、常に冷たい素材ばかり選んでしまうようです。でも作品をよく見ると、傷――に見える鋭利な部分――の中に、何か目を引く形があったり、何度もそれを覆い直すような行為を繰り返していることに気づくと思います。残念ながら、より大きな回復は引き裂かれるような痛みの上にしか降りてこないものです。」
この3年間、ソン・ミリョンは数々の「出来事」を経験してきました。何も経験しない人はいません。人は体験を吸収したり、見送ったり、忘れたり、立ち止まったり、しがみついたり、涙を流したりします。ミリョンにも大きな喜びがあった一方で、死にそうだったり、辛かったり、痛かったり、苦しかったり、手放せなかった出来事がありました。そしてそれらすべてを修行のような沈黙の中で過ごしてきました。人が修行のような時間を過ごすとき、闇が深まり、その静けさのなかで孤独な自分を見つけ出します。彼女はこの3年間、空が明るいときも暗いときも、そのような沈黙と内面の闇を深く体験してきました。自らその闇に沈んでいた、あるいは創造できないまま留まっていたのではないかと思うかもしれません。だからこそ、彼女が沈黙のなかで祈るとき、その祈りはどれほど壮絶なものであったことでしょう。あまりにも辛いとき、人は自然に祈りたくなります。今回、その祈りに応えるかたちで沈黙を破る機会が訪れたのだと、私は信じています。
嵐は不安定な状態から始まりますが、エネルギーを蓄えながら進んでいきます。その始まりと終わりははっきりしませんが、風と水がある条件に従って形成され、また消えていくことを繰り返します。すでに自らの身体を通じて二度の創造を経験し、深い孤独を味わったからこそ、より深みを増した彼女は、ようやく長い沈黙を破って扉を開ける準備を終えました。それがいつ枯渇するか分からなくても、絶えず繰り返されてきた相反するもの――傷と回復――が、結果として前に進むエネルギーとなったように。この展示が、彼女自身の素材から生まれる創作の循環サイクルの始まりとなることを願っています。
1)「plutoed」――2006年8月24日、国際天文学連合は新たな惑星の定義を採択し、それに達しなかった冥王星は矮小惑星134340に分類され、太陽系惑星の地位を失いました。筆者が作家を冥王星に重ねたのは、誰が中心かを問うことではなく、ただ自分の場所にいただけである、ということを伝えたかったのです。
2)キナ・レスキ『創造性は嵐のように』、エピファニー、2017年、26ページより。
文 ピョン·ヘウ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