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소설가 겸 극작가로 19세기 말 러시아의 사실주의를 대표하며 모파상, 오 헨리와 함께 세계 3대 단편작가로 더 유명하다.
소설집 〈황혼〉(1885)으로 푸슈킨 상을 수상했는데, 이 초기 7년간에 쓴 작품의 수 만도 400편이 넘는다.
초창기〈지루한 이야기〉희곡〈이바노프> 속에는 그 시대 인텔리들의 우울한 생활상이 잘 묘사되어 있다.
사할린까지 여행(1890)하여 감옥의 상태, 유형수의 생활을 상세히 조사한 보고 기록문 〈사할린 섬〉(1893)을 발표했다. 이 여행은 그의 작품에 한층 깊이를 더해, 〈구우세프>, 〈결투>,〈아내〉,〈6호실〉,〈무명씨의 이야기> 등의 걸작이 나왔다.
희곡 〈챠이카(갈매기)〉(1896)의 상연 실패는 그를 잠시 극작에 대한 좌절을 주었으나,〈바냐 아저씨〉(1897)를 써낸 이듬해 모스크바 예술극단의 〈챠이카〉상연은 대성공이었다.
이후 극단을 위하여〈세자매〉(1901)를 썼고, 만년의 병환 속에서 리얼리즘 희곡의 정점을 찍었다고 하는〈벚꽃 동산〉(1903)을 써 이듬해 상연, 대성공을 거두었지만, 그 해 요양지인 독일의 바덴바일러에서 폐결핵으로 작고했다.
그의 마지막 희곡인 [벚꽃동산]은 후대에 사실주의 작품의 교과서라는 업적을 남겼다.
44세라는 아까운 나이에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난 체홉이었지만 그의 마지막 희곡인 <벚꽃동산>은 리얼리즘 희곡의 정점을 찍는 최고의 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치 교향악이 흐르는 듯한 4막의 구성과 단 한 명의 인물도 놓치지 않는 개성있는 캐릭터 설정, 그리고 시대를 아우르는 보편적 정서와 함께 당시의 사회상을 비판하는데도 놓침이 없는 이 희곡은 1903년에 탈고하였고 그 이듬 해 1월에 스따니슬랍스끼의 모스크바예술극장(MXAT)에서 초연이 이루어졌다.
그도 시작 전에 무대에 나와서 인사를 했는데 너무나도 창백한 얼굴에 비틀거려서 관객들이 "보내시오! 제발! 체홉선생을 병원에 보내시오!" 라고 소리를 질렀지만 괜찮다고 하면서 객석에서 공연을 관람하던 체홉은 연극이 끝나기도 전에 쓰러지고 말았다.
후에 독일로 요양을 떠났으나 밤에 갑자기 고열과 함께 아주 안좋은 증세를 보였고 의사가 와서 진료했으나, 조용히 청진기를 내리더니 고개를 돌리며 말하길 "마지막 가는 길에 그가 원하는 샴페인을 주도록 하세요."
이 말에 아내는 울기 시작했고 결국 마지막으로 샴페인을 입에 머금은 그는 미소를 지으며 "오랜만에 마셔보는걸...맛이 좋아... 내가 죽으면 모두 샴페인을 즐기시길..." 그리고는 위트있게 독일어로 "나는 죽는다!"고 말하고 영원히 눈을 감았다.
그는 삶을 관조적으로 바라보았고, 해탈의 선에서 문학의 정수를 남기고 떠났다.
톨스토이는 그의 죽음을 너무나도 슬퍼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