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은 여행이다
수필은 여행이다
⧏ | 홈 | 스물아홉번째 이야기 | ⧐
[문화기행③ -도서]
올가을처럼 간절히 가을을 기다린 때가 있었을까? 사계절이 있는 우리나라에서 계절의 변화는 당연하지만, 열대야로 잠을 설친 날이 많았던 긴 여름을 지나고 만난 가을이어서인지 아침저녁의 선선한 바람이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지금 책상 위에는 수필집 몇 권이 놓여있다. 수필 하면 피천득 선생의 글이 우선 떠오른다. 선생의 '수필'이라는 제목의 에세이에 나오는 문장이다. 학창 시절 교과서에도 실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수필은 청자 연적이다. 수필은 난이요, 학이요, 청초하고 몸맵시 날렵한 여인이다…. 수필은 흥미는 주지마는 읽는 사람을 흥분시키지는 아니한다. 수필은 마음의 산책이다. 그 속에는 인생의 향취와 여운이 숨어있는 것이다…. 수필은 한가하면서도 나태하지 아니하고, 속박을 벗어나고서도 산만하지 않으며, 찬란하지 않고 우아하며 날카롭지 않으나 산뜻한 문학이다….”
다른 한 권은 현대 철학자로서 통찰력 있는 다양한 글을 쓴 알랭 드 보통의 에세이 <슬픔이 주는 기쁨>이다.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을 좋아하는 알랭 드 보통이 호퍼의 그림에 대한 자신의 느낌을 쓴 에세이다. 호퍼의 그림은 한국 사람들에게도 비교적 잘 알려졌다. 아마도 과거 호퍼의 전시회도 한몫했을 것이다. 아랫글은 알랭 드 보통의 <슬픔이 주는 기쁨>에서 옮겼다. 마치 호퍼의 그림을 보고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썼기에 그대로 가져왔다.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들은 황량함을 묘사하고 있지만 그 자체가 황량해 보이지는 않는다. 오히려 보는 사람이 자신의 슬픔의 메아리를 목격하게 함으로써 그 슬픔으로 인한 괴로움과 중압감으로부터 어느 정도 벗어나게 해준다. '자동 판매식 식당'은 슬픔을 그린 그림이지만 슬픈 그림은 아니다. 이 그림은 위대하고 우울한 음악 작품과 같은 위력이 있다. 혼자서 커피를 마시는 남자들과 여자들, 일반적으로 공동의 고립감은 혼자서 외로운 사람이 느끼는 압박감을 덜어주는 효과가 있다. 도로변의 식당이나 심야 카페테리아, 호텔의 로비나 역의 카페 같은 외로운 공공장소에서 우리는 고립의 느낌을 희석할 수 있고, 따라서 공동체에 대한 독특한 느낌을 다시 발견할 수 있다…. 익숙한 벽지와 액자의 사진들이 있는 거실보다는 이곳에서 슬픔에 무너지는 것이 더 편할 수도 있다."
추석 연휴 기간에 가족과 여행하며 들른 카페 벽에 호퍼의 그림이 걸려 '있었다.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Nighthawks)'이라는 그림이다. 호퍼의 그림을 보며 문득 알랭 드 보통의 에세이 생각이 났다. <슬픔이 주는 기쁨>은 드 보통의 아홉 편의 수필을 담은 에세이다. 신간인 줄 알고 구매했다가 나중에 신간이 아닌 것을 알았던 책이다. 과거에 <동물원에 가기>라는 제목으로 발간했는데, 2023년에 같은 책을 <슬픔이 주는 기쁨>으로 제목을 바꾸어 출간했다. 여행 기간에 본 그림 때문에 생각나서 다시 읽어 보는데 좋은 에세이다. 독서의 계절 가을이어서 더욱 그런지 모르겠다. 책을 통해 모르던 작가를 소개받고 좋아하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하지만 책을 통해 화가를 소개받고 관심 두는 경우는 드물다. 내 눈에 호퍼의 그림이 들어오게 된 것은 분명 알랭 드 보통의 영향도 있다.
장석주 시인은 그의 에세이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들>에서 서울대 심리학과 최인철 교수의 글을 인용했다. “사는 (buy) 것이 달라지면 사는(live) 것도 달라진다”라는 문장이다. 최인철 교수는 명품 구매보다 경험을 사는 게 훨씬 더 사람을 행복으로 이끈다고 말한다. 경험을 사는 대표적인 활동이 여행이다. 명품을 사겠다는 목적으로 여행하지 않는 한, 여행하면서 물건을 사기도 하지만 대체로 소소한 것들이다. 벼룩시장을 돌아보고, 헌책방을 들르며 식당을 기웃거리고(물론 예약하고 가기도 하지만), 카페나 숙소에서 책을 보거나 잡담을 하며 소일하는 것이 전부다. 그런데 여행은 경험의 다양성 속에서 자기 존재를 확장하도록 이끈다.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들>은 여행이 주는 행복을 포함한, 장석주 시인의 행복에 대한 사유를 담은 에세이다. “여름을 건너가기 위해 차디찬 수박 한입 베어 물 때, 그때 불행은 저 먼 곳으로 모습을 감추고, 행복은 마침내 발견된다. 삶은 거기에서 다시 시작된다.”
지난 여름, 우리는 유례없는 폭염과 열대야에 무력했고 고통스러웠다. 길고 길었던 무더위를 뒤로하고 만난 좋은 계절! 바쁜 중에도 커피 한잔 앞에 두고 에세이 한 편을 읽는 여유를 가져보면 어떨까, 멀지 않은 곳으로라도 여행을 한번 떠나보는 것은 어떨까? 행복은 늘 작고 단순한 것 속에 있는지 모른다.
2009년 온누리교회에 출석하면서 BEE를 시작한 후, 2015년 사역자 임명을 받았고, 현재 카타르 기도테이블에서 함께 기도하고 있다. 가족은 박소현 권사와 출가한 큰딸과 막내딸을 두었다. 한국경제신문에 근무한다.
[정리 및 편집 최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