立つ鳥跡を濁さず、とは言うけれど
(떠나는 새는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고 하지만,)
콘노 유키
立つ鳥跡を濁さず、とは言うけれど
(떠나는 새는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고 하지만,)
콘노 유키
풍경(paysage)은 낯선 것에 열려 있다. 낯선 것이 장소를 점유하고 생기함에 열려 있는 한, 바로 풍경은 그 자체로 장소이다. 1
(장-뤽 낭시, 이미지의 심연 속에서, 2003)
1.
사이타마에서 나리타 공항으로, 국내선을 타고 다카마쓰로 이동한 다음 날, 배를 타고 나는 테시마라는 섬에 갔다. 완벽하게 일치하진 않지만, 변혜은 작업과 전시에 활력을 불어넣은 이동의 경험을 떠올리면서 배를 탔다. 변혜은이 제작한 책 <비탈길의 하얀 십자가>(2025)를 읽어보면 탈것을 타고 이동 중인 장면은 사실상 많이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도 독자에게 이동하는 감각을 가져다주는 이유가 있다면, 물리 공간 안에서 생겼다가 사라지는 저자의 경험을 통해 다른 시간과 장소에서도 그 경험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그것은 시간이 이동하는 경험이고, 우리는 기억(한/된 것)이라 부른다. 테시마는 이번이 두 번째 방문이었다. 이전에 갔을 때의 미미한 기억이 떠오른다. 밖에서 튀는 물보라가 잠시 창문에 맺혔다가 금방 아래로 흐르듯이, 배를 타는 감각은 일상에서 벗어난 고조된 감각과 더불어, 첫 번째 여정을 이미지로 소환하였다. 몇 개 안 되는 기억들—같이 간 사람을 먼저 버스로 보낸 기억, 어두운 골목길, 그외 소수.
어쩌면 변혜은의 전시도 이런 식으로 지금 모니터 앞에서 소환되는 것은 아닐까. 몇 개 안 되는 인상을 가지고 작품을 이해하고, 전시를 다시 바라보듯이 말이다. 모든 전시가 그렇듯이, 글쓴이는 기억에 남는 파편들을 애써 붙잡고 글을 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선명하지 않은 것도 기억의 그물망에 걸리는 점이다. 작품과 전시에 관해 글을 쓰는 행위는 선명하지 않던 감각—복합적이고, 때때로 복잡한—을 정리하기 위함이다. <비탈길의 하얀 십자가>도 그렇게 쓰인 것은 아닐까. 장마다 전개되는 이야기를 읽어보면, 한국(인천, 서울)과 일본(다카마쓰, 데시마, 교토), 과거와 현재, 기억과 사물의 시선이 여러 번 교차한다. 어떤 장면 하나를 묘사할 때도, 작게는 개인적 경험, 조금 커지면 가족사, 크게 는 한 지역과 사회의 역사가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작고 큰 이야기는 글로, 글 안에서 한 몸이 된다. 이렇게 나온 한 몸 은 합일에 의한 희열일 뿐만은 아니다. 현실에서는 분간해야 마음 편하게 살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작품이라는 픽션 안에서 대동소이한 사연들이 하나가 될 때, 그 몸은 경험한/된 자의 몸으로써 이야기를 비로소 꺼낼 수 있다.
2.
개인전 《ᄆ|ᄋ》(신아이칸갤러리, 일본 데시마, 2025)의 시각적인 특징은 곧 제목이기도 하다. 투과성이 있는 천이나 인쇄물로 출력한 사진에 뚫린—뚫렸다고 하기엔 크기가 큰—구멍은 평면 뒤의 공간을 드러내는 동시에 연결한다. 다른 한편, 제목은 모난 것이 둥글게 다듬어지는 사물의 변화를 연상시킨다. <수평선의 가시광선>에 등장하는 도시와 집을 둘러싼 기억이 이곳 데시마에 마모되면서도 굴러온 것처럼, 말이다. 또 다른 관점에서 본다면, 두 자음의 모양새는 불안정하게 놓인 공이 들어갈 상자와도 같다. 집에 굴러들어 오면 모두가 안정을 되찾는 것처럼, 말이다. 제목은 대 상 자체의 변화뿐만 아니라 대상이 (말 그대로) ‘놓이는’ 상태를 말하고 있다. 전시에서 다루어지는 건축물과 장소의 변화는 “눈은 사물을 볼 때 변화를 갈구한다”라고 쓴 가스통 바슐라르(Gaston Bachelard)의 한 구절2에 비추어봤을 때, 시간을 통해서 공간을 인지하는 시선으로 본 결과라 할 수 있다. 타월 천에 ‘멈췄던 시간이 흐른다’3라는 글씨가 구멍 나 있는 작업 <멈췄던 시간이 흐른다>(2025)는 이 지점을 상기시킨다. 변혜은에게 멈췄던 시간은 과거의 기록 형태일 것이다. 그것은 동시에 시각 작업을 보는 감상자의 시선으로 전이된다.
그리하여 작가가 다루는 이야기는 과거의 특정 시간이나 고정된 장소의 소환 행위가 아니라 시차를 둔 변화나 환기에 초점이 놓이게 된다. <비탈길의 하얀 십자가>에서도 인용된 아카세가와 겐페이(Genpei AKASEGAWA)의 저서 『초예술 토머슨』(1987)을 읽어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을 찾을 수 있다. “도시라는 물건은 대자연에 발생한, 인류에 의한 일시적인 현상이며, 언젠가는 붕괴했다 다시 대자연 속에 파묻히게 되는 것이다.”4 일시적인 ‘현상’을 도시라는 (견고 한) 구조물에 찾은 아카세가와처럼, ᄆ이 ᄋ이 되고, ᄆ안에 있던 ᄋ가 꺼내어져 어딘가로 떠나는 변화와 과정—여정 을 변혜은은 (제목과 작품이라는) 시각적 은유 안에 담고 있다. 구멍은 그 너머를 향한 상상과 물리적 공간으로의 진입인데, 말하자면 도피를 사유하고 실현하는 양태이다. 변혜은이 ‘몽상’과 ‘구멍’이라는 수어를 인쇄한 후 출력물에 구멍을 내는 선택을 한 이유가 있다면(<몽상>, <구멍>, 2025), 이미지가 가리키는 바를 전시장 내외부—작품과 작품, 감상자와 전시—를 넘나들면서 불어넣도록 감상자에게 열어놓은 것은 아닐까.
물건 일부를 본떠 기록한 <기억의 고물상>과 <추억의 고물상>을 보면, 작가가 등신대로 만난 기억과 추억을 형상에 찾을 수 있다. 캐스팅의 방법은 일대일 크기로 대응하면서, 부재의 형태(form)로 기록하게 된다. 각각 <기억의 고물 상>과 <추억의 고물상>이라고는 하지만5, 무엇을 이 자국에 채워 놓는단 말인가. 대상은 보이지 않지만, 아마도 어딘가에 실제로 있을 것이다. 두 작품은 ‘눈에 밟힌’, 즉 ‘인상’ ‘깊게’ 본 이미지이며, 보기라는 행위를 기록한 형식(form) 이다. 유년기를 보낸 인천에서 경험한 지역 사회의 변화와 주택의 상실, 그리고 다카마쓰에서 이러한 추억을 환기한 흔적들이 사물의 부재로 담긴다. 그것은 대동소이한 경험을, 존재와 부재, 흔적과 원본을 껴안고 구성하는 이미지가 되어, 흐르는 시간과 그 시간을 보내면서 느낀 변화나 생각을 담는 것이 된다.
3.
야구선수 토머슨의 바람을 가르는—일격 없는 스윙처럼, 구멍은 평면과 공간을 넘나든다. 헛스윙(空振り)은 타격의 결과 대신 몸짓, 폼(form, 그러니까 그날의 컨디션이나 습득한 기량을 아우른 운동선수의 신체화된 능력)으로 남는다. 수어를 촬영한 사진과 사물을 본뜬 기록은, 비어 있는 형식을 시각 예술의 언어로 담는다. 이는 보이지 않는 움직임, 그러니까 공과 부딪쳐 소리가 나는 결과가 아닌, 스윙이 비단 헛된 것이 아님을 시각적인 언어로 말한다. 일본어로 말하는 헛스윙(空振り)은 어쩌면 (어설픈 자동 번역된 표현처럼) ‘빈-흔들림’으로 남지 않을까. 겨우 남은 움직임은 마치 인간이 하늘을 날고자 하는 모습과도 같다. 지상에서 날개 아닌 팔을 휘저을 때, 몸은 땅에서 벗어나지 않은 채 어딘가로 향한다. 팔을 움직일 때, 우리의 어딘가는 목적지와 여정을 향하는 대신 하늘이라는 이상을 향한다. 이 이상을 향한 움직임은 움직임으로도 담기기 어렵지만, 그렇다고 무의하기만 하지 않다. 오히려 공간을 열어-젓는, 현전을 도모하는 일격이 되며 하늘과 지상이 염원의 형태로 접점을 가지게 된다. 변혜은이 영상 작업에서 수평선을 상정한 이유가 있다면, (장-뤽 낭시의 ‘풍경’에 관한 사유를 짚고 넘어가자면)6 현전 없음의 표상인 풍경 안에 현전을 찾으려는 몸짓을 허락하기 위함이라 할 수 있다.
4.
“막상 맞닥뜨려보니 내가 말하려 했던 모든 것은 / 모두 피상적인 상태에 대한 것이었다.”이라는 구절이 <수평선의 가 시광선>에 자막으로 나온다. 이 영상 작업에서 작가는 본인이 살던 지역을 방문하면서 떠올린 기억, 전해 들은 이야기를 보는 시선 안에서 겹쳐간다. 중첩되는 기억은 시야에 들어오는 것을 복수화하여 보게 하는데, 이는 장소의 역사를 캐내는 일인 동시에 본인이 소유하는(기억, 선망, 망상의 형태로) 이미지를 덧씌우는 일이다. 엔딩 크레딧으로 이어지기 바로 전 장면에서 작가는 촬영하던 기기(디지털카메라)를 신경 쓰고 있다. 저쪽에서 이쪽을 향해 밀려오는 물결이 카메라로 서서히 다가올 때, 카메라를 신경 쓰고 있는 작가의 모습이 그림자로 순간 비친다. 그것을 보다 보니, “내가 말하려고 했던 모든 것은 / 모두 피상적인 상태에 대한 것이었다”고, “이미지보다는 문장이 뼈대가 되었다”고 말하는7 작가는 “막상”, 아니 ‘분명히’ 이미지에 무관심하진 않았다. 감정과 사유의 물결을 담아낸 영상 작업을 보면, 피상적이 었던 것 안에 그야말로 “뼈대”처럼 있는 것, 즉 기록하(려)는 행위에 대한 관심사가 보였다.
<수평선의 가시광선>에서 감상자는 남아 있는 형태 너머, 작가가 붙잡으려고 했던 몸짓 또는 몸부림을 똑똑히 훑어 보게 된다. 일본어 표현 중 ‘立つ鳥跡を濁さず(떠나는 새는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다. 이 문장에는 뒤처리를 깨끗이 하고 떠나라는 의미가 있다. 전시장에 원래 있던 벽화의 비둘기는 <비탈길의 하얀 십자가>에 썼던 도시의 하찮은 존재, 땅으로 내려온 까마귀, 그리고 하늘을 날던 철새와 겹친다. ‘몽상’의 수어에 나타난 손 모양은 새처럼 날아오르는 듯하다. 떠남에 흔적은 지울 수 없다. 그것은 계속 어딘가로 통과하듯이 이어지고 흘러가기 때문이다. 《ᄆ|ᄋ》에서 변혜은이 남긴 것은 본인의 기억과 경험, 그리고 상상까지 아우르면서 시각적으로도 경험적으로도 붙잡으려고 했음을 담아낸다. 영상 마지막에서 화면에— 무엇보다 파도에 다가가려고 했던 사람처럼, 변혜은의 이번 개인전은 밀려오는 흐름에 개입하면서 그 여정을 담아내고 기록하고 싶은 마음이 ‘묻어-나-있다’.
1 ジャン=リュック·ナンシ〡, 西山 達也(訳), 大道寺 玲央(訳), 『イメ〡ジの奥底で』, 以文社, 2006, p. 132. 원문은 다음과 같다. Le paysage ouvre sur l’inconnu. Il est proprement le lieu en tant qu’ouverture à un avoir-lieu de l’inconnu.
2 ガストン バシュラ〡ル, 及川 馥(訳), 『水と夢 〈新装版〉: 物質的想像力試論』, 法政大学出版局, 2016, p. 165 3 이 구절은 영상 작업 <수평선의 가시광선> 마지막 자막에도 등장한다.
4 赤瀬川 原平,『超芸術トマソン』, 筑摩書房, 1987, p. 340 인용문의 ‘물건’이란 부동산에서 쓰이는 ‘건물’의 의미뿐만 아니라 자연 과 상반되는 개념으로써 ‘사물’의 의미로도 쓰인다.
5 <비탈길의 하얀 십자가>에서 말하듯이, ‘추억의 고물상’이라는 말은 가스통 바슐라르의 『몽상의 시학』(1960)에서 가지고 온 것 이다. (ガストン·バシュラ〡ル, 及川馥(訳),『夢想の詩学』, 筑摩書房, 2004, p. 162-163)
6 장-뤽 낭시에 따르면, 풍경은 ‘우리에게 도래하는(찾아오는) 원근법적 시야’이다. (ジャン=リュック·ナンシ〡, 같은 책, p. 133)
7 전시장에서 나눈 변혜은과 필자의 대화에서 변혜은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