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함께할 수 있다면
私たちが共にいられるのなら
私たちが共にいられるのなら
현재 자리에 우두커니 앉아 바라보는 풍경과 계절을 최대한 상세히 체감하려고 노력했다. 내가 감각할 수 있는 가장 빠른 속도로 시시각각 변화하는 시야, 촉각, 기온, 기분, 생각 같은 건 자세하게 짚어보려 할수록 이미 바로 전의 장면은 온데 간데 사라진 것만 깨달을 뿐이다. 붙잡고 싶은 것은 내 눈앞의 장면인가, 시간인가. 요즘은 빛이 있을 때 너무 많은 풍경을 찍는 것은 자제하려 한다. 카메라가 망가지는 바람에 렌즈에 빛 번짐이 생겼기 때문이다. 나는 훗날 이곳을 떠올릴 때 빛 고리나 직선을 가로지르는 선이 하나씩 낀 채로 기억하게 될지도 모른다. 살을 까맣게 그을리는 볕이 내내 쏟아지는 하늘을 보다 시선을 조금만 아래로 내리면 직선으로 빼곡한 삼나무가 보인다. 그중에서도 가장 깊은 안쪽은 검고 서늘해서 현실감이 없다. 다시 주변을 둘러본다. 나와 같은 시간대에 놓여있지만 전혀 다른 시간을 살고 다르게 시간을 쓰는 사람들이 보인다.
내가 가져갈 기억은 사람에 의해 가장 크게 좌우된다. 당연한 말일수도 있지만, 섬에서의 시간이 내가 만난 사람들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라 다른 것으로 대체되었다면, 그러니까 존재는 나 혼자이거나 무언가를 함께 할 필요가 없었다면. 애초에 원한 적 없는 고통속의 수행이 되어 무엇도 느낄 수 없었을 거라고 예상이 가능하다. 매개가 없는 경험은 한계가 명확하여 그리 오래가지 못했으리라. 또한 이를 바라보는 ‘나’의 자리는 누군가의 환대로써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존재의 고독은 반드시 지속적일 필요는 없다. 혼자만의 고뇌도 심사숙고하여 꺼내놓을 일이 없거나 단련하여 마주하는 관계에 지혜로 해석될 수 없다면 깊어질 수 없다.
장면에 존재가 놓여지면 그 기억의 밀도는 완전히 달라진다. 거기에 참여라는 형식을 통해 공통된 기억을 만드는 것은 매순간 또렷하게 느끼거나 소환할 수 없는 기억의 성질을 강화시킨다. 여러 사람을 통해 회상되며 불규칙적으로 언급됨으로써 영원하지 않은 것, 그리하여 이미 지나버린 것도 마치 생생한 것처럼 기한을 연장해볼 수 있다. 함께일 수 있다면, 하다못해 밤이 열리는 시각 나를 인지하고 화들짝 놀라는 대상(야모리, 나방, 풍뎅이, 사슴, 매일 집을 허물리는 거미들, 샤워실의 달팽이, 두꺼비)도 한 시점의 화면을 불러일으키는 매개가 될 수 있다.
정신을 아찔하게 할 만큼의 더위는 이 모든 것의 눈을 통한 장면뿐만 아니라 온몸을 뒤덮는 감각으로도 저장이 가능하다는 것을 일러주는 듯하다. 그러므로 그만큼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끈적할 만큼의 뜨거움 아닌가. 계절로도 감각할 수 없는 때가 온다면, 존재끼리의 뜨거움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아닐까. 이제 매미소리가 들려오고 있다. 비어있는 허공을 울음이 가득 채운다. 여름이 절정을 향해 달려가고 있으며 나의 자리도 언젠가 마감되어야 한다는 일종의 알람음이다. 그러나 낮이나 저녁이나 울어대는 매미의 울음이 언젠가 재생될 수 있는 기억 속 영상의 한 귀퉁이에 이미 들어가 있다. 그 속에서 나는 어딘가에 덩그러니 있었던 것처럼 새겨져 있을 것이다. 그것의 자리를 미리 마련해보는 연습이자 명분으로 또 하나의 문을 열어놓는다. 그러니 어쩌면 모든 장면이 사라진 뒤에도 그곳에 오래도록 머물도록 허용되는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가진 채로.
글 변 혜 은
번역 채 수 범
現在の場所に静かに腰を下ろし、眼前に広がる風景と季節をできる限り細部まで感 受しようと努めた。視界、触覚、気温、気分、思考といったものは、刻一刻と変化し続 けており、それを最速の速度で捉えようとすればするほど、直前の光景は跡形もなく 消え去っていることに気づかされる。私が留めようとしているのは、目の前の光景で あるのか、それとも時間そのものであるのか。近頃は、光のあるときに風景を過剰に 撮影することを控えている。故障したカメラによりレンズに光のにじみが生じてしまっ たためである。将来、この場所を思い出す際、私は光の輪や直線を横切る筋が一筋 ずつ差し込んだ状態で記憶することになるかもしれない。肌を焼くような陽光が降り注 ぐ空から視線をわずかに下ろすと、杉の木々が直線に並んでいるのが見える。その 奥深くは黒く、冷たく、現実感が希薄である。再び周囲を見回すと、同じ時間帯に存在 していながら、まったく異なる時間を生き、異なる使い方をしている人々の姿がある。
私が持ち帰る記憶は、出会った人々によって決定的に左右されるものである。これは 一見当然のように思えるが、もしこの島での時間が、出会いによるものではなく、他の 要素によって形成されていたとすれば、すなわち、私は一人で存在し、誰かと何かを 共にする必要がなかったとすれば、それは望んだこともない苦行となり、何も感じ取 れなかったであろう。媒介なき経験には限界があり、記憶としても長くは続かなかった と推測される。そして、それを見つめる「私」という存在の位置もまた、誰かの歓待に よって成立するのである。孤独という存在状態は、必ずしも永続的である必要はな い。独りの悩みも、それが言葉として取り出されることなく、関係性の中で鍛えられて 意味付けられることがなければ、深まることはない。
ある場面に「存在」が配置されると、その記憶の密度は全く異なるものとなる。そこに 「参加」という形式を通して共通の記憶が形成されることで、それは瞬間的には明確 に思い出せないものであっても、記憶としての性質を強化する。複数の人々によって 回想され、不規則に語られることにより、永続的ではない記憶も、すでに過ぎ去ったも のであっても、今も生きているかのようにその期限を延長しうるのである。共にあるこ とができるのなら、たとえ夜が始まる時刻に、私の存在を察知して驚き身を引く存在 ――ヤモリ、蛾、カブトムシ、鹿、毎日巣を壊される蜘蛛、シャワー室のカタツムリ、ヒ キガエルといったもの――であっても、ある一瞬の光景を喚起する媒介となり得るの である。
目眩がするほどの暑さは、視覚によるだけでなく、全身でその場面を記録し得るとい う事実を教えてくれているようである。ゆえに、今、私たちに必要なのは、まとわりつく ほどの「熱さ」であるのではないか。季節の変化ですら感知できなくなる時代が来ると すれば、存在と存在の間にある熱こそが、必要なものとなるのではなかろうか。今、 蝉の鳴き声が聞こえてくる。空っぽの空間がその声で満たされていく。夏がその頂点 に向かって突き進んでいること、そして私のこの場所での滞在にも終わりが近づいて いることを告げる警鐘である。しかし、昼夜問わず響く蝉の声は、すでに再生可能な 記憶の映像の一部として記録されており、その中で私は、どこかにぽつんと存在して いた者として刻まれていることだろう。これは、その記憶のための場所を予め用意す るための訓練であり、またその場に留まるための名分として、もう一つの扉を開ける 行為でもある。ゆえに、すべての場面が消失した後にも、そこに長く存在し続けること を許される何かが存在するのではないか、という期待を抱きつつ。
文・ピョンヘウン
翻訳 チェ・スボ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