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읍>은 고려속요 가운데 비교적 오랜 전승을 가진 노래이자 궁중 무용(정재)이다. "고려사 악지"에 따르면 이 노래는 백제시대부터 시작되었으며, 이후 고려 궁중과 조선 궁중 그리고 조선시대 사대부들에게까지 널리 알려진 것으로 보인다. <정읍>은 16세기에 궁중에서 일시 퇴출될 운명에 놓였으나, 다시 부활하여 조선후기까지 전승하였다.
이 노래는 무고 정재의 창사(춤의 노랫말)로 불렸으나 순조 때 이르면 한문 창사가 바뀌게 됨에 따라 정재 창사에서 멀어지게 되었으나, 정황 상 무고 정재의 제1의 창사로서 위치는 지킨 것으로 보인다.
"고려사 악지"에, <정읍>에 대해 "무대(舞隊, 검은 장삼)가 악관과 기(妓)를 [악관은 붉은 옷을 입었고 기(妓)는 붉은 화장을 하였다.] 거느리고 남쪽에 선다. 악관들은 두 줄로 앉는다. 악관 두 사람이 북과 대를 받들어다가 전(殿) 복판에 놓는다. 여러 기들은 정읍(井邑)의 가사(歌詞)를 부르는데, 향악(鄕樂)으로 그 곡을 연주한다." (중략) "정읍은 전주(全州)의 속현이다. 정읍 사람이 행상을 나가서 오래 되어도 돌아오지 않자 그 처가 산 위의 돌에 올라가 남편을 기다리면서, 남편이 밤길을 가다 해를 입을까 두려워함을 진흙물의 더러움에 부쳐서 이 노래를 불렀다. 세상에 전하기는 고개에 올라가면 망부석이 있다고 한다." 고 하였다.
그리고 "악학궤범"에 "여러 기생들에게 정읍의 가사를 …… 부르고, 음악이 정읍 만기를 연주하면, 여기 8인이 광렴으로 좌우로 나뉘어 나아가 북의 남쪽에 선다."고 하였다.
이처럼 <정읍>은 고려와 조선의 무고 정재의 창사로 활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무고 정재는 어떤 춤일까? 춤추는 도구(무구)가 무고(교방고)이며, 춤을 추는 기생들이 8명(~16명)임을 알 수 있다. (원무 4명과 협무 4명이 한 조를 이루나 경우에 따라 배수가 될 때도 있다.)
<정읍>을 비롯한 고려속요에 대해 민요 내지 민요적 성격이 우세하다고 언급되지만 연행 상황을 보면 <정읍>(무고 정재)는 소박하거나 민중 예술이라 할 수 없다. 먼저 노랫말 앞에 붙은 악조를 보면, 후반부의 "어긔야~" 앞에 '금선조'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금선조'는 금선의 악조라는 의미로 '금선'을 알면 이 악조가 무엇인가 금방 확인할 수 있다.
<한림별곡> 6연에 당대 최고의 음악 연주자들이 등장하는데, 이때 '금선비파'가 시어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금선은 당대 최고의 비파 연주자였고, '금선조'는 비파악조임을 어렵지 않게 추정할 수 있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비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비파'가 향악기가 아니라 서역에서 전래된 외래악기라는 점이다.
곡향비파_돈황벽화
한편, 무고 정재의 무구인 교방고에 대해 알아보자. 무고의 유래에 대해 "고려사 악지"에 고려 시중 이혼이 영해에 유배되었을 때, 바다에서 밀려온 뗏목으로 북을 만들었다고 하였는데, 이는 이 악기가 외래 악기임을 보여주는 기록이라 할 수 있다. 실제 무고 정재에서 사용되는 북은 교방고로 고려시대 중국으로부터 유입된 악기다.
이외 <정읍>의 잦는소리(느린 음악에서 음악을 더 길게 늘이는 것)가 티벳 롤로 리듬과 유사한 점 또한 무고 정재 <정읍>이 외래적 요소가 적지 않음을 말해 준다.
교방고_왕실문화도감2(악기)
<정읍>은 고려시대 궁중 연향에서 성악곡의 창사로서 사용되었다. 물론 그 기원은 백제로 소급될 수 있음을 "고려사 악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렇게 <정읍>이 고려시대 궁중에 안착할 수 있었던 것은 노래의 배경이 된 '남편을 기다리는 여성의 마음'이 교화로써 작용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이후 <정읍>은 조선시대에 궁중 정재의 창사로 승격되어 사신연의 공연 종목으로 설행되었고, 악공의 시험 과목으로까지 격상되기에 이른다.
이렇게 무난한 질주를 하던 <정읍>은 성종, 중종 대에 이르러 음란한 노래로 지목받아 제거될 처지에 놓이게 된다. 성리학으로 무장한 비평가 일부가 노랫말에서 역린의 요소를 발견한 것이다. 이에 무고정재의 창사를 <오관산>으로 교체하도록 하였다. 아마도 노랫말 마지막 부분을 적극적으로 해석하여 내린 결론이기도 한 듯하다. 남/녀 -> 군/신의 상하 관계가 여성의 목소리가 주체적이거나 수평적일 발생하는 체제 혼란의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물론 예전의 관행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태도에서 벗어나 새로운 안목을 가진 신비평가들의 자세는 긍정할 일이다.)
그러나 <정읍>은 위기를 극복하고 숙종, 정조 대에 무고 정재로 부활하게 된다. 순조 이후 무고 정재의 창사가 한문 가사로 바뀌기는 했으나 사대부들 사이에서 <정읍>을 대상으로 여러 악부시가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게다가 <투호아가보>에까지 노랫말 일부가 차용되었다.
이처럼 <정읍>은 애초 성악곡의 창사였다가 무고 정재의 창사로 사용되었고, 이후 무고 정재의 창사에서 <오관산>, 효명세자 한문창사 등과 같은 거리를 유지하다가 악부시의 소재, 투호놀이에서의 노랫말 등으로 다양한 역할을 하였다.
1) <정읍>과 무고 정재가 이 시대에 문화 예술에 기여할 수 있는 방향은 무엇일까?
2) 무고 정재 <정읍>의 외래성을 인정한다면, 고려속요를 민족성이 강한 갈래로 보는 것이 옳은 일일까?
3) 성종, 중종 대 음란한 노래로 보는 비평가들의 태도를 무조건 그르다고 할 수 있을까?
4) <정읍>의 악부시, <정읍>의 현대시들을 수용사적으로 살필 때 무엇에 주목할까?
5) 무고 정재 <정읍>을 스토리텔링한다고 할 때, 어떻게 할 것인가?
6) 무고 정재 <장읍>을 해외 한국문화 보급의 대상을 삼을 때, 어떻게 할 것인가?
작성자: 김명준(한림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디지털인문학연구소 소장; oldpoetry@hallym.ac.kr)
봉좌문고본 악학궤범
정읍사공원에 다소 어울리지 않게 조형된 상이다. 이러한 여인상이 과연 교육적으로 온당한 것인지 혼란스럽다.(작성자 사견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