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의 아픔과 비극을 공감하다
2010년대 대표 작가로 떠오른 김애란의 세 번째 소설집 『비행운』. 새로운 삶을 동경하는 ‘비행운(飛行雲)’과 현실을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연쇄적 불운 ‘비행운(非幸運)’ 사이에서 지친 이 시대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하는 택시기사, 화장실과 동격으로 취급받는 화장실 청소부, 살아서도 죽어서도 박스를 줍고 계신 할머니 등 세상에서 살아남았지만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는 이들. 사람들은 ‘비행운(飛行雲)’의 꿈을 꿀수록 ‘비행운(非幸運)’의 악순환에 빠지게 된다. 동세대의 실존적 고민을 드러내온 작가는 이번 소설집에서도 그 매력을 발휘하며, 좀더 강력해진 성장통을 보여준다. 곁에서 이야기를 들어주는 친구처럼 우리의 고통을 이해해줄 것 같은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이제 삼십대가 된 작가는 자기 세대를 넘어 다른 세대까지 ‘함께 아파하기’의 영역을 넓히며, 인간과 사회 구조의 양면을 전면적으로 성찰한다. 점점 상황이 나빠지기만 하는 존재들의 모습을 극적으로 서사화하면서 비극적인 것에 더 몰입하고, 우리 시대의 우울과 소외를 자기만의 스타일로 그려내면서 감동적이고도 의미심장한 이야기들을 풀어놓는다. 그리고 그렇게 행복을 기다리느라 지친, 비행운과 씨름하느라 힘들었을 그들의 행운을 빌어준다.
책 속으로
저는 지난 10년간 여섯 번의 이사를 하고, 열 몇 개의 아르바이트를 하고, 두어 명의 남자를 만났어요. 다만 그랬을 뿐인데. 정말 그게 다인데. 이렇게 청춘이 가버린 것 같아 당황하고 있어요. 그동안 나는 뭐가 변했을까. 그저 좀 씀씀이가 커지고, 사람을 믿지 못하고, 물건 보는 눈만 높아진, 시시한 어른이 돼버린 건 아닌가 불안하기도 하고요. 이십대에는 내가 뭘 하든 그게 다 과정인 것 같았는데, 이제는 모든 게 결과일 따름인 듯해 초조하네요. 언니는 나보다 다섯 살이나 많으니까 제가 겪은 모든 일을 거쳐갔겠죠? 어떤 건 극복도 했을까요? 때로는 추억이 되는 것도 있을까요? 세상에 아무것도 아닌 것은 없는데. 다른 친구들은 무언가 됐거나 되고 있는 중인 것 같은데. 저 혼자만 이도 저도 아닌 채,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가고 있는 건 아닐까 불안해져요. 아니, 어쩌면 이미 아무것도 아닌 것보다 더 나쁜 것이 되어 있는지도 모르고요.
「서른」 pp. 293~94
지금 선 자리가 위태롭고 아찔해도, 징검다리 사이의 간격이 너무 멀어도, 한 발 한 발 제가 발 디딜 자리가 미사일처럼 커다랗게 보였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언젠가 이 시절을 바르게 건너간 뒤 사람들에게 그리고 제 자신에게 이야기하고 싶어요. 나, 좀 늦었어도 잘했지. 사실 나는 이걸 잘한다니까 하고 말이에요.
하지만 당장 제 앞을 가르는 물의 세기는 가파르고, 돌다리 사이의 간격은 너무 멀어 눈에 보이지조차 않네요. 그래서 이렇게 제 손바닥 위에 놓인 오래된 물음표 하나만 응시하고 있어요. 정말 중요한 '돈'과 역시 중요한 '시간'을 헤아리며, 초조해질 때마다, 한 손으로 짚어왔고, 지금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그것.
'어찌해야 하나.'
그러면 저항하듯 제 속에서 커다란 외침이 들려요.
'내가, 무얼, 더.'
「서른」 p. 316
몇백 원 더 비싸지만 부드러운 국산콩 두부를 먹고, 호기심에 일반 생리대보다 두 배는 비싼 유기농 소재의 패드를 써보기도 했다. 처음에는 좀 죄책감이 들었다. 생필품을 절약하지 않으면 돈 모으기가 힘든데. 씀씀이가 커 눈만 높아진 게 아닌가 싶어서였다. 하지만 변기에 앉아 화장지를 끊을 때마다, 부드러운 두부 조직이 식도를 건드릴 때마다 전에 없던 설렘과 만족이 찾아왔다. 그리고 만약 그런‘기분’도 구매할 수 있는 거라면 그걸‘계속하고’싶다고 생각했다.
「큐티클」 p. 212
현대의 복잡하고 거대한 시스템이 정적(靜的)으로 평화롭게 돌아갈 때, 그 무탈함이 주는 이상한 압도, 안심, 혹은 아름다움 같은 것이 공항에는 있었다. 사람들은 그걸 길게 뻗은 고속철도나 우아한 현수교, 송전탑에서도 느꼈다. 시커먼 타이어 자국이 밴 활주로 사이로 휘이? 시원한 가을바람이 지나갔다. 정차된 항공기들은 모두 앞바퀴에 턱을 괸 채 눈을 감고 그 바람을 느끼고 있었다. 어느 나라에서 불어와 어떤 세계로 건너갈지 모르는 바람이었다. 몇몇 항공기는 탑승동 그늘에 얌전히 머리를 디민 채 졸거나 사색 중이었다. 관제탑 너머론 이제 막 지상에서 발을 떼 비상하고 있는 녀석도 있었다. 딴에는 혼신의 힘을 다해 중력을 극복하는 중일 테지만 겉으로는 침착하고 여유로워 보였다. 얼마 뒤 녀석이 지나간 자리에 안도의 긴 한숨 자국이 드러났다. 사람들이 비행운이라 부르는 구름이었다.
「하루의 축」 p. 176
출판사 서평
막막하고 막막한 존재들_김애란식 비극의 향연
『비행운』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어쩐지 불행하기만 하다. 새벽 1시 아무도 없는 재개발 지역의 건물 잔해 위에서 양수가 터져 돌무덤에 주저앉게 된 임부나 크레인 위에서 체불 임금을 요구하다 실족사한 아버지에 이어 어머니마저 당뇨 쇼크로 잃고 세상을 집어삼킬 듯한 홍수로 뒤덮인 흙탕물 속에서 사투를 벌이는 소년, 그리고 첫사랑 때문에 발 들인 다단계 집단에 학원 제자를 끌어들이는 주인공 등 작가는 점점 상황이 나빠지기만 하는 존재상을 극적으로 서사화하면서, 비극적인 것에 몰입하고 있다. 이런 비극에의 몰입은 무엇보다 진정한 소통이 어려운 우리 시대의 우울과 소외를 자기 스타일로 혁파하면서, 가장 감동적이면서도 의미심장한 이야기로 진정한 소통의 자장을 넓고 깊게 하고 있다. 그러면서 김애란은 잊지 않고 그렇게 행복을 기다리느라 지겨웠던, 비행운과 맞씨름을 하느라 힘들었을 친구들에게 행운을 빌어준다. 다시 김애란 소설의 미덕이 발휘되는 지점이다. “여러 편에서 김애란은 막막하고 아득한 심연처럼 결말을 구성”하며 “막막함의 광장 공포 내지는 불안을 매우 극적인 구성적 상징을 획득”하는데, 이 점이 바로 “소설집 『비행운』을 관통하는 공통된 서사 문법”이다 이제 우리는 이렇게 ‘김애란식 비극’이라는 독보적인 한 장르를 갖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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