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대학교 영상콘텐츠융합연구소
Smart Image Content Research Center
Chung-Ang Univers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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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서 제1권 소개글
영상콘텐츠융합연구소는 2025년부터 2031년까지 한국연구재단의 글로벌인문사회융합연구지원사업(과제명: 감성 AI 기반 글로벌 문화콘텐츠 스토리텔링과 이미지 생성 연구)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학술 활동 결과물을 체계적으로 취합하고 확산하기 위해 ‘감성 AI 글로벌 콘텐츠 총서’를 준비하고 있으며, 2026년에 발간할 제1권은 ‘감성 AI- 기술, 예술, 인간의 경계를 다시 묻다’라는 제목의 공동 칼럼집입니다. 감성 AI라는 키워드와 관련된 단순한 기술 소개서가 아닌 ‘인간과 AI가 감정을 매개로 어떻게 공존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출발점으로 인간-기계-예술의 관계를 재사유하는 학제간 대화의 장을 만들고자 합니다. 이곳에 수록하는 칼럼들은 총서에 담길 원고들의 요약본이자 소개글로 준비했으며, 매주 한 편씩 업데이트할 예정입니다. 앞으로 이어지게 될 감성 AI 담론들에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5월 4호. AI 영화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손지현
중앙대학교 영상콘텐츠융합연구소 연구전담교수
#장면 1
“AI와 인간의 차이점은 무엇인 것 같습니까?” 얼마 전 한 TV 프로그램에 나온 김애란 작가는 이 질문을 듣고 한참을 생각하다 답했다. “좀 고민되는 일이 있어서 AI에게 고민을 나눈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인간한테는 있고 AI한테는 없는 게 하나 있었어요. 바로 망설임이었어요. 누군가의 고민을 들을 때, 아픔을 들을 때 어떤 말을 삼키거나 주저하거나 짐작하고 헤아리는 찰나가 있더라고요. 그리고 그 주저 안에 힘겹게 서 있는 어떤 배려나 품위가 있다고 생각하고, 그게 어느 때는 유려하고 빠른 AI의 조언보다 인간의 투박한 침묵이 더 위로가 된 적도 있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고는 이어 “인간의 결함이나 한계처럼 보이는 게 사실 우리의 미덕일 수 있고 개성일 수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고 말하며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장면 2
필자는 장애인 복지관에서 장애인들과 함께 AI 기술을 활용해 단편영화를 만든 적이 있다. 무엇이든 가능한 AI 기술로 수강생들의 버킷리스트를 영화로 실현해 보기로 했고, 각자 돌아가며 자신의 버킷리스트를 말했다. 가요제 나가서 상 받기, 서핑하기, 부산 가서 아버지 만나기, 김장해서 나눠 먹기, 오픈카 타고 전국 일주하기 등등. 수강생들의 버킷리스트는 다양했고 본인의 버킷리스트를 떠올리며 말할 때 그들의 표정은 그야말로 반짝반짝 빛났다. 그들의 얼굴과 신체를 AI로 모델링하고, 그들과 똑같이 생긴 가상의 인물을 만든 다음, 버킷리스트를 수행하는 프롬프트를 입력해 영화를 만들어 나갔다. 완성된 영화에서 그들은 막연히 떠올리기만 했던 버킷리스트를 직접 수행하는 본인을 마주했다.
저는 이번 칼럼을 쓰면서 가장 먼저 떠올린 질문은 ‘감성 AI’란 무엇인가였습니다. 바로 생각나는 구체적인 답이 없어, 그럼 ‘감성’이란 무엇이고, ‘AI’란 무엇인지 검색해 봤습니다. 감성은 ‘감각적 자극이나 인상(印象)을 받아들이는 마음의 성질’, AI는 ‘인간의 학습능력, 추론능력, 지각능력을 인공적으로 구현하려는 컴퓨터 과학의 세부분야 중 하나’라고 합니다. 그럼 제 나름대로 감성AI를 정의해 보면 ‘인간의 마음으로 느끼는 감각적 자극이나 인상을 컴퓨터라는 도구를 활용하여 인공적으로 구현하려는 것’으로 거칠게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저는 거칠고도 서툰 저만의 정의에서 ‘인간의 마음’이라는 부분이 자꾸만 걸렸습니다. 인간의 마음을 컴퓨터로 구현해 낸다는, 굉장히 강렬한 효율화에 솔깃하면서도 지극히 차가운 저 논리에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이러한 흔들리는 마음이 찬탄에 가까운 것인지 아니면 왠지 모를 서늘한 온도에 움츠러든 것인지 이마저도 모호했습니다.
그러던 중에 저는 앞서 나열한 두 가지 장면을 떠올렸습니다. 첫 번째 장면은 김애란 작가의 ‘망설임’이었고, 두 번째 장면은 ‘복지관 수강생들의 표정’이었습니다. 먼저 두 번째 장면을 조금 더 이어서 말하고 싶습니다. 그들은 평소 상상만 하던 자신의 모습을 마주했을 때 새롭고 신기한 그 장면에 놀라워했지만, 그 순간이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은 무언가 부끄러워했고 의기소침했습니다. 분명 그들이 AI 기술을 활용해서 영화를 만들었고, 그들이 주인공이 되어 그들이 평소에 바라던 일들이 실제로 이뤄질 수 있다는 것에 큰 뿌듯함과 자랑스러움을 느끼고 있었지만, 그 이면에 그들의 결함과 한계가 모두 지워진 본인의 모습에서 오는 괴리감과 어색함이 그들을 미세하게나마 불편하게 만들고 있었습니다. 기쁘지만 충만할 수 없는 그 표정을 보며 저는 같이 부끄러워했고 또 혼자 많이 반성했습니다. 김애란 작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인간의 결함이나 한계처럼 보이는 게 사실 우리의 미덕일 수 있고 개성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 채 AI의 유려함과 효율화에 젖어 어떠한 망설임도 가지지 않은 저 자신에 대한 반성과 부끄러움이었습니다.
저는 영화라는 매체를 아주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자, 그래서 영화를 연구하고 창작하는 사람 중 한 명입니다. 영화가 결코 세상을 바꿀 수는 없겠지만 한 사람의 내일은 충분히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 중 한 명이기도 합니다. 제가 사랑해 마지않는 영화를 만들 수 있는 새로운 기술로 AI라는 최첨단의 테크놀로지가 찾아왔고 저는 이 기술이 영화에 끼치고 있는, 그리고 끼칠 수 있는 영향력에 대해 살피고 있습니다. 여러 영향력 중에서도 저는 단연 영화 창작의 민주화가 강력한 힘을 발휘할 거라 생각합니다. 쉽게 말해 누구나 영화를 만들 수 있는 시대가 도래했고, 저는 이러한 AI 영화 시대를 긍정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우려되는 지점도 있습니다. 한 치의 주저함과 머뭇거림 없는 AI와 작업을 하면서도 어떻게 하면 매 순간 흔들리고 망설이고, 나 자신조차도 알 수 없어 좌절하는 우리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영화를 만들 수 있을지. AI가 주는 유려함과 효율화에 젖어 우리에게 정말 필요하고도 중요한 무언가를 놓치고 있지는 않은지. 이러한 우려는 AI로 영화를 만들고 있는 저 자신에 대한 고민과 반성이자 끝없는 자기 점검입니다. 그리고 누구나 영화를 만들 수 있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수많은 예비 AI 영화 창작자들을 향한 주제넘은 염려이기도 합니다.
복지관에서 만든 AI 영화는 영화제에서 수상도 하고, 수강생 중 한 명은 배우의 꿈을 가지게 되었고 한 명은 편집자로, 한 명은 감독으로 꿈을 키워가고 있습니다. 함부로 짐작할 수는 없지만, 그들의 다음 영화는 그들의 결함과 한계가 말끔하게 지워진 영화가 아니라 조금 투박하고 거칠더라도 제가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그들만의 감성이 담긴 작품일 겁니다. 저는 우리 모두 결함과 한계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어쩌면 그러한 부족함이 우리의 진심과 맞닿을 때 누군가에게 감동을 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감성AI가 조금 더 인간의 온도와 비슷해지기 위해서는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부족하고 불완전하기에 오히려 완전해질 수 있는 그 아름다운 결함을 인정하면서 인공지능과 손잡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쓰게 될 글은 불완전한 인간이 완전한(지능으로 나아가고 있는) AI 기술과 손을 잡고 어떻게 영화를 만들 수 있는지에 대한 안내서입니다. AI 앞에 감성이 붙을 수 있다면, 그건 컴퓨터의 완벽하고도 차가운 이성의 논리가 앞장설 때가 아니라 인간의 결함이나 한계라 할지언정 그 빈틈 안에 온기로 꽉 찬 감정이 앞설 때 가능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의 글이 여러분들의 흔들리고 불완전한 마음을 영화라는 매체로 앞세울 수 있는, 조촐하더라도 다정한 안내서가 되었으면 합니다.
5월 3호. 국악처럼 들리는 것의 시대
유리나
중앙대학교 영상콘텐츠융합연구소 연구전담교수
AI 음악 생성 기술은 빠르게 발전하고 있지만, 그 기반이 되는 데이터는 심각하게 편향되어 있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AI 음악 생성에 사용되는 데이터의 약 86%가 서구 음악에 편중되어 있으며, 남반구의 음악은 약14.6% 수준에 불과하다. 또한 많은 연구가 악보 기반의 상징적 음악 표현에 의존하고 있어, 지역 음악의 문화적·수행적 맥락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다[1]. 이러한 조건에서 비서구 전통음악은 단순히 덜 학습되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부정확한 방식으로 재현될 가능성을 안고 출발한다.
AI가 생성한 음악이 다시 학습 데이터로 축적되는 구조는, 단순한 오류 축적을 넘어 모델 자체의 붕괴로 이어질 수 있다. 실제로 AI가 생성한 데이터를 반복적으로 학습한 모델은 빠르게 성능이 저하되고, 결국 의미 없는 결과를 산출하는 상태에 이르는 것이 확인되었다[2]. 이는 이른바 ‘모델 붕괴(model collapse)’로, 원래 데이터 분포의 드문 패턴들이 사라지고 점점 더 단순하고 왜곡된 형태로 수렴하는 과정이다. 국악 역시 이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다만 국악은 대규모 시장이 아니라 국가 지원과 제도적 전승을 기반으로 유지되는 영역이기 때문에, 민간 산업을 통한 점진적 오염이 크게 우려되는 상황은 아니다. 오히려 문제는 다른 방식으로 발생할 수 있다. 만약 왜곡된 형태가 한 번 유통되기 시작하면, 그것이 기준처럼 굳어지는 속도는 매우 빠를 것이다. 따라서 이 문제는 시장이 아니라 아카이브의 문제이며, 국악의 학습 데이터 구축과 관리 역시 국가기관이 주도할 필요가 있다.
한편, 이러한 변화는 이미 음악 제작 도구 수준에서 현실이 되고 있다. 애플의 최신 Logic Pro는 AI 기반 ‘스튜디오 어시스턴트’를 통해 작곡, 편곡, 연주를 보조하며, 가상 베이시스트와 키보디스트가 사용자의 입력에 맞춰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세션 플레이어’, 하나의 음원을 여러 파트로 분리하는 ‘스템 스플리터’ 등의 기능을 제공한다[3]. 이 도구들은 창작 과정을 단순히 보조하는 수준을 넘어, 음악 제작의 진입 장벽 자체를 낮추고 있다. 이제 일정 수준의 작곡 기술이 없어도 음악을 구성할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된 것이다. 이 변화는 국악 전공자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연다. 전공자는 이미 국악의 장단, 시김새, 스타일에 대한 감각과 생성된 결과물을 판단하고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더 정교하게 만드는 기술이 아니라, 무엇을 선택하고 어떤 형태로 제시할 것인가에 대한 판단이다.
국악은 오랫동안 생산의 문제가 아니라 소비의 문제를 안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기술적 조건은, 국악을 보다 넓은 층위로 유통할 수 있는 새로운 계기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국악처럼 들리는 것’이 ‘국악’으로 오인될 위험은 항상 존재한다.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국악처럼 들리는 것’이 곧 국악의 기준으로 자리 잡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전공자의 역할은 단순한 창작자를 넘어 “무엇을 국악으로 제시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기준 설정자로 확장된다. 결국 문제는 기술이 아니라 주도권이다. 국악은 어떤 음악인가, 국악의 기준을 누가 설정할 것인가. 지금은 그 질문에 답해야 하는 시점이다.
5월 2호. 납득의 속도 - 매끄러운 이미지와 노이즈
한상임
중앙대학교 첨단영상대학원 교수
사진은 한때 무언가가 실제로 존재했다는 증거였다. 롤랑 바르트가 『밝은 방』에서 사진의 본질로 짚은 것도 바로 이 점이다. 사진은 “이것이 존재했다”는 돌이킬 수 없는 과거성을 통해 다른 이미지들과 구별되었다. 그러나 이제 그 문법은 존재하지 않는 것을 실재처럼 읽히게 만드는 데 쓰인다. 사진적 형식은 살아남았지만, 그것이 가리키던 존재의 흔적은 사라졌다. 오늘날 가장 설득력 있는 이미지는 가장 정교하게 만들어진 이미지가 아니다. 가장 자연스럽게 도착하는 이미지다.
생성형 AI 이미지는 이제 단순한 진위 판별의 문제가 아니다. 더 근본적인 질문은 이것이다. 이미지는 어떻게 우리의 판단이 시작되기 전에 이미 납득을 확보하는가. 한 번도 촬영된 적 없는 장면이 사진적 문법을 통해 기억처럼 스며들고, 존재하지 않는 공간이 건축 사진의 형식을 빌려 실재처럼 읽힌다. 히토 슈타이얼이 지적했듯, 오늘날 이미지의 권위는 원본의 충실한 재현이 아니라 순환과 유통의 속도에서 온다. 생성형 AI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그것은 이미지를 유통하는 데 그치지 않고, 유통에 최적화된 감각의 형식 자체를 생산한다. 허구가 현실로 오인되는 과정조차 생략한 채, 처음부터 '그럴듯한 것'으로 도착한다. 그리고 그 도착은 언제나 매끄럽다. 저항 없이, 마찰 없이, 멈춤 없이.
그런데 현실은 원래 매끄럽지 않다. 현실에는 늘 미세한 불균형과 우연, 정리되지 않은 잔여가 남는다. 노이즈는 그런 잔여가 기술적 이미지 안에서 감지되는 한 방식이다. 노이즈는 보통 제거해야 할 오류로 취급되지만, 그것은 노이즈를 기술의 언어로만 읽을 때의 이야기다. 조금 다른 각도에서 보면, 노이즈는 이미지가 세계와 마찰하고 있다는 증거다. 형광등 아래 사람의 얼굴은 고르지 않고, 오래된 사진 속 배경은 약간 흔들려 있으며, 실제 도시의 거리에는 불필요한 것들이 가득하다. 그 불완전함이 오히려 '이것은 진짜 세계'라는 신호다. 불완전함이 현실성의 징표가 되는 역설이다.
생성형 AI의 이미지는 이 역설 바깥에 있다. 조명은 어디서나 균일하고, 질감은 지나치게 정교하며, 공간은 군더더기 없이 정리되어 있다. 한병철은 『아름다움의 구원』에서 이 매끈함의 논리를 날카롭게 짚은 바 있다. 매끈한 표면은 저항을 제거한다. 마찰이 없는 곳에서는 멈춤도 없고, 멈춤이 없는 곳에서는 질문도 없다. 생성형 AI 이미지의 설득력은 정교한 재현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저항의 소거에서 온다. 이미지가 너무 빨리 닫혀버릴 때, 시선은 그 표면 위를 미끄러질 뿐 결코 뚫고 들어가지 못한다.
더 깊은 문제가 있다. 이 매끄러움은 중립적이지 않다. 케이트 크로포드가 지적했듯, AI 시스템은 언제나 특정한 사회적 분류 체계와 권력의 배치를 내장한 채 작동한다. 생성형 AI가 만들어내는 평균적 얼굴, 안정적인 공간, 설명 없이도 중심이 되는 장면은 기술의 순수한 산물이 아니라 이미 사회가 시각적으로 승인해온 규범의 반복이다. 무엇이 '보기 좋은' 것인지, 무엇이 '맞는 그림'처럼 받아들여지는지의 기준이 감각의 층위에서 조용히 재생산된다. 편향은 오류의 형태로만 나타나지 않는다. 더 자주, 더 부드럽게, 더 매혹적인 형식으로 나타난다.
그렇다면 노이즈는 단순한 결함이 아니라 하나의 인식론적 사건이다. 바르트가 사진에서 '푼크툼'이라 불렀던 것—계획되지 않았으나 보는 사람을 찌르는 세부—은 어떤 의미에서 노이즈와 닮아 있다. 그것은 전체를 압도하지 않으면서도, 시선을 붙잡아 그 자리에 머물게 만든다. 손의 구조적 이상함, 글자의 미세한 파열같은 가시적 오류만이 아니다. 지나치게 완벽해서 오히려 세트장처럼 느껴지는 장면, 모든 것이 설명 가능한데 그래서 더 낯선 얼굴—이것들도 노이즈다. 납득이 완료되기 직전에 무언가가 걸리는 감각, 그 미세한 저항이 사유의 시간을 만든다. 노이즈는 이미지가 너무 빨리 끝나버리지 않도록 붙잡아두는 균열이다.
결국 생성형 AI가 바꾸는 것은 이미지의 제작 방식만이 아니다. 우리가 이미지를 받아들이는 판단의 속도가 바뀌고 있다. 더 정교한 판별 기술이 필요한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요구되는 것은, 내가 어디서 이미 안심했는지를 되묻는 감각이다. 가장 비판적인 눈이란 모든 것을 의심하는 눈이 아니라, 너무 빨리 납득하지 않는 눈이다.
조금 늦게 믿는 것. 그 작은 지연 속에서 이미지는 정보가 아니라 사건이 된다. 지금 필요한 비판은 거짓을 더 빨리 식별하는 기술만이 아니라, 납득이 너무 빨리 완결되지 않도록 붙잡아 두는 감각이다. 노이즈는 바로 그 감각이 시작되는 자리다.
5월 1호. 감정의 조각 -AI 시대의 애니메이션 창작
김탁훈
중앙대학교 첨단영상대학원 교수
AI가 이미지를 그리고, 장면을 구성하고, 영상을 만드는 시대가 도래했다. Midjourney, Stable Diffusion, Sora와 같은 도구들은 불과 몇 년 만에 전문 창작자의 영역으로 여겨졌던 시각적 표현을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이 변화 앞에서 애니메이션 창작자들은 새로운 질문과 마주한다. 표현의 기술이 더 이상 창작자만의 것이 아닌 시대에, 애니메이션 창작자들은 무엇을 만들어야 하고, 왜 만들어야 하는가.
AI 시대의 창작 전환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예술의 개념이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 살펴봐야 한다. 마르셀 뒤샹의 레디메이드가 '얼마나 잘 만드는가'의 문제를 '무엇을 제시하는가'의 문제로 전환 시켰듯이, AI는 다시 한번 창작의 무게중심을 이동시키고 있다. 솔 르윗이 아이디어를 설계하고 타인이 실행하도록 한 개념미술의 방법론은 오늘날 인간이 감정과 컨셉을 설계하고 AI가 이를 시각화하는 공동 창작 구조와 구조적으로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고퀄리티 이미지를 생성하는 기술이 누구에게나 열린 이상, 창작의 가치는 결과물의 완성도가 아니라 그 결과물이 전달하는 컨셉과 감정에 의해 결정된다.
그 창작의 중심에 있는 개념은 '감정의 조각(emotional fragment)'이다. 낯선 공간에서 느끼는 불안, 관계 속의 미묘한 거리감, 설명하기 어려운 공허함—이 미세한 감정의 단위들이 거대한 서사에 앞서 존재하며, 바로 그것이 창작의 진정한 출발점이 된다. 신카이 마코토의 「초속 5센티미터」가 사건의 논리가 아닌 그리움과 거리감의 반복으로 구성되듯, 진정한 서사는 사건이 아니라 감정에서 시작된다. 사건은 감정을 담는 넓은 운동장이 되고 여러개의 감정들이 같이 사건에 따라 같이 병렬적으로 배치 된다.
인간 창작자의 대체 불가능한 역할도 바로 이 지점에서 드러난다. 안토니오 다마지오의 ‘신체표지가설(Somatic Marker Hypothesis)’에서 말하듯 이성만으로는 의사결정을 할 수 없듯이, 인간의 감정 경험과 표현이 단순한 데이터 패턴과는 근본적으로 다름을 알 수 있다. AI는 수백만 개의 이미지를 학습해 확률적으로 그럴듯한 결과를 생성하지만, 그것은 평균화된 패턴의 재현이다. 반면 창작자의 경험은 평균화되지 않는다. 비가 내리던 날 아침 어느 버스 정류장에서 느꼈던 특정한 외로움,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오후의 공허함, 또한 어릴 때 친한 친구가 전학을 떠났을 때의 상실감—이런 감각들은 살아있는 몸만이 기억한다. 이 살아있는 경험의 축적이 곧 인간 창작자만이 가질 수 있는 '경험의 데이터셋'이다.
감정이 서사를 만드는 방식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뉜다. 이사오 타카하타의 「반딧불의 묘」처럼 실제 경험에서 추출한 감정을 서사의 중심에 놓는 방식이 있고, 「진격의 거인」처럼 존재하지 않는 세계를 설계하되 그 안에 현실적인 감정을 배치하는 방식이 있다. 두 방식은 출발점이 다르지만, 감정에서 시작해 서사로 확장된다는 구조는 같다. 픽사의 「인사이드 아웃」이 감정 자체를 캐릭터로 형상화하며 보여주듯, 감정은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서사의 주체가 될 수 있다.
오늘날의 콘텐츠 환경은 이미 이 감정 단위 구조를 향해 빠르게 재편되고 있다. 「러브, 데스 + 로봇」의 옴니버스 형식, 「스파이더버스」 시리즈가 스타일 자체를 감정의 언어로 활용하는 방식, 틱톡과 숏폼 콘텐츠의 폭발적 성장—이 모두는 창작이 더 이상 긴 서사 중심이 아니라 감정 단위로 분해되고 재구성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감정을 설계하고 표현하는 능력은 선택이 아니라 시대적 요청이 되었다.
AI 시대의 애니메이션 창작자는 이미지를 생산하는 기술자가 아니라 감정의 흐름을 설계하는 스토리텔러다. AI가 표현을 담당하는 시대에, 창작자는 제작자에서 디렉터이자 큐레이터로 이동한다. 무엇을 시각화할지를 결정하는 것, 수백 개의 AI 생성 결과물 앞에서 자신이 원하는 감정에 가장 가까운 것을 선택하는 것—그 판단의 기준은 오직 살아있는 경험과 감수성에서 나온다.
기술이 창작의 문턱을 낮추는 시대일수록, 무엇을 왜 만드는지에 대한 감각이 더욱 중요해진다. 더 많이 만들어내는 사람이 아니라, 더 깊이 느끼고 더 섬세하게 발견하는 사람이 앞으로의 창작자가 될 것이다. AI와 함께 살아가는 시대의 창작자가 자신의 역할을 어떻게 정립할 수 있는지 우리는 다시 정의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