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박현제

Interviwee: 박현제

Interviewer: 안정배

2012.5.18 14:00~16:00

과천 기술표준원

SALAB에 들어간 이유

전길남 박사님 연구실에 들어간 첫번째 이유는 사회학 공부를 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70년대에는 군사독재 때문에 대학이 많이 어수선했다. 상당히 많은 공대생들이 사회문제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이런 환경 속에서 나도 인문학적인 고민이 많았다. 사회학을 부전공으로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고보니 컴퓨터 네트웍이라는 것이 사회학과 비슷한 학문이 아닌가. 컴퓨터를 통해 그 뒤에 있는 사람들을 서로 연결하는 학문, 결국 사람과의 커뮤니케이션에 관한 거니까. 시작할 때부터 컴퓨터 네트웍은 혼자서 하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과 같이 해야 하는 학문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평소에 못했던 사회학 공부도 이것으로 연계해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논문도 그룹 커뮤니케이션 주제를 선택했었고.

두번째 이유는 대학원 입학시험 때 교수 인터뷰가 기억에 남았기 때문이다. 6명의 교수와 개별 면담을 했는데 이 분은 조금 특이하게 얘기하는 것이었다. 아마 성적이 좋았던 모양인지, 나중에 어느 교수님께 “넌 됐으니까 신경쓰지 말라”는 얘기를 들었다. 그래서인지 교수들이 대개 질문을 안 했다. 가족관계나 묻고, 가벼운 얘기만 하다가 가곤 했다. 그런데 전길남 교수님은 조금 달랐다. “어떻게 하면 과학원에 좋은 사람이 올 수 있게 하겠냐”가 전길남 교수님의 질문이었다. 역시 그 분도 나에게 특정한 지식을 묻는 질문은 하지 않았지만 본인이 생각하는 고민을 가지고 질문을 했다. 꼭 나에게 정답을 내놓으라는 것은 아니었지만 자신이 이런 고민을 하고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 같이 얘기해보자는 질문. 이것이 인상에 남았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전박사님의 실험실에는 VAX11-750이 있었다. 대학 4학년 때, 데모 사건에도 연루되어 반 년 늦게 졸업을 했는데, 졸업 논문이 프로그램 컴파일러를 짜는 것이었다. 아침에 펀치카드를 컴퓨터에 입력하면 다음날 결과를 찾아 이 자료를 일일이 모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도저히 이렇게는 안되겠다 싶어서 터미널이 있던 홍릉의 KIST에 왔다갔다 하며 고생스럽게 겨우 논문을 마칠 수 있었다. 비용도 많이 들었다. 논문을 같이 하던 사람이 비용이 너무 많이 나왔다고 불평해 대부분을 내가 해결했기 때문에 컴퓨터에 대한 아쉬움이 있던 터였다. 그런데 여기는 실험실에 컴퓨터가 있어서 이 컴퓨터를 마음대로 쓸 수 있다는 것이 매력이었다.

83년 당시, 전산학과에는 조금 더 큰 기종(VAX11-780)이 있었고, 전박사님 실험실에 VAX11-750이 있었는데, 당시로서는과학원 뿐 아니라 전국을 통틀어 컴퓨터를 보유한 개인 연구실은 전박사님 연구실 밖에 없었을 것이다.

1983년, 컴퓨터 네트워크 관리 시작

실험실을 배정받자마자 컴퓨터 관리자로 자원했다. 실험실 컴퓨터를 교대로 관리하는 것이었는데, 밤새도록 백업하고, 다운되면 리셋하고, 콘솔(프린터)에 status mesage가 잘 찍혀나오는지 관리하느라 투닥거려야 했다.

1984년, UNIX OS 업그레이드

본격적으로 네트웍 관리 업무를 맡은 것은 1984년 초반이었다. 이해 말에 새로운 UNIX OS인 4.2BSD가 출시되어 VAX11-750과 780 두 컴퓨터의 OS 업그레이드 작업을 했다. OS가 업그레이드되었으니, 두 컴퓨터를 다시 연결하는 작업을 해야했다. 당시에는 Proteon Ring 방식으로 연결해야 했는데, 4.2BSD는 외부장치를 연결할 때 시리얼 라인(전용선)을 사용하도록 프로그램 되어있었다. 그런데 이 시리얼 라인 인터페이스를 구할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외부 인터넷 연결이 끊어지게 되었다.

직접 프로그램을 만들기로 하고, 커널 소스 등을 만들며 개발을 시작했다. 커널 프로그램은 테스트할 때마다 리부팅이 필요했는데 리부팅은 매회 20~30분씩 소요되는 일이었다. 개발중이라 자주 리부팅을 해야 했으니 다른 실험실에서는 난리였다. 당시 전산과나 전자과, 기계과 등에서는 시뮬레이션을 하느라 1~2주일씩 프로그램을 돌리곤 했다. 학생들이 일주일씩 작업하던 것들이 부팅 한 번에 날아가는 상황이었으니 난리일 수밖에 없었다.

이 문제는 인터넷이 연결되느냐 마느냐 하는 큰 문제였다. 반 년 정도 걸려 프로그램을 거의 다 짰는데, Harvard 대학에서 같은 프로그램이 개발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쉽기도 하고, 욕심 같아서는 더 개발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컴퓨터를 껐다 켰다 하는 것이 너무 힘들어서 포기하고, Harvard에서 만든 ppp 시리얼라인 드라이버를 구해 설치했다. KAIST에서 먼저 실험을 해보고, 서울대 등에서도 이 드라이버를 사용했다. 드라이버는 이후 Seismo에서 만든 SL 드라이버로 교체했다.

덕분에 1985년에는 인터넷이 다시 살아날 수 있었다. Ppp 시리얼라인 드라이버는 당시 내가 만들던 것과 같은 스타일의 프로그램이었다. 처음에 뉴스그룹 등에 이러한 이슈를 제기했을 때, 아무도 대답이 없길래 우리만 문제가 있는 줄 알았는데, 미국에서도 같은 이슈가 있었던 것이다. 나중에 AT(286) PC에서도 비슷한 작업을 한 적이 있었다. 이 때는 업그레이드에 필요한 Ethernet 카드는 구했는데, 프로그램이 MS-DOS용 뿐이라서 UNIX 용 프로그램을 직접 개발해야 했다. 이것을 개발하는데 한 달 3주가 걸렸으니 양쪽 사용자가 백여명에 달하는 VAX 같은 중형컴퓨터에 들어가는 드라이버를 만들 때는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당시에는 이런 프로그램을 직접 짜야 했다. 왜냐하면 UNIX라는 프로그램은 권장 프로그램이 아니라 연구용으로 임의로 설치했기 때문이었다. UNIX를 사용한 까닭은 오픈소스 프로그램이었기 때문이었다. 소스를 구할 수 있었기 때문에, 내부 구조를 들여다보며 그 메커니즘을 이해할 수도 있고, 이해한 대로 소스를 조정(configuration)할 수도 있었다. 미국의 대학이나 연구소에서도 대부분 UNIX를 사용했다.

IP over X.25로 CSNET 연결

이 시기에 MCVAX(네덜란드, 1983년 연결)와 Seismo, hplabs(미국, 1983년 연결)와 연결된 상태였는데, 당시 외국과의 연결은 모두 dial-up 방식이었다. 통신료가 부담스러운 수준이었기 때문에 약간 저렴한 X.29 PAD 방식으로 전환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이것 때문에 UUCP 소스를 들여다보면서 국내에서 사용하는 PAD 방식과 상호 신호를 맞추기 위해 고생했다. 결국 PAD로 바꿔서 외국과의 연결에 성공했다.

하지만 여전히 통화료가 비쌌기 때문에 UUCP 메일은 하루 1번, USENET 뉴스그룹의 자료는 한 달에 한 번 마그네틱 테잎으로 받아보았다. 나는 네트웍 책임자였기 때문에 시급하다고 생각되는 것이 이으면 추가로 연결해서 직접 받아보기도 했다.

컴퓨터 네트웍으로 나와 가장 많이 연락한 사람은 MCVAX의 네트웍 관리자였다. 당시에는 하루 1번 전화를 걸어 해외 네트웍에 연결하는 방식이었으니까 메일을 보내놓고 다음날까지 기다려야 했는데, 어느 날 다른 급한 일 때문에 곧바로 다시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그 친구의 답이 와 있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나도 곧바로 다시 전화를 걸어 또 답을 보내고, 이렇게 몇 차례 왔다갔다 했다. 당시로서는 유럽과 즉시 메일을 주고받는다는 것이 우리에게는 큰 사건이었지만, MCVAX는 당시 유럽 UUCP 중심이었으니 아마 일상적으로 메일에 대한 답변을 즉시 해왔을 것이다. 그 친구를 86년 런던 ISO 미팅에 참석했다가 암스테르담의 CWI 연구소에 찾아가서 만났다. 네트웍에서만 보던 사람을 실제로 보니 무척 반가웠다. 그쪽 시설 둘러보고, 같이 식사하고 커피마시고. 지금은 인터넷을 통해 만난 사람을 오프라인에서 만나는 경우가 흔하지만 그때는 특별한 경험이었다.

네트웍 관리자로서 이런 특혜를 누리기도 했지만 이메일에 의존하는 것은 여전히 불편했다. USENET 뉴스그룹에는 간혹 “이 정보는 FTP로 가져갈 수 있다”고 적힌 정보가 올라오기도 했다. 뉴스그룹으로 올리기엔 부담스러운 것들도 있으니까. 이럴 때마다 어떻게든 인터넷을 연결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당시 CSNET에 연결하려면 세 가지 방식 중에 선택해야 했다. 하나는 전화(Phonenet), 또 하나는 UUCP와 같은 방식??, 다른 하나가 인터넷을 이용한 “IP over X.25” 방식으로 데이터 커뮤니케이션 망 위에 IP를 올려 사용하는 방법이었다. 이 방식을 이용하면 전용선을 깔지 않더라도 미국에 직접 연결이 가능했다. 우리는 X.25사용에 자신이 있었기 때문에 이 방식을 이용하기로 했다.(1984년, X.25 PSDN을 사용한 공중데이터통신망 DACOM-Net 개통) 그러려면 IP 주소가 필요했기 때문에 뉴스 등을 뒤져서 1986년 6, 7월 경에 IP 주소를 신청하는 방법을 찾아서 신청하는 메일을 보냈다

당시에는 IP 주소가 A,B, C 클래스로 나뉘어 있었는데, 여러 번 고민하다가 B 클래스 IP 주소를 신청했다. 당시 보통은 200대 정도를 연결할 수 있는 C 클래스를 신청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우리는 여러가지 이유를 잘 설명해서 6만대까지 연결할 수 있는 B 클래스를 신청했다. 8월에 IP 주소가 승인되었다는 연락이 왔다.

인터넷이 연결되긴 했지만 여전히 우리의 콜을 받아줄 곳이 없었다. 우리가 콜을 하면, 상대쪽에서 허용해주어야 연결이 되는데, 우리의 패킷을 받겠다고 허용해줄 수 있는 곳이 없으니 연결이 될 수가 없었다. 누가 걸었는지, 어떻게 비용을 부담해야 하는지 알 수 없으니까. 그래서 CSNET을 연결할 준비만 갖춰놓고 시간이 흘러가 버렸다. 전박사님이 열심히 알아보셨다면 사용가능하라 수 있게 될 수도 있었겠지만 잘 되지 않았다. 아마 돈 문제도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연결하는 것도 돈이 많이 드는 일이었으니까.

PACCOM 프로젝트 협상과 HANA 망 구축

1987년 쯤, 전박사님이 일본에서 일본, 호주, 뉴질랜드가 미국과의 전용선을 설치하는 프로젝트(PACCOM)를 할 예정인데, 한국도 이 프로젝트에 참가하기로 했으니 한 번 책임지고 해 보라고 하셨다. 1988년 시드니에서 아시아 태평양 네트웍 관련 회의(IANW??)에 하와이 대학 책임자가 오니 협상을 해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시드니로 가서 당시 하와이 대학 책임자였던 Nielson Torben과 만났다. Torben은 터프한 분위기의 전형적인 미국인이었는데, 얘기를 좀 하자고 줄곧 쫒아다녀도 시간을 내주지 않더니 회의일정이 끝날 무렵에야 한국도 참가하기로 결정했다고 얘기해주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일본의 준 무라이 교수와 전길남 교수 사이에 사전 교감이 있었다. 이 내용이 미국쪽 책임자에 의해 확정된 것이다.

그런데 황당했던 게 미국측이 망 이용료??의 절반을 내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인터넷의 원칙은 예나 지금이나 양쪽이 비용을 절반씩 내는 것이다. 그래서 당연히 망 이용료??를 반씩 내는 것으로 생각했는데, 미국 측은 막무가내였다. CSNET도 비용문제 때문에 이용하지 못했는데 이번에도 같은 상황이었다. 형평성에 맞지 않는다고 항변했지만 당시 미국에서는 한국과 전용선을 설치해 얻을 이익이 전혀 없었으니 소용없는 일이었다. 미국의 이런 태도는 1997년 초고속 인터넷을 구축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전용선 설치에 돈이 1억 5천 만원이었다. 한 곳에서 낼 수 없으니까 관련 기관들이 나눠서 내기로 했다. 한국통신, 데이콤, 시스템공학센터, 전자통신연구소, 삼성, 엘지, 에너지 연구소 등이 분담해서 냈다. 대학 연구소들은 예산이 많지 않으니 참가 명단에 이름만 올리는 식으로 했다. 이때부터 SDN이라는 이름 대신 HANA 라는 이름을 사용하게 되었다. SDN이라는 이름을 계속 사용하지 않게 된 것은 국가망이었던 연구망이 연구실에 만든 비공식 네트워크에 돈을 내고 가입할 수 없다고 나섰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컨소시움 형태로 제 3의 단체를 만든 것이 해외망을 위주로 한 HANA 망이었다. 이때부터 자유자재로 인터넷을 이용할 수 있었다.(관련기사: 한미 "컴퓨터 직통선" 뚫렸다 1990.6.4 동아일보)

개인적으로는 82년의 SDN 구축보다 90년의 HANA 망 구축이 더 인상깊은 사건이었다. 사실 80년대 초에는 뭐가 뭔지 몰랐다. 연결했더니 "떴네?" 하다가 비가 왕창 와서 컴퓨터를 못 쓰게 되어서 두어 달 아무것도 못하다가 다시 "붙이자" 해서 다시 붙였던 것이 당시의 기억이다. 네트웍이라고 해도 이메일 겨우 다닥다닥 했던 정도. 반면, HANA 망 구축은 우리 또래에겐 훨씬 의미있고, 개인적으로도 간절히 바라던 사건이었다. 당시의 turn-around time(메시지 송신 후 답변을 받기까지 걸리는 시간)이라고 하면, 이쪽에서 통화료가 가장 싼 저녁 시간에 보내면 저쪽에서 받아보고 답신을 보내는 걸 고려할 때 이틀이 꼬박 걸리는 일이었는데, 이게 HANA 망 개통 이후에는 보내면 바로 볼 수 있게 된 것이니까.

카이스트 전산실(CSRC) 시절

HANA 망의 관리도 당연히 SDN 하던 사람들이 했다. 학위를 받은 이후, 반 년 정도 더 관리자로 있다가 회사에 입사하게 되면서 박태하가 관리하게 되었다.

이미 88~89년부터 해외 망 관리는 카이스트 전산실(CSRC)에서 하게 되었고, 나도 전산실 직원으로 파견되어 전산실 직원들과 일했다. 전산실에서는 아무래도 관리가 가장 큰 이슈였다. 이전에는 KAIST 실험실에서 SDN 통신에 필요한 전화비를 부담했는데 88년에는 이미 몇 천 만원씩 전화비가 나와서 실험실에서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래서 각 기관별로 건 전화(네트웍 접속)를 카운트하고, 이에 맞춰 계산서를 만들어 분배하는 일이 네트웍이 안정적으로 돌아가게 하는 기술적인 관리만큼 중요한 일이었다.

또, 관리를 하다보면 가끔 전용선 연결이 잘 되지 않는 경우가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한국통신에서 우리를 위해 비교적 상태가 좋은 선을 연결해뒀는데, 다른 곳에서 특별한 일이 있어 요청하면 우리에게 할당한 좋은 선을 그쪽의 후줄근한 선과 바꿔주는 식으로 운영해서 벌어진 일이었다. 이렇게 연결이 잘 안되면 우리가 아우성을 치고, 그러면 할 수 없이 다시 좋은 선을 되돌려 연결해주는 식이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다음에는 문제가 생기면, "또 바꿨구나" 했던 기억이 있다.

학인해야 할 모뎀도 무척 많았다. 전용선 모뎀도 있었고, dial-up 모뎀도 있었다. 어디서 전화가 안된다고 연락 오면, 모뎀이 죽 놓인 연구실 한 켠에 가서 불빛 쳐다보는 식이었다. 이런 관리업무가 전산실에서 주로 하던 일이었다.

도메인 네임을 결정하는 작업도 이때 했다. .sdn, .kaist, .edu.kr로도 해봤다가 결국 1986년에 ac.kr로 확정되어 도메인네임 서버(바인더 서버)를 설치했다. (SG-INET 017, ANC91-026)

당시 허진호가 담당한 이메일 configuration도 상당히 복잡한 작업이었다. bitnet, uucp 등 루트도 많았고, 각 케이스마다 세팅이 모두 달랐다. 예를 들면 우리한테 온 것은 @으로 왔지만, UUCP로 보내야 하는 경우 엉뚱한 곳으로 배달되지 않게 경로를 우리가 일일이 설정해줘야 했다. 우선 메일이 들어오면, 이 메일을 로컬로 뿌릴지, 다른 연구기관으로 보낼지 판단해서 처리해야 했다. 라우팅 설정도 어려웠고, 라우터마다 주소의 모양도 바뀌었다. @은 인터넷 방식이고, UUCP는 !를 사용했다. 경로도 일일이 지정해줘야 해서 복잡했다. 여전히 실험상태였기 때문에 이렇다할 큰 문제가 된 적은 없었지만 한 번씩 경로가 바뀔 때마다 sendmail configuration을 다시 해줘야 해서 실수도 잦았다.

SDN 사용자들과 운영자 네트워크

기본적으로는 컴퓨터 연구, 컴퓨터 망 연구에 관련된 사람이 가장 주된 SDN 사용자였다. 주로 연구실 사람들과 그 사람들을 통해 알게된 옆 연구실에 있던 사람이 사용하는 식. SDN 시절에는 기관 차원의 참여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서울대만 해도 전산과에만 있어서 SDN을 사용하려는 다른 교수들은 전산과에 와서 사용하는 식이었다. KAIST만 교내 전체를 커버했지, 다른 기관/학교는 전산과 수준에서 이용하는 정도였다.

그러다보니 주로 컴퓨터, 전자 분야를 잘 이용하는 사람들이 SDN을 사용했지만, 하다보니 컴퓨터 네트웍과 관계없는 문과 교수들이라든지, 미국에서 공부할 때 썼던 사람들이 알음알음 사용하게 되었다. 그래서 SDN 사용자들은 서로 아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데이콤, 금성전선, 삼성반도체통신 등과는 연간 3-5000만원의 프로젝트비를 지원받고, 직원이 반년~1년 씩 카이스트에 파견나와 일하면서 관리하는 법을 배워가는 방식으로 관계가 형성되었다. 이들이 돌아가서 자기 기관에 돌아가 자기 기관에서 관리일을 하는 식이었다. KT에서는 직원이 파견나오는 경우는 없었다. KT에는 KAIST 졸업생들이 많았기 때문에 이들을 주축으로 나중에 KORNET 상용망이 만들어졌고, KAIST NIC의 직원이었던 조혜순 씨가 DACOM에 취직해, KAIST에 1년 가량 파견나왔다 돌아간 DACOM 오익균 씨와 DACOM Internet을 만들었다. 이러한 교류를 통해 자연스럽게 관련 업계 사람들이 관계를 맺게 되고, 시스템 돌아가는 것도 알게 되어 별다른 어려움 없이 협조관계를 유지해나갔다.

운영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했던 회의가 이후 ANC와 SG-INET이 되었다. 운영에 대한 조율과정에서 갈등은 별로 없는 편이었다. 오히려 위계가 분명했달까? 모든 연결은 SALAB에서 나갔고, 상당 기간 우리가 돈을 내며 SDN을 넓히려고 도와주는 분위기였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우리가 고자세로 거만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협조하는 분위기였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우리가 도와주고 있다는 인식을 받으면서 일했다. 웬만한 것은 우리가 테스트하고, 공지하는 방식이었으니까 기술적으로도 앞서있었고.

대학도 기업과 마찬가지로 학생들이 가끔씩 파견나와 배워가는 형식이었다. 기억하기로는 대학에서 파견 온 학생들은 그렇게 잘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학교의 네트웍은 수시로 연결이 끊어지고 그랬다. 카이스트로 공부를 하러 오는 경우도 없었고. 반면, 기업이나 연구소에서 온 사람들은 잘했다. 자기 조직에서 맡은 역할이니까 열심히 하고 잘했던 것 같다.

학생들이 열심히 하지 않은 이유를 생각해보면, 당시의 네트웍을 장난감 같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을 것 같다. 반면, 시스템의 A부터 Z까지 관리를 해야 하는 일이라 일 자체는 힘든 편이었고,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니었으니 열심히 할 동기가 없었을 것이다. 원래 관리라는 게 그렇다. 사회적으로 존경을 받는다거나 빛나는 일은 아니고, 문제가 생기면 욕만 먹는 일이다.

90년 쯤엔 SDN도 개발은 다 끝나고 operation 모드로 들어갔다. 몇 년 후에는 KT로 이관하게 되면서, 더이상 공식적으로는 실험실에서 관리하지 않게 되었다.

7년 동안 시스템 관리자 역할을 한다는 것

긴 기간이었지만 계속 하는 일이 바뀌어서 지루할 틈은 없었다. 85~86년에는 새로운 시도를 하느라 재밌었고, 87~88년까지는 HANA 망을 한다고 재밌는 일이 많았다. 다들 2~3년씩 하는 프로젝트였으니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했다. 스케일이 커서 힘들었다기 보다는 너무 많은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 힘들었던 것 같다. 학생이 공부를 해야 하는데, 시스템이 죽으면 그거 가서 해결하고, 프로그램 짜서 넣고, 외국에서 새로운 프로그램이 나오면 설치하고, 이 얼마나 많은 시간을 쓰는 일인가. 공부를 할 수 있는 시간이 없었고, 하던 공부와 그다지 갭도 컸다. 나 뿐 아니라 다들 자신의 연구 주제와 갭을 가지고 있었다. 이미 돌아가고 있는 시스템으로 연구를 할 수는 없지 않나. 말하자면, 연구를 위한 환경이었던 건데, 그럼 이왕이면 다른 사람이 해줬으면 하는 그런 일이었다. 하다보니까 계속했던 것 같다. 한 번 하니까 빠질 수도 없었고. 결국, 네트워크를 통해 다른 사람과 소통한다는 것이 매력이어서 계속했다. 하지만 도와주는 사람, 지원하는 사람이 너무 없어서 일 자체는 무척 힘들었다.

80년대 SALAB 연구실의 분위기

당시에는 전박사님의 말이 절대적이었다. 이래서 못하고, 저래서 못하고 이런 일이 거의 없었고 하라면 하는 식이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안되는 일이 없었다. 전박사님 입장에서는 펀하셨을 것이다. 한 번 말하면 다들 알아서 하는 분위기였으니까. 얘기를 들어보니 나중에는 그렇지 않았다고 하지만.

전박사님 스타일이 강압적이기도 했지만, 그때는 그게 맞다고 생각했고 대부분 맞는 방향이었기 때문에 그냥 하는 분위기였다. 존경했으니까. 게다가 전박사님이 유난히 사명감을 강조하셨으니까. 당시에는 (카이스트를 졸업하면) 국가 R&D의 밑바탕이 되어야 한다는 의식이 다들 있었다. 그 중에서도 전박사님이 특히 이 점을 강조했다. 우리 실험실 출신 중에는 대학에 간 사람이 거의 없는데, 전박사님이 맨날 하던 얘기가 "국가 돈을 받고 공부해서 대학에 가면 어떡하냐. 교수는 서울대 애들이나 하는 거지. 너희는 돈 받고 공부했으니까 그만큼 국가에 기여해야 한다. 대학교수처럼 평범한 일은 너희들이 할 일이 아니다" 이런 식의 얘기를 많이 했다. 이를테면 국가의 기술발전에 도움이 되기 일. 구체적으로 기업을 한다거나 하는, 기업도 대기업 말고, 스스로 기업을 만드는 것으로. 뚜렷이 뭘 하라고 했다기 보다는 나름대로 찾아보라는 얘기였다.

SDN과 해외 연구망의 분위기

80년대까지만 해도 컴퓨터 네트웍을 잘 쓰는 것 자체가 도전이었다. 90년대 이후처럼 시스템에 침범하거나 장난을 치는 경우는 거의 일은 없었다.

외국의 이용자들은 요즘 블로그 활동하는 것처럼 네트웍을 이용했다. 스스로 개발한 것들을 올려놓거나 제안/질문이 오가는 경우가 많았다. 아무래도 미국의 커뮤니티에는 다양한 엔지니어들이 있었으니까 서로 모르는 것들이 활발하게 교류되었는데, 한국 내에서 문제가 생기면 우리에게 묻고 우리가 해결하는 식이었다. 우리도 모르면 어쩔 수 없고. 국내를 경쟁상대로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경쟁할 만한 동료가 없다는 고민은 하지 않았다.

80년대만 하더라도 인터넷을 이용하고 싶다는 생각이 가장 강했다. 인터넷의 수많은 자료들, 그 규모와 그 활발한 커뮤니케이션이 부러웠다. 반면, 우리의 네트웍 사용은 그렇게 활발하지 않았다. 컴퓨터를 보유한 사람들도 별로 없고, 그 인식도 별로 없고, 외국의 정보를 갖다 써야 할 필요도 없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우리보다 늦게 시작한 일본도 우리보다 10배쯤 커졌는데. 88 올림픽 이후가 되어서야 인식이 바뀌었던 것 같다.

한국 인터넷 개발의 초점

TCP/IP 뿐 아니라 다른 네트웍도 같이 연구했다. X.25 뿐 아니라 TP4 class 0, X.400 등을 같이 연구했다. 이것에 대한 연구도 당시 대부분 SALAB에서 했다. 전박사님 말씀처럼 우리의 인터넷 구축이 미국에 이어 두번째지만, 미국을 따라한 건 아니었다.(EBS 다큐프라임 - IT문명, 세상을 바꾸다 IT 코리아 30년 2012.1.16??)

82년 당시 한국이 후진국이었던 사실이지만, 후진국에서도 네트웍과 같은 첨단 분야의 연구를 했다는 것이 중요하다. 또, 이런 사실이 항상 옛날 이야기에 그치는 게 아니라 현재의 이야기여야 한다는 점이 중요한 것이다.

1995년에 쓴 "세계 속의 한국 인터넷"은 글로벌라이제이션에 초점을 맞춘 글이었다. 우리의 인터넷 개발에 있어서 중요했던 게 글로벌라이제이션과 자꾸 말로 주장하지 않고 그냥 시도해버리는 추진력, 그리고 모든 것을 개방했던 것 등이 지금도 유효한 철학이다. 이 점이 인터넷이 가진 힘이기도 하고.

컴퓨터 네트웍은 곧 휴먼 네트웍이란 말은 말 그대로 사실이다. 당시에는 노드끼리 서로 전화를 하지 않으면 확인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이 말을 실감할 수밖에 없었다. MCVAX나 릭 아담스가 매니저로 있던 Seismo 등이 컴퓨터 네트웍이자 휴먼 네트웍이었다. 물론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처럼 그들도 우리를 중요하게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PACCOM 프로젝트 구성 때의 Torben이 보인 태도에서도 드러나는 것처럼, 한국은 그저 일본 옆에 있는 나라 정도로 생각했던 것 같다. 97년, 초고속 인터넷 기술제휴를 위해 미국의 @Home 사에 방문했을 때도 비슷했다. 한국과 기술제휴를 "하겠다"는 엄두도 낼 수 없는 분위기였고, 일본 하고 나서 "생각해보겠다" 정도. 미국 입장에서는 한국의 기술력 수준에 대해서 견주어 볼 정도로 생각하는 게 아니라, 일본 보다 먼저 배운 것 정도로 생각했던 것 같다. AsiaNet 역시 외국(미국이나 유럽)에서는 거의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기껏해야 PACCOM 하면서 일본 정도만 신경쓰는 정도. 그래서 PACCOM 비용도 우리가 모두 지불해야 했고.

장담할 수 없었던 인터넷 대중화

한 때는 일본에 기술을 가르쳐주기도 했는데, 80년대 말에는 한국의 네트웍 사용량이 일본의 1/10밖에 안 됐다. 확산이 도대체 안됐다. 쓰는 사람이 너무 적었다. 빨리 만들면 뭐하나 확산이 안되는데. 그래서 아마 금속활자도 옛날이 이랬을 것이라는 글을 기고한 적도 있다. 외국보다는 오히려 국내에 컴퓨터 네트웍이 필요하다는 것을 설득하기가 어려웠다. KT에서 프로젝트 연구비 지원을 받을 때, 갈 때마다 쓸데없는 것을 한다고 면박을 당했던 기억이 있다. 하도 여러 번 다시 해오라고 하길래 아예 찾아가지 않았더니 나중에 탈락되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때 실험실에서 설악산에 놀러가 있었는데, 나는 프로젝트에 탈락했다는 소식을 듣고 기운이 빠진 채로 뒤늦게 속초에 가서 전박사님께 보고했다. 전박사님이 별 말씀 없이 그냥 알았다고 하시더니 나중에 다시 얘기해서 프로젝트 연구비를 지원받게 되었다. 당시 경상현 연구부사장이 도와주시지 않았나 싶다.

네트웍은 기술 자체가 어려운 것이었다. 어려운 반면, 실제로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었다. 그래서 나도 나중에는 멀티미디어를 했다. 다행이 웹이 나오면서 멀티미디어가 널리 활용될 기틀이 잡혔다. 웹도 처음에는 사용에 애를 먹었다. 컴퓨터도 느리지만 접속 자체가 매끄럽지 않고, 여러 단계를 거쳐야 했다. 나중에야 네오위즈가 '원클릭' 프로그램을 출시해서 히트를 쳤을 정도였으니까. 전화비 때문에 계속 접속상태로 놔둘 수도 없었고. 예전에 기관들이 SDN 쓰는 것보다 어려워서 초기에는 대중화에 실패할 거라는 생각도 했다. 특히 집에서 쓰는 건 너무 어렵다. 카이스트에서 랜 사용하던 것처럼 언제나 인터넷을 access할 수 있어야 된다고 생각했고, 그것이 두루넷의 초고속인터넷을 구축하면서 LAN과 같이 alaways-on 서비스가 되면서 대중화의 실마리가 풀렸다고 생각한다. 사실 뒤에 구축한 KT의 ADSL 기반 초고속망 서비스는 여전히 전화를 걸듯 사용 전에 연결하는 방식을 채택했었다가 1~2년 후에 지금과 같이 always-on 방식으로 바뀌었다.

201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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