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산 아래의 약속


비가

그는 같은 학교 2학년 선배, 지훈이었다.
평소에 말 한마디 섞은 적 없었지만,
그날 이후 두 사람은 같은 우산 아래서 몇 번이고 걷게 되었다.

소연은 알 수 있었다.
비가 오는 날, 그는 항상 같은 시간에 우산을 들고 그 자리에 나타났다.
그리고 묵묵히 그녀와 집 앞 골목까지 걸었다.

어느 날, 비가 오지 않았다.
하지만 소연은 습관처럼 서점 앞에 서 있었다.
지훈도, 말없이 우산을 들고 나타났다.
그날, 하늘은 맑았지만 두 사람은 우산을 펼쳤다.

"비가 안 와도, 우산을 쓰는 이유가 뭐예요?"
소연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지훈은 조용히 대답했다.
“우산은 비를 막기 위해서만 있는 게 아니니까요.”

그 순간, 그녀의 심장에 무언가 조용히 내려앉았다.

며칠 후, 지훈은 유학을 간다는 소문이 돌았다.
소연은 혼란스러웠다.
고백하지도 않았고, 아무 약속도 없었다.
하지만 매일같이 그 우산 아래 함께 걷던 그 길은,
이제 혼자 걸어야 한다는 사실이 그녀를 슬프게 했다.

비가 내리던 마지막 날, 소연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지훈은 오지 않았다.
그 대신, 서점 문 앞에는 접혀 있는 우산 하나와
노란 메모지 한 장이 남겨져 있었다.

“언젠가 다시 비가 오면,
우산 아래서 다시 만나요.”

그날 이후, 소연은 비 오는 날마다
그 우산을 들고 골목길을 걸었다.
누군가 함께 걸을 것만 같은 마음으로.

몇 년이 지나, 서울은 여전히 자주 비가 내렸다.
그리고 어느 흐린 오후,
우산을 든 한 남자가 조용히 골목 어귀에 서 있었다.

그 우산은 낡았지만, 모양은 그대로였다.
그리고 그 아래에서 다시 마주한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웃었다.

하늘에서 조용히 빗방울이 떨어졌다.
그리고 오래전 그날처럼,
하나의 우산 아래 두 사람은 함께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