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한 여행을 위한 준비물을 안내합니다. 하나. 넉넉한 시간과 예산. 둘. 계획적인 동반자. 홀로 종이 위를 누비는 금빛 깃펜이 짧은 문장 끝에 마침표를 찍었다. 셋. 조작된 세계지도.
Hello Pathfinder!
테미스의 손을 거친 세계지도는 한눈에 봐도 흉했다. 머리와 지느러미를 쳐내고 비늘을 긁어낸 식탁 위 생선 요리처럼 그린란드 북부와 칠레의 마가야네스 아랫부분이 보이지 않았다. 북극이나 남극을 지구의 천장과 바닥으로 여긴다면 이 집은 비를 막을 수도, 딛고 서 있을 공간도 없는 셈이다. 힘없이 날아간 다트가 수많은 무인도마저 외면한 망망대해에 세 번 꽂힐 줄은 예상도 못했다. 가위를 내려놓은 테미스는 흑단 지팡이를 휘둘러 최종 수정안이라며 확언한 지도를 벽에 고정했다. 축 늘어진 종이가 다림질한 듯 곧게 펴졌다. 텅스텐 팁이 뚫은 작은 구멍을 검지 끝으로 문지르던 그는 몇 분 전의 재난을 곱씹었다.
우울한 겨울을 지나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도록 옅은 구름 사이로 얼굴 내민 여름 햇빛 때문인지 영국 건기의 쾌적함에 괜히 들떠 평소엔 들추지도 않을 여행잡지가 눈에 들어왔다. 유명 관광 명소. 강조된 글씨 아래 다양한 삽화가 나열된다. 전부 근사했기에 한 곳을 고르기 어려웠던 테미스는 발을 동동 구르는 자신이 제과점 진열대에 널린 케이크를 두고 한참 고민한 아이가 어른에게 선택을 떠넘기는 모습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결국 상황을 해결할 어른 역할은 빈센트가 적임일 테다. 좋아. 직접 끌고 오자. 잡지 부록을 넓게 펼친 다음 사 미터 떨어진 바닥에 쪽빛 공단 리본을 늘어뜨린 미운 스물두 살은 계단을 단번에 뛰어올라 우렁차게 외쳤다. 비니!!
"티미. 다트로 여행지를 정하는 발상은 어쩌다 하게 된 거예요?"
아마존 우림을 스치고 떨어진 다트를 증거인멸이라며 소파 아래로 걷어찬 테미스의 만행을 목격하고 한 걸음. 대단한 마법사도 날것의 자연이나 원시 부족은 무섭다는 발언에 잔잔한 한숨이 섞여들었다. 문명의 존재가 의심스러운 좌표에 팁을 꽂아 넣을 때 두 걸음. 결과를 외면하며 점차 거리를 좁힐 때마다 정신이 아릿해졌는지 빈센트는 희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의 말이 끝나고도 묘한 묵언은 지속됐다. 좌우로 시선만 굴리던 테미스가 겨우 한마디 보탰다.
"그리핀도르 졸업여행을 이렇게 갔거든. 우리 기숙사를 향한 편견이 또 하나 쌓이겠는걸."
더 쌓일 편견이 남았던가. 현실적인 지적에 어깨가 움찔 떨렸다. 부연 설명의 필요를 느낀 테미스는 배럴을 쥐고 새롭게 겨냥하는 빈센트의 한 뼘 뒤에서 부지런히 입을 놀렸다. 결코 부족하지 않을 지능을 이런 일에 낭비한 이유와 하나부터 열까지 우연에 기댄 러시아 여행의 어떤 점이 즐거웠는지 양념을 조금 보태 나열했다. 당당한 헛소리는 소심한 정론보다 그럴싸하게 들리기 마련이다. 몸을 둥글게 웅크리고 자던 족제비가 입을 쩍 벌리더니 자리를 옮겨 제 주인의 발목에 머리를 문질렀다. 애쓴다. 그렇게 말하는 것만 같았다.
"아무튼 집중. 이게 마지막 한 발이라면서요."
탁! 경쾌한 소리가 거실을 울렸다. 그가 정신을 차렸을 때 검은 다트는 이미 지중해 연안을 가리키고 있었다. 와우! 비니 너는 최고야! 슬금슬금 올라간 입꼬리를 손바닥으로 꾹 누른 테미스는 자리에서 발발 떨더니 지도가 놓인 곳까지 단숨에 달려갔다. 문명은 물론 신화까지 꽃피운 명소. 온화한 기후와 아름다운 골목길이 여행객의 마음을 녹이며 백색 건물과 깊고 푸른 바다의 대비가 인상적인 높은 절벽 마을, 산토리니를 품은 낭만의 땅. 그리스! 얇은 구멍 여섯 개는 그동안의 기대를 멋지게 충족시키기 충분했다.
소파에 파묻힌 빈센트의 등 뒤로 돌아간 테미스는 허름한 동거인을 끝없는 칭찬 감옥에 가둔 채 어깨만 주물러주었다. 어떻게 이토록 뻔뻔하냐는 물음과 그만하라는 애원이 섞일 즈음 손을 뗀 그는 제미니오 마법으로 지도를 두 장 복사하고 지팡이 끝으로 툭 두드려 거대한 것을 손바닥 크기로 줄였다.
"이게 인디언 기우제와 뭐가 다른지…. 다음 여행지는 평범한 방법으로 정할 수 없나요?"
"방금 질문, 독수리 동상이 낼법한 문제 같다. 될 때까지 하는 집념과 기원이라는 공통점을 보면 우리가 치른 건 일종의 의식이지."
'그보다 비니. 다음 여행도 같이 가주려고?' 한 발짝 앞으로 나온 테미스가 진지하게 물었지만 업보는 불신으로 돌아왔다.
"티미는 말로 죄를 짓는 데 특화된 혀를 가졌어요."
"네, 아빠."
"다시 아빠 소리가 나오면 레이븐을 찾으면서 빌게 만들 거야."
제가 졌다며 꼬리 내린 것도 잠시. 복도를 재빠르게 거슬러 얼룩덜룩한 부엉이를 데려온 테미스가 뾰족한 입에 낯익은 종이 두 장을 물리고 짓궂게 웃었다. 우리 여름 휴가 간다고 자랑할 거다? 그 둘이서 죽어라 일할 때 그래놀라를 통으로 올리고 딸기와 건무화과 토핑으로 마무리한 그릭요거트를 씹을 거라고. 유치한 계획을 읊으며 한껏 열어젖힌 창문으로 부엉이가 날아올랐다. 동시에 거센 돌풍이 고요한 앞마당을 휩쓸었다. 손이 닿을 거리까지 가지 뻗은 단풍나무가 두어 번 흔들린다. 온화한 햇빛과 건조한 바람, 낮게 깔린 웃음소리. 특이한 것 없는 일상일수록 이런 순간은 평생의 자국으로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